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na.co.kr/view/AKR20100603262200004
육사 2기로 입학 25일만에 6.25 참전했고
http://blog.naver.com/mnd9090/221883033611
맹호부대 초대 재구대대장
https://the300.mt.co.kr/newsView.html?no=2017082714037673500
12.12 군사 쿠테타에 가담할 수 없다고 군복 벗은 전 장군 출신 박경석씨
군 역사 바로 세우기 하는 분
http://cafe.daum.net/pks6464/RozQ/29
낙동강 방어선 불퇴전의 결의
북한 인민군은 1950년 6월28일 서울을 점령하고도 7월3일에야 한강을 도하할 수 있었다.북한군 자체의 오판에 의한 지연 원인도 있었지만 국군 붕괴 후 새로 임명된 시흥지구전투사령관 김홍일 소장에 의한 한강 방어선에서의 저지 작전으로 40시간 이상을 더 허비해야 했다.
한강을 도하한 북한 인민군은 주공을 경부 축선으로 지향하여 7월6일에는 평택-충주-울진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였다. 이 선에서부터 북한군은 그들이 예상한 것과는 달리 우리 육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특히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의 참전이 결정됨으로써 국군의 사기는 급속히 회복되었다.
미 지상군이 전선에 투입되자 미국의 워싱턴 당국이나 도쿄의 극동군 사령부에서는 북한군 진격을 간단히 저지, 38선 이북으로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이한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초 투입된 미 제24사단 스미스 특수임무대대가 오산 북방 죽미령에서 참패를 당한 후부터 미국의 한국전 시각이 달라졌으며, 북한 인민군을 민병대 정도로 얕잡아 보아 미군만 보면 도망 갈 줄 알았던 것은 착각이었다고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미군 당국의 한국전에 대한 전면 대응책이 다시 강구되기 시작하면서 전쟁의 규모는 점차 확대되어 갔다.
또한 대전 전투에서 미 제24사단의 붕괴와 사단장 딘 소장의 실종은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국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으며, 한국 전쟁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김일성은 애당초 개전 50여 일후인 8월15일이 조국 광복 5주년이 되는 기념일이므로 이날을 기하여 남한을 완전히 적화하여 통일을 성취한다는 야심으로 모든 계획을 수립했었다.한편 8월 15일을 '조국통일기념일'로 정하여 대대적인 기념행사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남한을 공격하여 서울만 점령하면 남한 각지의 남로당원들의 봉기는 물론 농민을 비롯한 무산계층이 일제히 호응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 모든 희망사항이 차질을 빚고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참전이 확대되자 김일성은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인민군의 진출이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선에 이르게 된 무렵에는 그동안의 작전에서 입은 피해가 누적되고 병참선이 신장되어 보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없게 되자 굶주림과 피로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 위에 제공권을 장악한 유엔 공군기에 의해 병력과 장비의 이동이 심한 제한을 받는 등 전투력의 저하 요인이 가중되어 갔다.
인민군의 결정적인 사기 저하 요인은 최종목표인 부산을 점령하려고 낙동강 전선에서 무리한 총 공세를 감행함으로써 피해가 누적된데다가 전략폭격기의 융단폭격과 전술 항공기의 근접공격으로부터의 공포심 등을 들 수 있다.
낙동강까지 진출한 북한 인민군은 마지막 남은 총력을 기울여 8월 5일부터 낙동강을 도하 공격을 개시 하였다.20일까지 계속되는 총공격에서 막대한 피해만 내고 공격에 실패하자 다시 정비 8월 31일부터 9월 14일까지 이른바 9월공세를 감행하였으나 함안-창녕-왜관-영천-포항 선까지밖에 진출하지 못하였다. 이 공세는 한반도의 최남단에서 포위망을 압축하여 일격에 부산까지 점령하기 위한 북한 인민군의 마지막 공세였다.
그러나 이와같은 무리한 작전으로 말미암아 북한 인민군은 많은 손실을 입었을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후속 군수지원이 뒤따르지 못함으로써 9월 중순부터 북한 인민군은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할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와는 달리 우리 국군과 유엔군은 계속되는 전력의 보충과 증원부대의 도착으로 상대적 전투력의 우세를 확보하게 되었다.이때부터 비로소 작전의 주도권을 국군과 유엔군이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국군과 유엔군은 꾸준한 전력 증강과 함께 조직적인 지연 작전의 달성, 효과적인 파쇄공격(波碎攻擊:spoiling attack)의 감행, 천연 장애물인 낙동강을 이용한 성공적인 방어작전의 전개 등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 들었다.
