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다녀올게, 지휘관."
UMP9가 기지를 나서면서 말했다. 나는 차트의 보급품 항목을 넘겨보면서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UMP45는 이미 기지 밖에서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소대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HK416은 베레모를 푹 눌러 쓰고 걸어 나왔다. G11은 멍한 얼굴로 총도 없이 내 곁에 서서 HK416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
HK416이 물었다.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G11은 내 등 뒤에 숨어 옷자락을 붙들고 자그마한 반창고를 붙인 반쪽 얼굴을 내밀어 보였다.
"빨리 돌아와…."
G11이 말끝을 흐리면서 말했다. 겁을 먹은 건지 그냥 졸려서 그런 건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HK416은 코웃음을 치면서 총을 바로잡았다.
"속 편히 쉬는 주제에 지금 약 올리는 거야?"
G11이 붕대가 감긴 왼쪽 손목을 내밀면서 말했다. 밤새도록 수복실에 있었는데도 깔끔하게 낫지 않은 잔상처를 가리기 위한 조치였다. 상처 입은 강아지처럼 누그러진 태도였지만 HK416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지휘관한테 귀찮게 굴지 말고 얌전히 있어. 어차피 종일 잠이나 자겠지만."
UMP9가 손을 흔들면서 소리쳤다. UMP45는 기지 밖에 세워둔 자동차의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HK416이 매몰차게 고개를 돌리고 떠나갔다. 자동차가 소대원들을 싣고 시퍼런 매연과 함께 사라질 때까지 G11은 내 옷자락에서 손을 떼지 않고 계속 지켜보았다. 그녀들이 떠나기 무섭게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G11은 허공에 흩날리던 흙먼지가 사라지고 나서 평소처럼 축 늘어진 자세로 기지 안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풀어헤쳐진 신발 끈들이 바닥에 질질 끌려다녔다. 그녀의 뒷모습만 보고 있어도 졸음이 쏟아질 지경이었다.
"나중에 뭐 불편한 거 있으면 호출해."
G11은 내 말에 고개를 돌리지 않고 천천히 흔들기만 했다. 머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모자가 금세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자고 있을 거야, 지휘관…."
그녀가 말했다.
나는 집무실로 돌아갔다. G11의 소대원들은 외곽 구역으로 사흘간 출장을 나가 있을 예정이었다. 그녀가 기지에 남아있는 건 그놈의 잠이 빚어낸 실수 때문이었다. 이틀 전에 어두컴컴한 산속에서 철혈 소탕 작전을 벌이던 중에 G11이 잠결에 던지려던 수류탄을 그만 손에서 놓치고 말았었다. 통신기로 그녀의 당혹스러운 혼잣말에 이어 강렬한 폭음이 울려 퍼졌었다. 그전에도 항상 잠에 취해 있었지만, 전투엔 별문제가 없었던 터라 주의를 주진 않았었다. 그렇게 저지른 실수 한 번이 그녀에게 상당한 후유증을 남기고 말았다. 작전을 서둘러 끝마친 뒤에 HK416이 G11을 등에 업고 헬리콥터에서 내려와 씩씩거리면서 수복실까지 한걸음에 달려갔었다. 사람이었으면 몇 달은 병실에 누워 있어야 할 중상이었지만 그녀와 같은 인형들에겐 이틀이면 충분했다. 다만 바로 그다음 날에 빡빡한 스케줄이 잡혀 있는 게 문제였다. 다행히도 UMP45가 자기들끼리 가겠다면서 내 고민을 깔끔하게 해결해주었다.
"비실거리는 앤 데려가봤자 짐만 될 뿐이에요."
내가 괜한 걱정을 해주는 동안 UMP45가 남긴 말이었다. 참으로 그녀다웠다. 내 업무 목록에 그 애를 보살피는 일이 추가됐지만 불평할 수는 없었다. HK416의 말대로 잠만 자고 있을 게 뻔하니 그리 귀찮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점심을 건너뛰고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인형들이 전장에서 내달리는 것 못지않게 나만의 전쟁도 성가시고 치열했다.
