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뢰희(傀儡戱)
너희들은 어렸을 때부터
영웅들의 가면을 쓰고 놀았고
나만 홀로,
이상한 방독면을 쓰고 있었지
방독면을 뒤집어쓴 채 잠에서 깼네
뭉게뭉게 사람들을 잡아먹는 연기들 꿈속에서 본 사람들
어굴이 군화 같은 검은 연기 뭉치에 밟혀 뭉개지고 있었네
불은 붉은 튤립 꽃다발처럼 잔인한 총천연색이었네
바닥을 기던 꼬리 달린 연기가 뱀인 양
발목을 물고 달아났네
색(色)을 빨린 사람들은 흑백의 재로 변한 채
스스스 주저앉아버렸네
바람에 풀풀풀 날렸네
나는 방독면 안에서 풀무질하듯 거친 숨을 쉬었네 불은 활
활활 사나워졌네 꿈 밖으로 뛰쳐나오기 위해 사람들이 눈꺼
풀의 닫힌 문을 탕탕탕 두드리며 울부짖고 있을 사이
훼훼훼 나만 홀로 자물쇠 같은 방독면 안에서 안전했네
방독면에 철컥, 잠긴 얼굴은 그 누구도 알아챌 수 없었네
그 어둠 안에서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같은
공기를 나만 홀로 들이마셨네
“꿈속에 갇힌 사람들아, 너희들은 어렸을 때부터 영웅들의 가
면을 쓰고 놀았고 나만 홀로 이상한 방독면을 쓰고 있었지 학교
가 끝나면 실내화 주머니 대신 방독면 주머니를 질질질 끌며 집
으로 돌아왔지 딱지를 모으기보단 뜨거운 탄피를 모았지 나는
후춧가루보다 매운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
나는 울지 않는 무서운 아이,
너희들이 붉게 충혈된 안구를 굴리며 앵앵앵 경보음을 울
려댈 때
나는 수면모자 대신 방독면을 뒤집어쓴 채 잠들었지
“흑백텔레비전마냥 문명 밖으로 사라지기 싫었어 보건의 날
너희가 운동장에 한데 모인 불량식품처럼 꿈속으로 타들어갈 때
도 나는 방독면 안에서 고개를 쳐들고 검은 달의 그림자 인형
극을 보았어 때마침 달 기지공장에선 백만번째 방독면을 생산
하고 있었어”
방독면 안, 그곳은 쥐색으로 물든
또다른 우주
방과 후 아무도 없는 나의 골방
혹은 거름종이처럼
너희들의 얼굴이 깨끗이 걸러지는 곳
“방독면을 뒤집어쓴 채 밤거리를 헤매는 몽유의 세계야, 나는
매일 밤 꿈속의 너희들로부터 끝없이 달아났고 내 앞엔 환한 비
상구가 뚫려 있었고 언제나 나는 뛰던 자세 그대로 막 문을 통
과하던 참이었네”
방독면
조인호, 문학동네시인선 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