이윽고 9월16일에는 인천 상륙작전의 시발로 지상군의 총반격작전을 단행하게 되었다. 수세의 국군과 유엔군이 새로운 공세이전(攻勢移轉)의 호기를 포착한 것이다.
북한 인민군은 그동안 일일 평균 10 Km의 속도로 낙동강 선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낙동강 선에서부터는 국군과 유엔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부산은 커녕 대구마저도 점령하지 못한 채 공세가 꺾이고 말았으며 공격개시 82일 만인 9월 15일 이후에는 국군 및 유엔군의 총반격으로 북한 김일성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특히 낙동강 전선에 임하는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장군의 불퇴전(不退轉)의 결의는 확고하였다. 근래 낙동강 전선 국군 제1사단의 다부동전투가 백선엽 장군에 의해 과장 조작되어 마치 다부동전투가 낙동강 전선에서 공세이전의 국면을 전환한 것처럼 곡해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다부동전투는 다른 국군 사단의 역활 범위 안에서의 활약이었음을 분명히 밝혀 둔다. 모든 국군 사단과 미군 사단이 필사적으로 싸웠다.
낙동강전선의 한국군은 왜관 북쪽으로부터 영덕까지 128 Km에 이르는 방어선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미군은 왜관으로부터 마산까지에 이르는 112 Km를 담당하고 있었다. 즉 이 전선은 한국군 5개 사단과 미군 3개 사단이 마산-남지-왜관-낙정리-영덕에 이르는 240 Km에서 결사 항전에 참가하고 있었다. 만일 이 방어선이 무너지면 대한민국이 지도상에서 말소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는 것이었다. 당시 이 운명의 작전을 지휘한 최고사령관은 워커 장군이었다. 이 전선에서 워커 장군의 불퇴전의 결의는 훗날 세계 전사에 각인될 정도로 유명하다. 그가 승리를 쟁취한 후 교통사고로 불행히 순직했지만 우리 정부는 그의 영웅적 리더십을 기리기 위해 서울 광진구 아차산 서남부 일대를 '워커힐'로 명명하였다.
워커 장군에 의한 공세이전의 성공은 곧 국군과 유엔군의 승승장구의 기세로 이어져 북진에 돌입했다. 그로 인해 남북통일이라는 꿈을 실현시킬 것이라는 확신을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안겨주고 있었다.이때의 우리 국민의 환희를 무엇에 비기랴. 국민 모두가 통일 이후의 그림을 머리 속으로 그려가며 행복에 들떠 있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 공세이전의 성공 요인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워커 장군의 절체절명 불퇴전의 리더십
2.멕아더 장군에 의한 인천 상륙작전
3.미 공군 B-29 폭격기의 인민군 진지에 대한 융단 폭격
4.국군 사단과 미군 사단의 결사 항전
5.인민군 전투력의 한계 및 병참선(兵站線)의 신장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국군과 유엔군에게도 결정적 승리를 안겨주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중공군은 우리에게 영원이 잊혀질 수 없는 한을 남겼다.
http://cafe.daum.net/pks6464/RozQ/33
한국전쟁 4대 영웅 선정의 진실
전쟁에는 영웅이 출현한다. 우리나라 역사를 통해 가장 위대한 영웅을 추대하라면 단연코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이다. 어디 임진왜란뿐이랴, 우리나라는 반만년 간 수 없는 외세의 침탈에서 그때그때 영웅이 나타나 나라를 지켰다.
한국전쟁, 우리는 6.25전쟁으로 호칭한다. 역사상 가장 처참한 동족상잔을 고르라면 6.25전쟁일 것이다. 그 전쟁에서의 인명 피해와 재산 손실이 역사상 가장 큰 것으로 유추하기 때문이다.
