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 어떤 세상을 완벽히 표현하는 방법, 아케인: 리그 오브 레전드

우리... 아직도 자매 맞아?
- 징크스, 바이에게
리그 오브 레전드 기반 애니메이션 드라마, 넷플릭스 시리즈 ‘아케인: 리그 오브 레전드’ 가 3주 간의 방영을 끝냈다. 정말 할 말이 많지만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LoL 플레이어이자 이 세계관(비록 누덕누덕 기워진 것이더라도)의 팬이자 영상물과 게임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너무나 칭찬하고 싶은 부분이 많아서다.
개인적인 입장에서도 게임과 영상물 모두를 너무나 좋아하는 입장에서 ‘아케인’은 만족스럽기 그지없는 드라마였다. 개인적으로 올해 본 영상물 중에서 그간 최고봉은 ‘듄’ 이었지만, 미안하게도 ‘아케인’ 에게 그 자리를 넘겨줘야 하겠다. ‘아케인’ 은 그 훌륭함 만큼이나 배경지식이 없어도 볼 수 있다는 막대한 장점이 있으니까.

※이하의 본문에는 드라마 전체의 스포일러가 담겨있습니다. 시청 후 읽으시는 것을 강력히 권장합니다.
※아울러 댓글에도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


모든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이야기, 탁월한 전달과 표현
‘아케인’ 의 이야기는 사전 준비와 단계적 상승을 차근차근 밟아나간다. 1~3화에서 파우더와 바이의 이야기로 시작한 드라마는 4화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넓혀나가고 너무 급하지 않게, 인물에서 인물로, 서로 계속해서 연결되는 다른 관계와 갈등으로 이어진다. 특히 아케인의 제작진은 어떤 감정, 내용을 전달함에 있어서 음악, 배경, 캐릭터의 움직임, 세세한 표정, 화면의 구성 등 모든 부분에서 통달한 수준을 보여준다.




빅토르가 취하는 인간승리, 또는 극복은 그 뒤의 비극 때문에 더욱 애잔하다.
이처럼 화면에서 보여지는 화려하고 상징 가득한 색채의 사용, 명확하고 낭비 없는 구도, 역동적인 움직임의 표현 같은 감각적인 부분들이 하나의 낭비도 없이 의도적으로 쓰였음을 암시한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광원의 활용은 드라마 전체에 걸쳐서 매우 상징적으로 사용되는데, 예를 들어 실코가 화공 남작들의 회의에 난입해 이들을 제압하는 장면에서도 실코가 위압적인 카리스마를 드러내는 장면에서는 광원이 지극히 억제되어 있지만, 실코가 자비를 배푸는 순간부터 공간의 광원이 모두 더욱 밟게 강조된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든 이 변화처럼, 이 드라마는 모든 장면을 암시로서 활용한다.


주변 상황이 변하기 전임에도 극명한 빛의 대비를 통해 분위기를 전달한다.


징크스는 보라색을 가지게 되면서 돌이킬 수 없게 된다.
특히나 표정과 사소한 행동을 통해서 인물의 감정을 전달하는 능력이 너무나 탁월하여 대사보다도 장면에서 눈을 떼어서는 안되는 것들이 매우 많다. 멜과 제이스의 관계에서 멜이 보여주는 다양한 표정은 처음에는 그녀가 분명 제이스를 이용했지만, 뒤로 갈수록 제이스를 사랑하는 멜이 오히려 제이스에게 흔들리고 그의 뜻을 따르게 되는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러한 표정에서 바로 어떤 감정이 읽힌다는 것
비극적인 파국으로서, 이 드라마의 엔딩은 또 수많은 암시를 통해 그 비극을 부각시킨다. 멜 메다르다는 결국 자신의 일부이자 근원인 녹서스를 포기하고(반지를 벗어 내려놓는 장면을 통해) 제이스의 손을 들어 필트오버가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평화를 얻는 방향을 택한다. 이는 멜 스스로도 자신의 굴레인 가문에 의해 버려졌던 과거, 그리고 오직 이해타산만을 따지던 필트오버의 의원의 자세를 내려놓고 진심으로 평화주의자이자 제이스의 뜻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연인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러한 극적인 상승의 순간에 징크스가 발사한 로켓이 멜의 뒤로 날아들며 모든 것이 다시 파국으로 치달을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완벽한 전달력과 표현을 온전하게 읽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매우 뛰어난 한국어 더빙의 효과로 극대화 된다. 더이상 한국어 시청자도 자막이 아닌 다른 화면 곳곳에 집중하면서 드라마를 온전히 즐길 수 있고, 뛰어난 번역과 감정을 제대로 살린 더빙 덕분에 어느 하나 손실되지 않고 우리의 인식에 쏙쏙 들어와 박힌다. 이제 우리도 이런 콘텐츠를 더빙으로 즐길 수 있다는 것, 정말로 기쁘고,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산만하지 않고 풍성하게 만드는 편집과 연출
이 드라마의 뛰어난 표현력과 전달력을 뒷받침하는 것이 드라마 전체의 뛰어난 연출과 편집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드라마에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은 굉장히 많아지며, 마커스나 세비카 같은 주변 인물들도 일정한 분량과 비중을 부여받는다. 이는 자칫 극 자체가 너무 산만해지기 쉬운 위험성을 가진다. 하지만 ‘아케인’ 은 빠르고 낭비 없는 교차 편집을 통해 중후반부의 분량을 매우 알뜰하게 사용한다.



