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오히려 강력하게 조커에 대해 다루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함
우선 이 영화의 구조를 좀 말하고 싶은데, 시작부터 끝까지 영화는 1편의 반대로 진행됨.
(무슨 의미적인 의미가 아니라, 진행 순서상 그렇다는 의미)
현대 영화처럼 시작해서 과거 톰과 제리나 채플린 영화같이 코믹한 느낌으로 끝난 1편이랑 정 반대로
2편은 아예 짧은 만화로 시작해서 현대 영화처럼 끝남.
그리고 이 만화에서 영화의 구조 자체를 설명하는데, 조커 분장을 한 아서 플렉의 그림자가 아서를 옷장에 가두고, 자기가 머레이쇼에 출연함.
이후 경찰이 들어왔을 때 그림자는 아서에게 분장을 시키고 사라지는데, 지금 감옥에 있는 추레한 존재가 아서라는 것을 보여줌
그리고 그 이상으로 중요한,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보여주는데, 아서 플렉과 조커의 구분임.
영화는 완벽하게 이분법적으로 아서와 조커를 구분하고,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아서에게 집중함.
그리고 여기에, 영화가 뮤지컬 영화인 이유가 나타남.
(이후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설명도 해줌)
뮤지컬은 두 파트로 나뉘는데, 노래하고 춤추는 가극 파트, 그리고 평범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정극 파트로 나뉨.
조커는 가극, 그리고 아서는 정극을 담당해서 연기함.
이를 인지하고 영화를 보면, 극후반 한곡을 제외한 모든 음악은 조커가 부름.
그리고 음악이란 개념 자체가 조커에 대한 상징이자 일종의 신호로 나타나는데, 영화에서 조커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 또한 노래를 듣는 장면임.
그리고 이 갈등에 놓인 아서를 조커로써 탄생하도록 부추기는 인물이 할리인데, 영화는 할리퀸을 단순한 히로인으로 다루지 않았음.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할리퀸은 1편을 보고 '조커'(여기서 조커는 아서와 같은 인물임)를 동경한 관객을 투영하는 일종의 장치임.
이를 나타내기 위해서 1편의 영화를 마치 액자식 구성마냥 2편에 직접 넣어서 연출했는데, 굉장히 재밌었음.
그렇다면 영화는 이 할리퀸, 다시 말해 어쩌면 관객을 조롱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인물을 왜 영화에 넣었냐?
1편에서 다루지 못한, 정확히 표현하자면 '잘못 다뤘던' 내용을 바로잡고 싶었던 것 같음.
1편은 대립구도가 굉장히 명백함. 사회적 소수자 아서 플렉, 그리고 그를 괴롭히는 사회 전체.
그런데 이 1편을 다른 영화와 구분해준 것이 아서의 정신병을 통한 환각과 실제의 구분.
그리고 아서의 행동(조커의 행동)이 유발하는 카타르시스를 통한 사회에의 메시지.
그런데 문제는 이 영화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대립이 발생했다는 점.
첫째 해석은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갖자고 생각하는 사람들.
둘째 해석은 조커의 행위에 쾌감을 느끼고 그를 동경하게 된 사람들.
그리고 이 영화는 둘째 해석을 파괴하기 위해 할리퀸을 투입했음.
영화를 잘 보면, 계속해서 할리퀸이 아서를 완벽하게 이해한 존재가 아니라고 강조함.
아서와는 생활 환경도 달랐고(할리의 가족은 부자임) 가족에게 핍박받은 것도 아님.
그리고 굉장히 강조해서 연출한 부분이 앞서 언급한 1편 영화의 액자식 구성을 통한 대화임
할리는 조커의 영화를 20번도 넘게 봤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한 너댓번 봤다고 자백함.
이 부분에서 영화의 의도가 굉장히 명백해짐. 영화는 할리라는 인물을 통해 1편을 '잘못'해석한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음.
(이 비판이라는 말은 단순히 조커1을 재밌게 봤다는 사람들을 향한게 아님, 오히려 1편에 대해 반사회적이라고 비난한 평론가들이 해당한다고
생각함)
따라서 할리퀸은 '아서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않고 그에게 자신을 완전히 대입시켜서 '사회에는 조커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상징함.
