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칼부림 中, 누르하치의 첫 번째 원한 : 명에 의한 누르하치의 부친과 조부의 오인 살해
누르하치는 1617년 음력 12월 조선에 명과 곧 전쟁을 할 것이며, 조선은 이 전쟁에 괜히 명의 편을 들어 개입치 말라는 논조의 일종의 양해 겸 압박의 의도를 지닌 서신을 발송했다. 이 때 서신의 전문은 확실히 확인되지 않으나 기본적으로 누르하치가 1618년 음력 1월부터 본격적으로 주장하는 '일곱가지 큰 원한'의 원본에 가까운 내용이 삽입되었던 것 같다.1
이 이후 1618년 음력 1월부터 누르하치는 본격적으로 명나라에 대한 적대의식을 드러내며 명에 대한 전쟁명분으로 꾸준히 '일곱가지 큰 원한'을 언급했다. 이 일곱 가지 큰 원한이란 이전에도 언급했듯이 누르하치의 조부와 부친이 1583년 아타이의 난 진압과정에서 명군에게 억울하게 살해당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지난 35년간 명과의 사이에서 발생한 여러 갈등을 총망라하는 역할을 했다.
만문사료인 구만주당에서 일곱가지 큰 원한은 나단 암바 코로(nadan amba koro)로 서술된다.2이는 만문으로 말그대로 일곱개의 큰 원한이라는 뜻이다. 만문노당 역시도 그 기조를 수용한다.3한편 기존의 만문 사료를 기초로 편찬된 한문본 『무황제실록』과 『고황제실록』, 『만주실록』등에서는 해당 원한을 한문으로 칠대한(七大恨)으로 서술한다.
그러나 사실 누르하치가 원한을 천명한 당대에, 일곱가지 큰 원한/나단 암바 코로는 한문으로 표기할 때에는 칠대한으로 표기하기 보다는 칠종뇌한(七宗惱恨)으로 표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와의 전쟁에 돌입한 누르하치가 조선에 보낸 외교서한의 파편적 흔적은 조선왕조실록의 『광해군일기』에 남아있다. 이에 관한 기록에서는 서신에 수록된 일곱가지의 큰 원한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아무래도 누르하치가 보내온 서한에서 가장 중심적인 이야기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록의 기록을 보자면 누르하치가 서신에 수록한 '일곱가지의 큰 원한'은 '칠대한'이 아니라 일괄적으로 '칠종뇌한'으로 서술되고 있다.
무순 전역 이후 누르하치가 조선에 보낸 차관은 만포첨사 장후완에게 누르하치의 서한을 전달했다. 장후완은 해당 서한의 내용을 등서하여 평안병사 김경서에게 올렸고, 김경서는 그에 관한 보고를 다시 조정에 올렸다. 비변사에서는 이에 관한 논의를 한 뒤 광해군에게 회계하였는데, 여기서 비변사는 '칠대한'이 아닌 '칠종뇌한'을 언급한다.3 이로 보건대 당시 누르하치가 보내온 서신에는 '일곱가지 큰 원한'이 한문으로 칠대한(七大恨)으로 적혀 있던 것이 아니라 칠종뇌한(七宗惱恨)으로 적혀 있던 것을 파악할 수 있다.
다른 기록에서는 어떨까. 1618년 음력 11월 5일 함경감사 권진이 보내온 장계가 조정에 도착한 기록을 살펴 보자. 권진의 장계는 누르하치가 보내온 또 다른 서신의 등서본과 함께였다. 해당 서신의 전문은 확인되지 않으나, 해당 서신에도 역시 누르하치의 원한이 '칠대한'이 아닌 '칠종뇌한'이라고 기술되어 있음이 드러난다.4
조선이 이렇다면 명나라의 기록은 어떨까. 명나라 역시도 무순 전역 이후 누르하치로부터 '일곱가지 큰 원한'을 거론한 선전포고 및 화친과 관련한 서한을 받은 바가 있으니 말이다. 기록을 살펴 보면 이 때 명나라가 수신한 누르하치의 거병 명분 역시도 '칠대한'으로 표기되지 않고 '칠종뇌한'으로 한문표기되었다.5
이러한 각 나라의 후금이 발송한 외교서한 수신 기록을 보건대 당시 누르하치는 한문으로 작성한 외교서한에서 자신의 거병명분을 '칠대한'보다는 '칠종뇌한'으로 서술한 것으로 사료된다. 물론 둘 모두 뜻은 동일하지만, 칠종뇌한은 칠대한보다 표현이 좀 더 유려하다는 점이 핵심이다.