극의 후반부 수많은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고 존재감을 부여받지만, 어색하지도 작위적이지도 않다.
애니메이션 산업을 언급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일본의 경우, 드라마가 아닌 극장용 애니메이션에서도 컷 낭비나 극의 핵심 서사와 상관이 없는 장면에서 쓸데 없이 컷을 낭비하거나, 또는 지극히 정적인 구도로 대화 중심으로만 표현하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 서사 전달을 위한 정적인 씬과 액션을 위한 많은 컷 할애가 뚜렷하게 구분되곤 한다. 최근 일본의 만화/애니메이션 기반 실사화 작품들이 처참한 완성도를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러한 지나치게 정적이고 컷을 낭비하는 편집과 연출을 실사영상물에 그대로 사용하는 문제에서 기인한다.
비록 아케인도 액션씬의 구분이 뚜렷하기는 하지만, 서사가 중심이 되는 장면에서도 지루하거나 지나치게 정적이지 않은, 수많은 컷 분할, 구도 전환, 치밀한 대사와 표정 묘사로 중요한 내용들을 매우 함축적으로 전달한다. 이 때문에 서사를 위한 장면에서도 극이 전혀 지루하지 않고, 각 인물들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마커스는 부패 경찰일 뿐이지만 충분히 입체적이다.
세비카 역시 초반에는 그저 평범한 악당1 정도로 보이지만, 실코의 최측근으로서 역할이 부각되고 특히 화공 남작과의 갈등에서 의리를 지키는 모습, 또 바이와의 결전 등을 통해서 굉장히 강렬하고 멋진 캐릭터로 거듭난다. 이는 비주얼적 연출과도 무관하지 않은데, 한쪽 팔에 걸친 망토를 벗기 전까지 세비카는 그저 무채색의, 주목받기 어려운 디자인이지만 망토를 벗고 시머 팔을 드러내자마자 가득한 형광 보라색과 함께 그 존재감이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세비카는 그저 무채색의 악당 같았지만, 망토를 벗는 순간 빛나는 보라색과 함께 강렬한 존재감을 부여받는다.

넥스트 레벨 애니메이션, 매 장면이 월페이퍼이자 뮤직비디오
이 드라마 애니메이션의 영상미는 천재적인 수준이다. 단순히 3D, 2D 애니메이션 같은 분류를 떠나서 영상 기법, 색상의 사용, 뮤직비디오나 오페라 같은 다른 타입의 채용, 거기다 기가막힌 사운드와 음악의 사용까지 모든 면에서 감각적으로 최고 수준의 만족감을 준다.


특히 예고도 없이 치고들어오는 적재적소의 오디오 활용에 깜짝 놀라고 만다. 에코가 바이와 케이틀린을 구출하는 장면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에코의 테마곡 ‘The Boy Who Shattered Time’의 어레인지 버전이나, 곧 이어지는 에코와 징크스의 대결에서 갑자기 펼쳐지는 화려한 화면과 오리지널 곡 ‘Dynasties & Dystopia’ 의 사용은 장면의 분위기를 180도 바꿔버리지만 너무나 훌륭한 연출로 몰입감을 선사하기에 전혀 거부감없이, 오히려 즐거운 반향으로 다가온다.