1983년, 정부와 육군본부는 전역 후 전업 작가로 창작에 몰두하고 있는 나에게 중요한 과제가 주어졌다. 한국전쟁의 영웅을 부각시켜 그 영웅의 전기 소설을 집필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한편 그 작품을 원작으로 하여 KBS 1TV에서 3부작 드라마로 방영하겠다고 했다. 창군 이후 군부에 관한 홍보 프로젝트로서는 그 규모가 가장 컸다. 그 연유를 알아보니 전두환이 집권하면서 선배 장군들을 인사법까지 고치면서 임기를 단축해 60여 명을 예편시킨 데 대한 반대 여론을 누그러트리기 위한 유화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내심 마음이 내키지 않아 망서렸지만 그들이 간섭만 하지 않는다면 나의 작품 세계를 넓히는 기회라고 생각해 받아들였다.
나는 관계 당국에 이를 알리고 나는 이 가운데 김홍일 장군 전기 소설을 집필하기로 하여 1984년 10월 1일 '五星將軍 김홍일'을 서문당 출간작으로 완성했다. 김홍일 장군은 옛 중국군 유일한 정규군 중장으로 2성이었고 한국군 중장 3성을 함께 해 5성장군으로 비유했다. 김홍일 장군은 중국군 장군으로 항일전에서 전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광복군 참모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이어서 다음 해인 1985년에 내가 추천한 유현종 작가에 의해 '白馬高地'를 을지출판사에서 출간, 김종오 장군 전기소설을 당국에 제출됐다.
1985년 KBS 1TV는 박경석 원작 3부작 '五星장군 김홍일' 을 3일간에 걸쳐 국군의날을 기해 골든 타임에 방영 되었고 다음 해에 유현종 원작 '白馬高地'가 역시 골든 타임에 KBS 1TV에서 방영했다. 한편, 맥아더 장군과 워커 장군은 영상 자료를 편집 해 다큐멘터리로 방영 했다.
그 후 긴 세월 동안 아무런 잡음 없이 한국전쟁 4대 영웅이 이미 공개한 김홍일, 김종오, 맥아더, 워커로 전해지고 있었다. 특히 당시에는 6.25전쟁 참전 당사자들이 거의 생존해 있어 그들의 여론도 중요시됐다. 따라서 육군본부를 거쳐 재향군인회를 통한 여론 조사에서도 4대 영웅 선정에 동의한 것으로 통보됐다. 그런데 근간에 엉뚱한 두 영웅이 출현 해 이 글에서 진실을 밝히기로 한다.
근간 세상 사람의 입에 회자되는 한국군 측 영웅은 백선엽 장군과 김동석 대령인데 이 두 사람은 조사 초기 10명의 예비 명단에도 없었다. 다만 근래에 들어서자 일간 신문에 백선엽 장군의 전기가 계속 연재되고 있었고 일부 추종자들에 의해 백선엽 장군을 명예 원수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결론은 그 두 사람은 한국전쟁 4대 영웅과는 관계가 없고 미군 측에 의해 그들과의 밀접한 협조 관계에서 영웅 대접을 하다 보니 오해가 생긴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김동석 대령은 육군첩보부대(HID) 지구대장으로 재직시 미군과의 협조가 잘 이루어져 미군이 영웅 대접을 하다 보니 생겨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미국에서는 영웅이라는 호칭 개념이 우리와 달리 흔하게 사용하다 보니 생겨난 해프닝이었다.
전쟁 영웅이 때때로 가짜가 돌출하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구 일본군의 경우 태평양전쟁 중 '육탄3용사' 라는 전쟁 영웅을 부각시켜 일본 여러 곳에 동상을 세우는가 하면 교과서에도 일제히 게재되어 일본 국민들이 눈물을 흘려가며 추앙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일본군 '육탄3용사'가 조작되었음이 밝혀져 해프닝으로 끝났다.
6.25전쟁에서도 일본군 출신 장군들에 의해 가짜 영웅이 만들어져 한때 소동이 벌어졌지만 요즈음은 잔잔해졌다. 적 전차를 육탄으로 부셨다는 '심일 소령'과 '육탄5용사', 적 토치카를 육탄으로 파괴하고 장렬하게 산화했다는 '육탄10용사' 사건이 대표적인 해프닝이었다. 육탄으로 토치카를 부수고 전사했다는 '육탄10용사' 가운데 한 사람이 북한 방송에 귀순병으로 출현한 사건은 웃어 넘길 수 없는 우리의 지난 부끄러운 전사의 한 가닥이었다. 이 엉뚱한 가짜 영웅을 기리는 동상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고 과거 교과서에도 실렸는가 하면 군가까지 만들어 불러댔다. 이야말로 이 모든 흔적이 일본군 출신 장군들에 의해 만들어졌으므로 이 경우 일본 군국주의 잔재라 하겠다.
http://cafe.daum.net/pks6464/RozQ/36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 퇴출 경위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는 세기의 난센스다
한국군사평론가협회 회장 박경석
(예) 육군준장
일부 언론매체의 보도에 의해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내년 건군 60주년을 기해 명예 원수로 추대한다는 내용에 접했다.
