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송받는 자’ 리메이크, 한국어로 만나는 나뭇잎표 감성 SRPG
바야흐로 대한국어화 시대를 맞아 여러 해외 명작이 앞다투어 우리말과 글로 찾아오는 요즘이다. 이 가운데는 ‘슈퍼로봇대전’이나 ‘폴아웃’처럼, 불과 수년 전만 해도 한국어화는 상상조차 못했을 작품도 있다. 세가퍼블리싱코리아가 오는 11월 22일 정식 발매하는 ‘칭송받는 자(うたわれるもの): 흩어져가는 자들을 위한 자장가’ 역시 이러한 경우로, 이 시리즈의 한국어화 정식 발매 소식을 듣고 쾌재를 부른 이가 기자만은 아닐 것이다.
이에 기자는 10월 30일, 서울 용산 드래곤시티 호텔에서 열린 세가 신작 발표회를 통해 ‘칭송받는 자: 흩어져가는 자들을 위한 자장가’ 한국어 버전을 잠시간 시연했다. 마니아층에게는 워낙 유명한 시리즈지만 새롭게 접하는 독자도 많을 테니 여기서는 기본적인 부분부터 소개하겠다. 정식 발매를 앞둔 ‘흩어져가는 자들을 위한 자장가’는 2002년 PC로 출시된 ‘칭송받는 자’의 3D 리메이크다. 플레이어는 일본 아이누 문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독특한 세계를 무대로, 기억을 잃은 가면의 남자 하쿠오로가 되어 격동하는 난세에 뛰어들게 된다.
국내 보도자료에는 담백하게 SRPG로 소개되고 있지만 ‘칭송받는 자’는 태생적으로 미소녀 게임에 더 가깝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에도 나뭇잎社라 불리며 미소녀 게임 명가로 이름 높은 Leaf의 작품이기 때문. ‘투하트’와 ‘화이트 앨범’ 등을 만들던 Leaf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군담물에 가까운 이야기와 SRPG 전투 시스템을 접목한 ‘칭송받는 자’를 내놓았는데, 이게 예상외로 대박을 쳐버린 것. 그래도 방대한 텍스트 분량과 여러 선택지, 19금 에로 CG까지 미소녀 게임으로서 갖춰야할 요소 또한 빠짐없이 채워 넣은 작품이다.
다만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당시 Leaf는 나날이 사세가 기울었고, 1편 나름대로 깔끔하게 완결된지라 오랫동안 후속작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다 드디어 2015년 SRPG 전투 부분을 3D로 전면 일신한 ‘칭송받는 자: 거짓의 가면’이 나왔고, 이듬해 ‘칭송받는 자: 두 명의 백황’으로 뒤늦게나마 삼부작을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 1편과 2편 사이에 10년이 넘는 간극이 있다 보니, 새로운 엔진과 시스템에 발맞춰 2002년 원작을 ‘흩어져가는 자들을 위한 자장가’로 리메이크하게 된 것. 세가퍼블리싱코리아는 이 작품에 이어 후속작(이지만 더 먼저 만들어진) ‘거짓의 가면’과 ‘두 명의 백황’도 순차적으로 한국어화할 예정이다.
굳이 이러한 이야기를 짚고 넘어가는 이유는 ‘흩어져가는 자들을 위한 자장가’가 지닌 일장일단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Leaf가 자랑하는 최루성 스토리텔링에 동양 판타지를 적절히 결합한 수준급 시나리오를 자랑한다. 금번 리메이크를 통해 2002년 원작의 감성을 한국어로 120% 느낄 수 있는 데다 곧 남은 두 편까지 연이어 플레이할 길이 열렸다. 즉 그간 ‘칭송받는 자’라는 작품에 관심이 있었고 그 세계관과 시나리오를 담뿍 느끼고 싶다면 강력히 추천한다. 어디까지나 미소녀 게임으로서 말이다.
반면 이걸 ‘파랜드’ 시리즈 같은 여느 일본 SRPG로 여기고 구매하는 것은 말리고 싶다. ‘흩어져가는 자들을 위한 자장가’에서 미소녀 게임과 SRPG의 비중은 8:2 잘 쳐줘봐야 7:3이다. 일례로 이번 시연에서도 튜토리얼이나 다름없는 첫 전투에 진입하는데만 1시간 이상이 걸렸다. 단순히 비중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완성도도 그다지 좋지 못하다. 전장의 크기나 적 배치도 전술적인 고려가 느껴지지 않고 병종도 몇 안된다. 화, 수, 지, 풍, 광, 암의 물고물리는 상성과 박자에 맞춰 공격 시 기력이 오르는 연격 시스템이 존재하지만 특기할 정도는 되지 못한다.
유려한 2D 일러스트로 전개되는 미소녀 게임 부분과 달리 SRPG 부분은 어설픈 그래픽도 문제가 된다. 2015년 ‘거짓의 가면’이 PS3로 나올 즈음에는 그럭저럭 봐줄 만했지만 2018년 기준으로는 아무래도 눈이 괴롭다. 물론 Leaf가 그래픽에 크게 투자할만큼 여유 있는 개발사도 아니고 ‘칭송받는 자’가 그래픽 보려고 하는 게임도 아니긴 하다. 꼬투리를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혹여라도 그래픽에 대해선 기대하지 말라는 이야기.
그렇다고 SRPG 부분이 ‘칭송받는 자’의 평가를 낮추는 단점이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숱하게 쏟아지는 미소녀 게임 가운데 ‘칭송받는 자’가 두각을 드러내고, 플레이어의 저변을 넓힐 수 있게 해준 장점이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미소녀 게임으로서 ‘칭송받는 자’를 좋아하는 이에게 해당하는 평가다. 즉 매력적인 인물들과 시나리오를 감상하러 왔다가 SRPG는 보너스로 즐기면 된다. 그저 국내 홍보 시 살짝 빗나간 방향성으로 인해 전투 중심의 SRPG로 오해하고 구매하는 실수만 피하길 바란다. 진득하게 이야기를 즐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한국어로 만나는 나뭇잎표 감성 RPG는 여러분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김영훈 기자 grazzy@ruliweb.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