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공모전 제출과 그걸 넘어, 어디라도 좋으니 사이트 하나 잡고 첫 장편 연재를 준비하려는 작품입니다.
대략 기승 까지는 쓴 것 같아서 한 번 읽어주셨으면 해서 가져왔습니다.
본래는 단락에 엔터키를 안 넣었는데 웹에서 가독성 향상을 위해 따로 넣었습니다.
웹에 연재하게 되면 방식을 바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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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다가오고 있다, 거대한 벽의 파편이라는 형태를 갖춘 죽음이. 모든 것이 느려진 시공간 속에서, 그 무엇보다도 확고히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이대로 죽고 마는 것일까. 눈을 질끈 감는 어린 소년은 생각한다.
자신은 무엇을 잘못 했기에, 지금 이런 상황에 처해 있나. 별다른 건 없었다. 그 나이에 어울리는 어리광을 부리며, 가족들과 장난감을 사러 나온 것. 그게 전부였다. 이곳은 우연히 지나던 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결코, 소년에게 죄는 없었다.
그럼에도 진하게 풍기는 피냄새와, 사람들의 비명, 그리고 이제는 형태도 알아볼 수 없는 가족들의 모습. 어린 소년에게는 그것들이 마치, 자신이 부린 어리광의 결과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보채지만 않았다면, 이런 곳도 오지 않았을 텐데, 이런 일도 일어나지 읺았을 텐데.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어린 아이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건, 자신에 대한 벌이리라. 소년은 자연스레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눈앞에 다가오는 죽음 또한 마찬가지다. 달게 받아야만 한다는 죄악감이 다리를 얽맨다. 하지만, 살아야만 한다는 본능과 어리광은 그 입을 절로 움직이게 했다. 눈을 질끈 감고서는, 흔들리는 백화점 전체에 울리라는 것만 같은 목소리로 소리친다.
"사람 살려!"
하지만 목소리는 허무하게도 허공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지금, 소년의 주변에는 비슷한 처지에 놓인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사고, 아니, 사건이 발생한지 아직 채 반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백화점 바깥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입을 벌리고 바라보고 있고, 때문에 구조 차량도 진입에 곤란함을 겪고 있었다.
그러니까 소년의 목소리도, 수많은 비명도 섞여든 허공을 들어줄 사람은 없다. 자신의 목소리가 붕괴의 굉음이 묻혀 가는 걸 느낀 소년은,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때문에 이번에야말로 눈을 질끈 감고, 본능에 올라가는 팔도 어쩌지 못 한 채,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한다.
강렬한 충돌음. 소년은 그것을 제가 느낄 마지막 소리로 여겼다. 이제 다음으로 들을 소리는 분명, 재회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목소리겠지. 속한 세계가 변한 탓인지, 어쩐지 묘한 따스함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따스함과 찾아온 것은, 기적과 같은 배신이었다.
"괜찮니?"
기적처럼 따스한 배신. 그래, 강렬한 충돌음 다음으로 다가온 목소리는, 부모님의 것이 아니었다. 주변 상황이 거짓말인 것만 같은, 평온한 목소리. 남을 감싸주고 공포를 떨쳐내는 듯한 목소리.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드니, 한 청년과 눈이 맞았다.
특징 없는 민무늬의 붉은 반팔티. 움직이기 쉬운 청바지. 어디서나 싑게 볼 수 있는 차림이지만, 그와 달리 눈을 끄는 붉은 머릿결과 눈동자. 그리고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만 같은 자그마한 웃음. 손에 들린 장바구니만이 청년이 이 세상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소년이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청년은 소년의 검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아 보이네."
하지만 이윽고 소년에게서 피냄새가 난다는 걸 깨달은 것일까. 살짝 험한 눈초리로 그 냄새를 따르니, 그곳에는 이미 숨을 거두고 만 소년의 부모님이 있었다. 이번에는 그에 괴로운 표정을 지으니, 소년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엄마가, 아빠가..."
"......"
청년은 잠시간 말을 잇지 못 했다. 어린 소년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 모두, 방금까지 소년이 있던 곳을 향해 쭉 팔을 뻗은 채, 위에서 떨어진 파편에 깔려 숨을 거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떨어져 있던 소년에게 파편이 낙하하는 걸 보고, 구하기 위해 달려든 것이겠지. 제 목숨마저도 버리고, 아들을 구해낸 것이다. 쉽게 견딜 수 없는 참혹함이었다. 소년이 운 좋게 살아 남더라도, 평생의 트라우마로 강하게 기억되리라.
청년은 그런 불쌍한 소년을, 강하게 껴안아주었다.
"괜찮아, 네 잘못 아니야."
소년은 그 말에, 결국 견디지 못 하고 울음을 터트려 버렸다. 청년 또한, 이런 말로 위로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조금이라도 짐을 덜어주고 싶었다. 하물며, 지금의 자신은 더 이상의 일도 해줄 수 없었다.
청년에게는 아직도, 구해야 할 사람과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소년을 안전한 장소로 옮겨주기 위해, 소년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때였다.
"그렇지~ 나쁜 건 다 어른들이지~"
말끝을 질질 끄는, 그런 목소리가 들려온 건. 마치 찐득찐득한 질감을 가진 것처럼, 기분 나쁘게 귀에 들러 붙는 목소리였다. 안 좋은 직감이 스친 청년은, 커다란 파편 사이에 소년을 내려놓는다.
소년을 안심시키려는 것일까. 최대한 밝게 웃으며 "여기 숨어 있어. 금방 이야기 끝내고 올 테니까."하고 말하며, 어깨를 토닥여준다. 겁에 질려 있던 소년이지만, 그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돌아선 청년의 등은, 유달리 커 보였다.
"왜 그러세요? 어서 도망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요."
청년은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소리친다. 물론,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서 하는 말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팔과 다리를 이상한 방향으로 비튼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이빨 사이로 낄낄낄 웃고 있었다.
그것만 빼면 지극히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색이 바란 정장이나 벗겨진 머리를 보면 제법 나이가 되리라. 그런 중년 회사원은, 역시나 이빨 사이로 새는 목소리로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내가~ 몇 번이나~ 위험하다고 했는데~ 윗대가리는 안 들었지~"
천천히 청년을 향해 다가오는 중년 남성의 주변에, 아지랑이 같은 게 뭉치더니 그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초록색. 꺼림칙한 색이었다.
"결국엔 무너져 내렸잖아~ 쿠궁! 하고. 흐흐, 흐흐흐하!"
양팔을 가슴 앞에서 교차하며, 균열을 형상화 하듯 그려낸다. 그 순간, 청년의 발밑에 있던 바닥에, 균열이 생긴다. 성인 남성도 거뜬히 빠질만한 균열. 그와 동시에 청년의 머리를 스친 것. 그건 공포도, 초조함도 아닌, 죽어버린 소년의 부모님.
지금 이게 무너지면,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기고 말 것이다. 청년은, 무너져 내릴 것도 아랑곳 않고서 그 자리에 자세를 낮추었다. 찰나의 순간, 균열이 생긴 바닥에 손을 얹고서, 눈을 감고 집중하는 청년. 그 주변에 중년 남성과 비슷한 아지랑이 같은 것이 모였다.
차이는 색. 붉은 색. 저항의 색이었다.
그러나 그런 저항이 비웃음이라도 사듯이. 균열은 더욱 심해져, 끝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소년에게는 아지랑이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청년이 무언가를 시도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 표정에는 절망이 드리우고, 보고 싶지 않은 것에서 도망치듯이 고개를 돌린다. 바닥이 무너지는 소리가 귀를 사납게 때리고, 중년 남성은 피어 오른 모래 먼지를 보고 크게 웃었다.
"그러니까~ 이왕 하는 거 더 화려하게 무너트려 준 거라고! 푸하하하하하! 사람 말을 안 들으니 이렇게 되지이!"
고개까지 뒤로 젖히고, 팔을 붕붕 저으며 웃는 중년 남성. 기분 나쁜 웃음 소리에, 이를 가는 것은 소년이었다. 도망치면 안 된다고, 하다못해 형하고 부모님은 데리고 나가야 한다는 나이에 걸맞지 않는 용기와 무모함을 짜내어 고개를 들었다.
"아앙~? 뭐냐, 꼬마야? 너도 이 아저씨가 우습냐?"
그 순간, 아저씨와 눈이 맞고 말았다. 얇은 프레임 너머로, 녹색 아지랑이가 깃든 날카로운 눈동자가, 소년의 목을 죄는 것만 같았다. 방금 전까지의 결의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소년은, 단순한 어린아이가 되고 말았다.
"그렇지~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으니까아~ 어른 무서운 줄 모르고~ 덕분에 나는~ 위로 치이고 아래로 치이고~ 집에 가봐야 딸이고 아들이고 말도 안 해주고~ 너도, 너도 그런 거지 꼬마야~? 그럼, 벌을 받아야지!"
"오, 오지 마!"
도망치려 하는 소년. 하지만 발가락 끝자락이 파편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옴짝달싹도 할 수 없어, 그저 안간힘만 써보는 소년. 그러나 그런 노력도 허무하게, 손이 떨리고 발은 쥐가 나 도통 움직일 수 없다. 소리쳐 보아도, 남자는 멈추지 않는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 이번에는 다른 형태의 죽음이. 이제는 눈을 감아도 소용 없다. 뒤에서 다가오는 건, 바라볼 수 없는 형태 모를 죽음. 이번엔 기적 같은 배신마저 없다. 소년이 그런 제멋대로의 착각에 빠지면서도, 소리칠 수밖에 없었던 건, 오로지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혀어어어엉!"
그 외침과 동시에. 중년 남성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마치 소년에게 마지막 절망감이라도 안겨주려는 양, 녹색 아지랑이가 깃든 손을 쭉 뻗었다. 백화점의, 벽을 향해서. 단단한 것이 갈라지는 꺼림칙한 소리. 벽이 이대로 완전히 박살 난다면. 정면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소년은 무사치 않으리라.
"싫어, 죽고 싶지 않아......"
소년이 무의식 중에 그렇게 중얼거린다. 더 이상은 복잡한 생각을 하는 것마저 불가능했다. 그렇게 죽음은 다가왔다. 이번엔 눈 껌뻑할 새도 없이.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 시야는 어두워지고, 더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고통마저도, 없었다. 남은 것은, 백화점 외부에서 사람들이 술렁이는 소리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중년 남성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 앉았다. 이것이, 그가 처음으로 저지른 직접적인 범행이었다.
"키키, 키키키킬. 저질렀어. 저질렀다고오. 무너지던 백화점을 아주 날리는 것도 모자라, 어린애까지 죽였어. 키키키키키, 이, 이젠 나도 범죄자다아아. 아, 아무도 나를 무서워 못 한다고오! 봤냐! 마누라! 네 남편이, 네 남편은 이렇게나 무서운 사람이다! 보고 있니 딸!? 아빠가, 아빠가 이렇게 스케일이 큰 남자야! 푸하하하하하하!"
그대로, 대자로 뻗어버렸다. 붕괴는 계속된다. 위에서 파편이 떨어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남자는 계속 혼자 중얼거린다.
"아아, 이대로 죽는 건가. 나쁘지는 않네. 백화점 붕괴 사고의 책임자, 사고에 휘말려 사망. 마지막까지 백화점에 남아 사람들을 구하려던 것으로 보임. 크으, 스트레스도 풀고 명예도 받고! 아, 이거 국가 유공자는 안 되려나. 아, 되면 좋을 텐데. 되면... 되면 이런 곳에서 죽을 이유도 없을 텐데 말야. 아아, 죽고 싶지 않다. 여보, 마누라... 그리고 이름 모를 꼬마야... 미안하다. 다, 다 내 잘못이다아. 푸, 푸하하하하!"
감정의 기복이 격했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후회하는 것인지, 통쾌한 것인지도 알 구 없었다. 그저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남자를 감싸고 있던 아지렁이는, 어느샌가 몸집 작은 중년의 배, 아니, 세 배는 되어 보였다. 어느샌가, 커다란 그림자가 남자의 아래에 깔렸다.
하지만 그건,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가 아니었다.
"아, 그러셔."
붕괴된 벽 너머로, 바람이 불어온다. 커다란 구멍이다. 모든 것을 쓸어내는 것만 같은 바람이었다. 층에 가득 차있던 모래 먼지마저도, 전부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은, 아지랑이색으로 빛나는 붉은 눈동자.
"너, 너, 너..."
그 손은, 아지랑이색보다 진하게 물들어 있었다. 묽고 진한 피로 범벅이 되었다. 주변에 흩날리는 건 모래 먼지. 남자에게 다가가던 죽음을, 일격에 산산조각 내버리고 말았다. 중년은 놀라, 삐뚤어진 안경 너머로 눈을 크게 뜬 채 청년을 바라보고 있다.
"웃기지 마, 오늘 나갈 뉴스는 아저씨의 체포 소식이니까."
청년은 그렇게 말하며, 발밑에 있던 남자의 머리를 걷어 찼다. 시선이, 한 바퀴 뱅글 돌았다. 거친 비명이나 마찰음과 함께, 근처에 박한 파편으로 쓸려 가는 남자. 안경은 저 멀리 떨어져 있다.
