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자무시 67 행성
(『리 마빈의 아들들 인터내셔널』지에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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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신과 육신의 모든 세포들이 그대 쪽으로 나부
끼는 밤, 이라고 그대는『리 마빈의 아들들 인터내셔
널』에 썼던가, 라일라, 지금은 황금 물고기의 시간,
나는 여섯 살의 노을에서 황금 물고기를 보았네, 그
물고기의 비늘을 스치는 바람으로부터 나의 생은 오
네, 라일라, 지금은 황금 물고기의 시간, 나의 생은
레몬 버베나의 이파리를 스치는 바람으로부터 와서
푸른 담배 연기 끝을 달리는 창백한 말들로 사라지네,
라일라, 해 질 녘의 창가에 앉아 나는 오늘도 나의 외
계에서 지고 있는 삼만 팔천 개의 노을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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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마빈의 아들들 인터내셔널』에 발표된 열한 개
의 행성들에게도 저녁이 오고 있을까, 나는 이번엔 또
우주를 떠도는 몇 개 창백한 말들의 행성을 소환하여
『아프리카인』에 발표할 계획이야, 시커멓고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 난 내가 정말로 아프리카인이 된 듯한
기분이야, 그대라면 이해할 수 있겠지, 캄캄한 피부
속으로 뜨거운 피가 흘러 아프리카 북부 해안에 노을
로 가닿는 이 느낌, 그래, 이번 행성들로는 무가당 담
배 클럽 버전으로 무삭제판「흑인 오르페우스」를 만
들어 『아프리카인』에 발표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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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분의 행성들로는 뭘 하지, 행성들의 이면에 기록
해놓은 것들은 연금술사 동맹에 보내려고 해, 말이
동맹이지 연금술사들의 동맹이란 고독의 동맹이지,
삶의 비의를 끊임없이 천착하는 솔리튀드 동맹, 그들
이 만들어내는 두 개의 무크지 중에 한 곳에 보내려
고 해,『컨티뉴어스 레볼루션』과『데카브리 지즌』말
이야, 12월 당원인 데카브리스트들과 시의 연금술사
들과의 차이점이 뭔지 그대는 아는지, 그건 자신의
피를 혁명의 불꽃으로 바꾸려는 것과 시로 바꾸려는
것의 차이지, 그래, 본질적인 혁명이란 어쩌면, 불면
의 시로 불멸의 혁명 그 불꽃을 피워 올리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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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혁명의 와중에도 나의 사람, 나의 연애를 잃고
싶지 않았다, 궁극적으로 혁명이란 내가 담배 한 대
를 맛있게 피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
니까,라고 내 생각을 기록하는 동안 창가로는 슬라브
적인 저녁이 왔네, 내 영혼의 돛배가 아프리카 해안
을 떠나 발트 해 연안에 다다르는 동안에도 빅또르
쪼이는 여전히 슬라브어로 노래를 하고 나는 우랄 알
타이어로 내 고독의 기원에 대해 말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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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르 클레지오의 글을 읽고 나는 빅또르 쪼이
의 노래를 듣는 저녁, 빅또르 쪼이는 나의 글을 읽고
르 클레지오는 그대의 노래를 듣는 저녁, 검은 염소
떼의 어둠을 몰고 저녁은 창가로 내려오네, 창밖이
어두워지면 삶은 조금 더 환해지는 것일까, 찻물을
끓이고 감자를 삶는 지금은 창문을 조금 열어 외계와
은밀히 내통하는 시간, 푸른 밤을 여울져가는 갸륵한
숨결들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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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낮의 등뼈 뒤로 밤이 오고 밤은 조금 웅크린 채
착한 짐승처럼 깊어가네, 내 등골에 방금 당도한 지
구, 푸른 전등 앞에 한 잎의 저녁을 켜두고 내가 고요
히 그대를 생각할 때, 바람의 악사들은 창문의 등골
을 풀루트처럼 연주하네, 투명한 유리 속에서, 그래,
이제 조금씩 휘날리기 시작하는 눈발들, 눈발 속을
달려가는 창백한 말들, 그래, 그대는 지금 바야흐로
내 등 뒤에 도착한 톱밥 난로와 스웨터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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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적인 영혼들이 저녁의 창문을 조금 열어두고
담배를 피워 무는 여기는 12월당, 데카브리, 데카브
리, 밤새 눈이 내려 불꽃 같은 생을 모의하는데 추운
밤의 심장을 가르며 날아가는 담배 연기의 선언문,
생은 은밀한 혁명이어야 한다, 혁명을 덥히는 뜨거운
불꽃은 오직 그대 숨결로부터 와야 한다, 슬라브 지
붕 아래서 밤새 잠들지 않는 연인들이 슬라브, 슬라
브, 슬라브식 연애를 이어가는 여기는 12월당, 데카
브리, 데카브리, 눈 내리는 백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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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터 없는 골루아즈 담배를 피우는 밤, 골루아즈,
골루아즈 담배 연기처럼 눈발 휘날리네, 새벽은 깊고
어두워 잠들지 않은 영혼들이 하염없이 바라보는 지
구의 내면, 오래된 지구의 내면을 말달리는 내 영혼
의 동지들, 이 시각에 무슨 회합이라도 있나, 러시아
에서, 프랑스에서, 베를린에서, 티베트에서 급하게
타전해오는 눈발들, 눈발들의 모스부호를 고독고독