당시 다른 나라들에 보내진 후금의 한문본 외교서한에서는 칠종뇌한이라는 표현이 쓰였는데 어째서 정작 본인들의 한문기록에는 칠종뇌한 대신 칠대한이라는 표현이 쓰이고 기록된 것일까. 이는 아마도 실록을 편찬하는데에 기본 뼈대가 된 만문사료들에 쓰인 '나단 암바 코로'를 사관들이 한문으로 직역한 탓으로 보인다.
후금이 각국에 발송한 당대 외교서한에는 칠종뇌한이라는 표현이 쓰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문 외교서한에 쓰인 것에 불과했다. 후금의 자국 만문기록 사료에서는 그저 나단 암바 코로, 즉슨 일곱가지 큰 원한으로 기록되었다. 이는 한문으로 직역하면 칠대한이 된다. 당시 후금/청이 실록을 편찬하는데에 주료 이용한 기록은 그와 같은 자국의 기록사료이므로, 해당 부분을 직역하여 한문으로 칠대한으로 풀이하고 이를 한문본 실록에 기입했다고 생각한다.6
다만 청의 실록에서 한 차례 칠대한이 아닌 칠종뇌한이 언급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당시 후금의 한이었던 홍타이지와 요동순무(遼東廵撫)였던 원숭환간 외교적 교섭이 이루어지고 있던 1627년 3월경의 기록이다. 『청태종실록』 천총 원년 3월 5일의 기사상에는 7개의 큰 원한이 '칠종뇌한' 또는 '칠종', '칠한'등으로 기술되고 있다.7
웹툰 칼부림 中, 원숭환.
그러나 해당 기사는 청의 실록 기사라고 하더라도 명측,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원숭환과 이(李) 라마가 보내온 답서의 내용을 기술한 것이다. 해당 답서에서는 홍타이지가 칠종뇌한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이 언급된다. 즉, 해당 기사는 도리어 홍타이지가 명측에 보낸-정확히 말하자면 원숭환에게 보낸 외교서한에 '칠대한'이 아니라 '칠종뇌한'이라는 표현이 쓰였음을 증명한다.8
이상에서 보여지듯, 누르하치~홍타이지 시기 후금이 타국에 보내는 외교서한에는 '일곱 개의 큰 원한(nadan amba koro)'이 '칠대한(七大恨)'이 아니라 '칠종뇌한(七宗惱恨)'으로 기술되었으며, 자국의 한문 기록에 '일곱 개의 큰 원한'이 '칠대한'으로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만문의 번역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로 생각된다. 하지만 누르하치가 내세운 명분을 칠대한으로 칭하는 것이 잘못된 지칭용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후금/청의 한문기록에서 칠대한이라는 서술이 존재하며, 만문노당의 나단 암바 코로 역시 짧게 축약해석하자면 칠대한으로 읽을 수 있는 만큼 칠대한이라는 표현이 틀리다고 할 수는 없다고 본다.
1.『광해군일기』 중초본 광해 10년 3월 5일, 『비변사등록』 광해군 9년 12월 무일
1. 『구만주당』 무오년 음력 2월
2. 『만문노당』 동년 동월
3. 『광해군일기』 중초본 10년 음력 5월 29일
4. 『광해군일기』 중초본 10년 음력 11월 5일
5. 『명신종실록』 만력 46년 음력 4월 25일
7. 『청태종실록』 천총 원년 3월 5일
8. 단 『청태종실록』 천총 원년 정월 8일에 기록된, 홍타이지가 원숭환에게 보내는 서신의 원본에 가까운 서신에는 칠종뇌한이라는 표현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아마도 상기의 만문의 한문으로의 번역 이유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