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눈을 뜨는 게 어떨까?”
“아냐, 아직은 아니야. 엄마가 올 때 까지 기다려야해.”
“하지만 정말로 엄마가 올까?”
“그게 무슨 말이야?”
“그렇잖아, 엄마는 널 아주 싫어해. 그건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니?”
“그렇지 않아. 엄마는 날 사랑하셔. 항상 볼에다 뽀뽀도 해주시는걸.”
“널 사랑한다면 어째서 너에게 눈을 감고 서 있으라고 한 거야? 이건 정말로 힘든 벌인 걸?”
“그거야 내가 잘못했으니까.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는 게 당연해.”
“정말로 네가 잘못한 걸까? 엄마는 그저 네가 싫어서 너에게 이런 몹쓸 짓을 한건 아닐까?”
소녀는 몸을 돌리며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넌 누구야? 왜 나한테 계속 말을 거는 건데?”
“나? 글쎄 난 누굴까?”
“장난치지 말고!”
“난 장난치는 게 아니야.”
“그럼 넌 누군데?”
“그건 말이지. 네가 눈을 뜨면 곧바로 알 수 있어.”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신경 쓰지 않을래.”
“너도 참 고집이 쌔구나.”
수상한 목소리는 잠시 조용하더니, 이내 다시 말을 걸어왔다.
“밖으로 나가서 놀고 싶지 않아?”
“물론 그러고 싶지만, 엄마랑 약속했으니까 오늘은 이러고 있을 거야.”
“어른들이 말하는 약속이란 건 거짓말이나 마찬가지야. 자기들 편하려고 하는 나쁜 거짓말.
어른들은 항상 그런 식이야.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인질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 하지.”
“왜 그렇게 어른들을 싫어하는 거야?”
“글쎄. 난 그냥 어른들이 싫어. 그 사람들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거든. 내가 뭘 하려고만
하면 난데없이 나타나서는 나를 쫓아내 버려. 그렇다고 도망갈 내가 아니지만. 질리지도 않나봐.”
“뭘 하기에 어른들이 널 싫어하는 거야?”
“난 그저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고 다닐 뿐이야. 바보 같은 어른들로부터 너와 같은 아이들을
해방하는 거지. 물론 그들은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지만 아무 상관없어. 난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어른들이랑 싸우기라도 한 거야?”
“더 이상 그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들어봤자 그다지 좋은 이야기도 아니거든. 그보다
아직도 생각이 바뀌지는 않은 거야? 정말로 엄마가 올 때 까지 그러고 있을 생각이야?”
“당연하지.”
수상한 목소리가 말을 멈추자 둔탁한 발걸음이 창가를 향해 다가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봐! 엄마가 왔어.”
“엄마가 왔다고?”
“그렇다니까, 어서 이리 와서 봐봐!”
“...”
“왜 가만히 있는 거야? 엄마가 왔다니까?”
“정말로 엄마가 온 게 맞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내방에 있는 창문은 단 하나야. 너는 지금 그 창문 앞에 있겠지.”
“맞아. 그런데 그게 왜?”
“내방 창문은 우리 집 현관이랑 반대방향으로 나 있어. 그러니까 창문 밖으로 엄마가 오는 모습이
보일 리가 없지. 그러니까 너는 지금 나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 그렇지?”
“쳇, 정말 마음에 안 드는 꼬맹이네.”
“넌 정말 네가 싫어하는 어른들과 다를 게 없구나.”
“어째서 그렇게 생각해?”
“왜냐하면 네가 그랬잖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네가 지금 나에게 하는 행동이 그렇잖아. 내가 감은 눈을 뜨게 하려고 엄마가 왔다는 거짓말을 했으니까.”
“거짓말 중엔 나쁜 거짓말과 착한 거짓말이 있어. 난 너에게 착한 거짓말을 한 거야. 어른들의 달콤한 꼬임에 넘어가 불쌍하게 눈을 감고 있는 너를 위해서.”
“난 전혀 불쌍하지 않아. 불쌍한 건 너야. 그리고 네 거짓말은 정말로 나쁜 거짓말 이고.”
“내가 무슨 말을 하던 넌 들을 생각이 없구나?”
“적어도 지금은.”
수상한 목소리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 소녀 앞으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많은 아이들을 만나왔지만, 너 같은 아이는 처음이야.”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됐어?”
“뭐가?”
“너는 어른들로부터 아이들을 해방시켜 준다며? 그러면 네가 해방시켜준 그 아이들은 지금 뭘 하고 있어?”
“그야 물론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지.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꿈만 같은 삶을 살고 있어. 누구의 방해도 없는 멋진 낙원에서 자신들만의 마을을 만들어 하루하루 달콤한 나날을 보내고 있지. 한 번 다시 생각해봐. 너도 솔직히 그런 곳에서 살고 싶지 않아? 네 친구들이 네가 이런 허름하고 낡아빠진 집에서 산다는 걸 알면 뭐라고 생각할까? 그때 넌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만일 네가 계속 어른들의 말을 듣고 이곳에 있다면 친구들은 널 무시하겠지.”
“내 친구들은 그런 하찮은 걸로 날 무시하지 않아.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마 너 밖에 없을 거야.”
“정말 좋겠네. 그런 친구들을 둬서.”
“또 날 놀리는 구나.”
