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직 8살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내가 살던 곳에 산타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사실 내 어린 시선으로 보아도 산타의 차림새는 어리숙했다. 주근깨가 있는 젊은 얼굴에 간신히 달라붙은 가짜 수염은 어색해 시선을 맞추기가 부담스러웠고, 빨간 털모자 밖으로 검은 생머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더군다나 명색이 산타임에도 순록들을 잘 다독이지 못했다. 산타의 썰매가 떠나기까지 30분 동안 흔들었던 팔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팠다. 지금의, 30이라는 나이에 다가가는 내가 봤다면 그 한심한 모습에 냉소를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어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설문조사를 할 때면, 장래희망란에다 꼭 산타란 두 글자를 꾹꾹 눌러 썼다. 정작 왜 이런 꿈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명확히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고려하지 않았다. 세번째로 산타기능시험에 낙방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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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가 넘어가는 12월달 저녁. 짙은 남회색의 하늘 아래를 따뜻한 도시의 야경이 노랗게 물들였다. 시내는 건물 사이를 휘도는 한풍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북적였다. 인도를 오종종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불어오는 한기에도 아랑곳않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즐거운 듯 웃고있다. 그럴만도 하다. 오늘은 24일. 기쁘고 기쁜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젊은 연인들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해 밀담을 주고받고, 가족이 있는 직장인들은 오늘 밤 어떻게 산타가 오기 전에 아이들을 잠자리에 재워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달콤한 고민들은 밤공기를 뚫고 내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더 비참하게 했다. 내 고민은 행복 주머니에 있지않았다. 내 패딩 주머니 안에서 또아리 틀고 있지.
"하아."
한숨을 뒤로 하고는 왼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인터넷 매장에서 5만 코나에 주고 산 싸구려였지만, 다행이랄지 지난 1년 동안은 한번도 고장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 4에 닿은 분침도 옳게 가리키는 것일테다. 이런 약속시간에 늦겠군. 나는 좀 더 속력을 내기 위해 힘껏 날개를 쳤다. 한기의 폭풍이 얼굴과 손을 때리고 지나갔다. 입술이 땡기고 손이 시려웠다. 마스크와 장갑을 안 가져온 게 후회되었다. 나는 임시방편으로 입에서 화톳불을 뱉어 그것을 손에 잡고 비벼댔다.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방편이었지만,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이미 처량하기 짝이 없는 신세인데 뱉은 불로 손을 데우는 거에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있겠는가?
"앞의 시민 분. 비행 시에 화기 사용은 금지입니다!"
있었다. 뒤에서 20대로 보이는 영공 순찰대원이 쫒아왔다. 안경 너머로 히스테릭한 눈이 내 손에 붙은 엉겅불을 지긋이 노려보고 있었다.
"저기......"
"과태료 6만 코나입니다."
순찰대원은 변명을 들을 가치도 못 느끼는 듯, 과태료 용지를 내 손에 쥐어주고는 바로 다른 곳으로 날아가버렸다. 나는 또 다른 골칫거리를 넘기고 간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그리고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푸르게 빛나야 할 달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하, 이놈의 마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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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장소인 동네 고기집에 들어가자 식당 한 구석 자리에 있는 약속상대의 모습이 한번에 들어왔다. 친해서가 아니라 손님들 중 해골 바가지는 녀석 하나 뿐이였기 때문이다. 녀석도 나를 보았는지 살가죽만 간신히 붙은 손을 흔들며 아래턱을 덜거덕 거렸다. 녀석, 그러니까 그림(Grim)은 몇년을 들어도 익숙치 않는, 쇠철 긁는 소리로 말했다.
"여! 지금이 몇분인데 이제 오냐? 자그마치 고기 님을 영접하는 자리에 말이야."
"시꺼. 임마."
나는 퉁명스럽게 그림의 말을 받았다. 그러자 녀석은 무엇이 우스운지 낄낄 웃음소리를 거두지 않았다. 나는 녀석의 쇠철 긁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입에 맥주잔을 가져다댔다. 술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퐁하고 도는 술기운은 추운 생에 얼어붙은 몸을 잠시나마 녹여주었다. 한잔을 비운 나는 불판에서 지글지글 익고 있는 돼지고기 한 점을 집어들어 입에 넣었다. 고기의 육즙이 혀 위로 흘러넘쳤다. 그 강렬한 맛과 식감에 나는 순간 울 뻔했다. 근 몇 달간 처음으로 맛본 고기였다. 그림의 말이 맞았다. 고기 '님'이다.
"맛있냐? 이 형님께서 사다주신 고기의 맛이 어때?"
"네가 맛볼 수 없는 맛."
"녀석 재수없는 것도 고등학생 때랑 똑같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녀석은 나와 연락하는 얼마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였다. 게다가 본인은 음식을 먹지 못하는 언데드임에도 날 위해서 고기집에서 만나자고 하는, 배려심 깊은 녀석이었다. 나는 아까 전의 재수 없는 사건과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은 자존감을 잠시 잊고 고기를 입에 쑤셔넣었다. 꺼졌던 배속이 차올랐다. 젓가락질을 몇번 더 하고난 후에 앞에 앉은 그림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달라진 그림의 차림새가 들어왔다.
"...너, 그 옷은 뭐냐?"
아닌게 아니라 녀석은 평소 입던 헤진 회색 누더기가 아니라 고풍스러운 자색 로브를 입고 있다. 딱 봐도 고급 양장점에서 지었다는 것을 알 수있었다. 그림은 내 시선에 아래턱을 겔겔거렸다.