남자가 무어라 외치며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이번엔 청년이 아지랑이로 물든 손을 남자를 향해 내지르고 있다. 남자의 엉덩이 밑에, 커다란 원이 드리운다. 내부가 쇠사슬로 찬 원이었다.
"이미지하는 건... 새장."
"큭!"
청년이 그렇게 외치며, 주먹을 쥔다. 손가락과 손바닥이 하나가 되는 소리가, 강렬하게 울린다. 그와 동시에, 남자의 딱 3 미터 위치에서 사슬이 이리저리 얽히기 시작한다. 소년의 붉은 아지랑이가 능력은 '창조'.
지금 필요한 것은, 멍청한 자살지원자를 붙잡아 두기 위한 새장. 하지만 이전까지 능력을 과용한 탓일까. 아니면 아지랑이의 원천이 될 의지의 힘이 떨어지고 만 것일까. 도통 구축이 늦어져, 남자에게 틈을 주고 말았다.
남자는 흔들리는 녹색 아지랑이가 깃든 손을 뒤에 있던 파편에 얹고는, 초조한 느낌으로 혀를 찼다. 파편이 붕괴되어 길이 열리는 것과, 남자가 뒤로 굴러 도망치는 것, 그리고 새창이 떨어지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너 같은 거에 쓸 시간 없어."
하지만 새장이 떨어짐과 동시에, 소년이 그렇게 외치니. 이번에는 새장이 다시 사슬로 변화하여 남자를 쫓는다. 뒤는 뻥하니 뚫린 구멍, 양옆은 파편. 그 와중에도 붕괴는 계속되어 마땅히 서있기 조차 어려웠다. 남자에게는 청년처럼 사슬로 발을 고정할 능력이 없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흔들리는 녹색 아지렁이를 짜내어 천장을 붕괴, 약간의 방패로 삼는 것이었다.
그마저도 파편 사이를 꿰뚫은 사슬이, 남자를 덮쳤다. 팔이나 허벅지, 뺨을 스쳐 지나가, 자리에 주저 앉는 남자. 추격타를 걱정하지만, 청년도 힘을 다한 것이겠지. 팔을 움켜쥔 채 자세를 낮춘다.
조금 여유가 돌아오니, 중년의 혀가 또 돌아가기 시작한다.
"네, 네네네네, 네놈도 능력자였냐. 아아, 살아 있는 것도 이해가 가. 흐, 흐히히히. 더러운 인생. 모처럼 남들과 다르누힘을 얻었다고 생각했더니, 또 날 깔보는 녀석이 나타난 거냐! 흐하하하하!"
또 다시, 청년의 발 밑에 원이 생긴다. 하지만 그 크기도 훨씬 작아져 있었다.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구조원들이 건물 내로 진입했다고 한다. 그럼 이 정도라면 괜찮겠지. 소년은 작게 자리에서 뛰었다. 이번에야말로 끝을 낼 생각으로.
"그 힘은 남들과 다른 힘이 아냐. 모두가 가지고 있는 힘이지."
"또 나를 부정할 셈이냐아아!"
마지막 발악이라도 되는 것일까, 청년의 주위에 무수한 원이 뜨기 시작한다. 그러나 청년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붉은 눈동자가 바라보는 건 오로지 한 점. 남자의 발 바로 앞. 창조의 쇠사슬을 타고, 최단 루트로, 최고속으로.
촤르르륵, 사슬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그 끝자락이 남자의 발 바로 앞에 박힌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청년은 터지듯이 무너지는 파편 사이를 꿰뚫으며 남자에게 다가간다. 저 어깨 뒤로 뻗은, 주먹과 함께.
"어금니 꽉 깨물어."
중요한 무언가가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중년의 몸이 공중에 부웅 떠오른다. 백화점 5층 높이의 상공. 아주 잠시, 공기가 둥실 몸을 받쳐주는 감각에 휩싸이지만, 곧 엄청난 기세로 추락을 시작한다.
이대로 떨어져 죽는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당사자인 중년도, 무슨 일인가 바라보던 구경꾼들도. 붕괴의 여파로 튕겨져 나간 피해자라 생각한 걸까. 눈물을 머금은 채 고개를 돌리는 사람마저 있었다.
"아직 죽기엔 일러."
적어도, 그런 목소리와 붉은 아지렁이로 만들어진 쇠사슬을 보기 전까지는. 청년의 붉은 쇠사슬은 구멍 너머로 뻗어나가, 중년의 팔과 다리를 묶었다. 다시 한 번 추격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모두가 지켜보는, 백화점 상공에서.
쇠사슬은 남자를 향해 감겨지고, 청년은 또 다시 그 눈앞으로 닥쳤다. 얇은 쇠사슬을 백화점 벽에 걸고, 자신의 발이 향하는 곳마다 발판을 창조하는 식으로 고도를 유지한다. 청년의 몸보다 약간 높은 위치로 뻗어 있는 고정용 사슬은, 그 붉은색과 더불어 악마 같은 형상을 유지했다.
아니, 어쩌면 청년의 행동 자체가 그렇게 보인 것일지 모르겠다. 청년은 그 주먹으로, 다리로, 중년의 남성을 용서 없이 가격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단순히 아버지뻘의 사람을 폭행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이 힘은 특정한 감정의 폭발로 구현화되는 거야. 그건 사람을 가리지 않고. 단지 아저씨가 제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 했던 것뿐이지."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여전히 청년의 뒤에서는, 꾸물거리는 녹색 아지렁이가 백화점 벽을 좀 먹고 있었다. 남자의 능력은 붕괴. 이대로 바깥을 향해 건물이 무너져 버린다면, 또 다른 피해자가 만들어지고 만다.
때문에 청년은, 주먹으로라도 남자가 능력에 집중하는 걸 막아야만 했다. 남자는 그렇게 맞으면서도, 무엇이 그리 좋은지 이빨 사이로 낄낄낄 웃는다. 퉁퉁 불어 오른 얼굴과 맞물려,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다 세상이 잘못된 거 아니냐고...... 사람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만들어 버린 게 죄지. 쿠히히히, 푸하하하."
"뭘 잘못 생각하나 본데."
청년은 남자의 말을 단칼에 잘라냈다. 배에 큰 힘이 실린 주먹을 찌르며.
"이 힘은 부정적인 감정으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냐. 네놈이 정말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다면... 영웅 조차 될 수 있었겠지."
"영웅, 영웅이라! 폼 재고 있네, 마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그러는 넌, 그러는 넌! 그렇게 잘난듯이 떠드는 넌 뭘 하고 있는데! 사람은 구할 생각도 안 하고, 남이나 쥐어패는 게 영웅이냐!"
남자는, 자신이 저지른 일은 생각도 않고 적반하장으로 소리친다. 그리고 그게 떨어진 거리 때문에 비명으로 들린 것이리라. 사람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남자를, 분노에 찬 표정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시간을 끌으면 위험하다. 그 사람에게 어떤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며, 청년은 슬슬 이 지겨운 한탄의 끝을 내려 했다.
어지랑이 능력의 원천은 감정. 그 힘의 세기도, 정밀도도, 모두 감정에서 비례한다. 감정이 격하고 강해지면 강도도 정밀도도 높아진다. 반대로, 그 감정을 제어해낼 수 있다면, 위력도 조절할 수 있다. 물론 그건 전적으로 감정을 컨트롤하는 사용자의 몫이지만, 감정이란 내부 요인으로만 정해지는 게 아니었다.
청년은 남자를 사로 잡고 있는 쇠사슬을 강한 힘으로 끌어 당겼다. 이제 위치는 정반대가 되었다. 남자는 뻥뚫린 백화점의 구멍을 바라보게 되었다. 여전히 붕괴의 여파로 생긴 모래 먼지에, 안을 잘 볼 수 없었다. 운 좋게도, 때마침 백화점과 건물 사이로 바람이 불어왔다. 여름에 어울리지 않는 산뜻한 바람이었다.
"네 눈으로 봐."
청년은 모래 먼지가 걷히는 걸 지켜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감정 없는 목소리였다. 마치, 모래 먼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남자는 가소롭다는 양 코웃음을 쳤다.
"핫, 저런 시체 밖에 없는 걸 보고도, 제 스스로를 영...... 영..."
하지만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모래 먼지 너머에 있는 것을 보고 말을 잃고, 어깨 힘이 빠진다. 어지간히도 충격을 먹은 것이겠지. 그럴만도 했다. 모래 먼지 나머에 펼쳐져 있는 것. 그건 아지랑이였다.
붉디 붉은 아지랑이로 만들어진 쇠사슬이, 천장의 파편을 관통하여 바닥에 그대로 꽂아두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금 전, 소년을 덮친 커다란 파편 덩어리도, 쇠사슬로 똥똥 뭉쳐 저지되어 있었다. 소년은 종이 한 장 차이로 파편을 피해, 죽은듯이 기절한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중년과 청년이 보지 못 하는 곳마저도. 이를 테면 방금 전 중년이 박살낸 바닥도, 전부 쇠사슬로 봉인되어 있었다. 모래 먼지 속에서, 그 대량의 파편을 막아낼 사슬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너 설마, 나를 붙잡아 두는 동안에도..."
"저것까지 구축하고 있었던 거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
청년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감정의 아지렁이를 이용한 능력은 세 단계를 따른다. 형태의 구축, 위치의 지정과 이동, 변화의 실행. 그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것이, 감정과 정신력이다. 자신의 정신력 이상의 능력을 사용하면, 감정의 폭주에 사람이 망가지고 만다. 그래, 방금 전까지의 중년처럼. 그러니까 이건, 청년에게도 절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청년이 그런 거짓말을 한 이유.
"웃기지. 특별한 힘을 얻었다고 설쳤더니, 곧바로 더 굉장한 녀석이 나타났잖아. 아니다, 어쩌면 단순히 아저씨가 너무 약했나?"
청년은 중년의 남자에 귓가에 속삭이듯이 말했다. 역시나 감정 없는 목소리. 그저 사실만을, 자신이 우월한 게 흔들리지 않는 진실이라는 것처럼 속삭인다. 남자는 그저 멍한 표정으로 바라만 보고, 그 손의 아지랑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물었지? 사람 하나 구하지 못 하면서 영웅인 척 하지 말라고? 잘 봐. 이게 영웅이 사람을 구한 멋있는 광경이니까."
한 마디, 또 한 마디 이어질 때마다, 중년의 어깨가 흔들린다. 양손의 아지랑이가 녹색 빛을 잃고, 다른 색이 섞이기 시작한다. 그걸 확인한 청년은, 마지막 쐐기를 박는다. 지금의 남자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긴, 아저씨에게는 잘 안 와닿겠지. 아무것도 못 하는 떨거지니까."
허리를 접어, 중년의 귓가에, 한 글자 한 글자 새겨주듯이. 붉은 앞머리가 표정을 싹 가려 버리지만, 입가에 깃든 웃음만은 확실히 드러나 있었다. 그 말에, 끝내 중년의 안에서 뭔가가 끊어지고 말았다.
중년의 손에 깃드는 붉은 아지랑이. 형태의 구축도, 위치 지정도 끝내놓았다. 청년이 방해하지 않는 이유는 모르지만, 우월감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라 멋대로 해석했다. 중년은 그대로, 열등감과 분노를 담아 주먹을 쥔다.
"터져버려어어어어어어!"
그렇게, 터질 줄만 알았다. 이제까지와 다른, 맹렬한 분쇄음이 들릴 줄 알았다. 그래야만 했다. 기세 좋게 뻗은 팔은, 그저 여름의 더운 공기만 가를 뿐. 아무 일도 일으키지 못 했다. 중년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 한 채,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어?"
동시에, 붉은 아지랑이가 깃든 남자의 손을, 마찬가지로 붉은 아지랑이가 깃든 청년의 손이 잡는다. 그 손목에, 은빛 무언가가 드리운다. 수갑이었다. 청년은 무릎 꿇고 있는 중년의 다리를 걷어 차 일으켜 세우고는 건물 내부로 연행했다.
힐끔 아래를 내려다 보니, 구경꾼들이 다들 뭔지 모를 표정으로 자신들을 바라보았다. 소리 없이는 이해하기 힘들었겠지. 이제 어떤 이상한 소문이 돌지가 걱정이었다. 청년이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으니, 끌려 가듯이 걷던 중년 남성이 대뜸 물었다. 독기 빠진, 힘없는 직장인의 전형적인 목소리였다.
"형씨...... 공무원이었구먼."
"비슷한 겁니다."
청년의 분위기가 확 바뀌어, 딱딱한 말투와 목소리, 쌀쌀 맞은 태도로 대한다. 업무용 분위기였다.
"그래...... 다 끝나고 보니 별 거 없네. 뭔가 뻥하니 빠진 것만 같은 기분이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린다. 그도 그렇겠지. 수갑을 착용함과 동시에, 안쪽에 있는 자그마한 주사로 진정제를 놓았으니까. 지금은 그저 엄청난 허무감에 휩싸여, 이렇다할 생각도 들지 않을 터이다.
