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브식 연애
흑맥주를 마시는 캄캄한 밤, 강원도 내륙 산간 지
방에 내린 폭설주의보
바람이 컴컴한 하늘을 끌고 내려와 민박집 처마 끝
에 당도했을 때 나는 나타샤의 살결처럼 하얗게 피어
날 폭설의 밤을 생각한다, 슬라브식 연애를 생각한다
나는 연애 지상주의자, 지상에서 밤새도록 펼쳐질
슬라브식 연애를 생각한다
그러니까 폭설은 사흘 밤낮을 퍼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묵고 있는 민박집의 아리따운 그녀
는 세상이 더러워 세상을 버리고 산골로 들어온 고독
한 여인이어야 하는 것이다
흑흑, 흑맥주를 마시는 밤은 아주 캄캄하고 추워
지금 내 마음의 내륙에 내려진 폭설주의보
그러니까 그녀와 나는 폭설에 의해 고립되어야 하
는 것이다
너무나 추워 서로의 체온이 간절해져야 하는 것이다
아무 말 없이 체온만으로도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태양의 반대편으로 우리는 밤새 걸어가는 것이다
그 끝에서 우리가 태양이 되는 것이다
인생은 한바탕의 꿈이라 했으니, 그녀와 나는 끝끝
내 꿈속에서 깨어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함께 흑맥주를 마시며 캄캄하게 계속 따스해져야
하는 것이다, 천 일 밤낮을 폭설이 내리든 말든 그녀
와 나는 계속 밤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녀와 내가 스스로 태양을 피워 올릴 떄까지, 그
녀와 내가 스스로 진정한 사랑의 방식을 터득할 때까
지, 그녀와 내가 스스로 슬라브식 연애를 완성시킬
때까지
태양의 반대편으로 우리는 밤새 걸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 우리가 태양이 되는 것이다
삶이라는 직업
박정대, 문학과지성 시인선 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