이 보도 내용이 일고의 가치도 없는 해프닝이기에 평론 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여기 사이트 [박경석 서재]에 그 부당한 요점만을 제시한다.
1. 백선엽(일본이름-시라가와 요시노리-白川義則)은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육군소위로 임관,만주국 간도 특설대에 근무, 만주 일대의 독립군 소탕작전에 참가했다.
2. 2009년 11월.민족문제연구소에서 출간한 '친일인명사전' 제2권 208P~209P에 그의 친일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중위로 진급 후 해방이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평안남도 도인민위원회 치안대장으로 일했다.이어서 친일파 소탕 기미를 감지한 그는 월남, 미 군정하 군사영어학교에 입교 국군장교가 되었다.
3. 북한 인민군의 6.25남침 당시 개성의 38선 경계중인 1사단을 지휘한 백선엽 대령은 춘천 전선의 김종오 대령이 지휘하는 6사단의 선방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응전도 못하고 거의 모든 장비를 버리고 패주,수도 서울 조기 함락의 원인을 제공했다.
4 .낙동강 방어선에서의 그의 공적은 일부 미군 장성과 자신에 의해 과장 되었으며 낙동강 방어선의 영웅적 방어는 미국과 워커 장군의 불퇴전의 의지, 그리고 미군의 절대 우세한 화력과 국군 장병과 유엔군 장병 모두의 총력 혈투의 결과였다.
5. 미국과 미군당국이 그를 한국군 최고의 영웅으로 대우하는 것은 그의 절대적 친미행위의 결과로 기인한다.가령 사단장 군단장 군사령관 시절을 비롯한 군 재직간 자기의 미군 고문관인 하급자를 상전대우 하는 굴욕적 행태로 일관하였다.심지어 하급자인 미군 고문관을 상석인 찝차 앞자리에 태워 모시고 다녔다.
6. 대한민국 국군은 독립운동의 연장 선상에서 독립군,광복군의 위대한 항일투쟁의 정신을 계승해야 하며 만약 만주군 장교 출신인 그를 명예 원수로 추대한다면 국군 건군의 존엄성이 결정적으로 훼손된다.
7. 나는 일찍이 국군 건군의 정신적 기둥으로 6.25초기 한강방어선에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한 정규 중국군 장군 출신이며 광복군 참모장을 역임한 김홍일 장군을 '오성장군'으로 호칭,단행본 [오성장군 김홍일]과 단행본 [ 별 ]을 출간하였다.
8. [오성장군 김홍일]은 육군본부 추천으로 KBS TV 3부작으로 국민의 절대 호응하에 방영된바 있고 KBS라디오에서는 그 단행본 전문을 1년간 낭송 방송하였다.
9. 만일 국군 최초의 명예 원수를 추대하려면 김홍일 장군 외 대안이 없음을 역사 앞에 밝힌다.그렇게 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명예로운 정통성이 역사에 각인 될 것이다.
10. 특히 백선엽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으로 자청,위촉받아 6.25전쟁 전 이적행위로 일관,비극을 초래케한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의 이적 행위를 감추기 위해 [채병덕장군 평전]을 출간케하여 이적 행위 하나하나를 변명 감쌓다. (참고 : 채병덕의 이적행위인 10대 불가사의 - 이형근 회고록 '군번1번의 외길 인생)제3부 6.25전쟁 / 50P~64P / 중앙일보사 발행)
11.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새 6.25전사 편찬 자문위원장을 맡아 전쟁 초기의 전사를 임의로 개작, 상당부분 기 발행된바 있는 [한국전쟁사]내용을 일본군 만주군 출신에 유리하도록 조종 기술케 유도하였다.이 문제의 1권과 2권 권말에는 본인 박경석이 마치 자문한 것처럼 전우신문사 회장과 군사평론가협회 회장 직함으로 인쇄되어 있으나 본인은 오찬행사에 참여 하였을 뿐 단 한 곳 자문을 요청받은 적이 없었다.