그러니까 더는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겠지. 청년이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던 그때, 불쑥 중년 남성이 청년이 불렀다.
"형씨."
"뭐죠?"
퉁명스럽게 대꾸하니, 남자는 어물거리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물었다.
"그, 어째보겠다는 생각은, 절대, 절대 아닌데. 마지막에 그거, 왜 안 터진 거야?"
"......"
"아, 아니, 그, 그, 그냥 궁금해서."
그 어처구니 없는 질문에, 청년이 날카롭게 째려 보니 황급히 말을 돌린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약 때문에 흥분 증세는 다 날아 갔겠다, 정말로 순수한 궁금증일 수 있겠다 싶었기에, 한 번 푸욱 한숨을 내쉰 청년은 마지못하다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사실, 이런 것을 알려주는 것도 재발 방지를 위한 일이지만, 청년은 그 이론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아지랑이의 능력은 감정으로 정해진다. 감정과 욕망이 섞인 것이 능력의 정체로. 대체로 그 감정을 실현시켜주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방금 전까지 남자가 두르고 있던 녹색 아지랑이의 원천 감정은 체념. 욕망은 자포자기한 심정에 따른 붕괴.
때문에 자포자기하고 체념할 수록 강해진다. 붕괴와 함께 자살을 결심했을 때나, 공중에 매달려 청년에게 일방적으로 얻어 맞았을 때에 그 위력이 가장 강한 것이 그 증거이리라. 그렇다면 그런 감정의 공격을 막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가.
청년을 비롯한 '소위 공무원'들이 사용하는 가장 정석적인 방법. 그건 바로, 가장 큰 감정으로 바꾸는 것. 체념이 막기 힘든 붕괴로 이어진다면, 감정을 다른 곳으로 돌려 제어하기 쉬운 능력을 끌어낸다.
청년 또한 마찬가지로, 일련의 상황을 유도해 체념을 열등심으로 바꿔 놓는 것이었다. 열등심으로 발생하는 능력은 대개 범위가 적고 사용자 개인에 한정된다. 대체로 명확한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제어하기도 간단한 것이다.
그런 내용을 요점만 찝어 간결하게 전하니,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서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사람의 감정이란 게 의외로 남에게 좌우되기 쉽구나."
청년은, 못 들은 걸로 했다. 애초에 들어줄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니까.
"여기서 기다려요. 도망칠 생각 말고."
청년은 중년 남성을 비교적 안전한 구석에 내려놓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대답 조차 듣지 않았다. 들어줄 여유도 없었다. 구조대가 투입되었어도, 붕괴는 계속되고 있다. 중년의 말처럼 중년은 거든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애초에 무너질 건물이었던 것이다. 이곳이 붕괴의 중심과 거리가 멀어 망정이지, 중앙은 이미 폭삭 내려 앉았다.
이곳도 언제 그렇게 될지 모른다. 청년의 능력을 늦추고 있지만, 이미 너무 많은 능력을 사용했다. 정신력도 한계에 가까웠다. 시간에 쫓기듯이 발을 옮기는 청년. 그러나 그렇게 길을 가던 와중, 불쑥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발을 멈추었다.
한쌍의 시신. 이제는 그곳에 없는 소년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시신이었다. 청년은 말없이 그에 다가간다. 위에 깔린 파편을 치워보니, 거의 형태도 알아 볼 수 없는 잔혹한 현장이 펼쳐져 있었다.
사슬로 조심히 들어 올려, 아지랑이로 감싼다. 아직 가족이 살아 있다면 그 곁에 전해주는 게 도리이리라. 다만 소년에게 직접 보여줄 수는 없는지라, 다시 중년 남성을 놓은 곳까지 돌아가 내려놓았다. 남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가르쳐줬다가 보일 반응을 생각하니 역겨워져, 바로 발걸음을 돌리는 청년이었다.
소년은 죽은듯이 누워 있었다. 주위 파편을 치우고 안아 올린다. 잠시간의 고생에 힘이라도 빠진 것처럼 가벼운 소년이었다. 자신을 껴안은 온기에, 서서히 눈을 뜨는 소년. 지근거리는 눈에 띄는 붉은 머릿결과 눈동자. 그리고 사람 같지 않은 웃음기가 있었다.
"혀엉...?"
"그래, 여기 있어."
아직 만난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아주 자연스럽게 그런 말이 새어나왔다. 청년도 그게 싫지만은 않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니 소년의 얼굴에 안도가 드리운다. 하지만 무엇이 떠오른 걸까. 곧 눈에 눈물을 머금더니 울먹이기 시작한다. 끝내는 방울만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청년의 가슴에 얼굴을 묻어 그 옷을 적시며 말했다.
"엄마랑, 아빠랑... 꿈에서 만났어."
"......"
청년은, 소년을 품에 꼭 껴안았다. 그 등을 토닥이면서, 조용히 눈을 감고 말을 들어준다.
"강을 건너려고 하니까...... 너는 아직 이르다고, 오면 안 된다고...... 아무리 소리쳐도 끝까지 못 오게 막았어. 형, 엄마는, 아빠는 어디로 간 거야? 좋은대로 갔을까? 나 때문에 죽었다고, 내가 미워진 걸까?"
"그렇지 않아. 마지막까지 너를 지키려 했던 부모님이 널 싫어할 리가 없잖아. 분명 좋은대로 가셨을 거야. 누군가를 지키다 죽은 사람은 모두 그러니까."
그 말을 끝으로, 대화는 끊겼다. 소년은 조용히 울고, 청년은 조용히 받아주었다. 시간마저 멈춰 버린 듯한 공간에사, 움직이는 것은 붉은 아지렁이로 만들어진 사슬 뿐.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소년에게는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각인되었다.
"다 울었니?"
"응."
"장하네."
청년이 소년을 내려 놓으니, 비록 얼굴은 붉어져 있어도 눈물은 머금고 있지 않았다. 청년의 확인에도 기운 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아이에게는 강한 충격이었을 텐데, 지지 않고 이겨낸 소년이 마냥 기특해진 청년은 그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곧 구조대가 올 거야. 이 층은 내가 안전을 확보했으니까, 어디 이상한데 가지 말고 아저씨랑 있어줘."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보호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형편이 되지 못 했다. 붕괴는 멈추지 않았고, 도움을 구하는 사람은 수없이 많다. 가야만 했다. 때문에 청년은 소년의 손에 종이 한 장을 쥐여주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지 않을까 싶어 준비해둔 것이, 드디어 빛을 본 것이었다.
"이건 내 주소야. 만약 구조 후에 정 갈곳이 없으면 얼마든지 찾아와도 좋아."
멍한 표정을 짓는 소년. 하지만 곧 그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한 것이리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물었다.
"정말 그래도 돼?"
"너 같이 어린애 하나 정도는 괜찮아."
그 말을 끝으로,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소년이 또 다시 울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물이, 방금과 전혀 다른 의미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입을 반쯤 벌린 채, 똑바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놀람과 기쁨의 눈물이리라. 청년은 그 표정에, 살짝의 만족감을 느끼며 소년에게서 등을 돌려, 백화점 벽에 뚫린 구멍 위에 섰다.
자신을 구해준 것도 모자라, 덜컥 그런 약속까지 해버렸다. 어지간한 보통 사람은 절대 할 수 없는 일. 그렇다면 청년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소년에게 청년은, 어느샌가 TV에서나 보던 영웅상이 되어 가고 있었다. 청년을 붙잡는 그 목소리 또한, 살짝 기대에 차 있었다.
"형! 형은 뭐 하는 사람이야!? TV에 나오는 영웅이야!?"
어느샌가,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백화점 벽에 뚫린 구멍으로 들어오는 건, 오렌지빛 햇살. 기이하게도, 태양마저 그 원의 크기와 알맞은 위치에 떠있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오렌지빛 태양, 그리고 커다란 청년의 등.
마치, 소년의 말을 뒷받침 해주는 것만 같은, 인상적인 분위기였다. 청년은 완전히 돌아보지 않고, 살짝 입가만을 보이며 운을 뗐다. 그것마저도, 분위기에 어울리는 인상적인 행동이었으나,
"아니, 그냥 심부름 센터 직원일 뿐이야."
나온 말은 로망이라고는 하나 없는 순도 100%의 진실이었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던 소년이, 돌처럼 굳어지는 것도 모자라 쩍쩍 갈라지는 소리마저 난다. 입이 벌벌 떨리면서 영문 모를 소리를 되풀이 한다. 그 사이로 무언가 혼 같은 게 새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것도 개의치 않고, 아지랑이의 사슬을 아래로 뻗는 청년. 그대로 훌쩍 아래층으로 뛰어린다. 소년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 그 입가에는 살짝 웃음이 번져 있다. 그러나 떨어지는 압력과 함께, 소년의 말이 다시 한 번 되살아 난다.
영웅. 방금 전의 자신은, 소년에게 그렇게 비쳤던 것일까. 그렇다면 명백히 소년이 잘못 본 것이다. 자신은 영웅 따위가 아니다.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래, 한 때는 영웅을 꿈꾼 적도 있었다. 영웅이라며 떠들고 다닌 적도 있었다. 그리고, 혼쭐이 났다.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영웅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자신이 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직업에 지나지 않는다. 먹고 살기 위한 일이다. 그러니까 그런 거창한 칭찬은—기쁘기는 하여도—필요는 없었다.
지금도 그저 먹고 살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아래층에 내려 선 청년은 그런 생각을 한다. 참혹한 광경에 눈살을 찌푸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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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습니다."
문을 열면서 그렇게 말해 보지만,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자신이 또 실수한 걸 깨닫는 청년. 한동안 계속 이러고 있다. 문을 열자마자 보스가 나타나서야 멋이 없다는 이유로, 보스가 반 억지로 설치한 것이었다. 익숙해지지 않을 만도 하다.
멀쩡한 방에 억지로 벽을 세워 만든 좁은 복도를 지나니, 조잡한 나무 문이 나타났다. 그래도 또 폼은 잡고 싶은 것인지 엉성한 검은칠이 되어 있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분명 제정신이 아니리라. 절로 그런 생각이 드는 청년.
그리고 문을 열어, 명색상 보스방의 모습을 본 순간.
"그건 또 뭡니까?"
그런 생각은 더욱 강해지고 말았다. 고작 하루. 사무실을 안 나온 건 사건이 있었던 하루 뿐이다. 근데 그 사이, 이상한 잡동사니가 또 늘고 말았다. 대체 이런 잡동사니 산을 어떻게 뚫고서 새로운 걸 가져 오는가.
청년은 매번 그게 의문이었다. 보스는 매번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지만. 이번에도 해질대로 해진 사무용 의자에 깊게 등을 기대며 되물었다. 당연한 걸 왜 묻냐는 식으로.
"뭐가?"
"너무 많아서 찝기 힘들지만, 일단 그, 의자라던가."
"아, 이거~?"
보스가 팡팡 의자 손잡이를 친다. 그것도 하필 가죽이 벗겨져 속이 드러난 부분을. 그때마다 뭉게뭉게 먼지가 피어 오른다. 그런 것에 친숙하지 않았던 청년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질겁을 한다.
아주 잠시, 설마 정말로 쓰레기장에서 주워 온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은 청년. 그러나 바로 고개를 붕붕 젓는다. 그래, 자신의 보스라면 충분히 그럴만한 사람인 것이다. 단지 그게 점점 에스컬레이터 해갈 뿐이지.
"쓰레기장에서 주워왔지."
빙고다.
"그럼 그 고양이는요?"
"아, 이거~"
이번에는 손잡이 위에 올라와 있는 고양이를 쓰다듬는 보스. 그러나 부드러운 감촉은 없다. 도자기 같은 딱딱함만이 느껴질 뿐이다. 청년도 보스가 무슨 말을 할지 대강 예상은 같지만, 그래도 한 번 예의상 물어보는 것이었다.
"보스하면 고양이잖아?"
역시나 빙고. 다만 이번엔 경우가 다르다.
"복을 불러오는 고양이도 치는 겁니까?"
"고양이는 고양이니까."
"또 주워 오셨어요?"
"설마."
과장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는 보스. 웬일로 제값을 주고 산 모양이다. 하지만 주워왔다는 말보다 사왔다는 말에 오히려 표정이 안 좋아지는 청년. 안 그래도 먹고 살기 힘든 마당에 저런 사치를 부리냐는 거냐며 이를 바득바득 간다.
물론 말로 꺼냈다간 밀린 봉급도 받지 못 하고 쫓아날지도 모르기에 속으로만 하는 소리다. 변변찮은 능력이 없어 어디에 써먹지도 못 할 자신을 먹여 살리다시피 하는 사람이니까. 여유로운 태도도 그 때문이겠지.
그러나 보스 또한 청년과 오랫동안 지내온 사이다.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아도 얼굴만 보면 알 수 있었다. 품 안에서 느긋히 리모콘을 꺼내, 청년의 말을 부정하기라도 하듯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괜찮아. 하나 밖에 없는 부하 직원이 대박을 터트렸거든."
사무 책상 구석에 놓인 TV에 전원이 들어온다. 코딱지만한 구식 아날로그 TV였다. 화면에서는 여성 아나운서가 비장한 목소리로 기사를 전해주고 있었다. 정규 뉴스 시간이 아닌 걸 생각하면 속보이리라.