해독하고 있는 여기는 무가당 담배 클럽 다락방 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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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싱키 나폴리에서 밤새도록, 잠파노는 젤소미나에
게, 잠파노 잠파노 잠파노는 밤새도록 밤새도록 젤소
미나에게, 밤새도록 잠파노는 젤소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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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얘기할 테고, 오늘
내 이야기의 주제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내 얘기를 들어도 우리는 아무 데도 이르지 못하고,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할 뿐이죠,
잠을 자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눈치 볼 것 없어요, 왜
냐하면 난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것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을 테니까요, 자리를 뜨고 싶으면 그렇게 하
세요, 우리는 여전히 어디에도 이르지 못한 채,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을 테니까요, 라고
존 케이지가 말하고 있을 때, 나는 ‘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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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항상 주변부에 있는 것들에 끌려요, 주류가 아
니고요, 개인적 취향이 그래요, 주류는 그다지 관심
을 끌지 못하죠, 벨라 바르톡 같은 사람을 한번 생각
해보세요, 그는 자신의 음악을 끝내 인정받지 못한
채 뉴욕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쳤어요, 프란츠 슈베르
트 역시 가난 속에서 죽었고, 아무도 그의 음악에 관
심을 갖지 않았죠, 윌리엄 블레이크도 그렇고, 오
직 첫 시집만 생전에 공식적으로 출간했을 뿐 나머지
는 모두 소책자 형식으로 자비출판을 했죠, 그래요,
그래서 창밖에는 잠시 눈이 그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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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발에 뒤덮인 창밖을 보다 보니 고다르가 한
말이 생각나네요, 그는 극장과 비디오의 차이를 묻는
말에 이렇게 대답했어요, ‘극장에서는 스크린을 올려
다보고, TV는 내려다보죠’라고요, 나는 새벽의 창문
을 열고 눈 쌓인 세상의 TV를 내려다봐요, 담배가 다
떨어져가요, 눈발도 다 떨어져가요, 시를 쓸 수 있는
나의 새벽이 다 떨어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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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아득히 멀리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시간,
알랭 로브그리예 씨는 잘 지내고 있을까, 문득 로브
그리예 씨의 근황이 궁금해지는 새벽, 나는 나의 누보
로망 같은 한 편의 시를 적어나가고 인적이 드문 새벽
거리로는 사십오 도 각도로 여전히 희끗희끗 눈발 휘
날리는데, 내가 바라보는 지구의 새벽을 덮으며 눈이
내릴 때 지금 이 지구의 대척점에서는 누군가 또 파
도치는 해안의 종려나무를 바라보며 글을 쓰고 있을
텐데, 로브그리예 씨는 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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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나에게 집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나는 대답
했네, 나의 집은 그대, 나의 집은 가난한 그대, 혀 속
에 꿈꾸는 말들을 간직한 그대, 눈동자 속에 이 세상
에서 사장 맑은 물방울을 가진 그대, 밤이면 꿈꾸는
말들을 타고 달빛 아래 초원을 달리는 그대, 밤새 초
원을 말달리며 영혼의 국경을 돌아보다 새벽이면 다
시 나의 숨결 속으로 돌아오는 그대, 발칸의 슬픈 전
설 같은 그대, 흉노족 같은 그대, 나밖에 가진 게 없
어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그대, 그대가 나의 집이
라고 나는 감히 심장의 불꽃으로 대답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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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늑대들의 밤, 작은 호랑이들의 밤, 우랄 산맥
과 알타이 산맥의 깊은 밤, 눈발이 그친 밤하늘엔 별
들이 총총, 무장무장 독립투쟁을 하는 여기는 내 마
음의 파미르 고원, 새벽이면 먼 리스본으로부터 타전
되어오는 대칭의 별 세 개, 변형된 코드의 저녁들, 나
의 임무는 비교적 간단한 것, 세계의 변방으로부터
타전되어 오는 암호를 해독해 행성의 이면에 기록하
는 일, 밤새 오늘의 운세를 작성하여 아침의 요원들
에게 전송하는 일, 새들의 깃털 속에 태양으로부터
온 한 점의 열기를 새겨두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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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는 사막의 배라고 했던가요, 그러나 낙타에 앉
아 흑맥주를 홀짝거리는 검은 밤이면 나는 고비와 타
클라마칸을 지나 아프리카의 사하라로 가요, 내 혈액
형의 일부는 그곳으로부터 왔어요, 뜨거운 모래의 심
