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코로나19의 터널에 끝이 보이기 시작하던 올 초, 3년간 봉인되었던 여행 업계가
살아날 조짐을 보인다는 소식을 듣고 별 생각 없이 네덜란드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가까운 아시아는 일단 제끼고 북미는 내년쯤 갈 일이 생길것 같아 탈락, 남미를 비롯하여
방역 상황이 안좋은 동네는 불가, 동유럽은 요즘 러시아-우크라이나 상황상 제외하고 보니
남은게 서유럽 밖에 없더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저렴한 항공권을 발견했거든요.
지금은 아마도 두 배, 아니 세 배 이상이지 않을까 싶은데~
지방선거와 현충일을 끼고 가는 일정이긴 했지만 그래도 투표는 해야겠죠?
팔자좋게 공항에서 사전투표하고 놀러가는 사람이 어딨냐 했더니만 내가 딱 그짝이네??
체류일 기준 7일이라는 길지 않은 일정이어서 네덜란드와 벨기에 중 한 곳으로 줄이려다
'이왕 간 김에'가 발동, 결국 암스테르담으로 들어가 기차로 각 도시들을 찍으며 내려간 뒤
브뤼셀에서 나오는 경로가 되었습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장거리 여행이 워낙 오랜만이라
이런 경로가 어떤 파급 효과를 불러올지 감을 잃은 무모한 결정이었다고도 생각되는군요;;
항공편은 폴란드 항공(LOT)이므로 바르샤바를 경유합니다. 왕년에 스페인 여행 때였던가
KLM으로 가면서 암스테르담을 경유(그러니까 암스테르담까지는 직항)한 적이 있었건만
왕년의 경유지를 목적지로 가려고 보면 꼭 다른 경유지가 생긴다는게 여행의 법칙 중 하나죠.
게다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그를 피해 남쪽으로 빙 도느라 두 시간 연장! 아놔~
폴란드도 정말 가보고싶은 곳 중 하나이건만 이번에는 이렇게 흘깃 보는 걸로 끝이로군요.
경험해본 바 폴란드 항공은 비교적 저렴하다는걸 제외하면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전날 밤의 비행 시간 연기 통보는 기본에다 오버 부킹 실랑이로 인한 출발 지연도 있었거든요.
그럼에도 도착 시간은 얼추 맞추는걸 보면 출발이 늦은 만큼 과속을 하는건가 싶기도 하고
좌석 간격은 KLM이나 핀에어같은 극악스러운 항공사보다는 훨씬 쾌적한 편이기도 하고...
어, 그럼 괜찮은 건가?? 참 현지 승무원이 우리말로 안내 방송을 하는 것도 처음 들었네요.
폴란드에서 독일을 거쳐 네덜란드로 들어오니 정말 물 반 땅 반의 평평한 지형이 펼쳐집니다.
괜히 저지대(Nederlanden)라는 이름이 국호로 굳어진게 아니로군요.
결국 열 몇 시간이 걸려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 도착했지만 바로 지하 승강장으로 뛰었죠.
물론 암스테르담 시내로 들어가려해도 여기서 기차를 타야겠지만 제가 타는건 다른 방향...
기차를 타고 남서쪽으로 다시 30분쯤 달려갑니다. 8시가 넘었는데도 아직 해가 걸려있네요.
사방에 산이라곤 없이 지평선 아래에 들과 숲, 강과 운하만 보이는게 플랑드르 화가들의 그림
속 자연 모습이 왜 한결같았는지 바로 이해됩니다.
그리하여 집을 나선지 근 24 시간 만에 첫 목적지인 덴하흐에 도착했습니다.
덴하흐(또는 덴하그, Den Haag)는 네덜란드의 행정 수도에 해당되는 도시입니다.
행정 수도답게 여러 행정 기관들이 모여있죠. 영어식으로 '헤이그'라 하면 다 아는 그 도시.
약 50만의 인구로 약 80만의 암스테르담, 약 60만의 로테르담에 이어 네덜란드 제3의 도시가
됩니다마는 뜨내기에다 뚜벅이인 여행객은 비넨호프를 중심으로 일부만 둘러볼 예정이죠.
체크인하니 밤 10시가 넘었지만 첫 날의 흥분빨로 한 바퀴 둘러보러 나왔습니다.
구름이 끼었는데도, 언젠가 헬싱키에서 겪었던 백야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둑어둑한 정도네요.
맥주의 고장이니 한 잔 마셔줘야겠죠?
현지인들로 가득한 주말 밤의 광장 주변을 몇 바퀴 돌다가 한 곳에 들어가 구석에 앉았습니다.
동양인이라고는 한 명도 못본데다 코로나 이후 혐오에 대한 걱정도 있어서 사진도 소심하게;;
역시 소심한 주문 끝에 나온 것은 아는 맛 듀벨과 이유없이 찍어본 타조 그림의 맥주입니다.
'Brouwerij 't IJ' 라는 이름을 '브라우어레이 엇에이' 라고 읽는게 맞는지 모르겠네요.