"동생 놈아, 잘 들어라. 이 몸께서 사신 고시를 준비했다는 것은 알고 있지?"
"삼수생이라는 것도 알고 있으니 빨랑 말해."
"쯧쯧. 한 때 그런 처량한 시절도 있었지."
녀석의 어조에는 쇠철 뿐만 아니라 자신감과 자존감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 나는 놀라 소리쳤다.
"설마 합격한 거야?!"
"지난 달에 합격 통보가 날아왔다. 왜? 이 형님이 합격한 게 싫냐?"
그림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싫다니 당연히 아니다. 다만......
"그러고보니 너도 이번 달 중으로 합격 발표나잖아? 아직 안 나왔냐?"
패딩 주머니 안에 도사리고 있는 종이 뭉치를 떠올렸다. 꼬리를 흔드는 방울뱀 같이.
"아직."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며 나는 왼손으로 옆구리를 덮어 눌렀다. 주머니 안의 뱀은 꿈틀대지 않았다.
그렇지만 녀석은 내가 사실을 감춘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놈은 없는 혀 대신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얘기했다.
"네녀석, 떨어진 거냐?"
할 말이 없었다. 비록 그 말의 품새가 고약했지만, 먼저 그림을 속이려 한 내 잘못이었으니. 다음 말을 하지 않았다면 안에 웅크린 무언가를 술로 밀어넣었을 것이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사탄 임용 시험을 쳐보는 건 어때?"
내가 놈의 머리에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던 건 빈 맥주병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챙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가 식당 안에 울려퍼졌다. 사람들이 놀람과 호기심, 경멸어린 시선으로 나를 보았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그건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녀석도 참. 그 지랄같던 성격은 더해졌냐."
그림은 벽에 부딪쳐 깨진 병의 잔해를 보며 중얼댔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향해 '너희들이 신경쓸 일이 아니니 그 머리에 있는 눈들 다 돌려라.'는 요지의 내용을 정중하게 표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치자 녀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쇄골과 견갑골을 으쓱였다.
"뭐 네가 싫다면 싫은 거겠지. 됐고 고기나 마저 처먹어라."
나는 녀석의 제안대로 고기를 집어들었다. 퍽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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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집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밤 9시가 다 된 시점이었다. 그림 녀석은 술이 들어간 나를 보고 자취방까지 부축해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놈에게 폐를 끼치기도 싫었고, 건장한 악마인 내가 해골 바가지의 부축을 받는 것도 우스웠다. 그리고 말이지. 내 신세가 사신님의 부축을 받을만큼 높지도 앉잖아?
"큭, 큭. 하아."
웃음과 더불어 한숨이 입에서 샛나왔다. 어디로 놓을지 갈팡질팡하는 발걸음을 놓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아. 날아서 갈까.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데. 물론 그럴 용기는 없다. 음주비행을 하다 걸리면 최하 1000만 코나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그러니 땅개들처럼 바닥에 발을 붙이고 갈 수 밖에. 술기운이 도는 모양인지 도시 위에 뜬 몇 없는 별들이 두 배로, 세 배로 나뉘어져 천공에서 춤을 추었다. 그 광경은 환상 속의 무도회같았다. 그래, 도시 위에 춤추다 바로 사라져 버리는 환상. 그러나 무도회의 주인공이어야 할 달은 보이지 않았다. 달은 어디로 간 걸까? 우둘투둘한 도시의 간극 사이로 숨어버렸나? 아니면 저 북쪽에서 다가오는 두터운 눈구름에 덮여버렸나? 알 수 없었다. 나는...
꽈당.
바로 내 앞도 못보기 때문이지. 일어서면서 보니 보도 블럭의 모서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젠장. 받친 오른쪽 무릎이 쓰라렸다. 보지 않아도 까진 피부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나마 이 광경을 본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남아있던 십분의 일 쪼가리 자존심도 사정없이 망가질 뻔했다.
"키득키득."
젠장, 이번에도 보는 사람이 있었군. 나는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고개를 억지로 가누었다. 하지만 밤골목은 약간 기울어진 전봇대와 멀리서 점멸하는 네온등을 제외하고는 텅 비어있다. 이어지는 낡은 담장과 아스팔트 바닥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술을 감당할 수 없이 들이부어 환청을 듣는걸까? 내 이성적인 부분은 그렇다고 목청을 높였으나, 술이라는 스테로이드를 잔뜩 머금은 다른 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다른 부분, 과잉되고 또 수축되기도 한 감성쪽을 편들어주었다.
나는 전봇대 옆, 그림자 속에 쌓여진 쓰레기 더미를 향해 비척비척 걸어갔다. 그리고는 불법투기된 쓰레기봉지들을 바로 옆자리로 투기했다. 쓰레기 봉지 안에는 살이 깨끗이 발려진 닭다리 뼈와 썩어버린 귤, 질척한 기저귀들과 함께 즐거운 명절을 앞에 두고도 즐겁지 않은 일상의 조각들이 두루 튀어나왔다. 온갖 지저분한 것들이 내 손에 닿고, 묻고, 튀어도 신경은 쓰이지 않았다. 술이란 기화되는 친구는 들썩대는 땅과 더불어 비현실감도 주었다. 온갖 더러운 냄새들이 코를 찔러도 상관있으랴? 어차피 한 겨울의 개꿈 중 하나일 뿐. 비다 내일 점심 때 일어나면 지금의 만용을 후회할 테지만, 그건 내일의 나이지, 오늘의 내가 아니었다. 그런 인식 덕분에 나는 목소리의 주인을 발견하고도 태연히 인사할 수 있었다.
