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 3 리로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궤적을 그리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Things come to life by accident
내 삶에 우연으로 다가온 것이라도
When it remains on
그것이 내게 남아있는다면
Sounds like it's meant to be
그것도 운명이라고
-페르소나 3 리로드 op-
매일 밤 12시가 되면 평범한 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그들만의 시간이 시작된다.
관으로 가득 찬 거리, 거대한 탑으로 변해버린 학교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
세상 쿨한 표정으로 일에 휘말린 천재 카리스마 사나이에게는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까
Memento Mori, 필멸자임을 기억하라.
시간은 모두를 평등한 최후로 인도한다는 이 게임의 주제는 주인공이 결말부에 죽음을 맞이하면서 매듭짓습니다.
하지만 엔딩 크레딧을 보며 느껴지는 것은 허무함이나 절망감이 아닌 먹먹함과 동시에 드는 삶에 대한 회고이죠.
주인공의 1년을 함께 따라 걷는 페르소나의 시스템을 처음으로 제대로 활용한 작품이자 아직 까지도 가장 여운 짙은 엔딩을 선사한 페르소나3는 어떻게 주제 의식을 전달했을까요?
페르소나 4,5가 나온 지금 보면 페르소나 3의 이야기는 꽤나 헐거운 편입니다. 개인과 미디어를 중심에 두고 페르소나라는 주제에 맞게 내면에 집중하는 방식을 취한 페르소나 4나 사회문제를 바탕으로 강렬한 호소력을 지닌 페르소나5에 비하면
페르소나3는 초반부와 후반부의 분위기가 명확하게 갈리고 이야기가 크게 움직이는 아라가키의 죽음 전 까지의 이야기, 그리고 그 사이 뉵스의 정체가 밝혀지기 직전 까지의 중간 이야기가 꽤나 늘어지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이는 중간 중간 커뮤니티가 없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채워 넣고 스트레가의 서사를 강화한 리로드에서도 동일하게 느껴지는 큰 단점이죠.
하지만 페르소나 시리즈만의 특징이자 장점은 페르소나 3에서 가장 크게 역할을 발휘합니다.
주인공의 시간을 따라가며 인연을 쌓아가는 일상파트가 그 어떤 시리즈 보다 깊게 주제 의식과 맞닿아있고 결말부의 여운을 짙게 만들어주기 때문이죠.
커뮤니티, 코옵 시스템은 이야기와 이야기 중간의 일상파트에서 서브 스토리를 풀어주는 역할이자 각 주인공들의 특성을 살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페르소나 4에서는 학교 인물들을 중심으로 다정한 마음을 가진 주인공을 강조하고 인연을 메인 키워드로 둔 작품인 만큼 따뜻한 시골마을 이나바시의 분위기를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죠.
페르소나 5는 아예 괴도단이라는 아이덴티티에 크게 무게추를 옮깁니다. 전 시리즈들과 달리 매우 직접적인 방법으로 사회로부터 받은 문제들을 해결해주고 친구보단 협력자로서 진전 해나가는 형태를 취하죠. 그렇기 때문에 혼자만 시스템의 이름이 코옵이기도 하고요.
페르소나 3는 초기작인 영향도 있겠습니다만 위 두 작품보다 커뮤니티에서 주인공이 가지는 역할이 제일 옅은 편입니다. 대부분의 문제를 그저 들어주는 것으로 넘기고 직접적인 영향을 주거나 행동하는 것을 지양하죠.
하지만 이건 반대로 커뮤니티를 진행하는 주인공을 좀 더 현실적인 인물로 인식하게 하는 장치로서 작용합니다.
4의 시골 황태자처럼 다정하고 대인배스럽게 모두를 품어주거나 5의 조커처럼 메멘토스를 털어 개심을 시켜줄 수는 없겠지만 3의 주인공처럼 그 상황에서 차분히 들어주는 건 나도 할 수 있겠구나 싶거든요.