12. 국방부와 청와대는 미국과 미군 당국의 오판에서 연유,엉뚱한 한국전쟁 영웅설에 속지말고 현명한 결정을 내려주기 바란다.한국전쟁 4대영웅은 김홍일,김종오,맥아더,워커 장군이다.김홍일 장군에 이어 김종오 장군 전기도 육군본부 추천하에 출간되었으며 KBS TV 3부작으로 방영된바 있다.
13. 내 글에 이의가 있어 이 사랑방에 내용을 밝히면 토론에도 응할 것이다.한편 여기에 기술한 내용은 무한 책임을 진다.
14. 참고사항 / 박경석 홈페이지 들어오는 방법.naver를 제외한 모든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박경석의 서재]클릭하면 아이콘이 뜨고 다시 아이콘을 클릭.
추가 의견 : 백선엽장군은 국군의 원로 장성이며 국가에 기여한 바 크다.또한 나의 상관이었다.예의상 나의 결례임이 확실하다.내가 밤잠을 설치면서 고뇌한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국군의 건군 이념에 훼손된다는 명제 앞에서 나는 결례의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대한민국 국군의 맥은 일본군 만주군 출신에 둘수 없다.그렇게 하면 훗날 역사에서 북한 인민군이 정통성에서 우위가 될지 모른다.
북한 인민군의 주력은 항일 투쟁 세력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장교 출신을 국군의 최초 명예 원수로 추대한다면 훗날 역사가는 북한 인민군의 남침을 이해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될지 모른다.인민군의 남침이 민족의 원수인 일본군 만주군 잔당에의 공격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항일 전쟁을 중국군 육군 소장으로 지휘했고 광복군 참모장을 역임한 김홍일 장군을 대한민국 국군의 건군의 기둥으로 두고 싶어 두 권의 단행본을 썼다.그 단행본은 읽기 편하게 하기 위해 소설체로 기술했지만 내용은 전사다.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 세력을 이용할수 밖에 없었던 정치 상황에서도 국군의 정통성을 고려, 유독 김홍일 장군 단 한 사람 만을 국군의 유일한 장군으로 임관 시켰다.따라서 나는 중국의 별과 대한민국의 별을 합쳐 또한 일본군 만주군 출신을 압도하기 위해 김홍일 장군을 5성장군으로 호칭했다.
그가 명예 국군 최초의 원수가 되어야 한다는 이치의 배경이다.
독립군과 김홍일장군의 우국충정 그리고 항일전쟁 내막, 독립운동과 6.25전쟁에 관한 비사는 이 서재 [전자논저]에 전자책으로 입력한 [오성장군 김홍일]과 [별] 두 권의 단행본에서 읽을 수 있다.
2009년 3월 27일
채명신 장군도 "큰일 낼 사람들이군.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 의식이 희박한지 모를 일이오. 건국 이후의 첫 명예원수 추대는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이 매우 중요하오. 만약 일본군, 만주군 출신에다 독립군 토벌작전의 지휘관 경력자가 명예원수로 추대된다면 우리나라 건국사와 국군사는 하루아침에 북한 역사관에 종속될 거요." 라고 생전에 했었음.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네요. 백선엽 추대 ->북한 인민군 정통성에 명분을 부여해버리는 결과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네요. 백선엽 추대 ->북한 인민군 정통성에 명분을 부여해버리는 결과
역시 일본제국군의 후예들 이놈들이 국군의 악습을 가져온 주범들임
채명신 장군도 "큰일 낼 사람들이군.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 의식이 희박한지 모를 일이오. 건국 이후의 첫 명예원수 추대는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이 매우 중요하오. 만약 일본군, 만주군 출신에다 독립군 토벌작전의 지휘관 경력자가 명예원수로 추대된다면 우리나라 건국사와 국군사는 하루아침에 북한 역사관에 종속될 거요." 라고 생전에 했었음.
어차피 북한한테 먹혀서 공산화 안된건 미국 덕이지.. 저런 매국노새끼들이 뭘했나.. 어떻게 하면 또 나라 팔아먹을까만 고민했겠지.. 그렇게 탄생한게 박정희 유신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