"안녕?"
"안녕."
쓰레기 봉지 더미 위에 앉아있던 낡은 장난감은 응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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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아소를 방문한 산타는 극성어린 어린 아이들의 환대를 받아야 했다. 며칠 간 고민과 고민 끝에 자신이 원하는 선물을 골라야 했던 남자 아이의 수고와 산타를 만난다는 생각으로 밤잠을 못이뤘던 여자아이의 기대감은 주근깨가 인상적인 산타의 옷깃을 붙들고는 떨어질 줄 몰랐다. 아이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던 산타는 화려한 장식의 크리스마스 트리를 연상케 했다. 나는 신발장 구석에 숨어 젊은 산타를 쳐다보았다. 갈색 눈이 내 쪽을 향했다. 그 사람은 미소지었다.
부끄러웠다. 산타가 왔는데도 숨어있던 겁많은 자신이. 그래서 나는 더 몸을 웅크렸다. 얼마있지 않아, 탁아소의 소장이 우렁찬 목소리로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들은 각자 선물 꾸러미를 받고는 즐거움에 못 이겨 탄성을 내질렀다. 활기찬 남자 아이들 중 몇은 꾸러미를 머리 위에 들고 야외 놀이터를 한 바퀴 돌기도 했다. 내 차례가 오자 나는 쭈벗쭈벗 앞으로 나섰다.
그렇지만 온 몸을 훑는 흥분과 기대에 날개를 퍼덕였다. 산타는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호박색 홍채가 반짝였다. 시선을 마주받고는 산타는 커다란 보따리에서 녹색 선물 꾸러미를 건네주었다. 나는 꾸러미의 크기를 보고 약간 실망했다. 내가 한 달 전부터 받기를 간절히 원하던 장난감이 들어가기에는 너무 작았다. 그렇지만 나는 산타의 선물을 기쁘게 받았다. 1년 전, 엄마가 준 목도리 이후로 처음 받아본 선물이었다. 안에는 목각 인형이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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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한 골목을 벗어나 시내가에 다다랐다. 두 시간하고도 반이나 지났지만, 시내는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아니, 오히려 서로의 목에 목도리를 두른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연인들은 더 많아진 것 같다. 나는 사람들의 느리지만 거대한 물살을 피해 길 구석쪽으로 걸었다. 물론 술주정뱅이라는 인상을 주고싶지 않았던 것도 이유였지만.
"사실이 그러면서."
약간 두툼히 튀어나온 패딩의 아랫 부분에서 조그맣게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해."
혼자서 읊조리듯 충고하고 난 뒤, 나는 제 발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제때 몸을 가눌 수 있었다. 겨울밤의 차갑고 건조한 한숨이 무방비한 얼굴과 목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그렇지 않았도 붉었던 얼굴이 더 달아올랐다. 취기 역시 강해졌다. 현기증이 나 쓰러질 것 같다. 그림 녀석과 약속 장소를 대충 골라 잡은 것이 한이다. 얻어먹는 입장이라도 내가 사는 셋방이랑 가까운 곳을 고를껄! 이불이 기다리는 집까지는 아직도 멀었다.
"적당히 쉬어가."
여린 목소리가 하는 제안에 나는 동의했다. 별 수가 없다. 이대로 가면 내가 쓰러지든가, 토를 하든가, 그 둘을 동시에 겪든가 세 가지 가능성 뿐이니. 나는 시내의 소광장까지 걸어가서는 아직 연인이 차지하지 않은 나무벤치에 가서 털썩 몸을 던졌다. 목재가 패딩 안의 인조 털을 헤치고 등 뒤를 차게 문질었다. 나는 한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감싸고서 머리를 두 다리 아래로 숙였다. 불쑥 찾아온 불쾌한 손님은 도무지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주머니가 제 스스로 뒤적대며 잡동사니 하나를 뱉어냈다. 아니, 움직인 건 잡동사니다. 20cm의, 머리와 몸통이 같은 비율인 각진 로봇은 뭉뚝한 팔과 다리를 움직여 일어났다. 그러나 그 광경에 관심을 주는 이는 없었다. 전지로 움직이는 장난감은 흔해 빠진 세상이다. 하물며 술주정뱅이가 가진 장난감에 눈길이 갈리 없다. 그래서 녀석은 스쳐가는 인파에 아랑곳않고 말을 걸었다.
"죽을 것 같아?"
"그래, 죽겠다."
나는 녀석의 말에 대충 응대했다. 녀석은 커다랗고 모난 머리를 기울였다. 안구역할을 하는 유리 전구 속 필라멘트가 깜빡였다.
"왜 안 죽어?"
나는 멍한 머리를 돌려 잡동사니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스스로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나는 왜 저 우스꽝스러운 장난감을 들고 온 것일까?'
쓰레기 더미 위에서 인사하는 장난감을 보았을 때, 나는 이 황당한 대치 상황에 놀라지 않았다. 이 역시 한 겨울 밤의 꿈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었으니. 낡은 장난감을 패딩 안에 넣은 것도 무계획적이고 즉흥적인 행동이었다. 다만 나는 의아하게도 이 잡동사니가 낯설지 않았다. 언젠가 본 적이 있다는 기시감이 들었다. 각진 머리의 녀석은 대답 없는 나를 향해 다시 한 번 또박또박 기계음을 내었다.
