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왔어.”
정장을 입은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선다. 비틀거리는 발걸음, 붉게 달아오른 피부, 흐트러진 옷차림, 무엇보다 먼발치에서도 선명히 느껴지는 술냄새. 어떻게 보아도 진탕 마시고 돌아온 모양새다.
“...지금이 몇 시인지는 아시나요?”
긴 밤색 머리칼의 우마무스메 아내가 팔짱을 낀 채 남편을 맞는다. 귀가 접혀 있는 것을 보니 적잖이 화가 난 모양이다.
“쫑알대지 말고 들어가서 잠이나 자.”
남자는 퉁명스레 쏘아붙이며 넥타이를 푼다. 그가 아내를 무시하고 지나치려 하자, 아내는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누구랑 마셨어요? 오늘.”
“...거래처 직원들이랑.”
남자는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남자의 머리칼에서 어렴풋이 풍겨오는 낯선 샴푸 향이 코를 간질인다.
“샤워하셨군요.”
“땀을 좀 흘려서.”
남자가 힘을 주어 팔을 빼내려 하지만, 붙잡힌 팔은 고목의 뿌리처럼 굳건했다.
“땀을… 흘리셨다라. 셔츠를 세탁해야겠네요.”
“됐어. 세탁 안 해도…”
“이런 ‘얼룩’도 묻어있는데요?”
아내가 남자의 재킷을 거칠게 젖힌다. 재킷이 가리고 있던 립스틱 자국이 드러났다.
“이 얼룩은 누구 거죠? 이번에는 어떤 여자와 뒹굴다 오신 거에요? 더이상 바람피지 않기로 약속했으면서!”
“하….”
남자가 한숨을 푹 내쉬며 아내를 바라본다. 그 눈동자 안에는 명백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무슨 상관이냐고요? 난 당신 아내에요!”
노골적으로 자리를 피하려 하는 남자와 격앙하여 소리치는 아내.
“...이거 놓고 나중에 얘기해.”
“나중요? 저한테 나중이라는 게 있나요?”
남자가 한 걸음 물러서고, 아내가 한 걸음 다가선다.
“이거 놓으라고!”
“꺄악!”
채근하는 아내에게 짐짓 성을 내며, 남자가 손을 거칠게 휘두른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한 아내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놓으랄 때 놨으면 좋았잖아.”
일말의 죄책감은 느끼는지, 남편이 아내를 외면하며 변명하듯 읊조렸다.
“들어가서 자.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하니ㄲ…”
-치이익
돌연, 남자의 코와 입을 향해 정체불명의 기체가 분사된다. 남자는 순간 움찔하더니 그대로 힘없이 픽 쓰러지고 말았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남편을 내려다보는 아내는, 놀랍도록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으… 음….”
잠시 후, 남자는 안개처럼 혼탁한 의식 속에서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의 몸이 침대 위에 뉘여져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일어나셨나요?”
그런 남자를 반기는 것은, 착 가라앉은 아내의 한마디.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에 남자는 무심코 움츠러들었으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체 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철컥
“어, 엇?”
손목에 차갑고 무거운 감촉이 느껴진다. 고개를 들어 손목 쪽을 바라보니 은빛의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이, 이거 뭐야? 당장 풀어!”
힘껏 손을 움직여 보아도 덜걱거리는 소리만 날 뿐, 튼튼한 사슬은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최근, 여유롭게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죠, 우리.”
그런 남자의 발버둥을 무시한 채로, 아내가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일말의 감정의 동요조차 담겨있지 않는 그 음성이, 오히려 심장을 옥죄는 듯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니 오늘, 지금, 그동안 못 했던 만큼 진득하니 이야기해봐요, 여보.”
아내가 남자의 귀 옆에 손을 짚고 그의 몸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가지런한 갈색의 장발이 흘러내리며, 사락이며, 남자의 콧잔등을 간질인다.
“....”
머리카락으로 좁아진 시야 속에 보이는 것은 오직 아내의 얼굴, 그리고 얼음처럼 차갑고 고요하게 가라앉은 푸른 색의 눈동자 뿐. 남자는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싸늘한 한기를 필사적으로 견뎌야만 했다.
“내 마음도 몰라주고 절조 없이 구는 당신을, 대체 어쩌면 좋을까요?”
아내의 입꼬리가 기묘하게 비틀린다. 미칠듯이 사랑하고, 동시에 미칠듯이 증오하는 남자를 자신의 손아귀 안에 틀어쥐었다는 사실로부터 음습한 쾌감이 솟아오른다.
“대체 어떻게 해야 제 마음을 알아주시겠어요?