그리고 이 할리에 반대, 즉 아서의 편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서의 변호사임.
근데 아무도 이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음 왜?
대사도 적고 그 적은 대사 칠 때 영화는 일부러 아서의 얼굴을 비추고 있으니까.
심지어는 중반쯤에 아서가 직접 해고하고 아예 등장을 안함.
그리고 영화의 중후반부쯤 스스로를 변호하는 '조커'의 앞에 나타난 것이 1편의 개리 퍼들스.
그리고 개리는 명백하게 조커와 아서를 구분하면서 조커 내면의 아서를 불러냄.
결국 아서는 비록 조커 분장을 하고 다시 나타났지만 본인은 조커가 아닌 아서임을 인정하고 죄를 모두 자백함.
그렇다면 이 영화가 왜 '조커'에 대한 영화냐?
영화의 결말에 이 메시지가 굉장히 강렬하게 등장하는데, 그 직전까지 아서는 직접 '조커는 없다'고 말함.
그런데 그 이후 아서는 감옥에서 살해당하고 화면이 바뀌면서 조커가 등장함.
그리고 조커는 마지막으로 찬송가를 부름.
'자신의 자식이 땅에 내려와 자신의 일을 대신할 것이다' 그리고 아서를 죽인 죄수는 미친듯이 웃더니 자신의 입을 찢음.
영화의 흐름대로 자연스럽게 이해했다면, 현실에는 조커같은 미치광이가 없고 아서와 같은 사회적 약자만이 존재한다고 해석됨.
그런데 결말부에서 이걸 완전히 뒤틀어서 '어쩌면 있을지도?' 하고 끝내버림.
그리고 이 결말은 기존 조커에 대한 완벽한 찬사라고 생각함
왜냐면 우리가 1편의 조커를 좋아했던 이유는, 그게 아서 플렉이었기 때문임.
사람 죽여놓고 정신나간 농담하면서 사회를 선동한 범죄자를 관객들이 감정이입하며 옹호했던 이유가
관객들은 그가 사실은 착하고, 최선을 다해서 선해질려고 노력했고, 마지막까지 사회에 순응하려 했던 인물임을 알기 때문임.
즉, 대부분의 대중이 원했던 건 '완벽하게 복수에 성공한 아서 플렉을 다룬 피카레스크' 였음. 이걸 조커라고 생각한거고.
근데 이 영화는 여기서 코믹스의 조커를 가져왔음. 정체불명, 인원불명, 의미불명, 광기의 대변자 원조 조커.
영화 마지막에 아서를 직접 찌른 조커는 한명이지만, 아서를 도주시킨 두 명, 그리고 법원을 폭파시킨 인물까지, 이미 수많은 조커가 등장했음.
그리고 영화는 이를 자조적으로 연출하면서 끝남.
아서처럼 1편이 현실의 잠재적 조커를 만들어냈으니까.
결국 이 영화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대한 아서 플렉의 조커를 다루지 않음.
대신 코믹스의 개념을 가져와서 이를 아서와 강력하게 구분지음.
그리고 이를 통해서 1편에서 잘못 다뤘던 메시지,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갖자'는 의미를 재차 강조함.
난 재밌었는데, 1편과 같은 도파민터지는 피카레스크를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모르겠음.
별로 그렇게 와닫지 않았음
굉장히 공감가는 해석임 할리퀸은 '아서 플렉'에 대해 완전히 모르고 알고싶어하지도 않았지
영화 제목 폴리 아 되 가 할리만을 겨냥한 제목이 아니였음 ㄹㅇ
별로 그렇게 와닫지 않았음
굉장히 공감가는 해석임 할리퀸은 '아서 플렉'에 대해 완전히 모르고 알고싶어하지도 않았지
때로는 이러한 해석도 있어야 하는 법
나도 이런 해석 좋아
오히려 난 대중들이 원하는처럼 진짜 조커로 각성하는 빌런 영화가 되버렸으면 실망했을거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