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가 예주자사(豫州刺史)가 되었을 때 전예는 모친이 연로하다 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했다.
유비가 눈물을 흘리며 그와 작별하며 말했다.
“그대와 더불어 함께 대사(大事)를 이루지 못함이 한스럽구려.”
(생략)
공손찬(公孫瓚)이 전예에게 동주령(東州令: 東州현의 현령)을 맡겼는데,
공손찬의 장수 왕문(王門)이 공손찬을 배반하고 원소(袁紹)를 위해(원소의 편이 되어) 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격하러 왔다.
(전예의) 무리들이 두려워하여 항복하고자 하였다.
전예가 성(城)에 올라 왕문(王門)에게 말했다.
“경(卿)은 공손(公孫, 공손찬)에게 후대받고도 떠났으니 여기에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으리라 여겼소.
(그러나) 이제 다시 돌아와 침범하니 경이 그저 난인(亂人)일 뿐임을 알겠소.
무릇 작은 병 정도의 보잘것없는 지혜를 가진 이[挈甁之智]라도 기물(병, 즉 지혜)을 지키며 (남에게 쉽게) 빌려주지 않는 법이며
내가 이미 (이 현을 지키는 임무를) 받았소. 어찌 급히 공격하지 않으시오?”
-전예전
전예가 떠난건 유비가 예주자사 받고 공손찬과 떨어질려는 시점이었는데
왕문한테 일갈하는걸 보면 모친이 연로하다고는 했지만
혹시 이때 공손찬을 떠날려는 유비에게 실망해서 함께 남지 않고 돌아간 게 아닐까?
결국 선우보의 밑으로 들어가다가 위나라 장수가 됨
공손찬멸망한다음에 간거니 별문제없겠지만
공손찬이 패망한 뒤 선우보(鮮于輔)가 국인(國人)들의 추대를 받아 태수(太守)의 사무를 대행하게 되자(※①) (선우보가) 평소 전예를 좋게 여겼으므로(or 전예와 서로 친했으므로) 그를 장사(長史)로 삼았다. 당시 웅걸(雄傑)들이 아울러 봉기하여 선우보는 (그 중에서) 누구를 따를지 알지 못했다. 전예가 선우보에게 말했다. (※①) <공손찬전> 등에 의하면 유우(劉虞)가 공손찬을 공격하다 193년에 죽음을 당한 뒤 유우의 종사(從事)였던 어양 사람 선우보 등이 유우의 남은 무리를 이끌고 원소와 연결해 공손찬과 서로 맞섰습니다. 그러다 199년 공손찬이 역경에서 농성하다 원소에게 패망한 뒤 선우보가 유주 여섯 군의 사무를 대행하였고 조조, 원소가 서로 대치할 때 조조 쪽으로 투항합니다. “결국 천하를 평정할 자는 필시 조씨(曹氏)일 것입니다. 의당 속히 귀명(歸命)하여 뒷날에 화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공손찬멸망한다음 선우보 아래간거니 문제없고 저거보면 선우보가 누구아래로갈지고민했다하니 그냥조언해서 조조에게가자한거니
찬씨 손절도 영향 있긴한듯
그럴싸 한가
협관점에서 볼때 유비가 이해가 안됬겠지 아무리 상황을 말아먹고 있어도 대우해준게 있는데 뭐라도 해주고 가야하지 않나 다만 유비의 협은 장사용 물건이고 의리또한 모두를 포함하지 않았다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