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검다리*
평생 강물의 노래를 들었으나
자신의 노래를 부른 적 없는 이가 눈보라를 맞는다
피아노의 검은 건반이 하얀 눈보라 속에 묻힌다
* 강에 두 개의 징검다리가 있다. 첫 징검다리의 디딤돌은 34개, 두
번째 징검다리의 디딤돌은 43개다. 디딤돌은 1~2미터 정도의 길이
와 폭을 지녔다. 무싯날 디딤돌은 강물보다 20센티미터쯤 높다. 카페
A 앞에 강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받아 들고
계단을 내려간다. 강에는 철따라 꽃들이 핀다. 망초와 메꽃, 민들레
꽃, 황하코스모스 들이 군락으로 핀다. 첫 징검다리에 이르러 부평들
과 고마니떼, 물봉선 꽃들에게 인사하고 새로 태어난 물고기들에게
도 인사한다. 비 오는 여름날 검정 안경을 쓴 노인이 지팡이 끝으로
징검다리를 두드리며 강을 건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끝까지 무사했
다. 가을에는 징검다리 앞의 풀숲에 길고양이가 새끼 세 마리를 낳았
다. 어미는 보이지 않고 새끼들은 풀숲 밖으로 나와 징검다리를 건너
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고양이가 사는 풀숲 입구에 물과 사료를 매일
가져다주는 사람이 있었다. 34개의 디딤돌을 건너는 시간은 일정치
않다. 물 아래 큰 물고기들이 보일 때도 있고 새로 온 물새 식구들을
헤아릴 때도 있고 동네 아낙들이 나와 다슬기를 잡을 때도 있다. 아
기 물고기들은 호기심이 많은데 내가 커피를 조금 부어주면 무슨 냄
새지 하며 모여든다. 어느 날 황새 한 마리가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아
챘는데 물고기가 부리에서 퍼덕이는 것을 본 내가 악! 큰 소리를 질
렀고 그 순간 새도 놀라 물고기를 떨구고 말았다. 사흘째 되던 날 물
빛이 맑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고기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을 보
았는데 그중 한 마리의 등이 새끼손톱만큼 파여 있었다. 그도 씩씩하
게 헤엄치고 있었다. 아시는지? 모든 물고기들이 헤엄칠 때 상류 쪽
으로 머리를 향한다는 것을. 10마리의 물고기가 모여 있다면 그들의
머리가 모두 한 방향이라는 것을. 첫번째 징검다리에서 두번째 징검
다리까지의 거리는 1,190걸음이다. 영하 7도쯤 되던 바람 많은 날 급
하게 헤아린 것이니 오차가 있을 것이다. 두번째 징검다리의 디딤돌
은 첫번째 징검다리보다 조금 크다. 이곳 강폭이 더 넓고 깊이도 조
금 깊기 때문이다. 여기서 카페A가 자리한 계단으로 돌아오면 오늘
의 순례가 끝난다. 순례의 시간도 일정치 않다. 무엇보다 도중에 내
가 좋아하는 의자가 둘 있기 때문이다. 의자에서 시집 읽기도 좋고
말매미 울음소리 듣는 것도 좋고 그냥 멍때리기도 좋다. 바람이 좋고
강물 냄새도 좋다. 그중 한 나무의자 이야기를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
다. 지금은 깊은 겨울이므로 강변의 풀들은 다 시들었다. 며칠 전 의
자에 앉았다 일어서는데 의자 아랫부분만 색깔이 다른 것을 알았다.
의자 아래의 풀들만 초록빛이었다. 나무의자가 지붕처럼 눈을 막아
주었고 추운 바람을 막아준 탓이라 생각하니 놀랍고 신비했다. 나는
이 사진을 몇 장 친구들에게 보냈는데 그중 한 친구는 부끄럽다고 말
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영혼에게 작은 의자가 되어준 적이 있는가
생각했다는 것이다. 부끄럽기는 어디 그이뿐이겠는가. 꽃과 나무와
새 들, 물고기들, 강을 걷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힘들어도 생명은
전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흐르는 물이 얼음으로 뭉쳤다가 봄날
의 자욱한 꽃향기를 만나듯.
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
곽재구, 문학동네시인선 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