"왜 안 죽어?"
끈질기게도 물어보는구만. 나는 귀찮다는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 여기가 고립무원의 북극이라면 얼어 죽었겠지. 그런데 여기서 동사하기에는 내 셋방하고 너무 가깝거든."
보일러가 고장나기 일쑤였지만 굳이 그 사실을 첨언하지 않았다. 잡동사니는 큼지막한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녀석이 넘어지지않고 몸을 가누는 것에 약간 놀랐다.
"알았어."
녀석은 짧은 단어를 던지고는 벤치 앞으로 몸을 돌려 털썩 주저앉았다. 금속과 목재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녀석은 앞만을 응시했다. 유리 전구에는 색색이 빛망울이 만발했다. 나는 녀석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광장 중앙에는 붉고, 푸르고, 노랗고, 또 하얀 빛을 띄는 전구들이 선으로 줄줄이 이어져 커다란 침엽수를 얼기설기 엮고 있다. 크리스마스 트리였다. 가지각색의 빛이 그물 위를 교차하며 침엽수 잎 위로 다양한 그림과 문자들을 나타냈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내 귀에 잡동사니 녀석의 말이 들려왔다.
"저기 산타 할아버지야!"
나는 순간 움찔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산타 할아버지는 커녕 산타복을 입은 알바생도 없다. 온통 애인들 뿐이다. 의뭉스러운 눈길로 녀석을 보니, 녀석의 뭉뚝한 팔에 달린 더 짤룩한 손가락이 크리스마스 트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녀석이 가리킨 건 썰매를 끄는 산타의 문양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왜 그래, 산타 할아버지가 싫어?"
"아니."
"그럼?"
"내 또래 녀석들이 보기 싫거든."
산타를 싫어하는 산타 지망생은 없다. 나는 단지 그들중 일부와 마주치기 싫었을 뿐이다. 신참 산타들. 비록 한겨울에 보이는 그들의 모습은 피곤에 찌들어 있지만, 그마저도 내게는 부러운 모습이었다. 그들에게는 나와 달리 지위가 있고, 아르바이트로 하루 하루를 연명하지 않아도 되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이미 꿈을 실천하고 있다.
내게는 이제 이 꿈을 왜 꾸었었는지조차 잊어버렸는데.
개인적인 악감정이라기도 민망하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헛구역질할 것 같은 거북감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기도 전에 치고 올라왔으니. 상상 만으로도 이렇다. 정말로 위액과 소화가 덜 된 음식 잔해를 내뱉으려고 속의 오장육부가 몸부림쳤다. 등이 당긴 활처럼 경직된 곡선 모양으로 기울어졌다. 녀석의 조그마한 손이 내 등을 힘껏 치지 않았더라면 광장 앞에서 추태를 부릴 뻔하였다.
"나한테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잡동사니 녀석은 팔짱을 낀 채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련하겠나. 헛웃음이 나왔다. 고작해야 어린 아이가 갖고 노는 장난감에게 이런 소리를 듣는다는 게 굉장히 한심했다. 그리고 약간이지만 고마웠다.
"왠지 네가 내 엄마라도 된 것 같은데."
"난 술주정뱅이의 엄마가 아니야. 평범한 기계 용사일 뿐이야."
나는 슬쩍 눈꼬리를 치켜 올렸다. 녀석의 말이 계속 됐다.
"나는 터미널이라는 커다란 대륙에서 살던 평화로운 기계 일족이었어. 웜이라는 외계 생명체가 쳐들어오자, 우리 일족은 다른 모든 이들과 함께 평화를 위해 맞섰지."
나는 고개를 들었다. 옆에서는 로봇이 공상의 소리를 계속 주절거렸다. 귀로 흘러내리는 녀석의 얘기는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었다. 아마도 장난감이 등장하는 만화의 줄거리일 것이다. 만화의 캐릭터가 만화의 내용을 떠드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그와는 별개로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은 더해져 갔다.
"고작 장난감을 사람처럼 여겼었다니."
중얼거림과 한숨에 가려 별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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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암흑 뿐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현관 앞에 서서 나와 그것이 살고있는, 집이라고 불리는 콘크리트 덩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낡아빠진 1층 집에는 불빛도 온기도 없었다. 그 광경은 익숙했고, 난 이 익숙함이 이가 갈리도록 싫었다. 하지만, 더욱 더 싫은 것은 이 건물에 붙어사는 그것이었다. 나는 가방 안의 초록색 꾸러미를 생각했다. 탁아소를 방문한 산타가 건성으로 준 선물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앞으로 닥쳐올 불행들을 잊어버릴 만한 것이었으면 하고 바랬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는 까치발을 한 채로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채 닿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놀라서 굳은 내 몸을 그것의 그림자가 덮었다. 말그대로 악마같은 눈이 나를 내려보았다. 그것의 온몸에서 지독한 알코올 냄새가 풍겨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조그마한 위안 따위가 얼마나 부질없을지를.
"이게 어디서 아비한테 눈을 부라리고 있어!"