“이제 그만 익숙해져. 난 원래 이렇거든.”
“아무튼 이제 그만 가. 더 이상 할 얘기도 없어.”
“너는 없어도 나는 많아. 마을에 있는 아이들이 뭘 하면서 노는지 알려줄게. 이야기를 들으면 너도 흥미가 생기지 않고는 못 배길걸?”
소녀는 한 숨을 쉬었다.
“그렇게 힘없이 한 숨을 쉬면 보는 사람도 기분 나쁠 거야.”
“그러라고 한 거야.”
“나 참!
수상한 목소리가 화난 듯이 소리쳤다.
“넌 왜 그렇게 고집이 쌘 건데?”
“피차일반이잖아?”
“아무튼 내 얘길 들어봐. 아이들은 말이지 달콤한 과자로 만들어진 아기자기한 집들로 이루어져 있는 꿈의 동산에서 즐겁게 뛰놀고 있어. 하루 종일 뛰어놀고 달달한 과자를 양껏 먹어도 누구도 뭐라 하는 사람들 없이 자유롭게 지내고 있지. 정말 꿈만 같은 곳이지 않아?”
“그 아이들이 정말로 즐거워하고 있는 거야?”
“당근이지!”
“그러면 부모님들은 어떻게 됐어?”
“그거야, 글쎄? 난 모르겠는데.”
“어째서?”
“그야 나는 불쌍한 아이들을 어른들로부터 해방하는 게 목적이니까. 그러니까 아이들의 부모들이 죽던 말 던 나랑 무슨 상관이야?”
“아이들이 정말로 부모님과 떨어져서 자기들만의 세상에서 살고 싶어 했던 걸까? 정말로 다른 아이들이 자기 스스로 원해서 그곳에 간 거야? 난 아니라고 생각해. 그저 네가 원해서 네가 하고 싶어서 네 멋대로 아이들을 납치해 간 거나 마찬가지잖아!”
수상한 목소리는 대답이 없었다.
“생각해봐. 자신의 소중한 아이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부모님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 하루, 아니 몇 날 며칠을 소리치고 뛰어다니며 애타는 마음을 부여잡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원망할거야. 만일 내가 네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간다면 우리 부모님도 똑같이 하시겠지. 난 그런 건 싫어. 엄마나 아빠가 슬퍼지는 건 결코 보고 싶지 않아.”
“더 이상 못 참아! 빨리 눈을 떠, 뜨란 말이야!”
수상한 목소리는 갑자기 돌변하여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건방진 꼬맹이 같으니라고!”
수상한 목소리가 화가나 이리 저리 뛰어다니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아무리 소리 질러도 나는 절대 눈을 뜨지 않을 거야.”
“다 없애버릴 거야! 없애버릴 거라고! 그런데도 너는 눈을 뜨지 않는 거야?”
“응. 엄마랑 약속했으니까.”
“으아악!”
수상한 목소리는 괴성을 지르며 주변에 있던 물건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불로 태워버리거나 시리도록 차가운 냉기를 불어넣어 온 사방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소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어떠한 상처도 입지 않았다.
“너는 어째서?!”
그 순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엄마가 소녀를 부르며 소녀의 방으로 걸어왔다. 수상한 목소리는 집으로 돌아온 엄마의 목소리를 듣자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제길, 제길! 말도 안 돼!”
수상한 목소리는 절망했고, 방문을 열고 들어온 엄마는 그것의 존재와 엉망이 된 방을 확인했다.
“저건 대체?”
“안 돼, 이리로 오지 마! 저리 가란 말이야!”
“넌 설마, 어서 꺼져! 여기서 당장 나가!”
엄마는 크게 소리치며 수상한 목소리를 쏘아붙였다. 수상한 목소리는 그런 엄마의 기세에 눌려 구석으로 숨어들어 떨리는 몸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엄마는 그 존재를 향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선반위에 있던 거울을 들어 수상한 목소리를 향해 던졌다. 엄마가 던진 거울에 맞은 수상한 목소리는 고통에 절규 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딸아 어서 이리로 오렴!”
그 사이 엄마는 소녀를 끌어안고 불길에 휩싸인 수상한 목소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그것이 소멸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상한 목소리는 타오르는 불꽃과 함께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엄마는 그제 서야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다녀오셨어요?”
“그래. 정말 기특하구나. 그리고 정말 다행이야.”
“엄마랑 약속했으니까요.”
“이제 눈을 떠도 돼.”
소녀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천천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눈앞에는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는 엄마의 얼굴이 보였고, 소녀는 그런 엄마의 품에 안겼다.
“이제 그것은 영원히 네 앞에 나타나지 못할 거야. 그러니 이제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고마워요.”
수상한 목소리가 사라지고 소녀가 눈을 뜨자 엉망진창이 되었던 소녀의 방에 있던 그을린 자국과 얼어붙었던 흔적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소녀와 엄마는 그런 방을 뒤로한 채 손을 잡고 문을 열어 1층 거실로 내려갔다.
LUMINATRICE
안녕하세요. 먼저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글을 쓰다 보니 단어선정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 같네요. 이전에도 군대 후임에게 제가 쓴 글을 보여 주었을 때 어린아이가 쓰기에는 다소 성숙해 보이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지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이와 같은 단어 선정에 있어서 좀 더 생각해 보고 심혈을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간 내어 소중한 의견을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