배꼽시계의 알림이 없었다면 G11은 쭉 잊고 있을 뻔했다. 커피포트를 켜는 동안 붕대를 감고 있던 그녀의 손목이 떠올랐다. 반나절 뒤에 풀어도 되는 장식용이었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머그잔에 커피를 따라두고 방을 나섰다. 숙소만 들러보고 바로 돌아올 계획이었다. 숙소에서 널찍한 가죽 소파를 혼자서 차지하고 있을 G11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노크도 없이 숙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른 인형이면 모를까 G11 혼자라면 절대로 문제 될 일이 아니었다. 불이 꺼진 숙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커튼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햇볕 위로 먼지들이 떠다녔다. 소파에는 UMP9가 샀을 법한 동물 얼굴이 그려진 쿠션들이 올려져 있었다. 나는 턱을 어루만지면서 단서를 찾아보았다. 침대의 이불들은 G11의 것만 빼고 가지런히 개켜져 있었다. 그녀의 이불과 베개를 만져봤지만 따뜻하지 않았다. 쿠션도 마찬가지였다. 방을 구석구석까지 훑어보았지만,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G11!"
내 목소리만이 메아리쳤다.
"G11! 자고 있어?"
입에 손을 대고 소리치는 동안 탁한 색상의 옷장들이 눈에 띄었다. 하나하나 열어보았지만, 당연히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G11의 옷장에는 작전 때 입고 나가는 것과 똑같은 옷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었다. 지난 작전 때 넝마가 되어버린 코트까지 그대로였다. 군데군데 번져 있는 핏자국을 보고 나니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했다. 마지막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숙소를 나섰다. 생각해보니 직접 G11을 찾아다니는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HK416이 매번 어딘가에서 G11을 끌어내 왔었다. 그때마다 인상을 찡그렸던 거로 봐선 G11이 얌전히 숙소 안에만 있는 건 아닌 듯했다.
나는 일정이 촉박한 것마저 잊고 G11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편의점과 창고엔 없었다. 복도에서 마주친 인형들에게 물어봤지만, 아침 이후로 그녀를 본 인형은 없었다. 뒷정리까지 끝마친 식당의 탁자 위엔 접시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오락실에선 다른 인형들이 열심히 레버를 돌리고 있었다. 화장실 앞에서 기다려 봐도 안에 아무도 없다는 소식만을 들을 수 있었다. 창밖에서 따뜻한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산책로의 기둥과 나무 뒤에선 뒤뚱거리는 비둘기만 볼 수 있었다. 나는 벤치에 주저앉아 느릿느릿하게 흘러가는 구름을 지켜보았다. 혹시나 해서 연락해본 초소에서 그녀의 소대원들 말고는 나간 인형이 없다는 답신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땅으로 꺼지기라도 한 걸까? HK416은 항상 오 분 안에 G11을 찾아냈었다.
'숙소에서 가까운 곳에 있을 거야.'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처음부터 숙소에 있었거나….'
나도 모르게 입에서 욕이 나왔다. 나는 내 추측이 틀리기를 바라면서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 안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아까보다 짙어져 있었다. 시간을 보려고 휴대폰을 꺼내는 동안 어딘가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곧장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가 밑에 아담한 크기의 철제 캐비닛이 있었다. 캐비닛에 귀를 대봤더니 안에서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허망한 심정으로 캐비닛을 활짝 열었다. G11이 빗자루와 함께 엎어졌다. G11은 바닥에 머리를 찧고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딴 세상에서 온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졸린 눈은 그대로였다. 그녀는 뒤늦게 찾아온 통증 때문에 머리에 손을 대고 신음했다. 늘어지는 하품에 이어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한쪽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가볍게 털어내고 G11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모자 밑으로 정신 사납게 뻗쳐 있던 머리카락들이 삐져나왔다.
"으…지휘관?"
내가 물었다. 약이 바짝 올라있었지만 막 깬 애나 다름없는 G11의 표정을 보고 나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욕설로 G11을 끌고 다니던 HK416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야 416한테 들키기 싫으니까…. 아, 오늘 416 없구나…."
그녀가 모자를 매만지면서 말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휴대폰을 꺼냈다. 벌써 5시였다. 이제 와서 업무로 돌아가 봤자 야근은 확정이었다. 뱃속이 요란하게 고동쳤다. G11이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베개 대신에 붙들고 있던 빗자루를 아직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비비면서 멍하니 서 있다가 자기 배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손목에 감은 붕대를 풀어보니 상처는 말끔하게 나은 뒤였다.