우악스런 손이 내 뿔을 잡아당겼다. 아프다고 제발 놓아달라고 사정을 하고 빌어보았지만 들은 체하지 않았다. 그것의 발길질과 주먹질을 견디는 동안, 나는 비명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속으로는 원망이 쌓였다. 그것에게, 한 달 전에 저를 두고 달아난 어미에게, 비명 소리와 애걸 소리가 들려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이웃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런 비참함 뿐인 나와는 달리 행복한 명절을 들떠서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은 쌓여서 마음 한 구석에서 굳어갔다. 그것이 지쳐 곯아떨어지자 나는 간신히 가방 앞으로 기어갔다. 그리고 한톨만큼일지라도 위로를 구하며 선물 꾸러미 속 목각 인형을 품 안에 꽉 안았다.
하지만 온기는 없었다.
나는 웃었다. 자신이 너무 바보같아서. 그 날은 최악의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그리고 그 날 밤, 나는 집을 뛰쳐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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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뒤적이는 소리에 나는 잡동사니를 보았다. 녀석은 똑바로 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녀석의 사각형 입은 꾹 닫혀있었다.
"안 듣고 있었지?"
들을 가치가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녀석은 입을 열었다 탁 닫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시인걸까. 잡동사니 녀석은 그대로 앉아있다가 갑자기 일어섰다. 그리고는 스스로가 대견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네 고민을 들어줄게!"
뜬금없는 소리에 난 헛웃음을 터트렸다. 사람도 아닌 장난감 주제에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주겠다는 참 대담하기 그지없는 발상이었다.
"그래, 기계 용사님께서 이 하찮은 백수의 고민을 들어주겠다니 영광이네."
"사람은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 거지!"
이 말 역시 우스꽝스럽다. 사람이 아닌 것이 사람의 도리를 읆다니. 세상이 요지경이긴 한가 보다. 나는 녀석의 유리 안구에 빛나는 필라멘트를 쳐다보았다. 표정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지만 내 말을 기대하는 듯 다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장난감을 갖고 놀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또, 내년이라도 구직해야 될 처지인데 이렇게 시간을 허비해도 되는 걸까?
"술주정뱅이야. 입 벌리고 있으면 냄새나."
녀석의 타박에 입을 닫았다. 목구멍에서 올라온 온기 섞은 취기에 나는 아직 알코올이 분해되지 않은 걸 인정해야 했다. 깰려면 내일 낮은 되어야 할테니 그 때까지는 이 꿈을 꾸어도 괜찮겠지. 녀석은 흠흠대며 최대한 진지하고 근엄한 태도로 물었다. 고저없는 기계음이 울렸다.
"네 고민은 뭐야?"
"내 고민은..."
부스럭. 종이 구겨지는 소리가 머리 속에 울렸다.
"...지금 시도하는 일이 과연 나에게 옳은 일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거."
"술주정뱅이에게 옳은 일이 뭐야?"
"많지. 경제적인 자립, 사람들의 인정, 안락한 노후처럼 사회가 촉구하는 가치들과 마음의 안정, 편견으로부터의 탈피, 꿈의 성취 같은 나 스스로가 추구하는 개인적인 가치들. 처음에는 서로 대립하지 않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머리 속에서 서로 물고 뜯으며 싸우고 있어."
"왜?"
나는 크리스마스 트리에서 시선을 내렸다. 화려한 조명들에 가려져 있었지만, 보도 블럭 위에는 사람들이 흘리거나 버리고 간 쓰레기들이 놓여있었다. 곧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쓰레기들의 마음은 나는 알 수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알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 같았다.
"밑바닥에 떨어져 있으니까. 녀석들은 내 계속되는 실패에 놀랐고 이에 대해 의견을 달리했지. 편이 갈리고 가치들은 머리 속에서 자신들에게 공정한 평가를 매겨달라며 밀고 당기고 다투고 있어. 그런데 나란 녀석은 보다시피 술이나 마시며 그 싸움에서 몸을 피하고 있고."
난봉꾼들의 박투를 말리지 못하는 술집 사장처럼 사이에서 안절부리기만 할 뿐이다. 상황이 해결되기는 커녕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데도 타성에 짓눌려 휘둘린다. 지금 당장 결단하지 않으면 나락의 나선에 빨려들어가버릴 그런 상황이었다.
녀석은 잠시 침묵했다. 머리 위의 레이더가 웅웅 진동했다.
"내가 보기에는 술주정뱅이는 이미 한 쪽을 선택한 것 같아."
"어떤 근거로 추론한거냐?"
영문모를 소리였다. 이쪽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이런 내가 선택을 했다고?
"글쎄, 정확한 근거는 없어. 느낌이야."
"기계용사님께서는 감이 좋나 보군. 하긴 그래서 악마들로부터 대륙을 지켰나?"
녀석은 나의 농담에 우웅 중얼거리듯이 대답했다. 그리고는 다시 본론으로 전환했다.
"내 느낌일 뿐이지만. 주정뱅이는 속에서 이미 답을 내렸어. 다만 주정뱅이는 왜 이 길을 걸어나가기로 했는지, 혹은 그만두기로 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필요한 거야."
"이유들이라면..."
녀석은 큰 머리를 도리도리 저었다. 잡동사니 녀석은 내 눈을 똑바로 올려다 보며 말을 이었다.
