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슬픔
어디를 가도 슬픔은 명멸하였다
슬픔이 바싹 말라 가랑잎처럼 불타오를 때가 나는 좋았다
아무리 세상을 떠돌아보아도, 조국이며 인민이며 국경
은 모두 내 안에 있었다
그럴 때면 추운 밤하늘을 보며 한 떨기 초저녁별처럼
몸을 떨었다
들판에 흩어진 콩깍지들 사이 흩어진 콩을 함께 주울
사람도 없는 지상에서 사랑은 인류에 대한 연민처럼 몇
송이 눈발로 나부낀다
바람에 나부껴 다 헤진 깃발을 두고 온 곳이 나의 조국
이었고 인민이었고 철지난 사랑이었다
페이소스도 파토스도 없이 몇 개의 눈송이와 더불어 한
밤의 길을 간다
내가 가는 곳에 돋아날 지도와 새로운 행성을 나는 알
지 못 한다
다만 졸린 눈을 비비며 주머니 속의 고독과 더불어 그
곳에 가까스로 당도할 뿐이다
파리에 사는 동생 알렉시스 베르노가 보내온 편지를 읽
는다
그곳이 정선이고 이절이고 만종이고 원주다
원주에 사는 김도연이 보낸 패업경을 읽는다
그곳이 부에노스아이레스고 파리고 네팔이다
진위에 사는 우대식이 보내준 시집을 읽는다
그곳이 함흥이고 세상의 모든 설산이며 슬픔이다
세상의 어디를 가도 슬픔은 명멸하였다
나는 세상의 모든 곳을 떠돌았으나 나에게로 도착하여
가장 슬프다
그러나 나의 슬픔이 지상에 작은 눈송이 몇 개 흩날리
게 하리라는 걸 안다
작은 눈송이 몇 개 휘날려 삭막한 겨울날 지상의 인민
들을 위로하리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눈송이들 흩어져 지상에 닿을 때쯤이면 그것이
몇 점의 불꽃으로 바뀌는 밤이 있다는 것을 안다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
박정대, 달아실시선 0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