아나운서의 뒤에는 폭삭 내려 앉은 건물과 구조 대원, 주저 앉아 우는 사람들이나 무슨 일인가 싶어 멍하니 바라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잠시 그런 영상이 흐르다가도 이따금 자료 화면 같은 게 방송된다. 두 남자가 싸우는 영상을, 아나운서는 "이번 일은 능력자의 소행으로 보이며, 사건 진행 중에 능력자들의 싸움이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뉴스를 잘 챙겨 보는 청년은 아니었지만, 그 뉴스가 어떤 뉴스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향해 있던 백화점 붕괴 사고이다. 보스는 지시도 내리지 않았는데 멋대로 행동한 걸 나무라는 것이리라. 곧바로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청년. 그러나 보스는 손을 붕붕 젓는다.
"아니아니, 나무라는 건 아냐. 오히려 칭찬하는 거라고?"
"하지만......"
본래 청년의 역할은 백화점에서 장을 봐서 전달하는 것. 요즘 들어 백화점에 대해 흉흉한 소문이 돌아, 무서워 못 가겠다는 주부의 의뢰였다. 그런 와중에 사고가 벌어졌고, 청년은 그만 몸이 이끄는대로 행동하고 말았다.
장바구니도 내려놓았다 어느샌가 완전히 잊고 말았다. 지금쯤 파편에 깔려 가루가 되어 있으리라. 둘의 일은 신용을 먹고 사는 법. 하물며 의뢰인은 이 주변을 꽉 잡고 있는 아줌마이다. 주부회의 쫑알쫑알 통신에 올랐다가는 밥줄이 끊길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사과한 것이었지만, 보스는 오히려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다니까? 넌 올바른 일을 한 거고, 거기다 이거."
보스는 또 다시 품안에 손을 넣었다. 뭐가 저리 많이 들어가는지 궁금해질 정도의 양복 안주머니에거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제법 두툼한 편지 봉투였다. 보스가 살짝 손목을 비트니, 노란색이 엿보인다.
"무슨 돈입니까?"
청년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자신의 사무소에 저만한 돈이 들어 올 리가 없을 터이다.
"뉴스 속보가 터지자마자 그 아줌마가 달려오지 뭐야. 한창 창창한 청년을 그렇게 보내서 미안하다고. 유가족에게 전해 달라고. 내가 연락도 됐고 무사하다고 해도 도통 한사코 듣지를 않아서야 말야."
"그런 돈을 받아도 되는 건가요?"
"아무리 거절해도 주는 걸 어째? 뭣하면 네가 주고 오던가."
"......솔직히 조금 힘들어서요."
"그럴 줄 알았다."
청년이 쓴웃음을 지으니, 보스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 청년의 위치에서는 보스의 얼굴을 볼 수 없다. 다만 살짝 엿보이는 뺨과 희미하게 올라간 입꼬리로만 그렇게 추측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잡일만 없던 요즘에는 거절하기 힘든 금액이리라.
보스는 그 돈 다발로 사무용 책상을 탁탁 내리치며 말했다.
"그러니까 가슴 당당히 펴. 잘못한 것도 사과할 일도 아니니까."
"돈 안 받았어도 그런 소리 할 수 있어요?"
"......조금 힘들지."
그렇겠지. 이건 어디까지나 결과 OK인 것이니까. 다만 보스가 화를 내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청년의 몸을 걱정해서 하는 말일 터이다. 청년이 아무리 뛰어난 능력자라도, 능력자와 싸우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하물며 다른 회사처럼 감옷이나 슈트 같은 걸 마련해줄 돈도 없다. 그런 일을 전업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도 그런 걸 권장하게는 될지도 모르지..... 쿠쿠쿠."
"또 무슨 소리를 하시려고..."
보스가 이런 웃음 소리를 낸다는 건,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이다. 꿍꿍이야 늘 있지만 그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현기증을 일으키는 꿍꿍이가. 손이 또 다시 양복 안주머니 쪽으로 향하기에, 청년의 표정이 본격적으로 굳어진다.
이상한 슈트라도 꺼내면서, 본격적으로 영웅 활동이라도 하라는 건 아닐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절대 사양이지만, 막상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몰랐다. 사무소를 살릴 방법이 그게 밖에 없다고 하면, 청년은 절대 거절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그 기대는 배신 당하게 된다.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이거다!!"
보스는 기세 좋게 바닥을 걷어 차, 청년을 향해 빙글 돌아선다. 펄럭, 양복을 열어 젖힌다. 양손을 교차시켜, 무슨 바바리맨처럼 되는 것처럼. 양복 아래에 있는 것. 다른 소위 영웅들이 쓰는 튼튼한 갑옷? 정치를 숨기기 위한 슈트? 아니, 달랐다. 비슷하지만 달랐다.
"......제정신으로 만든 겁니까?"
청년에게 잠시간 말을 빼앗고 만 그것. 그 분류만은 가리기 쉬웠다. 단적으로 말하면 티셔츠였다. 면 소재의 반팔 티셔츠. 중요한 것은, 그 티셔츠에 프린팅되어 있는 것이었다. 가슴팍부터 어깨 소매까지. 오로지 하나로만 꼼꼼히 프린팅되어 있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한 펑키한 중년 남성이, 입을 크게 벌린 채 활짝 웃고 있는 사진으로.
보고 있자니 꿈에 나올 것만 같은 디자인에도, 보스는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청년을 향해 한 발 다가가면서 옷을 들이민다. 실제로도 티셔츠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기겁을 하며 한 발 뒤로 도망가는 청년.
"물론이지! 제 정신도 모자라 심혈을 기울여 만든 거라고!"
"아, 네. 정말 멋지군요. 그나저나 그런 걸로 뭘 어쩌겠다는 겁니까?"
일단 긍정해주는 청년. 해줘야만 한다. 부정하면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르니까. 어떤 식으로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 임팩트가 커서 어떤 문맥으로 이걸 보게 되었는지도 잊어 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정산적인 대답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잊어버린 것일까.
"자네가 이걸 입고 활동하는 거지!"
"......"
말을 잃었다.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제까지 그 어떤 활동도 군말 없이 해결한 청년이, 돌처럼 굳어져버렸다. 입을 반쯤 벌린 채. 마치 그 사이로 영혼이 나오고 있는 것처럼. 겨우겨우 정신을 찾는 데까지,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마치 기름 바르는 걸 잊은 기계처럼 삐걱거리는 동작으로, 간신히 팔만 올려 티셔츠를 가리켰다. 그 목소리도 믿을 수 없는 걸 확인하는 것만 같이 더듬거렸다.
"누, 누가 뭐, 뭘 입어요?"
"네가, 이걸!"
서랍 안에서, 잘 포장된 같은 디자인의 티셔츠를 꺼내는 보스. 아무래도 잘못 들은 게 아닌 모양이다. 에초에 자신이 왜 이런 옷을 입어야 하는가. 도통 납득이 가지 않는 청년. 납득이 간다고 입고 싶어질 옷도 아니었지마는.
"내가 이걸 왜 입어요!"
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이며 흥분하는 청년. 이곳이 아니면 잘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말을 내뱉은 순간,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닫는 청년. 늘 보스의 페이스에 말려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에는 이미 늦었다.
보스의 얼굴이 바로 코앞까지 와있다. 펑키한 노란 염색 머리는 쓸데 없이 눈이 부시고, 으쓱이는 눈썹은 징그러웠다.
"그야 우리 사무실을 홍보하기 위함이지~! 네가 이 옷을 입고 활동하면, 이 배정호는 금세 전국구 스타! 그렇게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오면 이 베정호 무엇이든 사무소는 전국구 흑자! 끝내는 해외 진출! 다큐화! 만화화! 애니화! 캐릭터화! 헐리우드 영화화! 나는 돈방석 부귀영화! 푸하하하하!"
듣기 싫어 귀를 막아보아도 제멋대로 처들어 온다. 보스—배정호—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이런 변두리에서 심부름 센터나 하면서 참 꿈도 크다 싶지만, 그래도 매일 같이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집념의 노력가이기도 했다.
방향이 어긋나 있은 것과, 주위 사람들을 말려드는 게 문제지. 청년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안 입어요. 더는 그런 일 할 생각도 없고."
그 말을 들은 보스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이렇게 귀여운데?"
"안 귀여워요! 애초에 사무소의 이름을 팔고 싶은 거면 소장님 얼굴이 아니라 사무소 로고라도 박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내 얼굴이 안 팔리면 의미가 없잖아! 얼굴이 안 팔리면 사무소가 잘 되도 영화화는 꿈도 못 꾼다고?"
"......"
견디지 못 하겠다는 양 사무용 책상을 부여잡고 부들부들 떠는 청년. 이 사람에게는 정론이 통하지 않는다. 상식적인 사람이 자신을 끼고 돌 리는 없으니, 청년도 때로는 그 정신 머리에 감사하고는 한다.
하지만 이런 일상적인 대화를 할 때가 되면, 늘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진다. 결국, 또 다시 한숨을 푹 내쉬는 청년,, 보스의 가슴 주머니에 꽂혀 있던 돈다발을 낚아채듯이 뺏었다. 보스도 저항하지 않는다. 둘만의 봉급 지급법이었다.
"밀린 것까지 해서 얼마나 떼가면 돼요?"
"절반 뚝 떼가."
"......보스가 정상이야."
담담한 보스의 한 마디에,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청년. 늘 이상한 사람이 평소와 다르다면 정상적인 것밖에 없겠지. 분명한 칭찬임에도, 보스는 토라진 얼굴로 돈다발을 향해 손을 쭉 뻗으며 투덜거렸다.
"싫으면 말던가."
"싫긴는요."
바로 절반을 뚝 떼어 품에 넣고는 한 발 뒤로 물러서는 청년. 받아야 할 것도 받았겠다. 이제 그만 돌아가도 되지 싶었다. 골치 아픈 것에게서 도망치자는 심리도 당연히 있었지마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짧게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돌려 방을 나가려던 찰나였다.
"박상태."
보스가 불러세웠다. 보스는 폼 잡는 걸 좋아한다. 딴에 무게를 잡을 때에는 늘 이렇게 성을 붙여 가며 부른다. 이유도 없이 돌아보지도 않고, 그저 "네."하고만 짧게 대답하는—박상태라고 불린—청년.
"너무 표면적인 거에 집착하지 마라."
"......"
대답해줄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맥락 없는 말이었다. 무엇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인가. 자신은 무언가에 집착한 기억이 없다. 오히려 집착하고 있는 건 보스 본인이 아닌가.
때문에 또 옷을 강요하는 것이라며 제멋대로 해석하는 청년. 그러니 이제는 대답할 가치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라~"
엉성한 문이다. 닫아도 살짝 비어 있는 윗틈으로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아, 그러고 보니 너, 결혼은 안 하냐!"
"그러니까 네가 맨날 로리콘 소리를 듣는 거야!"
문을 닫고서도 보스의 헛소리는 계속되었다. 그나마 맘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게 저런 사람이라니. 자신은 정말 괜찮은 것일까. 나중에는 자신도 저렇게 되지는 않을까. 몇 번째인지 머를 한숨을 내쉰 청년은, 자신의 성격에 회의감을 느낀다.
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보수공사가 잘 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가난한 동네라고 잘 하지 않는 것일까. 가로수가 망가져 바쁘게 점멸하고 있다. 그런 음침한 골목길의 구석탱이. 창문 창살에는 녹이 슬어 있고 색이 바란 콩크리트로 둘러싸인 건물. 청년의 보금자리다.
"다녀왔습니다."
잠그지도 않은 문을 열고 들어간다. 입을 열고 목소리를 내보아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자신을 맞이해주는 건 액자. 그나마도 지지대가 낡은 탓인지 엎어져 있다. 세워도 다시 넘어질 뿐이겠지. 차라리 새로 액자를 사오자고 결심하고 짧은 현관을 넘어서는 청년.
집은 여전히 고요했다. 방도 주방도 없이 싱크대만 덜렁 놓인 한없이 간소한 집이다. 테이블 하나, 테레비 하나, 자그마한 옷장과 냉장고. 1인용 식기와 간소한 요리 도구. 죽지 않을 정도로만 두꺼운 이불. 청년의 전재산이다. 구태여 문을 잠그지 않는 이유기도 했다. 도둑이 들어와도 가져갈 것이 없으니까. 괜한 동정심에 돈이나 놓고 가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래도 집은 집인지라, 자리에 앉은 청년은 한숨을 돌린다. TV라도 볼까 싶어 켜보지만, 나오는 건 낮에 있었던 사고 뿐. 바로 전원을 끄고 리모콘을 저 멀리 던져버린다. 간신히 끝난 힘든 하루를 돌이켜 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잠시 쉬다가 밥이나 먹을까 싶어 밥통을 열어본 순간.
"아......"
절로 탄식이 새어나왔다. 텅빈 밥솥 안에는 밥풀 떼기 밖에 없었다. 도저히 성인 남성이 해결할 양이 되지 않았다. 개미면 모를까. 할 수 없이 쌀통을 열어 보지만, 혹시나 싶었던 게 역시나였다. 텅텅 비어 있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밖에서 적당히 떼워야겠네."
