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야가 자살하기 전에 쇼코를 만나 사과하기로 했던 그 날,
쇼코는 수화교실에서 다리밑 잉어에게 빵을 떼어주는 당번을 자처했는데
그것을 본 쇼야가 의아해한다. 뭐가즐겁다고 이런일을 하는거야?
쇼코가 정말 기쁜 얼굴로 필요한 사람이 되는게 기뻐서
라고 하자 별걸갖고 좋아하는 쇼코를 이해하질 못해 별 이상한 생각이나 한다고 한다.
그런데, 작품 초반부에 가볍게 넘어간 장면이지만
이것은 작품 완결부에 가장 무겁게 다뤄질 복선이었다.
쇼코는 인생 여기저기에서 '너는 필요없는 사람'이란 메시지를 숱하게 들었다.
생부 가족에게서 필요없다며 버림받고
초등학교에선 청각장애 때문에 콩쿠르가 망했고 반이 불편해졌다며 버림받았다.
놀랍게도 세상은 쇼코가 자긍심을 가질 여지를 한 푼도 주지 않았다.
그러니 쇼코가 끔찍한 자기혐오에 갇히게 되는 것은 필연이었다.
자기혐오가 가득 들어찬 마음에는 어머니와 여동생의 사랑도 들어가질 않았고
버리지 않고 부둥켜안고 함께 사는 가족들이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쇼코를 보며 함께 괴로워했다.
그리고 그런 가족을 보며 쇼코는 또 괴로워하고... 쇼코는 쇼야가 속죄하러 오지 않았으면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미래를 맞이했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네가 떨어진 건 나 때문이야. 옛날이랑 똑같아. 난 정말 최악이야. 내가 모두의 관계를 망쳐버렸어. 그때랑 똑같아. 소중한 건데..."
-쇼코의 수화-
쇼코의 자기혐오가 여전하단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거기서 쇼야는 비로소 깨닫는다.
자기가 쇼코에게 그동안 해 준 일방적인 보호가 아닌
쇼코에게 진정으로 필요하고 자기가 해 줄수 있는 걸.
쇼코에게는 자긍심이 필요했다.
세상에 자기 자리가 있고, 자기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이며
쓸모가 있고, 자기의 존재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는 그런 게 필요했다.
그래서 쇼야는 자기가 쇼코에게 그런 존재가 되기로 한다.
울고싶어질때면 함께 울어주고, 기쁜일도 함께하며
자기가 미처 못 하는 일은 쇼코에게 의지하기로 한다.
그런데 쇼야는 사실 쇼코를 위해서만 그런말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쇼야는 쇼코 없이는 살 수가 없는 놈이었다.
카와이에게 폭로당해 수치심과 자괴감에 자살충동을 느껴도
다리위 사건에서 모든 인간관계가 박살나도
과장 하나 안 보태고 정말 쇼코 하나만 행복하게 만들 수 있고 지켜낼 수 있다면
그걸 이유로 살아가는 놈이었다.
그게 어느정도냐면,
쇼야는
쇼코에게 속죄하기 위해서라면 자기는 죽지도 말아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다.
죽으면 속죄를 더 못하니까.
니어데스 해피니스라는 소설과 만화에서 나오는 가공의 병명이 있다.
그런데 그 소설과 만화에서 처음 등장한 말은 아니고, 실제로 중태에 빠진 각종 환자들의 임사체험 경험담을 토대로 만든
가상의 병명이라고 한다.
그것은
죽음에 근접한 사람이 굉장한 황홀감과 행복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near(가까운)death(죽음)happiness(행복)이다.
그게 그냥 죽음에 임박해서 고통을 줄이기 위해 뇌하수체가 도파민 뿜뿜할뿐이란 분석이 있긴 한데 정설은 없으니 관두고
그보다 중요한건
작중에서 쇼야는 정말 심각한 위기였다.
혼수상태에 빠진지 2주차에 접어들었다.
환자의 용태에 따라 천차만별하긴 하나, 혼수상태에 접어든지 2주~5주가 되면 병원에서는 가족들에게 '결정'을 권유한다.
생명유지를 그만둘지 계속할지를.
소생가능성이 몹시 낮단 의미다.
실제로 쇼야는 행복한 안식의 꿈을 꾸며 삼도천을 건너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러다 쇼코의 꿈에서 쇼야의 옷깃을 잡아당긴게
쇼야의 꿈에 나타나
그 감각이 다리위의 쇼코의 모습을 보여주고
쇼야는 안식을 집어던지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깨달으며 죽음 앞에서 다시 일어난다.
여기까지 적고보니 이시다 쇼야란 놈의 정체가 보였다.
이거 순 싸이코다.
세상 어떤놈이 이렇게까지 해
근데 존나게 멋지고 선량하고 간지 상남자스러운 싸이코였다
세상에 선량한 싸이코란게 있을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