"가치들을 말하는 게 아니야. 그보다 좀 더 근원적인 것. 계기를 말하는 거야. 생각해봐. 아니 떠올려봐. 왜 주정뱅이는 이 길을 가기로 한 거야?"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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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길에 들어섰다. 아직 어린 나였지만,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 정도 밖에 아는 것이 없었다. 나는 추운 손발과 날개를 부르르 떨었다. 어둠 속에 놓여진 낯선 건물들의 윤곽은 웅크린 맹수들처럼 보였다. 언제부터 이 길로 오게 된 것일까? 집을 나설 때부터? 아니면 엄마가 떠나셨을 때부터? 어쩌면 내가 태어난 것부터가 잘못된 길의 시작이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잘못된 길을 걸어나간다면 나는 어떤 어른이 될까? 주변 어른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과 똑같은 인간군상이 될지도 몰랐다. 악마니까. 흔히 말하는 나쁜 피를 물려받았으니까.
물론 그 시절의 나는 그런 우울한 잡상에 빠져 있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때의 나는 그저 울고 싶었다. 누군가가 날 감싸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랬다. 하지만 내 옆에 있는 건 비틀거리며 땅 위에 널브러진 그림자 뿐이었다.
딸가닥.
하나 더 있었다. 나는 내 손과 함께 얼어붙은 목각 인형을 바라보았다. 다짜고짜 집을 뛰쳐나왔기에 여태까지 쥐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비쩍 마른 나뭇가지처럼 딱딱한 손가락 마디를 억지로 펴보았다. 목각 인형은 손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것을 아스팔트 바닥에 던지고 인형이 부서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상했다. 나와 인형 사이에는 닮은 점이라고는 전혀 없는데. 고작 싸구려 인형일 뿐이었는데 나는 순간 인형이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혼자서 바닥에 나뒹구는 인형을 상상하자니 가슴에 멍울이 잡히는 것 같았다. 나는 던지는 대신 인형을 꼭 안았다. 또래 남자 아이들이 보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있자니 다가오는 구두굽 소리가 들렸다.
"얘, 여기서 뭐하니?"
나는 고개를 들었다. 주근깨 있는 볼과 호박빛 눈동자.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터트렸다. 그녀의 다정다감한 눈에는 영문을 몰라 당황한 기색을 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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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는데."
녀석은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에 그림 녀석이 언뜻 떠올라 언짢았다. 아까 전, 그림은 나의 한심한 작태를 보고도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넘어가줬지만 속으로는 실망했을 것이다. 아니, 그림 녀석 만이 아니다. 지난 3년 동안 나의 실패를 조금이라도 알았던 사람들은 늘 이런 식이었다. 물론 겉으로는 미소를 짓고 있지만, 속으로는 나라는 악마의 한심함에 다들 질려있겠지. 그 생각을 하자 우울해졌다.
"뭐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주정뱅이도 사람이잖아!"
어색한 위로의 말이 냉각된 공기 사이를 진동시켰다. 필라멘트가 가열되어 따뜻한 빛을 띈 녀석의 눈이 내 얼굴을 살폈다. 그 태도가 정말로 사람 같았다.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떨어진 분위기를 상승시키기에는 역부족이지만 대화의 빛을 다시 켤 수는 있다.
"내가 너무 막연하게 질문해서 미안. 구체적으로 물어볼게. 주정뱅이의 꿈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어?"
장난으로 받아들인 건데 꽤 진지하게 하는군. 나는 어렸을 때를 떠올렸다. 짐작가는 부분은 있었다. 그러나 간간히 단편적인 부분만 수면 위로 부상할 뿐 가장 중요한 기억은 하얀 머리 속에 소복한 망각에 쌓여 묻혀있었다. 그 사실을 말하니 잡동사니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마. 내가 삽으로 그 기억을 파내줄게!"
어떤 삽으로 그 기억을 파내든 장난감의 팔로는 역부족일 것 같은데. 나는 어깨와 날개를 으쓱였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 기억나는 부분을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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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나를 데려온 곳은 낡은 교회였다. 1층 기도실 바로 위에 위치한 휴게실에 들어간 나는쭈벗쭈벗 서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그마한 방 안은 따사한 연분홍색 벽지로 마감되어 있고, 세 면의 벽에는 선반이 놓여져 아기자기한 동물 인형들이 자리해 있었다. 방 한켠에 있는 건 벽난로와 내 키 만한 크리스마스 트리. 트리 꼭대기에는 하얗게 빛나는 십자가가 꽂혀있다. 한 번도 가보지는 않았지만 내 또래 여자 아이들의 방이 이런 느낌일거라 생각했다. 잠시 나갔던 그 사람이 돌아왔다. 두 손에 든 받침대에는 따뜻한 코코아와 가운데에 잼이 들어간 쿠키가 놓여져 있다.
"수사님들이 몰래 먹을려고 숨켜둔 쿠키야. 어서 앉아서 먹어."
그 사람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원형 탁자를 사이에 두고 그 사람도 앉아 나를 지그시 보았다. 나는 쿠키에 손을 대지 않았다.
"쿠키 싫어해?"
젊은 산타는 사려깊게 물어보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배가 고프지 않았다. 공복은 되려 극도의 우울에 삼켜져 자취를 감추었다. 그 때의 내게는 지금과 같은, 그러나 훨씬 더 한 무기력감 만이 진득할 뿐이었다. 그 사람은 내 모습을 세심하게 살폈다. 그리고 그때까지 손에 꽉 지고 있던 목각 인형을 가리켰다.
"얘야, 인형을 사랑해주는 건 고맙지만, 그렇게 세게 조이지는 말아주렴."