혼자 살면 느는 게 혼잣말이던가. 청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채비를 갖춘다. 돈이 들어왔으니 잠깐의 사치는 괜찮겠다 싶었다. 밖으로 나서니 바뀌어 가는 계절의 찬바람이 거셌다. 편의점도 먼곳이다. 얇은 옷과 강한 바람에 얼어죽을 수는 없으니 재빨리 발걸음을 옮기던 차였다.
"제법 귀여워 보이는 아가씨인데 혼자 어딜 그렇게 가실까~?"
"외로운 거 아냐? 이 오빠들이 놀아줘야겠는걸! 푸하하하!"
척 들어도 성가신 목소리와 웃음 소리가 들려온 것은.
아무리 치안이 좋은 나라라도, 이런 외진 곳에는 바보가 자리 잡기 마련이었다. 청년은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기어코 목소리가 들린 골목을 향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정의감 같은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해결하지 않으면 밤에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잔다. 낡은 아파트에 방음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뭐, 길 가는 건 길 가는 거고. 어때, 지금은 이 오빠들이랑 놀지 않을래?"
"저리 비켜."
이어서 들려온 이질적인 목소리와 골목의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엿보이는 등에, 청년은 바보들의 어휘력에 질려버렸다. 다섯 명이나 있는데 지적 하나 없단 말인가. 목소리는 한없이 앳되고, 키는 청년의 절반 밖에 돼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보아도 아가씨로는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소녀라고 해야겠지. 등에는 자기 상체만한 커다란 백팩을 매고 있었다.
"비키라니까? 안 들려? 귀 먹었어?"
"하 참 나. 뻔뻔한 아가씨네. 사람이 친절히 길을 알려줬으면 대가를 치뤄야지.
"정의는 악당과 함께 하지 않아."
그런 소녀는 머리를 피어스로 둘둘 만 바보들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었다. 청년이 양쪽 모두에게 들키지 않도록 천천히 다가가니, 어둠속에서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제법 의지가 담긴 눈동자에,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는 청년.
그에 이끌리듯이 이번에는 한 발 성큼 다가간다. 그 박자에 맞추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로등에 불이 들어온다. 이번에는 빛을 반사하는 듯한 금발과 전체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입을 앙 다물고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도도하게 서있다.
"야, 들었냐!? 악당이란다, 악당!"
"푸하하하! 능력으로 건물 부수고, 사람 패고 다니는 애들에 비하면 우린 천사지! 천사! 아, 땅딸만한 아가씨에게는 우리가 거인 같이 무서운 사람으로 보이는 거려나? 앙?"
그럼에도 바보들은 웃는다. 부족한 건 어휘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뇌에도 피어스를 하고 있는 것이겠지. 청년이라면 절대 건드리지 않을 것을 살갈 건드리고 있다. 소녀도 그렇고. 청년도 그렇고. 애꿎은 곳에서 악당 취급 당한 청년의 머리과, 땅딸보 소리를 들은 소녀의 이마에 살짝 핏줄이 드리운다.
"야, 이 아가씨 어떻게 할까? 가지고 놀기 전에 혼쭐 좀 내줄까?"
바보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덩치 큰 민머리가 그렇게 소리친다. 주위에서 "찬성!", "좋지!"하는 환성이 터져 나왔다. 하나 같이 이상한 책에서 빼온 것만 같은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럼에도 소녀는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가방을 내려놓고는 맞서는 자세를 취한다. 지식이 부족한 청년이라도, 그게 무언가 무술의 준비 자세란 걸 알 수 있었다.
당돌한 자신감도 그렇고, 빈틈 없는 무술 자세도 그렇고. 아마 소녀는 무술 유단자 정도 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길거리 양아치에게 질 일은 없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불안 요소가 전무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저들 사이에 능력자나 그 씨앗을 가진 사람이 하나라도 끼어 있다면. 이런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는 저런 바보들에는, 제 감정을 주체할지 모르고, 주체할 생각도 없다. 만에 하나라도 욕망의 감정이 폭주하여 능력에 각성한다면, 소녀는 손발도 쓰지 못 하고 유린 당하리라.
그 때문이었다.
"한 번 싸워보시겠다? 뭐, 좋지. 얼굴에 상처가 날지도 모르지만, 혼 좀 내주겠다는 건 만장일치 찬성이었거든! 각오하라고, 아가--"
"----아니, 난 반대인데."
"뭣!?"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는 대장 바보. 말이 찬성이고 반대지, 대장 바보의 말을 거스르는 바보는 그 즉시 벌을 받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똘마니 바보들도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볼 뿐. 대장이 "그럼 누구야?"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찰나였다.
무거운 사슬추가 땅에 박히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마치 말뚝이라도 박는 것만 같은 소리였다. 진원지인 사슬추에서 다시 사슬을 따라 바보들의 시선이 움직인다. 그 끝에는 무감정한 표정으로 사슬을 부여잡고 있는 청년의 모습이 있었다. 사실 살짝 올라간 눈꼬리가 화가 난 걸 보여주고 있었지만, 오늘어제 만난 사람이 구분해낼 정도는 아니었다.
바보들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소녀가 입을 쩍 벌리며 놀라고 있으니, 청년이 당연한 걸 묻듯이 물었다.
"왜, 나는 투표권 없어?"
"......"
"......"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어쩐지 청년까지 어색해지기 시작했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농담이었나 싶어, "아, 미안."하고 사죄한다. 물론, 그 또한 분위기에 어울리지는 않았다. 스스로 자각이 없는 것이리라. 본인의 걱정처럼 점점 보스를 닮아 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 대장! 이 녀석, 오늘 뉴스에 나온 그 녀석이에요!"
"뭣이!?"
결국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 청년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한 뚱뚱한 부하가 소리친 순간부터였다. 양아치들도 뉴스는 꼬박꼬박 챙겨 보는 것일까. 벌써 얼굴이 팔려 버린 모양이다. 그리고 대개 이런 경우에는 쓸데 없는 오해를 사길 마련이었다.
"뭔가 했더니 능력자였냐! 아주 영웅 노름에 푹 빠지셨구만!"
대장 바보가 그렇게 소리쳤다. 빙고다. 그때도 지금도, 청년을 움직이는 건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그저 우연히 얻어 걸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바보들이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지 않았다면, 이 모습을 보아도 적당히 자기 해석을 해가며 넘어 갔으리라.
"헷! 아무리 능력자 나리라고는 해도, 머릿수를 이길 수는 없을걸!? 아앙!?"
제 스스로 판을 버린 대장 바보는, 뭐가 그리 분한지 길길이 날뛴다. 어느샌가 대장은 물온이고 부하들까지 그 손에 잭나이프를 들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청년은 싸우러 온 게 아니다. 상대해주는 것도 귀찮아져, 땅에 박힌 사술추를 옆으로 끌어 줄 하나를 긋고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경고야, 좋은 말로 할 때 물러나. 그게 데드라인이니까 참조하고."
하지만 그런 말로 물러날 사람이라면, 애초에 싸울 생각도 하지 않았으리라.
"덤벼들어! 어차피 저런 녀석들은 우리 같은 일반인은 못 건드린다고!"
칼을 앞으로 들이밀며 달려드는 바보들. 대체 누가 일반인이란 말인가. 하지만 청년도 기대는 하지 않았나 보다. 한숨 한 번 내쉬지 않고, 그럴 줄 알았다는 양 콧김을 내뿜는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라고 자신이 그은 데드라인을 넘기 전까지는 가만히 기다려준다.
데드라인까지 세 걸음. 청년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 대장 바보의 얼굴은 패기로 가득 차 있었다.
데드라인까지 두 걸음. 청년은 마지막 경고의 의미를 담아 사슬을 한 번 내리친다. 오래된 콩크리트 바닥에 커다란 상흔이 드리우고, 대장 바보는 잠시 멈칫하고 뒤를 돌아본다. 부하들은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 한 모양이었다. 달려들고 있다. 이대로 내빼서야 대장의 위엄은 살릴 수 없을 것 같아, 마지못해 표정을 다 잡고 다시 달려 나가는 대장.
데드라인까지 마지막 한 걸음. 청년의 주위에서 붉은 아지랑이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TV에서도 본, 청년의 무시무시한 능력. 대장 바보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죽는다. 죽고 만다. 죽인다. 안하무인한 골목의 무법자가 오랜만에 느낀 감정. 공포, 절망, 후회. 공권력을 건드렸을 때마저 느끼지 못한 명백한 살의. 어둠속에서 빛나는 붉은 머릿결과 눈동자는, 그런 살의의 구현화.
돌아가야만 했다. 이 발을 빼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발은 이미 기세를 탔다. 마치 느리게 재생되는 것만 같은 세계에서, 발은 분명히 데드라인 위에 있다. 빼기에는 이미 늦었다. 자신에겐 기회가 있었을 텐데, 알랑한 자존심이 모든 걸 그르치고 말았다.
밟고 싶지 않아, 밟고 싶지 않아. 몇 번이나 되뇌이고 되뇌이지만, 마치 등 뒤의 부하들에게 떠밀리기라도 하듯이. 콩크리트를 억지로 긁어 만들어진 반원의 흠. 인력에 이끌려 그 위에 얹어진 발은, 반사되듯이 울려 그 어떤 때보다 큰 발소리를 만들어냈다. 그 순간이었다.
"이미지하는 건...... 말뚝, 그리고 벽."
"히에에에에에엑!?"
다섯 손가락이 하나로 모이는 소리와 동시에, 이번에는 인력을 반대로 거스르는 바보 대장. 마치 콩크리트 바닥이 그대로 솟은 것만 같은 벽이 올라오더니, 거꾸로 뒤집혀 그에 끌려 가고 말았다.
본래, 그 기세에 이기지 못 하고 떨어져야 했을 바보 대장이지만, 어째서인지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기절한 것일까, 입가에는 보글보글 거품이 물려 있다. 부하들은 채 5초도 걸리지 않은 그 일련의 사태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그 찰나의 순간을 인지하여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한 사람은 단 둘. 한 명은 당연히 사용자인 청년. 그리고 또 한 명은—도망치지 않고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던—다름 아닌 소녀였다.
푸른 눈을 똘망똘망 빛내던 소녀는, 일련의 상황을 마치 영상속 프레임을 한 장, 또 한 장 지켜보듯이 똑똑히 읽어냈다. 먼저, 데드라인을 넘은 대장 바보의 발 바로 위에, 사슬이 뭉치며 말뚝이 만들어졌다. 말뚝으로 발을 바닥에 고정한 뒤, 곧장 벽을 생성하여 그대로 들어 올린 것이었다.
채 5초가 되지 않는 시간에. 고도의 정확성으로. 역시 자신이 찾던 사람이라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 소녀를 뒤로한 채, 청년은 바보들을 향해 고했다.
"너희 대장 말처럼 나는 사람을 해치지 않아. 그래도 경고를 무시한 건 사실이니까 조금 벌을 준 거고. 대장을 구하고 싶으면 어디 안간힘을 써서 올라가 봐."
청년의 말처럼, 말뚝의 강도는 성인 남성이 힘만 쓰면 뽑을 수 있게 해놓았다. 청년 나름대로의 자비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하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은지라, 벽 너머에서 커다란 볼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벽의 높이가 어지간한 성인 키의 열 배는 되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집고 올라갈 틈이나 돌기도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악당의 사정. 피해자에 가까운 청년이 배려할 일은 아니었다. 가볍게 흘려 들으며 발걸음을 돌리려 한 찰나.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뜻뜻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제서야 이곳에 또 다른 피해자가 있다는 걸 떠올린 청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괜찮니?"
소녀를 자극하지 않도록 천천히 다가가는 청년. 꿇어 앉아 눈높이를 맞추니 그제야 전체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게 롤을 그린 눈부신 금발과, 은은한 바닷빛처럼 빛나는 벽안. 그리고 아마 이 나라에서는 구하기 힘들어 보이는 고스로릭풍 드레스. 전체적으로 이국적인 분위기다. 아니, 외국인이라고 단정 지어도 좋겠지. 혼혈이거나 2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국적인 소녀는 울고 있었다. 정확히는 눈물을 맺고 있었다. 바닷빛 눈동자에 눈물을 머금고 있으니, 청년은 정말로 바다를 보는 것만 같은 환각을 느낄 정도였다. 그에 이끌리듯이 잠시 머뭇거렸던 청년이었지만, 이윽고 진정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에—일종의 버릇이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뻗은 그 찰나였다.
"잡았다......"
"응?"
소녀가 마치 칼날 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양손으로 그 팔을 낚아챈 것은. 청년이 당황하여 소녀의 얼굴을 보니, 방금 전까지의 눈물은 온데간데 없었다. 눈가는 앞머리로 가려져 음영이 드리워 있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고 있는 입가에서는 괴상한 웃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쩐지 불안한 예감에 손을 빼려고 했지만 소녀는 도통 놓을 생각을 하지 읺았다. 그렇다고 강하게 내치자니 상대는 어린 아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청년. 청년의 그런 모습에 걸려 들었다는 양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드는 소녀. 그러고서는 청년을 향해 기세 등등히 외쳤다.