생각해보니 듀벨은 네덜란드가 아닌(!) 벨기에 맥주였지만 엇에이는 다행히 네덜란드 맞다고.
1985년 소규모 양조장으로 시작한 후발 주자이나 순식간에 퍼져나간데는 이유가 있겠죠?
천하의 듀벨을 평범한 맥주로 느껴지게끔 만들 맛이라면 믿으실라나??
장시간 이동의 여파로 시차고 뭐고 바로 곯아떨어진 뒤 둘째 날이 밝았습니다.
아 나 여행왔지 하며 창문을 열었더니 왼쪽으로 오래된 건물, 오른쪽으로 새 건물이 보이네요.
먼저 오른쪽 건물은 덴하흐 시청입니다. 온통 흰 벽과 격자 창문에서 눈치챈 분도 계시겠지만
르 코르뷔지에의 후계자로 일컬어지는 리처드 마이어(Richard Meier)가 설계한 건물이죠.
국내에서도 경포대 씨마크호텔로 구경한 적 있지만 아무래도 공공건축에 더 어울린다 보기에
내부를 경험해보고 싶었으나... 일요일이라 닫힘.
왼쪽 건물은 분명 포스가 상당한데도 지도에도 아무 표시가 없어 한참 검색을 돌렸더니만
신교회(Nieuwe Kerk)라는군요. 1656년 세워졌고 지금은 콘서트홀이라는데 계속 쓰이는건가?
특이하게 정 중앙에 종탑을 두고 전후와 좌우가 대칭인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면 이리저리 사진 한참 찍어다 따로 포스팅을 했을텐데요. 아쉽~
네덜란드의 모든 도시마다 있는 구교회와 신교회의 관계는 암스테르담에서 이야기하도록 하고,
복장을 보니 날씨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6월 초이건만 10도 안팎의 쌀쌀한 기온에다
비도 계속 오락가락해서 가져간 가장 두꺼운 옷들을 전부 꺼내어 껴입었더랬습니다.
지형이 평지라서 그런가 구름이 머무르지 않고 계속 이동해서 하늘 표정도 계속 바뀌네요.
들어갈 수 없어 신교회 바깥을 한 바퀴 도는데 안뜰 한 켠에 비석 같은게 하나 있더라구요.
근데 이름이... 스피노자? 우리가 아는 그 스피노자?? 또 한참 검색해보니 정말 맞다네요???
아니 스피노자 씩이나 되는 인물의 묘가 아무런 안내도 없고 알려지지도 않았다고??
아무튼 건물의 역사로나 위인의 무덤으로나 볼 가치는 있으니 덴하흐 가시면 꼭 찾아보세욧.
신교회 한 블록 위가 백화점과 영화관이 있는 번화가 대로지만 일요일 아침이라 적막만이~
더 올라가기 전에 방향을 틀어 잠시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합니다.
왜냐면 한 블록 아래에 이 건물이 있기 때문이죠.
우리에게 '헤이그'라는 도시의 이름을 각인시킨 그 분, 이준 열사 기념관입니다.
당시 열사를 비롯한 특사단이 숙소로 썼던 드용 호텔을 1995년 이기항 씨가 매입하고 손보아
이준 열사 기념관(평화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념관 또한 일요일은 휴관;;;
조상님 죄송합니다! 서양 미술관 한 곳 보겠다고 일정을 바꾼 덕분에 이런 사단이!! ㅠㅠ
기념관 앞 도로 연석에는 우리말 글귀가 새겨졌네요. 어둡던 시절 아무런 의미도 없어보이는
저 한걸음 한걸음이 차곡차곡 쌓여 결국 지금의 우리나라가 되었으니 항상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제 덴하흐 구시가지의 중심 비넨호프로 갑니다.
13세기 홀란트 백국의 성채로 만들어진 비넨호프(Binnenhof)는 네덜란드 공화국 시절을 거쳐
19세기 민주주의 헌법 제정 후 네덜란드 총무부, 총리 관저 및 상하원 의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던 장소이기도 하죠.
서쪽 문을 지키는 것처럼 서있는 동상은 네덜란드 왕국 2대 국왕 빌럼 2세(Willem II)입니다.
워털루 전투의 승장 중 한 명이어서인지 말에 탄 당당한 모습이로군요.
그런데 정작 비넨호프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작년 가을부터 대대적인 공사에 들어갔다네요.
아 정말 이번 여행 시작부터 자꾸 왜 이러니. ㅠㅠ
잠시 멘붕이 왔으나 혹시나 싶어 호수를 끼고 반 바퀴 돌아 반대편 동쪽으로 갑니다.
어차피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때문에 와야 되기도 했구요.
진주 귀고리 소녀를 비롯한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에 대해 더 궁금하시면 아래 블로그를~
미술관을 먼저 구경한 뒤, 미술관 왼쪽의 비넨호프 동문은 다행히도 출입 가능합니다!
