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 3대 국왕이자 프로이센을 강대국으로 끌어올려 독일통일의 초석을 세운 프리드리히 대왕
하지만 사도세자처럼 아버지가 원하는 방향에 관심이 없어서 존나 학대당하면서 컸다.
사도세자가 학문에 관심이 없이 무예에 관심을 보인다고(영조가 생각해서) 학대를 당했다면,
프리드리히는 정반대로 군대에 관심을 안가지고 공부만하고 아버지가 탐탁찮아하는 계몽주의에 호감을 보여서 학대당했다.
영조는 그래도 직접 손찌검은 안했다만,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버지는 진짜 복날 개패듯이 자식들을 두들겨팼다.
누나인 빌헬미네도 두들겨 맞다가 실신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남자이자 후계자는 뭐.....
사도세자가 정신적 압박감에 시달리다가 온갖 탈선행위를 벌인 것 처럼,
프리드리히 대왕은 왕위계승권자였음에도 못버티겠어서 영국으로 망명가려다가 잡혔다.
부왕은 길길히 날뛰며 같이 망명가려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친구(동성애인이라고도함)의 목을 따고,
머리통을 자기 아들이 수감된 요새에서 아주 잘보이게 효수해놓는다.
영조가 결국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인것처럼,
프리드리히 대왕도 망명 직후 부왕에게 처형당할 뻔했지만,
왕비의 청원을 받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친히 개입해서 제지한 덕분에 겨우 살아남았다.
이러한 성장과정은 계속 트라우마로 남아서 장성한 프리드리히 대왕을 끝까지 옥죈듯 하다.
수십년이 지난 후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7년전쟁 도중에 쿠너스도르프 전투에서 최악의 패배를 당하고 일기장에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혼나면서 혼비백산하는 악몽을 꿨다" 라는 내용을 남기고,
나중에 전황이 나아지자 일기장에 또 다시 꿈속에서 아버지가 나와서 용서받았다는 내용을 적었다.
이때 프리드리히 대왕은 나이 50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혹의 나이에도 아버지의 학대에 대한 트라우마가 가시지 않았던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