"당신이 눈물과 어린 아이에게 약하다는 건 이미 다 알고 왔지요! 절대 놓치지 않습니다! 스승님!"
"스승님!?"
청년은 전혀 생각지도 못 한 말. 스승님. 그것이, 어린 소녀 혼자서 이런 어둑한 골목까지 온 이유. 그 열망함을 드러내듯이, 팔을 잡은 손에는 강한 힘이 들려 있었고, 푸른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오늘 뉴스를 본 순간, 운명을 느꼈어요. 부디 제자로 받아주세요!?"
"제, 제자!? 그런 거 안 키워!"
"그럼 부하라도 좋아요!"
확실히 몇몇 영웅들이 부하나 제자들을 두고 활동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런 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자신은 박봉인 데다가 애초에 영웅 조차 아니다. 작은 심부름 센터의 직원일 뿐이다.
그런 사람의 아래로 들어가봐야 좋은 일 하나 없으리라. 때문에 청년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안 된다니까.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너한테 줄 월급도 없어."
하지만 소녀는 어딘가 간절해 보였다. 거의 반 매달리듯이 청년을 부여잡고는, 애달픈 목소리로 소리쳤다.
"도, 돈은 필요 없어요! 그, 그! 잠만 재워주시고 밥만 먹여주시면 돼요!"
"밥...?"
그 순간 청년의 뇌리를 스친 것. 텅빈 밥통. 텅빈 쌀통. 생각해 보면 자신은 밥을 먹으려고 가던 차였다. 대낮부터 지금까지 쌀 한 톨 먹지 않은 것이었다. 그걸 인식한 순간, 배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드럼통을 안쪽에서 긁는 것만 같은 소리.
밤거리에 잘 울리는 그 소리에, 소녀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소녀의 배에서도 똑같은 소리가 울려 얼굴을 붉힌다. 청년을 찾는 탓에 밥도 못 먹었는데 그만 또 힘을 쓰고 말았다.
부끄러운지는 아는지, 붉어진 얼굴을 살짝 돌리고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말했다.
"그럼 밥부터 먹고 이야기할까요?"
청년의 표정이 굳어졌다.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냐는 표정이다. 가만히 오른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키더니 오른쪽으로 긋는다. 반댓손으로는 소녀를 가리켜 왼쪽으로 긋는다. 서로 각자 갈 길 가자는 제스처겠지. 바로 그 의미를 깨닫고 한숨을 푹 내쉬는 소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로, 소녀 또한 어느 정도 청년에 대한 조사를 해둔 상태였다. 다만 반나절에 알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지라, 설마 이렇게나 돈에 쪼들리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하물며 이렇게 간단히 내쳐질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
품에서 지갑을 꺼내 열어보니, 있는 것이라고는 달랑 만 원 짜리 하나. 그나마도 집에서 나올 때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하고 가지고 온 것이었다. 이걸 쓰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돈까지 썼는데, 만약 청년이 끝까지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 자신은 정말로 땡전 한 푼 없이 길거리에 나앉게 된다. 집에는 성장하여 돌아오겠으니 찾지 말라는 출사표까지 던져두고 온 참이다. 설령 철면피를 깔고 들어간다고 해도, 차 탈 돈은 없고 돌아가는 길도 모른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보좌관을 잘 구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걸 잘 알고 있어도. 아니, 잘 알고 있기에 소녀는 뜻을 굳힐 수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며 만 원을 집고 있던 손에 힘을 팍 쥔다. 만원의 중앙이 볼품 없이 구겨지지만, 빛나는 금발과 어울리니, 어쩐지 강한 의지의 상징처럼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오오."하고 감탄시를 내뱉는 청년.
소녀는 그런 청년을 향해 당당히 소리쳤다.
"그, 그럼 밥 정도야 제가 사죠! 그러면 이, 이야기 정도는 들어줄 수 있죠!?"
긴 금발을 손으로 쓸어 올리면서, 최대한 우아하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양. 손에 들린 만 원이 전재산이라는 게 훤히 보임에도.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임에도. 눈 끝자락에 오들오들 눈물이 맺혀 있음에도.
그런 훤히 보이는 허세에, 입만 씨익 웃어 보이는 청년. 별 것 없으면서도 허세를 떠는 모습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해 썩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조금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때문에,
"네가 사준다면야 좋지."
그렇게 말하며 발걸음을 홱 돌려 버렸다. 조금의 고민도, 미안함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설마 그렇게 뻔뻔하게 뭘 받아 먹겠어? 하고 품고 있던 소녀의 일말의 희망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마치 모르는 사람을 내쫓는 고양이처럼 털을 삐쭉 세우면서 그 뒤를 따른다.
"정말 받아 먹을 생각이에요~!?"
"준다는 건 거절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너무해요!"
"싫으면 안 따라 와도 된다니까?"
"으으으으......"
생각보다 어른스럽지 못 한 사람이다. 그게 소녀가 받은 청년의 첫인상이었다. 절대 좋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소녀는 청년의 뒤를 쫓았다. 아직 대화 한 번 제대로 해보지 않았는데,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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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제가 샀어도 괜찮았는데 말이죠!"
허세다. 실제로는 안도하고 있다. 자신의 만 원을 지켜낸 데에 정말로 크게 안도하고 있다. 그 증거로 만 원을 쥔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이번에는 그 의미가 달랐다. 안도와 희열이었다. 편의점에서 도시락 두 개를 사고 만 원을 내던 때, 눈에 눈물을 펑펑 머금으면서도 흘리지 않도록 고개를 까딱까딱 올리던 모습은, 아직도 청년의 뇌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 모습도 특히 귀여웠고, 점원도 어쩔 줄 모르기에 결국 청년이 계산을 했다. 애초부터 단순히 놀리기 위한 것이었지, 정말로 얻어 먹을 생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도 똑같은 말을 한 소녀였지만, 역시나 설득력은 없었다.
아무튼, 청년이 그런 회상을 하면서 도시락 뚜껑을 열고 젓가락을 꺼내 렌지에 돌릴 준비를 하는 사이, 소녀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도시락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의아해진 나머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묻는 청년.
"안 먹어?"
"머, 먹을 거예요."
그 말을 뒷받침이라도 하는 것처럼 꼬르륵 울리는 소녀의 배. 그러나 소녀는 멈을 배배 지틀며 눈싸움만 할 뿐으로,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 설마설마 싶었지만 그래도 구태여 물어보는 청년.
"......편의점 도시락 처음 먹어봐?"
"............네."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소녀. 사실 청년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일이라 단순히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요즘 같이 저런 독특한 고스로릭 드레스를 입히는 사람은, 진짜 부자거나 진짜 이상한 사람 밖에 없겠지. 소위 온실 속 화초라는 녀석이다. 그런 소녀가 살짝 걱정스러워져, 청년은 도시락을 들고 일어나며 쓸데 없는 오지랖을 부린다.
"그래서야 제대로 사회 생활할 수 있겠어?"
"......자기도 편의점 점원하고 제대로 눈도 못 마주쳤으면서."
"커헉!?"
하지만 예상치 못 한 공격이 들어왔다. 정곡을 찌르는 말에 그만 도시락통을 놓칠 뻔한 청년. 확실히, 점원으로 있던 여성하고는 아주 기본적인 비즈니스(?) 대화는 물론이고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 했다. 그래도 꼴에 자존심은 있는지, 식은 땀을 흘리며 변명한다.
"사람을 대하는 게 조금 어려워서......"
"저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면서요?"
"너 같은 어린애는 괜찮아."
"흐음~"
살짝 도끼눈을 뜨고 렌지에 도시락을 넣는 청년. 공격은 끝인가 싶어 안심하던 찰나였다.
"그 유명한 로리콘이란 거군요!"
"크흑!?"
버튼을 누르려던 손가락이 힘을 잃고 추락한다. 이제는 목소리까지 떨기 시작하는 청년.
"사, 사정이 있어서 그래."
"그 사정이 뭔데요?"
"그건 말 못 하지만."
"로리콘 맞네요."
"으그윽......"
결국 소녀의 로리콘 연호를 막기 위해서도, 그리고 한 시라도 빨리 배를 채우기 위해서도, 비수에 너덜너덜해진 몸을 이끌고 소녀의 몫까지 손수 비닐을 뜯어 렌지에 돌려주는 청년이었다. 어쩌면 애꿎은 애를 놀려 먹은 벌일지 모른다고 조금 반성하면서.
"마, 맛있다...!"
그리고 그게, 도시락의 첫 숫갈을 뜬 소녀의 감상이었다.
밥은 푸석푸석하고 계란말이에는 윤기가 없어 퍽퍽하다. 소세지에서는 씹히는 맛이 전무하고 조미료향이 심하게 났다. 다른 반찬들도 마찬가지라서, 돈가스는 생전 느껴본 적 없는 식감에다가 불고기는 고기가 흐물거려서 고기 맛이 아닌 양념 맛으로만 먹어야 했다. 닭튀김은 기름이 너무 많아 눅눅했다. 만약 소녀의 어머니에게 이런 걸 내놓으면 잔소리를 한참 들어야겠지.
그러나 소녀에게는 달랐다. 늘 귀찮게 차리는 것만 보다가 이렇게 간단하 무언가를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놀랐고, 이제껏 맛보지 못 한 맛에 놀랐다. 어린 소녀에게 새로운 것이나 신선한 것은 늘 정의였던 것이다. 뺨을 한 껏 부풀리면서 열심히도 먹는다.
청년은 그 모습에 맛있게 먹는 거 같아 다행이라고 안도하면서,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래서, 너는 무슨 사정으로 나를 찾아 온 건데?"
"제자로 들어가려고요."
"아니, 그건 아는데......"
척 보아도 비싼 집에서 잘 자란 것만 같은 소녀. 그런 소녀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단순한 가출이라면 이런 빈곤한 소시민을 특정하여 찾아 올 리는 없었다. 그렇기에 무언가 사정이 있으 리라 생각했다.
어쩌면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사정이. 때문에 청년도 조심스레 말꼬리를 흐린 것이었으나,
"저 봤거든요! 뉴스에 나오는 스승님의 모습! 대단했어요! 엄청났어요! 그래서 이렇게 찾아 온 거예요! 저도 영웅이 되고 싶어서!"
"뭐?"
돌아온 것은 너무나 간단한 대답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젓가락을 멈추고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청년.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의 파란 눈동자는, 동경과 기대로 젖어 있는 것만 같이 빛나고 있었다. 보통 그런 이유로 집까지 나와가며 모르는 사람을 찾아갈까. 더군다나 어느샌가 호칭이 스승님으로 바뀌어버렸다. 현기증을 느끼는 청년.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어쩌면 이미 지인 중에 대화하다보면 머리그 아파지는 사람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익숙해지는 것 무서운 일이다. 혹은, 오랜만에 다른 누군가와 상을 같이한 덕일 수도 있겠다.
어찌 됐든, 나쁘지 않았기에 그런 말이 나온 것이겠지.
"......정말 괜찮겠어? 부모님이 찾지는 않으실까?"
"!"
그 뉘앙스가 어떤 것인지 안 것이겠지. 안 그래도 밝았던 소녀의 얼굴이 한층 더 밝아진다.
청년은 결코 스스로를 영웅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도 될 수 없으리라. 하지만 한 때, 영웅이길 추구한 건 사실이었다. 자의식 과잉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은 주위에도 영향을 끼쳤다 믿던 때가 있었다.
때문일까. 소녀의 모습을 누군가에게 겹쳐 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 번 쯤은 그런 관계를 가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비록 부족한 자신이라도, 보스의 도움을 받는다면 어릴 적 자신을 떠올리면서 이끌어 갈 수 있지 않을까.
"괜찮아요! 아버지의 보좌관이 잘 둘러댔을 거예요! 제가 약점을 꽉 쥐고 있으니까요!"
"그, 그래......"
그 대답에, 잠시 이러다 아동 납치범으로 오해를 사 납치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든 청년. 하지만 보좌관이 알고 있다는 것은, 부모님도 알고 있을 거란 뜻이다. 곧 찾아 오거나, 혹은 따로 청년에게 연락할 수도 있겠다. 소녀의 부모가 조금 별종이라면 청년에게 딸을 맡기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현실에서는 조금 보기 힘든 전개겠지마는.
그래도 그 때까지는 잠시간 스승 놀음에 빠져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럼."
"?"
어찌 됐든, 조금은 마음이 굳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굳어졌기에 확인해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함께 살아가는 데 있어, 제자를 두는 데 있어, 청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청년이 젓가락까지 내려놓으면서, 사뭇 진지한 느낌으로 운을 떼니, 소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 하나만 묻고 싶은데, 괜찮겠어?"
"얼마든지요."
"네 대답 여부에 따라서는 제자로 받아주지 못 할지도 몰라. 그래도?"
".........네."
잠시 생각에 잠긴 소녀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질문을 피하면 제자로 들어가지 못 하겠지. 으레 하는 확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 대답에, 청년은 조금 뜸을 들이고 다시 한 번 물었다.