그녀는 부드럽게 말하며 한기가 찬 내 손을, 두 손으로 감싸주었다. 뜨거운 온기가 전해졌다. 그 온기는 내 손을 타고 전해져왔다. 저도 모르게 다신 눈물이 흘렀다. 뺨을 타고 흐른 방울이 쿠키 위에 떨어져 자욱 자욱 눈물 자국을 그려냈다. 눈물이 그칠 때까지 그 손은 나를 꽉 지탱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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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기억나는 전부야. 젊고 어리숙한 분이셨지만, 좋은 분이셨어. 친절하시기도 했고."
말을 마치면서 새삼 놀랐다. 내가 여태껏 이 시절을 거의 기억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게. 귓동냥으로 얻은 상식이 떠올랐다. 사람이 불안으로부터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하는 방어기제 중에는 억압이란 것도 있다고. 다른 말로는 선택적인 망각이라 불리는 이 개념이 내게 적용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단순한 추정일 뿐이지만. 그리고 가장 놀랍고 기뻤던 점은 다름 아닌 그 때, 그렇게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단 것이다.
"음. 할아버지가 아니었구나."
녀석의 엉뚱한 말에 나는 웃으려 했다. 산타가 모두 할아버지일거라는 순진한 생각은 어린 아이도......
잠시 할아버지라고? 나는 녀석한테 산타라는 말을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다.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녀석의 태도에서 언뜻언뜻 보이던 위화감을. 근거가 없다고? 감이라고? 나는 약간 허탈해졌다. 감은 무슨. 증거가 바로 여기 있는데. 나는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녀석의 눈이 깜빡였다. 아직도 남은 술기운 탓인지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종이 소리에 겁을 먹지 않았다. 그것은 뱀도 전갈도 아니었다. 그저 종이일 뿐이었다. 종이는 구겨진 자국이 가득했지만, 확실하게 퍼져있었다.
"봤구나."
녀석은 머리를 숙였다.
"미안해."
"왜 그랬어? 기계 용사님께서 그렇게 소시민의 사적인 고민을 도와주고 싶었어? 개인의 권리를 침해해서까지 말이야."
궁금해서 물어본 말이었다. 추궁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기분이 나빴던 건 사실이기에 비아냥거림이 살짝 들어가버렸다. 녀석은 더더욱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또 다시 버림받고 싶지 않았어."
잡동사니 녀석의 기계음은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여태껏 들었던 녀석의 말 중에서 가장 진솔한 울림이었다. 나는 녀석 쪽에서 고개를 돌렸다. 스쳐지나가는 군중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냐."
그 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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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어! 네 어머니와 드디어 연락이 닿았다고!"
그녀는 기쁨에 겨워 외치며 팔을 들었다. 나는 믿기지 않아 물었다,
"정말요?"
"그럼. 전세계에 퍼져 있는 산타 협회에서 들어온 정보니까 확실하지! 여기서 차로 5시간 거리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고. 통화하신 담당지사 분께서는 바로 이쪽으로 달려오시겠다는구나. 왜 그러니?"
젊은 산타의 물음에 나는 내 자신이 기쁜 표정을 짓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기쁘지 않아요."
그녀는 다리를 구부려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불안해요. 혹시 또 다시......"
버림받다는 말은 쉽게 새어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이번에도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괜찮아."
어째서일까. 그 부드러운 손에서 강한 고동이 울리는 건. 어떤 위로의 말보다 그 다정한 고동이 나를 어루만져 주었다. 그녀가 손을 떼었을 때 내 손에는 목각 인형이 자리해 있었다.
"그 인형이 나 대신에 너를 지켜줄거야. 그리고 법과 200미터이내 접금금지 가처분 규정도."
그녀는 눈처럼 새하얀 이빨을 드러냈다, 정말 멋있는 미소였다.
"나중에 내가 보고 싶으면 그 인형과 함께 놀러와. 나와 내 동료 산타들이 너를 환영해줄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은 어느 때보다 더, 더 인형을 꽉 쥐고 있었다. 절대 놓치는 일이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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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빡 잠이 들었었나 보다. 꿈속에서 오랜만에 그녀의 미소를 떠올렸다. 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 눈가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다 큰 어른이 이걸로 질질 짜서는 되겠나. 시계를 보니 11시하고도 50분이었다. 손과 얼굴이 찼다. 나는 자리에 일어나 다시 비척비척 셋방을 향해 걸어갔다.
걸음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니 조그마한 잡동사니 녀석이 나를 보고있었다. 녀석이 있었다는 걸 깜빡 잊었다. 그러나 잊어도 상관없었다. 녀석의 사연은 모르겠지만 어차피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한 낡은 장난감일 뿐이니까. 녀석의 안구 안의 필라멘트가 깜빡였다. 자시의 처지를 아는 건지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웅웅대는 기계음이 들렸다. 버림받은 것을 체념한 듯한 비참한 소리였다. 나와는 상관없는 이 녀석의 처지 따위는... 하, 빌어먹을. 하필 그 시절 꿈을 꾸어서는. 나는 걸음을 돌려 잡동사니 녀석을 잡아 주머니에 넣었다. 녀석이 뒤적댔지만,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다시 앞을 보고 발걸음을 떼었다. 한참을 걷자 주머니 속의 녀석도 잠잠해졌다. 밑에서 웅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왜 안버려?"
"네 녀석에는 질문 기능만 붙여져 있냐?"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내뱉었다. 입에서 불티가 튀었다.
"그런 무관심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거든."
지금으로도 충분히 한심한데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불꺼지는 가게들과 아직도 한창인 술집들을 지나갔다. 명절이 십여 분도 남지 않은 것치고는 참 심심한 풍경이었다.