온몸 구석구석을 힘껏 깨물어 상처를 내면 알아주실까요? 내 손톱으로 살갗을 도려내고 흉터를 새기면 알아주실까요? 근육이 으깨지도록 멍자국을 내면 알아주실까요? 머리칼로 피부를 꿰어 사랑을 수놓으면 알아주실까요? 네? 말해줘요.”
아내는 그리 말하며 입을 작게 벌려 남자의 목덜미에 갖다대었다. 남자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심장이 터질 듯이 달음박질친다.
“후후, 뭘 그리 떠시나요. 귀여우시긴. 정말로 그럴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오늘은… 그래, 당신의 머리부터 발 끝까지 제 향기로 가득 덮어버리는 정도로 봐 드릴테니까요.”
아내가 가볍게 키득이며 몸을 일으키고는 허리께로 손을 가져다 댄다. ‘향기로 덮는다’라는 기묘한 선언을 이행하기 위해서.
“어? 안 깨물어 주는거야, 그래스?”
하지만 뒤이어 튀어나온 남자의 발언에 아내-그래스 원더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트레이너 님? 시나리오에 그런 대사는 없을텐데요? 겁만 주고 넘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지 않았나요?”
그래스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자신 밑에 깔린 트레이너를 내려다본다.
“분위기 타서 해줄 줄 알았는데….”
트레이너가 노골적으로 실망한 기색을 드러낸다.
“왜 실망하시는 건가요? 깨물리는게 뭐가 좋으시다고. 그리고 우마무스메의 치악력은 히토미미와 차원이 다르다구요? 단순히 아프기만 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에요.”
그래스는 그런 트레이너의 반응이 그저 기막힐 뿐이다.
“그래스라면 적당히 조절해 줄 거잖아? 내가 그래스의 것이라는 흔적만 남을 정도로.
자, 바로 여기에다가 새겨줘.”
“읏….”
트레이너가 의식적으로 고개를 젖혀 목덜미를 드러낸다. 무방비한 목덜미, 그리고 [자신의 것이라는 흔적]이라는 말에 그래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음습한 정복욕이 솟구친다. 사모하는 트레이너에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은 그래스가 바라마지않던 것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역시 싫어요. 트레이너 님을 아프게 하는 건.”
그래스는 머리를 저으며 어두운 충동을 떨쳐냈다. 분명 트레이너에게 흔적을 새기는 것은 그녀의 오랜 소망이었다. 지금도 그를 엉망으로 만들고 싶다는 충동을 견디기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설령 트레이너 자신이 원하고 있을지라도, 그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싶지 않다. 트레이너는 자신이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사모하고 아끼는, 소중하고 소중한 연인이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이 정도로 참아주세요.”
그래스는 아쉬움을 삼키며, 트레이너의 목에 입을 대고 힘주어 빨아들였다. 작지만 선명한 키스마크가 트레이너의 목덜미에 떠오른다.
“하아…. 역시 이걸로는 부족하네요. 이 세상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도록, 당신이 내 것이라고 표시해 두고 싶은데.”
그래스가 작게 한숨을 쉬며 읊조렸다. 노골적으로 아쉬움을 드러내면서도, 끝끝내 자신을 상처입히지 않으려는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트레이너는 소리 없이 웃었다.
“누구도 감히 당신에게 눈독들일 수 없도록,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흔적을 남겨두고 싶은데.”
그래스 원더가 트레이너의 가슴팍을 베고 엎드린 채로 칭얼댔다. 그래도 연인의 품에 안긴 것이 적잖이 만족스러운지, 목소리는 한결 편안해진 채였다.
“혹시 불안한 거야, 그래스? 내가 바람필까봐 걱정돼?”
트레이너는 가짜 수갑에서 손을 빼낸 뒤 양팔로 그래스를 감싸안았다. 그래스는 한층 더 깊게 그의 품에 파고든다. 트레이너의 심장 소리가 선명히 들려오고, 체향이 생생히 느껴질 정도로 깊게.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요. 아니, 정확히는… 다른 여자가 트레이너 님을 넘볼까봐 걱정돼요.
중앙의 다른 여성 트레이너 분들이라던가, 일전에 뵈었던 트레이너 님의 고등학교 동창 분이라던가, 다른 학생들도….”
중앙 트레센의 트레이너는 그 직함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무게가 있는 만큼, 옆자리를 노리고 접근하는 경쟁자들이 발에 채일 만큼 많다. 그래스의 트레이너처럼 수려한 외모에 확실한 실적까지 있다면 더더욱.
“그래서 이런 시나리오를 가져온 거야? 바람피면 어떻게 될지 경고하려고?”