"밥 안 먹었지?"
G11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를 골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전자레인지에 핫바를 넣고 돌리는 동안 간식거리들을 둘러보았다. 소용돌이무늬가 새겨진 막대 사탕이 G11에게 딱 어울릴 것 같았지만 꾹 참고 아이스크림을 집어 들었다. 나는 G11의 맞은편에 앉아 샌드위치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G11은 아침부터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는데도 샌드위치를 깨지락거리며 먹고 있었다.
"416이 오려면 아직 한참 멀었어."
HK416이 왜 인상을 구기고 다녔는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저녁 식사도 거를 생각이었다. 시간에 얽매이기 전에 지금의 여유를 최대한 오래 즐기고 싶었다.
"귀찮게 해서 미안해, 지휘관…."
G11이 말했다. 평소에도 기운 없는 목소리였지만 지금은 완전히 풀이 죽은 것 같았다. 사과하는 와중에도 입이 찢어지도록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자놓고도 아직 잠이 더 필요하단 게 믿어지지 않았다.
"미안하면 앞으론 침대에서 자 줘."
"응…."
나는 그 뒤부터 입을 다물고 있었다. 계산을 마치고 편의점에서 나오는 동안 시계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만, G11을 숙소까지 바래다주는 건 잊지 않았다. 그녀가 침대에 똑바로 누워 있는 걸 보기 전까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등 뒤를 흘깃거리는 G11의 처진 눈이 정말 끝까지 따라올 생각이냐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나는 행동으로 대답해주었다. 내가 먼저 숙소에 들어가 바닥에 널려 있는 청소 도구들을 캐비닛에 다시 넣어두었다. G11은 내 감시하에 이불 속에 틀어박혀 몸을 뒤척였다. 어째 캐비닛 안에 있을 때보다 더 불편해 보였다.
"지휘관, 나가면서 불 좀 꺼줘."
G11이 말했다. 청소까지 부탁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집무실에 돌아오자마자 원래부터 쌓여 있던 서류들이 섬뜩하게 반겨주었다. 머그잔에 따라둔 커피는 이미 차게 식어 있었다. 나는 커피포트를 다시 켜놓고 철야에 대비했다.
일주일 뒤에 도착할 보급품 목록이 마지막 서류였다. 나는 컴퓨터를 끄고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났다. 허리와 어깨에서 뚜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창문에서 서늘한 밤공기가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담벼락 너머에서 올빼미들이 울어댔다. 문 옆에 달린 거울을 보니 내 눈도 G11처럼 처져 있었다. 병에 손톱 크기만큼 남아있던 커피는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이제 잠들면 그만이었지만 느긋하게 한 잔만 더 마시고 싶었다. 결제 파일을 옆구리에 끼고 걷는 동안 커피보다 술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숙소의 냉장고에 한 병 넣어놨던 게 떠올랐다. 내일 일정은 오후부터 있으니 무리하지 않으면 적당히 뻗어 있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지휘관…."
G11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진 그랬다. G11은 모자를 벗어두고 베개를 꼭 끌어안은 채 숙소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시간은 더 잤을 텐데 눈은 나와 다를 게 없었다. 정말로 잠들기는 하는 건지 궁금했다. 이번엔 아까 전과 달리 약간 겁먹은 눈치였다.
"무슨 일이야?"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나는 집무실에 돌아가서 서류들을 마저 챙기고 불을 껐다. 한잔 걸치지 못한 게 아쉽진 않았다. 다만 G11이 같이 자자는 이유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맞기를 바랄 뿐이었다. 맞는다면 이것도 며칠만 참아주면 그만이었다. 스탠드를 켜놓고 잠옷으로 갈아입는 동안 G11이 먼저 침대에 들어갔다. 그녀답지 않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스탠드 옆에 물 한 컵을 따라두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G11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겁이라도 먹은 거야?"