노래를 듣는 순간 싸움 장면이 바로 머리에 떠오를 것
그리고 이런 장면이 한두개가 아니다. 바이가 드디어 아틀라스 건틀릿을 끼고 벌이는 싸움 장면에서 나오는 노래 ‘Snakes’ 는 바이의 펑키한 테마를 아주 잘 표현한, 지극히 캐릭터성을 드러내는 선곡이다. 7화 초반 점화단 뮤직비디오도 정말 대단하다. 이게 모두 라이엇 음악 부서의 창작이라는걸 감안하면, 그냥 게임사 부속 음악 부서라고는 믿을 수가 없는 결과물이다.
드라마 가득하게 쓰이는 멋진 배경과 이를 활용한 미쟝센도 눈을 즐겁게 한다. 이 드라마의 모든 장면 하나하나가 월페이퍼라는 칭찬이 아깝지 않게, 화면의 어느 한 곳 낭비 없이 저마다 의미를 뽐낸다. 필트오버 의회의 표결, 빅토르의 질주, 실코가 징크스에게 세례를 해주는 장면 등등 모든 중요한 장면은 배경과 함께 어우러져 인물을 돋보이게 한다.



어느 장면을 보더라도 동화(動畫)라는게 믿기지 않을만큼 아름답다.

수많은 캐릭터를 의미있게 조명하는 관계와 인물 서사


이 드라마는 수없이 둘 사이의 관계를 조명한다. 작중 거의 모든 인물들이 서로 둘 씩 관계가 얽혀있다. 징크스와 바이는 말할 것도 없고, 바이와 케이틀린, 제이스와 빅토르, 벤더와 그레이슨, 마커스와 실코, 제이스와 멜 등 크게 드러나는 관계들 뿐만 아니라 빅토르와 하이머딩거, 빅토르와 스카이, 멜과 어머니 등등… 모든 이들이 각각 여러 인물들과 1대1 로 복합적인 관계를 맺고 있고, 단 둘이서 대화나 작용하는 장면이 묘사의 대부분을 이룬다. 대표적으로 ‘필트오버’ 와 ‘자운’ 자체가 그러한 둘 사이의 관계를 가장 크게 상징한다.
‘아케인’ 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 바로 이 수많은 1대1의 관계가 다시 서로 얽히고 설키면서 만들어진 수없이 많은 갈등과 애정의 관계들이다. 이 복잡한 실타래 같은 관계들은 4화부터 본격적으로 얽혀들어가기 시작해 풀 수 없는 매듭처럼 모든 인물을 줄줄이 이어가며, 마침내는 필트오버와 자운이라는 거대한 집단의 대립 하에서 이들의 갈등이 표면화되고, 그 갈등이 마침내는 집단의 대립마저 파국으로 몰고가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징크스는 실코에게 세례를 받고 한 번, 신지드에게 한 번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실코의 "넌 완벽해." 로 인해 진정으로 파우더가 아닌 징크스가 된다.
이러한 실코가 보여준 현재의 '징크스'에 대한 긍정은, 결국 '파우더' 를 되찾고 싶어하는 바이와 현재의 '징크스' 를 완벽하다고 하는 실코 사이에서 징크스가 결국 실코의 뜻을 따라 '징크스' 로 남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빅토르의 경우에도 비록 우리가 이 캐릭터 서사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잘 알고 있지만(영광스러운 진화에 동참하라!) 거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과 디테일에서 큰 호기심을 품을 수 밖에 없는 캐릭터다. 이에 동감이라도 한듯 빅토르의 서사도 굉장히 뛰어나다. 빅토르가 장애를 이겨내는 과정은 너무나 큰 카타르시스를 줘서 마치 영화 ‘가타카’ 에서 주인공이 수많은 장애와 역경을 이겨내고 목표를 이루는 장면과 겹쳐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 덕분에 오히려 그 끝에 파국이 기다리고 있다는 비극적 대비가 더욱 잘 부각된다.