"미안, 나 거짓말했어."
"또, 뭐가 더 있는데?"
"나는 기계 용사 같은 게 아니야. 그것은 만화에 나오는 이타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영웅이지. 나는...그냥 그런 멋진 탈을 쓰고 싶었던 장난감이야. 메이드 인 차이나 제였고."
그런 나라가 있는지도 몰랐다. 지도 어디에 붙어있냐, 그건? 나는 설렁설렁 대답했다.
"알고 있어. 나도 어렸을 때 그 만화를 봤었거든. 정작 내가 갖고 싶었던 장난감은 디사이시브 암즈라고 엄청 커다란 로봇이었지만. 아까 전에 네가 악마와도 싸웠다고 내가 말했을 때 그렇다고 동의했었지?"
"싸운 적 없어?"
"응. 그 전에 네 모티브 캐릭터가 먼저 죽거든."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 아무 생각없이 신나라 보던 것들 중에는 지금 나이에 봐서는 기겁할 만한 내용의 것들이 잔뜩 있었다. 하지만 상관은 없다. 그 만화를 보던 시절은 지났고, 내용이 어찌되었든 그것을 보고 즐거웠던 기억은 추억이라는 거름이 되어 머리 안을 기름지게 했으니까. 사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은 잠시 침묵했던 입을 열었다.
"나는 원래 사랑받던 장난감이었어."
문득 녀석이 말했다. 궁금하지 않았지만 대화를 막을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다. 침묵의 동의 속에서 잡동사니는 말을 이었다.
"나는 어느 크리스마스 날에 한 남자 아이의 특별하고, 귀중한 생일 선물로 화목한 가정에 보내졌어. 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데도 생생하게 떠올라. 남자 아이가 기대에 차 포장지를 뜯던 소리. 기쁨의 탄성과 함께 네모난 상자 속에서 네모난 나를 꺼내 들어올리던 따뜻하고 고운 손. 그리고 아이와 부모가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서 한 즐거운 대화소리. 이 기쁨이 언제까지나 줄곧 계속될 것 같았고, 이를 믿어 의심치 않았어."
한동안은 녀석의 바램대로 행복했다고 한다. 남자 아이와 녀석은 진흙탕물을 튀겨가며, 다른 아이와 그 장난감들과 투닥거리며 즐겁게 보냈었다. 그렇지만 단순한 장난감이었던 녀석은 몰랐었다. 한창의 남자 아이가 얼마나 빠르게 크고 성숙해지는지를. 아이는 낮밤이 교차할 때마다 소년에서 청소년으로, 10대에서 20대로 유년의 고치에서 벗어났다. 그에 따라 녀석은 이제 아이라 부를 수 없는 남자와 교감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남자는 결국 어렸을 때의 철제 친구를 벽장에 넣고는 잊어버렸다. 잡동사니는 오랫동안 빛을 볼 수 없었다.
"그때는 혼자서 움직일 수 없었거든. 지금처럼 움직이게 된 건 얼마 안 됐어."
녀석은 중얼거렸다. 나는 녀석의 정체에 대해 추론한 것중 하나를 읊조렸다.
"정령이군."
내 나이 때에 말하기는 뭣하지만, 요즘 세상에 정령을 보기란 쉽지 않다. 소비적이고 소모적인 현대 사회에 정령이 깃들 정도로 오래되고 애정을 받았던 물건은 잘 없으니까. 귀하다기 보다는 희귀했다.
"잘 모르겠어. 하지만 처음으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기뻤어. 이제 나 스스로 이 어둠을 헤치고 내 주인에게 갈 수 있었으니까. '분명 그 애도 기뻐해주겠지!' 라고 혼자서 지레짐작하며 들떴어."
하지만 아니었다. 밖으로 겨우 빠져나와 널브러진 잡동사니는 남자의 아내의 눈에 띄어 버려졌다. 남자는 잡동사니 녀석이 있었다는 것도 잊어먹었겠지. 그리고 그 상태로 쭈욱 일상을 이어갈 것이다.
"주정뱅이가 나를 발견해 주었을 때 나는 기뻤어. 또한 무서웠어."
또 다시 버림받을까봐. 흥. 나는 내 뿔을 톡톡 두드렸다.
"나는 악마인데? 오히려 악마가 제 스스로 떠나주는 게 더 낫지 않냐?"
잡동사니는 키득키득 웃었다. 부품들이 삐걱였다.
"괜찮아. 산타를 목표로 하는 악마라면."
"그래. 나도다. 떠올려보니 나도 인형이 하나 필요했거든. 예전 거는 망각 속에 던져버려서."
"이름이 뭐야? 지금부터 함께 하려면 이름을 알아야 할 것 같아."
나는 내 본명을 말해주었다. 88자나 되는 긴 이름에 녀석은 질렸다는 듯 에에 소리를 내었다.
"그냥 사탄클로스로 부를래."
나도 허락했다. 이름에 사탄이 들어가 있었지만 이제는 개의치 않았다. 산타 협회에 등록되면 별명이 이것일텐데. 미리 들어둬서 나쁠 건 없지.
"내 이름은...'
"넌 그냥 잡동사니야, 임마."
녀석이 주머니 속에서 화를 냈다. 나는 그 녀석의 행동에 웃다가 또 돌에 걸려 넘어졌다. 한심한 백수와 장난감은 이렇게 이번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되었다.
12시 정각. 하늘 위에는 별의 호수를 헤치며 순록들이 힘차게 발길질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