생각대로였다. 혼자서 자본 경험이 적은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심정이었다.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시끄러웠던 고향 동네가 떠올랐다. 영정사진을 곁에 두고 보험금과 군인 연금을 운운하고 남편이고 부인이고 가릴 것 없이 서로 바가지를 긁어대던 곳이었다. 창문을 닫아놔도 주정뱅이의 고성방가와 접시 깨지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잠자리를 방해했다. 겨우 잠을 청하고 나면 꼭두새벽부터 아가리 닥치라고 소리치는 걸 들을 수 있었다.
그런 곳에도 가끔은 평화가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밤이 오면 어쩐지 쓸쓸한 마음이 들곤 했다. 그러다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적도 있었다. 창문을 통해 이웃 간에 따뜻한 정이 넘치는 저속한 인사말들을 듣고 나면 익숙한 기분이 돌아왔었다. G11의 숙소가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항상 곁에 있던 누군가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나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G11의 숨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오른쪽 뺨에 아직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조심해서 떼주었다. 발그스레한 볼이 그녀의 호흡을 따라 살짝 부풀었다가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스탠드를 끄고 눈을 감았다.
오후 일정이 시작되기 전에 숙소에 들렀다. G11은 보이지 않았다. 스탠드 옆에 빈 우유병이 올려져 있었다. 예상과 달리 이불은 깔끔하게 개켜져 있었다.
그날 밤엔 G11이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그녀를 부를 일이 없어서 숙소를 확인하는 일도 잊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하다못해 소파라도 써주기를 바라면서 머리에 깍지를 끼고 누웠다.
주말 아침이 밝았다. 문밖에서 고소한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나는 코를 벌름거리다가 벌떡 일어났다. 부엌으로 달려가 보니 G11이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프라이팬에서 기름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지휘관…왜 그래…?"
그녀는 나와 똑같이 놀란 눈을 하고 말했다. 한순간 가스 불을 켜놓은 줄 알았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나는 아무 일도 없는 척 식탁에 앉아 찬물을 들이켰다.
"아무것도 아니야. 웬일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G11이 뒤집개로 프라이팬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먹는 것도 귀찮아하던 그녀가 밥을 해준다니.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었다. 나는 텔레비전을 켜놓고 부엌을 흘깃거렸다. G11은 여전히 멍한 눈빛으로 접시에 음식을 담아 내 앞으로 가져다주었다. 달걀옷을 입힌 토스트에 잘 구워진 베이컨이었다. 드레싱을 끼얹은 양상추 샐러드도 있었다.
"냉장고에 채소는 없었을 텐데…."
G11이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겉보기엔 먹음직스러운 식사였다. 토스트를 한 입 먹어보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았다.
"맛있네. 어디서 배운 거야?"
나는 그녀가 지난번처럼 몹시 당황했을 때 튀어나오던 말버릇들을 떠올렸다. 나를 주인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메이드 계열의 일을 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지만 온종일 잠에 푹 빠져 있는 지금까지 실력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잠꾸러기였어?"
나는 베이컨을 먹으면서 물었다.
"응…."
마침 뉴스에서 인권단체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멍청하기 짝이 없게 생긴 금발의 스킨헤드가 마이크에 대고 인간들의 일자리를 되찾아야 한다며 부르짖고 있었다. 나는 텔레비전을 꺼버리고 식사에 집중했다. G11은 양다리를 쪼그리고 앉아 식빵을 먹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신경 쓸 필요 없어 지휘관…. 여기선 자도 그렇게까지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런 말을 듣고 나면 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졸려?"
"아니…버틸 만해…."
나는 접시를 설거지통에 넣고 나서 G11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귀찮다고 말하면서도 싫은 내색은 보이지 않았다. 샤워실에 들어가기 전에 그녀에게도 씻고 오라고 말은 해뒀지만 기대는 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은 뒤에도 그녀의 산발 머리는 여전했다. 그나마 입가에 있던 침 자국은 지워져 있었다. 그녀는 복도에서부터 나른한 분위기를 풍기고 다녔다. 계단으로 3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마주친 인형은 없었다. 그녀는 잠자코 따라오기만 하다가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채고 질색했다.
"지휘관, 오늘은 노는 날인데…."