멜과 제이스의 관계도 매우 흥미롭다. 분명 처음에는 과학 밖에 모르는 순진한 제이스를 멜이 이용하는 모양새였지만, 점차 둘의 사랑이 깊어지고, 제이스가 멜의 정치적 지지를 이용하여 폭주하자 오히려 멜은 제이스에게 휘둘리면서도 그를 사랑하기에 지지하게 되고, 둘의 관계가 역전되어버린다. 오히려 제이스가 정치에 물들면서 복잡한 상황으로 들어갈 때 멜은 이 상황에서 오히려 평화주의자이자 필트오버의 의원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녹서스의 뿌리를 포기하면서, 멜은 가장 크게 성장한 캐릭터이기도 하다.


모든 캐릭터가 타당하고 모든 캐릭터가 핍진성과 개연성으로 가득차 있으며 모든 캐릭터가 흥미롭다. 어떤 캐릭터라도 시청자가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구구절절하지 않은 세련된 방식으로 제공하고, 그 캐릭터의 특징을 기반으로 갈등과 사건이 터져나와 매우 강렬한 몰입을 선사한다.

처음에는 그저 바이와 징크스의 이야기인 줄 알았던 이 드라마는 빅토르, 제이스, 멜, 실코, 에코 등의 인물들이 그저 조연이 아닌 바이와 징크스와 동등한 주역의 비중을 차지하고 마찬가지로 매우 깊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선사하면서 총체적으로 풍부한, 세계관이 가득 들어찬 이야기가 됐다. 그리고 이 덕분에 드라마 내내 모두의 노력이 결국 극의 마지막에 허사로 돌아감에도 그게 허무하다거나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6년의 인내와 수많은 퇴고가 만들어낸 명작
어느덧 파우더와 바이의 이야기에서 이제 거대한 두 도시의 싸움이 된 이 이야기는, 실코와 제이스의 평화협정으로 해피엔딩이 되는듯 싶었으나 징크스가 마침내 그 이름처럼 모든 일을 한 번에 망쳐놓으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이 다음의 이야기는 과연, 도대체 어떻게 전개될까? 또한 빅토르, 에코, 하이머딩거, 세비카 같은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진행될까? 이번 드라마에서 시작된 모든 갈등이 다 해소되지 못한 부분은 아쉽지만, 다음 시즌을 위한 넘김으로서는 충분히 만족스럽고, 대미를 장식하는 엔딩으로서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이번 ‘아케인’ 애니메이션 드라마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게임, 이벤트보다도 룬테라 세계관을 직접적으로, 가장 디테일하면서도 가장 거대하게 그리고 있다. 우리가 단편적으로 알던 세계관의 지식들이 더욱 확장되고 갱신되면서 생기를 불어넣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그만큼 그저 부수적인 스핀오프가 아니라 이 드라마는 가장 주도적으로 세계관을 활용하고 있기에 각별하다.

이 드라마의 제작자들이 인터뷰를 통해 말한 가장 바라는 목표인 “LoL 플레이어들이 LoL 을 하지 않는 친구들에게 '이게 내가 좋아하는 게임이야', 라고 설명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은 너무 훌륭하게 이루어졌다. 실제로 LoL 플레이어가 아닌 사람들, 또는 아주 오래전 플레이해서 징크스는 미쳤고, 필트오버와 자운이라는 배경이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는 사람들도 너무나 즐겁게 이 드라마를 보는 모습을 봐왔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LoL 플레이어를 위한 팬 서비스도 넘쳐난다. 각 챔피언이 벌이는 싸움에서 보여지는 각 기술의 사용이나 테마 음악이 대표적인 사례다. 바이와 제이스의 전투 씬은 말할 것도 없고, 에코와 징크스의 대결에서 보여지는 에코의 시간 되감기를 떠올릴만한 묘사는 그야말로 탄성을 자아낸다. 이 전투 장면들만 스무 번은 더 본 것 같다.

모든 것의 시작이자 마무리를 장식한, 아케인.
작성 / 편집: 이명규 기자 (sawual@ruliweb.com)
스크린샷 출처 : 넷플릭스(https://www.netflix.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