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나는 시
아,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세요? 저는 뭐…… 그
냥…… 예, 조금 편해지긴 했어요 심지 부러진 연
필처럼 쉬고 있어요 마개 잃은 PET 병처럼 길에
누워 있어요 내 정신 좀 봐 재활용 쓰레기 배출일
인가 봐 토막 난 산낙지처럼 처음에는 쓰려서 발광
하다가 네모난 플라스틱 사라 위에서 늘어져 예,
맞아요 이사 갔어요 버리기도 뭐하고 해서…… 그
냥 서랍 안에 잠들어 있는 이전 집 열쇠처럼 조용
해요 흙을 쏟아놓은 겨울 화분처럼 텅 비어 있어요
비밀 번호는 기억나지 않으니 보조키 다실 필요 없
어요 명함이요? 그런 거 있긴 한데 이멜 주소는 바
뀌었어요 그래도 하나 드릴까요? 시커멓게 된 은
귀걸이처럼(당신이 사줬죠) 라이터에 적힌 고깃집
이름처럼 지각한 아이처럼 냅스터처럼 지나치게
높이 달렸다가 썩은 채로 얼어버린 감처럼 금연하
자는 결심처럼 휘어버린 LP처럼 비둘기의 발톱처
럼 판박이처럼 구가다 칼라처럼 아, 더운 물은 나
와요 시큰둥한 엄마처럼 통장 이월시켰구요 펀드
는 깼어요(더 이상 부을 필요 없는데요 뭐) 당신 기
억이 지워버린 아이처럼(아이가 있다는 걸 몹시도
싫어했죠)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처럼 이혼한 부부
처럼 왼쪽 깜박이처럼 숙녀 앞접시의 청양고추처
럼 당신의 생일처럼 제출된 보고서처럼 종점의 보
관소처럼(그나저나 넌 요새 그림 잘 되니) 보도자료
처럼 비누방울처럼 콘돔처럼 모자이크 처리된 몰
카처럼 터무니없는 메뉴처럼 지나간 버스처럼 수
시로 조는 남경장 조바처럼 대중적이라는 단어처
럼 당신의 사진처럼 풍선껌처럼 유통기한 지난 골
뱅이처럼 혼인 서약처럼 구두 뒤축처럼 비보호 좌
회전처럼 유치한 고백처럼 연탄처럼 잡지처럼 감
탄사처럼 그분의 시처럼 사은품처럼 안약처럼 더
운 물? 눈물? 나와요 아 아까 말했나? 졸업 앨범
처럼 당신이 사준 옷 장갑 시계 유리 주전자 정도
처럼(대부분 버렸어요) 당신 집 주차 스티커처럼
(구겨 버렸어요) 참 그 차 팔았어 빚진 게 좀 있어
서요 지난해 망년회처럼 개근상처럼 잘 있느냐는
개 같은 말처럼 엘리자베스 여왕처럼 라면처럼 피
어싱처럼 기호 2번처럼 영화요? 잘 안 보고 가끔
드라마는 봐요 대체로 중간부터 멍하니 퇴근 후에
양말은 벗어놓죠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처럼 진공관
처럼 겨울 화분처럼(아까 했죠) 멍든 형광등처럼
성모님처럼 한밤의 빛처럼 당신이 좋아하던 날씨
처럼 공강 시간처럼 등신불처럼 깎아놓은 손톱처
럼 인텔리전트라는 바보 같은 낱말처럼 뒤꼍으로
드는 한 뼘의 햇빛처럼 옛날에 쓰던 컴퓨터에서 겨
우 찾아낸 음악처럼 그냥 있어요 곗돈처럼 별똥별
처럼 왜 연락 안 했느냐고 선수 치는 뻔뻔한 혀처
럼 알리바이처럼 거짓으로 점철된 우리의 인생처
럼 호리병처럼 아 기분이 잘록하고 당신은 희박해
그만 해야지 행방 不滅 아빠처럼 하루하루 자라나
는 이 시가 자라기를 그칠 때쯤 당신은 잊혀져 있
겠죠 텅 빈 채 역을 통과하는 회선 열차처럼 청소
하는 아주머니만 태우고 나처럼 (계속)
당신의 텍스트
성기완, 문학과지성 시인선 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