장으로부터, 한밤에도 식지 않는 태양의 기억으로부
터, 사막을 횡단하던 낙타의 뜨거운 발바닥 그 견딜
수 없는 생으로부터요, 낙타가 사막의 배라고요, 낙
타는 사막의 시예요, 온몸으로 온 발바닥으로 이번
생을 횡단하는 가장 뜨거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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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이, 자신은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의 시민
임을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할 때 백남준의
문상객들은 자신들의 넥타이를 잘라 백남준의 관 속
에 넣어주고, 존 레논이 부대 자루 인터뷰를 할 때,
백남준은 바이올린을 강아지처럼 데리고 신대륙을 산
책하지요, 어차피 다 외계인일 테지만 한 사람은 자
꾸만 지구의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고 또 한 사람은
자꾸만 텔레비전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지요, 그럴 때
먼 지구에 홀로 남은 여자들은 부드럽게 자신의 다리
를 벌리고 그녀의 가장 깊은 곳으로 세상의 모든 저
녁을 집어넣어요, 그래요, 오늘 저녁의 메뉴는 아마
감자와 양파와 김치를 숭숭 썰어 넣은 맵고도 달콤한
수제비가 될 거예요, 하루 종일 다른 행성에서 외계
인들을 인터뷰하던 센티멘털 실업 동맹의 인터뷰어가
지구로 귀환하고 있는 현재 시각은 행성 시각 1905시
20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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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불꽃이여, 나는 홀로 있다라고 트리스탕 차
라는 말했다, 이 세계는 의미심장한 것도 부조리한
것도 아니다, 다만 존재할 뿐이다라고 알랭 로브그리
예는 말했다, 나는 멍청한 년처럼 외롭다, 내 보지와
함께, 라고 미셸 우엘르베끄는 말했다, 그들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그들의 말을 누군가와 함께 고조곤히
읽고 싶었을 뿐이다, 이 행성에도 겨울이 오고 있었
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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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오르페우스」는 잘돼가느냐고『아프리카인』에
서 연락이 왔네, 그래서 나는 지금「슬라브식 연애」
를 구상 중이라고 대답했지, 그랬더니 그러면 사진과
약력이라도 먼저 좀 보내줄 수 있냐고『아프리카인』
에서 다시 연락이 왔지, 나는 내가 사는 동네의 슈퍼
마켓에서 흑백필름 한 통을 구해 짧은 메모와 함께
『아프리카인』으로 보냈지, “인화되지 않은 그 필름
속에 내 사진과「흑인 오르페우스」의 원고가 다 들어
있으니 좋은 책 만드쇼, 그럼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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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그럼 이만 총총, 이라고
나는 썼던가, 지금 생각해보면 바쁜 일도 없는데 나
는 왜 늘 그렇게 썼던가, 생각해보니 자꾸만 미안해
지는 지금은 새벽이 깊어가는 시각, 나는 이제사 고
요히 그대를 생각하네, 밤새 끓어오르던 주전자 속
혁명의 물결도 잠잠해지고 내가 기르는 강아지 만옥
이도 이제는 깊은 잠에 곯아떨어진 시각, 마지막 커
피를 마시고 이제는 나도 잠들 시각, 그러니 여전히
나의 외게를 떠도는 그대여, 이제는 내게로 오라, 비
록 꿈속 한 줄기 영혼일지라도, 그럼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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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리 마빈의 아들들 인터내셔널』에 썼던 구
절을 조금 변형시켜, “내 영혼과 육체의 모든 세포가
그대를 향해 나부끼는 새벽”이라고 쓴 한 줄짜리 시
를『컨티뉴어스 레볼루션』지에 보냈지, 그랬더니『컨
티뉴어스 레볼루션』지의 편집장 조르단스키 씨는 그
작품이 아마 나의 대표작이 될 거라는 소견을 보내왔
더군, 또『타오르는 마음의 남쪽 혁명』지에서 보내온
청탁은 정중히 거절했지, 그래서 지금 나는 여전히
「슬라브식 연애」만 골똘히 구상 중, 그런데 왜 나는
지중해식 연애나 우랄 알타이식 연애가 아닌 슬라브
식 연애에만 골몰할까, 글쎄, 글쎄라는 표현은 내 영
혼의 클리셰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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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편차, 딜런, 가령 그런 이름들이 주는 파토
스를 생각해보는 새벽이 있어요, 딜런 토마스와 밥
딜런의 차이,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의 차이, 페르
난두 페소아와 알베르투 카에이루의 차이, 생의 간
격, 이름들과 이름들의 틈 사이에서 중력을 견디는
아름다운 영혼들을 생각해보는 새벽이 있어요, 가령
무가당 담배 클럽과 센티멘털 실업 동맹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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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다시 내 영혼과 육체의 모든 세포가 그대를
향해 나부끼는 밤
대낮을 생략한 여기는 비밀결사 ‘리 마빈의 아들들
인터내셔널’의 또 다른 밤, ‘리 마빈의 아들들 인터내
셔널’은 ‘무가당 담배 클럽’의 또 다른 점조직, 영혼
의 세포
이 글의 필자는 체, 파미르 고원의 통신원, 새들의
깃털 속에 태양으로부터 온 한 점의 열기를 새겨두
는 자
(다음 호에 계속)
삶이라는 직업
박정대, 문학과지성 시인선 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