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송논쟁이란 장례절차에 대한 송사를 말하며 송사에 논쟁이라는 뜻이 어느정도 포함되어있으므로 원래는 그냥 예송이라고 칭하는게 맞다.
이는 효종이 죽은 직후 현종대에 일어난일로 대왕대비인 자의대비가 몇년간 상복을 입어야하느냐로 벌어진 논쟁이다.
뭐그리 시답잖은 걸로 싸우냐 싶을수있지만 속사정을 보면 이러한데,
당시의 붕당은 서인과 남인으로 갈라져있는 상태로 서인쪽이 주도권을 잡고있는 상태였다.
서인은 이이학파이고 남인은 이황학파였으니 두분의 이미지를 빌려서 간단히 얘기해보면
서인: 효종 그분이 왕이긴해도 장자가 아니였잖아.(장자는 소현세자다)
'주자가례'에 따르면 우리 사대부들은 장자가 아닌사람이 죽으면 그 어머니는 1년간 상복을 입게되어있다.
왕이나 사대부나 다를게 뭐가있어. 1년으로 갑시다.
남인 : 그게 무슨 헛소리냐. 왕이 어떻게 사대부랑 똑같아.
이 부분에서는 적자냐 아니냐가 중요한게 아니고 어쨋든 왕이었던 분이 죽었던게 중요한거야.
성종임금때 쓰여진 '국조의례의'에 따르면 대비는 3년동안 상복을 입게 되어있어. 당연히 3년동안 입어야지.
이렇게 되는것이다. 아주 간단히 설명한거지만 서인에게는 분명히 왕을 깎아내리는 뉘앙스가 있었다.
반대로 남인은 생겨난 이래부터 계속 주도권이 없었던 만년야당이었기때문에(선조-광해군-인조-효종 4대동안이나!) 정치 주도권을 잡고싶었고,
그러려면 왕(현종)의 지지가 필요했기때문에 일부러 왕의 존엄을 치켜세우는 방식을 택한것이다.
이 논쟁이 1차예송인 기해예송으로, 당시는 앞에서 말한대로 서인이 주도권을 잡고있었고
현종은 당연히 남인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겠으나 서인들을 세종이나 정조처럼 누를힘이 없었기에 결국 서인의 손을 들어준다.
겉으로 보기엔 대비가 상복몇년입냐고 싸운 한심한 싸움같아보이지만
이렇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왕과 신하의 알력다툼, 각 붕당들의 정치주도권을 위한 명분잡기 싸움인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 누구도 피를 흘리지않았으니 아주 평화롭고 고차원적인 정치다툼이라고 볼수있다.
한편 현종은 아버지 효종이 그런 취급을 당한데에(장자가 아닌 이유로 장례에 제대로된 왕취급도 못받은)
앙금을 품었고 고금의 장례의식을 익히는데 힘을 쏟으니 이번엔 효종비가 죽자 2차예송인 갑인예송이 터진다.
그때도 대왕대비인 자의대비는 살아있었고(이분은 아주 어릴때 나이많은 인조에게 시집온것으로 새아들인 효종보다도 어렸다)
다시 한번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하나로 논쟁했는데
서인: 효종은 적자가 아니니까 9개월만 입어도된다!
남인: 효종은 왕이셨는데 적자타령좀 그만해 1년이 맞아
라는 똑같은 원리의 논쟁이 일어났지만 이번엔 절치부심한 현종이 서인들을 말빨로 작살내면서 남인의 손을 들어주었고
남인의 1년 상복론이 채택되며 자연스럽게 정치의 주도권은 남인에게로 넘어간다.
그렇게 자의대비는 우습게도 새아들과 며느리의 죽음에 각각 1년씩 똑같이 상복을 입게되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예송은 평화로운 당파싸움으로 양당도 입장은 다르지만 서로를 존중하고 있었기에 바람직한것이었다.
양당사이에 진짜 피바람이 불고 붕당정치가 더러워진건 그 다음 숙종대 환국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