"너에게 영웅이란 '악을 쓰러트리는 사람'이야? 아니면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는 사람'이야?"
"......"
소녀는 입을 다물었다. 어느샌가 젓가락도 내려가 있다. 아직 삼분지일은 남은 밥. 밥 먹는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다는 생각도 있지만, 청년은 어떻게든 확인을 해야만 했다. 누군가에게는 둘 모두가 영웅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년에게는 달랐다.
때문에 청년은 소녀의 답을 확인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답을 가진 두 사람이 사제 관계를 멪엊본들, 결과는 좋지 않을 테니까. 그 때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찾아가야겠지. 모든 영웅들이 그런 마음으로 활동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청년이 소녀와 같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먼저 정적을 깬 것은 소녀였다. 방금까지 생각에 잠겨 있던 게 연기라도 된다는 것처럼, 흥, 하고 콧김을 내뿜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스승님이라면 그렇게 물으실 줄 알았어요."
"......알았다니?"
독심술이라도 쓸 줄 아는 것일까. 그런 생각에 청년이 소녀를 주목하니, 소녀 또한 청년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정말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느낌에 숨을 꾹 삼키는 청년. 그럼에도 가까스로 물을 수 있었다. 그러자 소녀는 마치 자랑거리라도 밝히는 것처럼, 가슴에 한 손을 얹고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스승님이 범인을 무력화하고 체포한 데에 주목하는 동안, 나는 스승님이 능력으로 사람들을 구한 걸 보았지요. 저는 이래 봬도 많은 영웅을 지켜 봐왔어요. 그 대부분이 악당을 쓰러트려 주목을 받고 명성을 받는 데에 열중했죠.
그러나 스승님은 달랐어요. 무너져 내리는 백화점에서, 누가 보아도 능력자의 개입이 있었던 그 현장에서, 범인을 찾기보다, 제압하기 보다도 사람을 구하는 것을 우선했어요. 정말로, 장말로 굉장했어요. 대단했어요. 제가 찾던 영웅이 이제야 나타난 것이죠.
만약 그 범인이 스승님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애초에 싸울 일도 없었을 테고요. 아닌가요?"
"......."
청년은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침묵을 긍정으로 생각한 소녀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제 대답은 스승님의 답과 같아요. '영웅이란 사람을 구하는 사람'. 대답은 마음에 드셨나요?"
"......응."
청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그리고 기대 이상의 대답이기도 했다.
영웅을 꿈꾸는 자들은 많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그런 일로 들어올 명성이나 겉멋, 즐거움, 따라 들어 올 돈 같은 것에 목숨을 건다. 때문에 악당이 나타나면 주위 피해는 생각도 않고 싸우거나, 멋을 위해 직접 부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 면에서, 소녀는 참으로 대견하다 할 수 있었다. 악과 싸우는 것보다도 사람을 구하는 데에 그 의미를 두고 있다. 물론 그것은 청년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지만, 청년은 스스로를 그런 대견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소녀의 눈부심에 진 그림자라도 되는 것처럼,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냐. 분명 어떤 계기가 없었으면 네가 찾는 영웅상이 되지 못 했겠지."
"계기요?"
"내 지인 중에...... 바보가 하나 있었어. 정의감에 젖어서 자신을 영웅이라고 부르던 녀석이. 하지만 녀석은 결국 악당을 잡는 데에 빠져 있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걸 잃고 말았어. 결국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지."
"......"
소녀에게는 무거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특한 소녀라면 분명 알아줄 것만 같았다. 때문에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이야기를 이렇게 꺼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사람을 동경했어. 때문에 그 사람처럼 되려고 행동했었어. 하지만 그제야 깨달은 거야. 그런 건 진짜 영웅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 때는 나도 이미 늦어 있었어. 너무 뒤늦게 깨달은 거지. 그러니까 나는 너나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냐."
괴로운 표정으로 말을 끝내는 청년. 잠시간 침묵이 감돌고, 조금 생각을 가진 후에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황급히 웃음을 지어보이며 "아, 미안. 이런 칙칙한 이야기 해봐야 듣기 싫을 텐데."하고 분위기를 무마해보려 했다. 그러나,
"아뇨, 싫지 않아요. 영웅에게 뒷이야기 하나둘 쯤은 늘 있는 법이잖아요?"
소녀는 그렇게 태연히 말했다. 그러고는 불쑥 젓가락과 도시락을 통을 집어 엄청난 속도로 입에 퍼붓는다. 마치 무언가 에너지라도 담으려는 것처럼. 그렇게 남은 잔반을 다 비워 푸하~ 하고 기운찬 소리를 내더니, 살짝 높은 톤으로 입을 열었다.
"게다가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라 지금이잖아요? 과거가 어쨌든 지금의 스승님은 사람을 구하려 행동했어요.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아니, 오히려 더 좋아졌는 걸요! 고뇌 끝에 성장한 영웅! 멋지잖아요! 그러니까, 부탁드려요! 저를 제자로 받아주세요!"
말을 할 수록 점점 흥분이라도 한 것일까.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고, 금발이 더 빛을 발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건, 어쩐지 사람의 마음을 편안케 했다. 청년의 어두웠던 표정이 금세 밝아진 것도 그 때문이겠지.
청년은 생각한다. 이런 녀석이라면, 옆에 두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본격적인 확신이 들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때문에 소녀를 향해 그 손을 뻗었다. 잠시 그게 무엇인지 몰라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악수란 걸 깨닫고 마찬가지로 손을 뻗어 맞잡았다.
"잘 부탁한다."
"저야말로요!"
힘차게 악수를 나누는 두 사람.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녀석이다. 그게 청년이 가진 소녀의 첫 인상이었다. 어쩌면 생활에 새로운 활기가 될 수도 있겠지. 기대감에 살짝 가슴이 뛰는 청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훈훈하게 사제 관계를 맺은 건 좋았다만......
"잠은 어떻게 잘까요?"
곧장 찾아온 새로운 역경에 현기증을 느끼는 청년이었다.
"그, 그러게."
생각해 보니, 무작정 데려오기만 했을 뿐으로, 두 사람의 성별조차 고려하지 않았다. 한 방에서 같이 잘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애초에 청년의 집에 방이란 개념은 존재조차 하지 읺았다. 싱크대와 생활 공간 사이에 식탁이라도 하나 세워 놓으면 그럭저럭 따로 잘 수는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궁여지챙일 뿐이다.
비좁고 찬바람이 쌩쌩 들어오는 곳이다. 소녀를 눕히기에는 가혹하고, 자신이 누우면 꽉 차서 미동 조차 할 수 없었다. 어쩌지 싶어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청년은 무의식적으로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지금, 잠옷 차림을 하고 있었다. 쓸데 없이 큰 가방이다 싶었더니, 정말로 작정을 하고 나온 모양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소녀의 모습을 보고 마치 무언가에 얻어 맞은 것만 같아진 청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이 좁은 집에서 남녀가 함께 지내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그런 것도 생각하지 못 하고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아 들이고 만 것이다, 자신은.
더군다나 청년은 쑥맥이다. 어릴 적부터 파란을 겪고 또 겪은지라 여자 경험이 전무했다. 당연한 이야기로, 여자의 잠옷 차림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이 설령 어린 소녀의 귀여운 파자마라고 해도, 처음은 처음이었다. 번뇌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청년의 탓은 아닐지도 모른다. 만약 소녀의 지금 모습을 본다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입을 다물지 못 한 채 빨려들고 마리라. 편히 자기 위한 것인지 사과 모양으로 올린 금발, 검은색과 붉은색을 바탕으로 어른스럽고 클래식한 드레스를 대신하는 편하고 귀여운 분홍 파자마. 귀여운 곰돌이가 그려진 수면 양말까지.
전체적으로 귀엽기만 보일 수 있는 인상이었지만, 느슨하게 풀려 있는 곳곳과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웃음이 묘한 분위기를 주었다. 본인은 그저 편하고 신나서 그런 것이리라. 아직 스스로의 파급력을 모르는 것이다.
"스승님."
"으, 으앗!"
청년이 어쩔 줄 몰라 결국 벽을 바라보며 자신을 진정시키던 그때, 갑자기 귓가에 숨결이 닿았다. 놀라서 껑충 뛰며 돌아서니, 소녀와 눈이 맞았다. 파자마의 틈으로 보이는 벚꽃빛 피부와 꿰뚫어보는 것만 같은 푸른 눈동자에, 시선을 좌로우로 흔들며 얼굴을 붉히는 청년. 처음에는 의아하게 바라보던 소녀가 이번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어디 아프세요?"
하필이면 청년의 얼굴을 더 가까이에서 바라보겠다는 양, 까치발까지 서가며 얼굴을 가까이 하면서. 청년의 귀에만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울리고, 청년의 입에서는 실제로 무언가가 터지듯이 말이 쏟아져 나왔다.
"아, 아아아아아니, 그, 너, 너랑 한 방에서 자게 된다고 생각하니, 그, 그, 기, 긴장했다고 할까? 아, 아니지. 이게 아니지."
그만 본심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수습이 힘든 본심이. 다행히도 소녀는 다른 의미로 받아 들인 모양이었지만.
"죄, 죄송해요...... 역시 폐를 끼쳤군요."
전혀 엉뚱한 의미로 받아 들이고는 시무룩해 하는 소녀. 그 모습에, 청년은 황급히 말을 수습한다. 역시나 별 도움은 되지 않는 방향으로.
"아냐아냐, 나, 예전에도 여동생이랑 한 방에서 같이 잔 적이 있으니까 괜찮.....지 않나? 아무튼 괜찮아! 자도 돼, 자도 돼. 아니, 오히려 제 집인 양 편히 주무십쇼, 네이."
"정말 편하게 자도 돼요?"
"넵, 말만 하세요. 뭣 하면 제가 나가드려도 좋습니다."
"흐음."
아무리 보아도 상황에서 도망치는 것밖에 지나지 않지만, 청년은 소녀를 배려해주는 것뿐이라 변명한다. 어찌 됐든, 이상한 사태(?)와 이상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소녀의 의중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럼 저랑 나란히 자요!"
"엑."
정말이었다. 맹세코 소녀의 말을 듣고서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었다. 또, 소녀에게는 별다른 의미도 없는 것이겠지. 그저 해맑게 웃으며 한 말이었다. 그 말에 그만 쩌적 굳어 버리는 청년. 하지만 소녀는 그런 청년을 아랑곳 않고 그 손을 끈다
.
방중앙에는 어느샌가 이불 두 개가 나란히 깔려 있었다. 본래 청년이 쓰던 이불과, 자그마한 분홍색 이불이다. 역시나 귀여운 곰돌이가 그려져 있었다. 그 순간, 청년은 이상한 생각에 빠졌다. 외견보다 어른스러운 이 아이가, 혹시 나를 유혹이라도 하는 건 아닐까. 설령 그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을 이성으로 인식하여 붙드는 건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불쑥 정신이 드는 청년. 어떻게든 손을 뿌리치고 구석에 처박혀 누우려던 그 찰나였으나.
"저, 부모님이 항상 바빠서 누구랑 같이 잔 적이 없어서요!"
소녀는 해맑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다른 엉뚱한 곳에, 생각에 눈이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눈부시고 환한 웃음을. 순수함이나 하얀 백지를 사람으로 구현화 한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청년은 절로 그런 생각을 한다.
아주 잠깐의 순간이었지만, 청년이 이제까지 이상한 상상이나 번뇌에 젖어 있던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게 할 정도였다. 자신은 대체 뭘 고민하고 뭘 괴로워했나. 열 살 가까이 차이나는 소녀지 않은가. 말하자면 사촌 동생이나 조카를 재워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마치 그 웃음에 정화라도 되어버린 것처럼, 청년 또한 부끄러움이나 번뇌를 떨쳐낸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 손에 이끌려 갔다.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자는 건 이런 느낌이군요!"
"정말로 늘 혼자 자기만 한 거야?"
"네! 그래서 늘 쿠마토모하고 같이 잤어요!"
결국, 나란히 눕게 되었다. 각자의 이불을 몸에 두르고 눈높이를 맞추고서.
청년이 흥분한 것만 같은 소녀에게 그렇게 물으니, 소녀는 자신의 이불 옆에 눕혀두었던 곰인형을 내밀며 말했다. 수면 양말이나 이불에도 그려진 곰돌이의 인형이었다. 이런 컬렉션까지 있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좋아하는 것이겠지.
청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불쑥 곰인형과 자신을 번갈아 보는 소녀. 청년이 뭐 하는 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니, 소녀는 이내 눈을 질끈 감고는 곰인형을 훽 던져버렸다. "에엑!?"하고, 생각지도 못 한 행동에 마치 본인이 던져진 것만 같은 청년의 비명과 함께, 쌩하니 날아가 바닥을 구르는 인형.
"저, 저렇게 다뤄도 괜찮은 거야?"
꽤나 아끼던 것만 같던 모습과 다른 과격한 행동에, 청년이 당황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러나 소녀는 그런 인형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
"지금은 스승님이 옆에 있는 걸요."
"그, 그래."