나는 그녀의 투정을 무시하고 훈련실 문을 열었다. 억지로 총을 집어 든 그녀에게 맛있는 걸 사주겠다는 약속을 한 뒤에야 사격 솜씨를 감상할 수 있었다. 그녀의 쉬고 싶은 열망이 귀찮음을 이겨버렸다. G11은 자신의 특기인 무시무시한 속사를 앞세워 표적들을 순식간에 처리했다. 그녀는 탄창을 비우고 심통이 난 얼굴로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때마다 바로 다음 단계를 진행했다. 그녀의 뛰어난 실력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러다 보니 탄창을 네 개나 비워버렸다.
"더는 못해…."
G11이 말했다. 정말로 못한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이 정도면 내일 당장 출격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결과표를 저장해두고 지하에 있는 카페로 내려갔다. 카운터에서 접시를 닦고 있던 인형들이 G11을 보고 놀라워했다. 그녀를 여기서 본 게 처음인 듯한 반응이었다. 카페가 들어선 게 한 달 전이었다. 설마 그동안 한 번도 들르지 않았을 줄이야.
"술…?"
안 될 말이었다. 나는 그녀가 즐겨 먹던 럼맛 아이스크림을 한 컵 가득 담아주고 커피를 주문했다. G11은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면서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녀의 몫으로 커피를 한잔 더 시키려고 했는데 그녀가 내 손을 붙잡았다.
"커피는 됐어…지긋지긋해…."
끓이는 게 지겹다는 걸까? 나는 창밖을 내다보면서 그녀가 컵을 다 비울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잠을 제대로 자고 있긴 한 거야?"
G11은 내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대로 잔다는 게 뭔데…?"
그녀는 숟가락을 입에 물고 한참을 고민했다.
"그냥 멍해…. 가끔은 옛날 생각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G11을 숙소에 돌려보내고 집무실에 들렀다. 그녀에게 편한 잠이 무엇인지 알려주면 상태가 좀 더 좋아질 것 같았다. 나와 함께 자고 있을 땐 얼굴만은 평온해 보였었다. 휴대폰을 꺼내 잠이 오지 않을 때 듣던 음악들을 훑어보았다. 그중 하나를 점찍어두고 다른 인형들과 어울리며 밤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번엔 내 쪽에서 G11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나는 취침 시간에 맞춰 그녀의 숙소를 방문했다. 불이 다 꺼져 있었다.
"G11."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불과 쿠션은 이틀 전 그대로였다. 캐비닛을 열었더니 빗자루만 떨어졌다. 침대 옆의 서랍장에는 반쯤 먹다 말은 샌드위치가 남아 있었다. 침대 밑에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십 분 넘게 샅샅이 수색해봤지만, 허탕만 치고 말았다. 나는 세탁기까지 열어보고 나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곳에 숨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언제부터 여기 있던 거야?"
나는 거짓말로 G11을 안심시켜주었다.
"그래도 이번엔 침대에 있었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나는 스탠드 옆에 휴대폰을 올려두었다. 내가 그녀의 곁에 눕는 동안 '아주 새로운 날'의 잔잔한 선율이 흘러나왔다. G11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에요, 지휘관…."
나는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아주 새로운 날인 새벽
"잘 자, G11."
나는 그녀에게 속삭여주고 나서 눈을 감았다.
G11의 소대원들은 시간에 딱 맞춰 돌아왔다. UMP9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미소를 머금고 내게 달려들었다.
"지휘관, 잘 지내고 있었어?"
허리 때문에 평소와 같은 환영식은 무리일 것 같았다. 그녀는 잔뜩 실망한 눈으로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나는 별수 없이 그녀의 허리를 잡고 번쩍 들어 올리면서 한 바퀴 돌려주었다. 그나마 가만히 서 있을 때 해서 다행이었다. 달려오는 걸 받아줬다면 분명히 쓰러졌을 것이다. UMP45와 HK416이 다가왔다. HK416은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내 등 뒤에 숨어 있는 G11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저 잠탱이 녀석. 지휘관, 귀찮지 않았어요?"
HK416이 물었다.
"아니, 그냥 잠만 자던데…."
HK416은 G11에게 꿀밤을 먹이는 시늉을 하면서 들어갔다. G11은 진짜 맞기라도 한 것처럼 떨고 있었다. 내가 소대원들의 뒤를 따라가는 동안 옷자락을 쥔 G11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기…지휘관…."
그녀가 말했다.
"응?"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래, 그러자."
잠탱이 귀여워요 잠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