페르소나 3의 주인공은 메인스토리에서 대체할 수 없는 초인입니다. 와일드라는 특성과 리더로서의 자질, 그리고 숭고한 희생은 평범한 인간이 아닌 구세주로서의 캐릭터를 형성하죠.
반대로 커뮤니티에서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과묵하지만 곤란한 사람을 지나치지 않고 차분히 바라봐주는, 그리고 고민을 들어주는 현실에 있을 법한 조금 착한 평범한 인간으로요.
두 개의 상반된 모습은 뉵스와의 결전에서 교차하며 이제껏 쌓아온 이야기를 증폭시킵니다.
페르소나의 전통이자 클리셰 중 하나가 커뮤max를 찍은 인물들이 최종결전에서 힘을 전해주고 그걸 받은 주인공이 ‘세계’ 아르카나를 각성하는 장면입니다.
분명 모두 비슷한 장면이고 오히려 연출적인 측면에선 페르소나 3이 가장 약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연결성은 제일 뚜렷하다고 생각합니다. 뉵스라는 불가항력적인 죽음을 삶의 과정에서 그려간 인연이라는 궤적을 통해 대적하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주인공은 분명 초인입니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존재로부터 세상을 구하는 구세주이죠.
동시에 과묵하지만 친절한 이웃이기도 했습니다. 시한부 청년의 말동무가 되기도, 파계승의 좌절을 들어주기도, 금단의 사랑을 하고 또 깨지는 친구를 위로하기도 하는 조금 특별한 상황을 겪지만 과정과 행동은 현실에 있음직한 평범한 소년이었죠.
최후의 전투에서 삶의 종착역으로 희생을 선택했지만 개인의 생명 만으로 모든 걸 극복한 것은 아닙니다. 플레이어와 함께 걸어온 1년 동안 쌓아온 인연이 주인공을 완성시켰고 그 답에 도달하며 뉵스를 봉인할 수 있던 것이죠.
에피소드 아이기스가 나오면 더 깊은 이야기를 하겠지만 S.E.E.S에서 주인공 다음으로 주제와 가까운 인물은 아이기스입니다.
아이기스는 생명체가 아닌 목적만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로서 자유의지나 개인의 선택 없이 내려진 명령을 따르는 맹목적인 존재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을 비롯한 S.E.E.S 동료들을 만나면서 삶에 대해서 조금씩 배워가고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점점 깨닫게 되죠.
그렇기에 주인공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보는 인물이 아이기스인 것입니다.
눈을 감는 주인공 곁에서 함께하며 무엇을 깨닫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것들을 느꼈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도출해낸 삶에 대해, 그걸 자신에게 전해준 사람에게 고백하는 것이죠.
저는 ‘삶이 라는 건 살아가는 동안 세계와 함께하는 시간, 그 속에서 그려나가는 궤적이다.’ 라는 것이 페르소나 3 리로드가 전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1년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주인공이 떠나기 전 커뮤니티 인물들의 후일담을 듣고 또 응원을 받는 것은 모든 시리즈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전통이지만 절대 돌아올 수 없기에 더 먹먹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삶을 그려오며 자신만의 궤적을 남긴 주인공의 죽음과 삶이라는 것에 의미를 몰랐지만 주인공을 비롯한 동료들을 만나 많은 걸 깨닫고 이제부터 진정한 삶을 살아가게 될 아이기스의 교차로 매듭짓는 이야기.
삶은 유한하지만 그려낸 궤적은 누군가의 눈에 담겨 또 다른 궤적을 꾸미는 혹은 방향을 뒤바꿀 계기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페르소나 시리즈에서 가장 여운 깊은 결말을 전하는 페르소나 3 리로드가 말합니다.
One day these quiet voices will be heard
언젠가 이 고요한 목소리가 들려오겠지
Loud and clear, the story of the ones we miss
맑고 선명한, 그리운 이들의 이야기
But shed no tears
하지만 울지 마
Realize what they left behind
남겨진 것들을 되새기면 돼
-full moon, full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