3줄요약
일제시대때 역갤러 같은 아마추어 문화연구가가 자국 문화가 조선 기원인게 빡쳐서
조선의 열등한 재주도 고급으로 바꾸는 일본 스게에!
라는 글을 빨아재끼는 한국 국,뽕충들이 자국유래 문화를 역으로 깔봄
근대라면 도자기를 개밥그릇으로 쓰는 이유는 서양 자기에 밀렸다면 모를까......
이런거 보면 소설같은데서 한국의 개밥그릇으로 돈버는 그런 것은 멈추는게 맞는 듯
많은 사람들이 찻사발을 막사발이라고 부르는데 도자기(陶瓷器)라는 것 자체가
도공(陶工)이 대충 만들어 서민들이 막 쓸 수 있는 값싼 제품이 아니기에
찻사발에 대해 일반적으로 잘못 알려진 내용들에 대해 몇 가지 논의(論議)를 하고자 이제 다시 한 번 짚어 보겠다.
고려청자(高麗靑瓷)를 막사발이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고, 분청(粉靑 : 분청사기(粉靑沙器)라고도 함)도
자유롭게 만든 것이지만 서민(庶民)들이 깨져도 상관없이 막 쓰던 것은 값싼 물건은 아니며,
이도나 웅천다완은 아마도 제사(祭祀) 때 사용했을 가능성이 제일 높은데 이 또한 막 만들어 막 쓰는 도자기가 아니다.
또한 일본인이 주문제작한 다기(茶器)들은 동래부사(東萊府使)가\
진주(晋州)의 백토(白土)와 곤양(昆陽) 새미골의 수을토(水乙土) 등의 흙을
김해요(金海窯), 창기요(경남 양산군 법기), 부산(釜山)의 왜관(倭館) 부산요(釜山窯)까지 가져와
관요(官窯)의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만든 것으로
거칠게 만들어진 것도 있지만 그것은 일본인들이 그렇게 주문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막 만들고 막 쓴다는 의미의 ‘막사발’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표현(表現)임이 명백(明白)하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어느 것 하나도 막 만들었다거나 막 쓰는 용도(用度)의 물건이 없으며,
더군다나 일본인들이 도자기가 없고, 안목(眼目)이 없고,
돈이 없어서 우리나라의 개밥그릇, 거지 동냥 그릇을 마구잡이로 가져가 국보로 삼은 것이 아니라
뛰어난 심미안(審美眼)을 가지고 고르고 골라간 것이 바로 조선(朝鮮)의 찻사발인데도
"우리 개밥그릇인 막사발을 가져가 국보(國寶)로 삼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구겨진 자존심(自尊心)을 세우려는 분들을 만나면 참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생긴다.
일본의 박물관 등에 있는 중국의 다완(茶碗)들도 이미 1500년대에 일본인들이 중국에서 구해다 쓰던 찻사발들이다.
이런 더 고급의 도자기들을 쓰던 일본인들이 조선의 다완에 눈을 돌린 것은 중국 다완들은 화려(華麗)하여
의식용(儀式用)으로는 좋을지 몰라도 일반 차인(茶人)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차를 나누기에는 너무 사치(奢侈)스러워
오히려 조선의 소박(素朴)한 사발들이 더 적합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
도자기(陶瓷器)가 없거나 안목(眼目)이 낮아 우리 사발(沙鉢)에 열광한 것은 아니다.
야나기 무네요시 또한 1931년에 기자에몬이도를 보고 적은 글에서
지적(知的) 의식(意識)이 없는 일자무식(一字無識)의 조선(朝鮮) 도공(陶工)이 뒷산의 흙을 파다가
대충 굽고 화로(火爐)에서 꺼낸 재로 대충 유약(釉藥)을 입혀 구운 것이 이도다완(井戶茶碗)이고,
조선의 어디서나 쉽게 싼 값에 구할 수 있고 천민(賤民)들이 부담 없이 사서 마구잡이로 쓸 수 있는 값싸고 흔한 물건이 바로 이도다완이며,
그런 이도사발을 다완(茶碗)의 용도로 골라낸 일본 다인들의 안목을 칭송(稱頌)하면서
이도다완은 조선인들이 만들었지만 찻사발로서의 용도와 가치는 일본인들이 찾아내었기 때문에 일본 것이라고까지 주장하였는데
많은 분들이 이 글을 우리 이도다완에 대한 최고(最高)의 평가(評價)라고 많이들 인용(引用)하고 있다.
막사발이 아니라 찻사발이라는 글에서도 비판했지만 도자기가 근대(近代)에까지도 막 쓰기 힘든 물품인데
조선(朝鮮) 초기(初期)에 천민(賤民)들이 도자기(陶瓷器)를 마구 썼다는 내용도 그렇고,
이도다완도 경남(慶南) 진해(鎭海)와 하동(河東) 진교(辰橋)에서 조선 초기에 아주 잠깐 생산된 것인데도
1914년부터 조선의 민중예술(民衆藝術)에 심취(心醉)하고 조선의 도자사(陶瓷史)를 연구한 조선 민예(民藝)의 전문가(專門家)라는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가 1931년(나이 43세로 조선도자사를 공부한지 17년 됨)에 기자에몬을 보고 적은 글이라는 게
고작 전국 어디서나 만들어졌고 천민들이 부담 없이 마구 쓰던 물건이 이도다완이라니,
조선 도공의 지적 의식’ 운운(云云)하던 야나기의 지적(知的) 의식(意識)을 의심(疑心)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막사발이라는 표현은 조선 말기(末期)에 상공업(商工業)의 발달로 상인(商人)들이
도공들을 고용하여 도자기(陶瓷器)를 대량생산(大量生産)하게 한 것에서 나온 표현일 수는 있겠으며,
그중에 다완과 비슷한 형태의 것들이 만들어 졌을 수 있겠으나 일본인들이 고려다완(高麗茶碗)이라고 이야기하는
15➰6세기의 조선 찻사발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우리나라의 근현대 도자사 참조)
그런데도 15➰6세기 막사발 운운하며 ‘막사발’이라는 표현(表現)에 집착(執着)하시는 분들이 정작
글에서는 서민용(庶民用)이 아닌 것 같다거나 막 쓰던 것이 아니라는 상반(相反)된 주장들을 펴시며
횡설수설(橫說竪說)하는 경우를 자주 보는데 이는 ‘막사발’이라고 이름을 잘못 붙인 이름의 ‘막’이라는 글자 때문에
머릿속에서 은연중에 찻사발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가 생겼기 때문에 스스로 헷갈려 그런 것이다.
찻사발이건 막사발이건 차만 잘 마시면 되지 뭐가 그리 복잡(複雜)하냐고 하실 분이 많겠지만
사물(事物)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먼저 바르게 이름 붙이는 것인 ‘정명(正名)’에서 부터 시작해야하며,
‘막사발’이 아니라 ‘찻사발’이라고 고쳐 불러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 최성림의 「한국 찻사발 정리(막사발 비판 2)」, 01/09/05,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