"네! 그러니까 오늘은 제가 잠자리에 기대했던 걸 전부 들어주셔야 해요! 첫 제자의 첫 부탁이니까요!"
"자, 잠자리에 기대하던 거?"
또 다시 얼굴을 붉히고 마는 청년. 소녀는 응응 소리를 내며 골똘이 생각에 빠진다.
"그럼 스승님의 무용담을 들려주세요! 저 예전부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중에 잠에 드는 게 꿈이었거든요!"
"아, 그래. 무용담...... 응, 무용담."
이제 슬슬 깨닫는 게 좋지 않을까. 소녀의 무방비함을. 둔함을. 그 두 가지를 절대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추정 나이 15.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어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지만, 혼자 지낸 탓에 생긴 외로움이, 어리광 부릴 수 있는 사람에게는 한 없이 쉽게 어리광을 부리게 만든 것이다. 때문에 어른스러움 사이에서도 이런 아이 같은 모습이 나올 수 있는 것이리라.
"그러네, 뭐 부터 할까."
청년은 이제 그만 소녀의 그런 모습을 받아주기로 했다. 어른스러운 소녀도, 아이 같은 소녀도, 환경이 만들어낸 양면의 모습이겠지. 그럼 그 때마다 걸 맞는 방법으로 대해주면 된다. 그런 생각에 천천히 해줄만한 이야기를 고른다.
"그래서, 그때 불쑥 강변을 보니까 한 남자애가 혼자 울고 있는 거야. 그래서 나랑 동생이......"
무용담은 대개 어릴 적의 이야기에서 골라 했다.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괴롭힘 당하는 아이를 구해준다던가, 곤경에 처한 강아지를 구해준다던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돕는다던가. 정말로 어릴 적의 무용담이다. 남에게 들려주어도 별 문제가 없는 것을 고른 탓이겠지.
그럼에도 소녀는, 마치 전설속 영웅담이라도 듣는 것처럼 눈을 빛내며 들었다. 때문일까, 나중에는 청년도 신이 나서, 이야기는 과장되고 이상한 효과음이나 전투 묘사마저 들어갔다. 이야기를 하나 끝낼 때에는 영문 모를 희열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랬더니 이번엔...... 어라?"
그렇게 신이 나 이야기를 하던 도중, 청년은 불쑥 위화감을 느껴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어느샌가 소녀의 맞장구가 들리지 않게 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소녀는 자그마한 숨소리를 새근거리며 곤히 잠에 들어 있었다.
갑자기 집을 나서고, 이상한 양아치랑 엵히고, 생전 처음 가본 집에서 생전 처음 먹는 밥을 먹고, 생전 처음 자는 자리에서 잠에 들었다. 제법 힘들고 피곤한 하루였을 터임에도 고요한 표정으로 자고 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빛과 희망으로 가득 찬 평화로운 곳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금빛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그러니, 마치 온기를 찾는 고양이처럼 자신에게 몸을 바짝 붙이는 소녀. 자의식 과잉이겠지만, 어쩐지 이 평온한 표정와 동작이 자신과 자신의 무용담 덕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영웅이 아니다. 세상을 바꾼다느니, 전세계의 안전을 지킨다느니 하는 거창한 프레이즈를 내걸고 활동하지 않을 뿐더러, 그럴 생각도 없다. 그저 우연히 자신의 주변에 특이한 일이 생기면 소소하게 사람을 구할 뿐이다.
늘 그런 식으로 슬퍼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줄도록 행동해왔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소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생각해 보니 낮에 만난 소년도 있었다—조금은 남의 웃음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청년이 할 일은 달라지지 않는다. 목표가 달라지더라도 스스로가 찾아 갈 일은 없으리라. 결국 자신의 그릇은 그 정도니까. 하지만 구하는 것과 지키는 것의 차이가 조금은 실감이 가는 것 같았다.
나쁘지는 않을지도. 청년은 그런 생각을 한다.
조그만 차이가, 어쩐지 큰 변화를 가져올 것만 같은 묘한 예감 속에서 청년도 소녀를 따라 살며시 눈을 감는다. 오랜만에 느끼는 사람의 온기 탓일까, 아니면 단순히 피로 때문에 깊은 잠에 든 것일까.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밤이 매우 짧게 느껴졌다.
"............챡갹이였나."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햇살 하나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청년은 그렇게 중얼거린다. 하지만 그 발음은 분명치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른뺨에 커다란 장애물이 꽂혀 입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으니까.
힐끔, 자신의 뺨을 누르고 있는 걸 확인한 청년은 몸을 부르르 떤다. 그에 맞춰 눈썹도 움찔움찔 위아래로 움직인다. 꽤나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과 감정이었다. 아마, 지난 밤에 괜한 기대를 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살짝, 정말로 살며시 자신의 뺨에 자리한 그것—소녀의 발--을 옆으로 치워 놓는다. 몬을 일으켜 소녀를 내려보니, 꽤나 가관이었다. 견디지 못 하고 무슨 어머니라도 되는 것처럼 한탄하는 청년.
"못 살아 진짜."
분명 머리가 방해되지 말라고 묶었을 터인 사과 머리건만, 그것마저도 성가셨는지 풀어 헤쳐버렸다. 입에는 침이 질질 흐르고 있고, 무슨 꿈을 꾸는 것인지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면서 괴상한 웃음 소리로 웃는다. 배는 훤히 까놓고 아저씨마냥 긁어대고 있다. 곰돌이 수면 양말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그뿐이랴, 어찌나 몸을 뒤척였는지 이불들이 이리 튀고 저리 튀고, 상은 엎어져 있고 아주 가관이 아니었다. 오랜만이 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는 청년. 그렆게 그 열을 그대로 뱉어내듯이 소리쳤다.
"기사아아아아아아앙!"
"후에에에에엑!?"
영문 모를 소리를 내지르며 벌떡 일어나는 소녀, 눈은 초점이 맞지 않고 옷이 한층 더 흐트러진다. 그리고 잠시 영문 모를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 이윽고 뭔가를 깨닫는 표정을 짓는다. 갑자기 바뀐 잠자리에 놀랐다가 어제 있었던 일을 다시 확인한 것이리라. 어제의 감정을 고스란히 옮겨온 것처럼 방긋 웃는다.
"스승님, 안녕히 주무셨습....... 엑."
하지만 청년과 눈이 맞은 순간. 눈과 눈이 맞은 순간. 분노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순간. 그제야 자신의 잠버릇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집에 있을 때야 고용인 아주머니가 다 해결해주니 괜찮지만, 이곳은 달랐다.
"죄, 죄송합니다아아아!"
"거기에 앉아!"
결국, 소녀는 거의 반 시간 가까이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잠버릇을 조절할 것. 남의 집에서 잘 거면 하다 못해 말은 해두고 잘 것. 등등등. 뒷정리도 소녀가 전부 도맡아 해야 했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혼나고, 처음으로 자신의 잠자리를 정리해 본 순간이었다.
"우에에엥, 힘들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썩 나쁘지는 않은 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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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조금 거슬러 올라가, 청년이 한창 무용담을 늘어 놓고 있을 즘. 서울 한 복판은 여전히 네오 사인의 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낮에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일까. 기사 작성, 보험 처리, 단순 넉두리까지, 이유는 가지각색이었지만 평소보다도 더 진득한 활기가 넘치는 밤이었다.
"죄송합니다. 따님분이 하도 억지를 부리셔서."
서울 중심지에 있는 한 고층 빌딩의 꼭대기층에도 여전히 불이 들어와 있었다. 어떤 남자가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그 사무실에서, 비교적 젊어 보이는 선글라스의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이며 사죄를 하고 있었다.
"됐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 사죄를 받아주는 것도 남자였다. 달빛을 반사하는 것만 같은 은빛 머리를 나부끼며, 붉은 눈동자로 서울의 거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 목소리는 한없이 인자했지만, 실수를 범한 부하로서도 쉽게 물러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성장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요."
"네?"
은발 남자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 부하. 은발 남자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는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부모 곁을 떠나 미지의 세계를 겪어 보는 것도 좋겠지요."
은발 남자의 딸은 늘 영웅을 동경했다. 자신이 돌아와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영웅이 나오는 TV에 집중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때문에 이번의 갑작스러운 가출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드디어 때가 되었냐며 그러려니 했다. 아니, 차라리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때문에 차라리 이대로 나두어 보자는 생각도 들었다.
"딸이 이 일을 계기로 무얼 배워 올지는 모르지요. 늘 바라는 것과 현실은 어긋나 있기 마련이니까요. 딸이 울면서 돌아오더라도 받아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돌아온 딸이 영웅이 되겠다며 가족의 연을 끊고 나가더라도 납득해 줄 각아도 되어 있습니다. 아, 딸아 그게 네 선택이구나. 그럼 아빠는 아빠의 선택을 하마. 하고서요. 그래도."
그 말에 부하는 작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의아해 했다.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은발 남성은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만히 창문 너머로 손을 뻗었다.
고층 빌딩에서 내려보는 창문 아래. 한밤중의 서울 거리는, 사람들이 만든 빛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은발의 남성에게는 그 모습이 마치, 사람들이 쌓아 올린 저항의 상징처럼 보였다.
"그 아이가 아직 저 불빛 안에 있는 한은 부모의 도리를 할 생각입니다. 이번 일이 그 어떤 결과로 끝나더라도 슬프고 괴로운 기억이 아닌, 웃을 수 있는 추억이 될 수 있도록 지켜줘야겠지요."
"......"
부하는 조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보통 딸이 그렇게 나가면 걱정이나 불안이 엿보일만도 하지만, 은발 남성에게는 도통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성장을 위한 것이라면서 위험한 세계에 풀어 놓는 매정함 마저도 느껴졌다.
혹시 자신이 부모가 아니라서 그럴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부하는, 자신이 은발 남성의 측근이라는 데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럴만한 사람이었다. 당차고 카리스마 있으면서도 상냥한 사람, 자신 같이 백 없고 연줄 없는 사람을 그저 능력만 보고 뽑아준 공명정대한 사람. 사회의 지도자로서 늘 그 역할을 다 하는 사람.
존경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때문에 낮설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청년이 그런 생각에 빠져 있으니, 은발 남자는 서랍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제법 두툼한 봉투다.
"이건 뭔가요?"
"우리 딸이 찾아간 놈팽이의 조사 자료입니다."
"언제 이런 걸 다......"
부하가 서류 봉투를 열어 보니, 두툼하게 엵힌 서류 뭉치 첫 장에 '박상호 조사 자료'라 적혀 있었다. 첫 페이지를 넘겨 보니, 이번에는 사진과 신상정보가 적혀 있었다. 흑발흑안의 스물다섯 남자. 대단할 거 없는 평범한 대한민국 청년이었다.
은발 남자는 부하가 대략의 개요를 읽었다고 판단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람을 범죄자 취급하는 건 아닙니다만...... 딸을 맡긴 아버지로서는 어쩔 수 없군요. 한동안은 그 남자의 뒤를 밟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따님이 아니라 이 남자를요?"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아, 아뇨. 바로 실행하겠습니다."
결국 부하는 마지못해 고개를 숙인 채 자리를 뒤로 했다. 방을 나서 복도를 걷는 와중에도 그저 의아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고개를 한 번 젓고는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걸었다.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이라면, 분명 자신은 이해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는 것이리라. 그런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 편, 은발 남자의 사무실. 부하가 나간 후에도 은발의 남자는 여전히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창가 너머를 향한 붉은 눈은, 여전히 먼발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려한 큰길과 다른 어두운 서울 외각. 은발 남자는 그곳을 향해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조용하고 인자하지만, 확실한 뜻이 담긴 목소리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들어본들 그 의미는 이해할 수 없으리라.
스토리와 설정이 좋아서 재밌게 읽었습니다만 공모전에 낼 거라면 아무래도 맞춤법을 조금 더 교정하고 제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오타도 살짝 있고요. 그래도 재밌었네요.
감사합니다 맞춤법이나 오타는 재출 전이 교정할 생각입니다.
쭉 읽어봤습니다. 일단 제가 자주 보곤 했던 '글 쓴지는 얼마 안되었지만 괜찮게' 글을 쓰시는 분 같습니다. 좀 주제넘은 추측이기는 합니다만 이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고. 아무튼, 올리신 글에서 고쳐야할 점을 집어보자면, 서술이 독자를 지치게 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서술이 길어서 생긴 문제가 아닙니다. 문장의 구성 탓입니다. 우선 쉼표가 많습니다. 또 문장에 수식어나 부사, 소위 말하는 꾸며주는 말들도 많습니다. 비유하자면 문장을 기름지게 만든다고 할 수 있겠지요. 아울러 문장의 종결이 명사로 끝나거나 불완전한 경우도 빈번합니다. 강조의 의미라면 분명 도움이 되겠지만, 남발한다면 본래의 효과가 퇴색되고, 오히려 가독성을 저해할 겁니다. 한 마디로 표현해서 비문이 많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경우 문장의 주어를 단단히 잡고가면 대체로 해결됩니다. 신문기사의 문장형식을 참고하시면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일본어 번역투에 익숙한 탓일지도 모르겠네요 참조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