비넨호프는 워낙 오랜 시간에 걸쳐 증축과 개보수를 거듭해왔기에 구간별로 양식이 다릅니다.
공사로 인해 들어갈 수 있는건 여기까지. 왼편의 고성같은 건물이 비넨호프의 중심이자 본관인
리더잘(Ridderzaal)이로군요. 옛날 특사단은 여기까지도 들어오지 못하지 않으셨을까나.
다시 나가 서쪽문 앞으로 돌아갑니다. 비텐호프 하링가게(Haringkraam Buitenhof)가 있거든요.
비는 내리고 옆에서는 공사중인데도 현지인들이 계속 오는걸 보면 맛집은 맛집인 듯?
오른쪽이 염장한 청어인 하링(haring)을 샌드위치 빵에 넣은 것, 왼쪽은 흰 살 생선 튀김인
키벨링(kibbeling)입니다. 키벨링이야 맛이 없을래야 없을수가 없는, 상상하시는 그 맛이고
문제는 하링인데... 염려했던 것보다는 먹을만 하더라구요. 다만 한 번으로 족하다는 느낌. ^^
아침부터 빨빨거리고 돌아다녀서 그런가 뱃속에 뭘 좀 넣으니 주위가 좀 달라 보이네요.
비넨호프와 호수를 바라보는 광장에 섰는데
광장 중앙의 동상은 17세기 정치인이자 수학가인 요한 더 비트(Johan de Witt) 라는군요.
사실상 네덜란드 공화국 황금기의 최고지도자로 영국과의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었으나
네덜란드 권력의 시작이자 끝(...)인 오라녜 공작가의 빌럼 3세가 부상하면서 실각합니다.
광장 남쪽으로 붉은 사자 문장이 큼직하게 박힌 고풍스러운 건물의 이름은 무려 죄수의 문
(게반겐푸르트, Gevangenpoort). 지금은 감옥 박물관입니다.
실제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감옥이었고, 위에 언급한 요한 더 비트가 형 코르넬리스와 함께
반역 혐의로 수감되었다가 1672년 폭도들에게 집단 린치당한 끝에 살해당했습니다.
폭도들이 살해한 뒤 시체 훼손으로 모자라 심지어 식인을 했다는 이야기가;;;
이제 북쪽으로 올라갑니다. 빌럼 1세가 바라보는 노르트에인더 궁전(Paleis Noordeinde)은
현재 왕의 집무실 격으로 별다르게 크거나 으리으리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거대한 녹지를 낀 관저이자 정궁 격인 하위스 턴 보시(Huis Ten Bosch)는 동쪽에 따로 있죠.
쭉쭉 더 올라가니 커다란 붉은 건물이 멀리서부터 보입니다.
왼편의 석주는 2차대전 기념비였군요. 아마 다시 언급하게 되겠지만 네덜란드-벨기에 지역은
독일의 현관으로 서부 전선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들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만큼 많은 파괴와 희생이 뒤따랐구요.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이 근사한 건물은 평화궁(브레더스팔레이스, Vredespaleis)입니다.
국제법에 따른 국제사법재판소와 상설중재재판소 등을 위해 1913년 세워졌죠.
평화를 기원하는 각국의 기증품도 많고 시간에 맞춰 방문객 투어도 하는데, 그 시간이 없네요.
잠깐 구경만 한 뒤 다시 비넨호프 동쪽의 중앙 광장(Het Plein)으로 내려왔습니다.
전날 밤 여기를 방황하다가 맥주 한 잔 했었죠.
광장 중앙의 동상으로 네덜란드 국부 빌럼 판 오라녜(Willem van Oranje)를 드디어 만납니다.
네덜란드의 독립 영웅이자 초대 총독, 국가의 상징색인 오렌지(정작 어원은 다르다고)의 기원,
그리고 지금까지도 네덜란드 왕가로 이어지는 오라녜-나사우 가문의 창시자.
공화국 시대의 총독이든 왕국 시대의 국왕이든 대부분 이 사람 후손이라는게 네덜란드식 유머?
광장 위쪽, 작은 숲처럼 만들어진 랑어 보르하우트 거리에서는 휴일 맞이 장터가 열렸네요.
그 거리, 엠마 여왕이 살던 궁전은 이제 에셔의 그림들을 전시하는 미술관이 되었습니다.
이과 출신들이 특히 좋아하는 화가, 오징어 게임에도 등장한 미로 계단의 원형으로 유명한
에셔의 그림들에 대한 이야기는 역시 블로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돌아다니다 네덜란드 명물 감자튀김이 보여 맛보기로 합니다.
...근데 받아들자마자 뱃속에 집어넣기 바뻐 정작 중요한 음식 사진이 없네? orz
사진 찍은 암스테르담에서 다시 얘기하죠 뭐.
그리고는 황급히 짐을 챙겨 다시 기차역으로 갑니다. 바쁘다 바뻐~
다음 암스테르담 이야기 곧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