“꼬, 꼭 그런건 아니에요! 그냥… 그냥 트레이너 님이 제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해보고 싶어서…!”
의표를 찌르는 트레이너의 지적에 몸을 일으키며 변명하듯 내뱉는 그래스. 하지만 트레이너의 얼굴에 비난하는 기색은 없었다. 되려, 무엇이 그리도 기쁜지 빙긋 웃고 있을 뿐.
“그래스는 날 그렇게나 좋아하는 거구나. 기쁜걸, 정말로.”
트레이너는 다시금 그래스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제가 이런 못된 마음을 먹었는데도, 절 미워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미워해? 그래스를? 내가? 왜?”
그래스가 걱정스레 되묻지만, 트레이너는 그 의문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투로 받아친다.
“질투라는 감정이 성립하는 것 자체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잖아? 강하게 질투하는건 그만큼 상대를 좋아한다는 뜻이고 말야. 나는 그렇게 질투하고 불안해하는 그래스가 훨씬, 훨씬 더 사랑스러운걸.
나는 오히려 그래스가 불안해하지 않았다면 슬프고 실망스러웠을 것 같아.”
“그런…가요?”
그래스가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는지 몸의 긴장을 풀고 트레이너의 품에 안긴다. 하지만 근본적인 의문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듯 했다. 이토록 격렬히 질투하는 자신이 되려 더욱 사랑스럽다니?
“나도 너와 같아, 그래스. 그래스처럼 강하고 아름다운 우마무스메가, 내가 아닌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되면 어쩌나-하고 이따금 걱정하게 돼.”
“그럴 일은 절대로…”
“없지. 알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나는 다만, 그래스가 그런 감정을 홀로 껴안고 고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말했듯, 질투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자연히 딸려오는 감정이니까.”
“....”
트레이너가 그래스의 등을 토닥이며 조곤조곤 속삭인다. 그래스는 그제서야 납득할 수 있었다. 만일 트레이너가, 자신이 다른 남자와 어울리는 것에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다면? 분명 실망하고 말리라. 그의 사랑을 의심하고 말리라.
자신은 지금껏, 이런 질투심이 성숙하지 못하다는 증거라고 여겨왔는데, 그래서 줄곧 불안했는데, 트레이너는 아주 간단하게 불안함을 일소했다. 질투 역시 사랑의 일부. 그렇게 생각하니 그동안 고민해왔던 것이 한낱 바보짓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트레이너 님. 물론 그러시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래스가 트레이너와 눈을 맞추고 입을 연다.
“일부러… 제 질투를 불러일으키지는 말아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질투하는 자신이 더 사랑스럽다’라는 말로부터 불안감이 솟아오른 탓이었다.
“그럼, 물론이야. 그래스가 날 아파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것처럼, 나도 그래스를 아프게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트레이너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리 대답하며 그래스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그 작은 애정의 표시가 그래스의 불안감을 한순간에 날려버리고, 그 빈자리를 확신과 믿음으로 가득 채웠다.
“...트레이너 님. 괜찮으시다면… 뾰이해도 될까요?”
그래스가 욕망을 조심스레 드러낸다. 트레이너의 품에 안겨 그의 온기를 나눠받으며 사랑을 속삭이다 보니, 더 이상 참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그럴까? 우리 어디까지 진행했더라?”
“시나리오는 잊어버리죠. 어차피 몰입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다시 수갑을 차려 하는 트레이너를 제지하는 그래스.
“트레이너 님이 제가 아닌 다른 여자를 좋아할 일이 절대로 없으리라는 것을, 우리 둘 다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스는 트레이너와 이마를 맞대고 그리 말했다. 트레이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한방 먹었다는 듯 시원스레 웃었다.
두 사람은 길고 정열적인 키스를 나누었다. 입술이 떼어진 후, 나신이 되어 서로에게 다시금 달려들 때까지는 찰나의 시간조차 필요치 않았다.
(대충 격렬한 우마뾰이 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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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디지털은 한층 돈독해진 거리감으로 트레센 부지를 나란히 걷는 그래스 원더와 그 트레이너를 보았다. 먼 발치에서도 선명히 느껴지는 뾰이의 여러 증거들-무엇보다도 서로의 목에 새겨진 키스마크와 노골적으로 풍겨대는 서로의 향기-은 디지털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고, 그녀는 그 길로 아지트에 달려가 격렬한 솔로뾰이에 빠져들었다.
얀데레 농도를 짙게 하려다가 엎고 순애로 선회했읍니다.
순애최고!
그트그우 독점력 강한 담당 우마무스메에 독점력 강한 담당 트레이너라... 천생연분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