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최고 인기 무장 사나다 유키무라에 대해서 알아보자
사나다 유키무라 하면
"오야카타사마~!!"라고 고함지르는 전국바사라의 이 모습이나
절륜한 스탯을 자랑하는 노부나가의 야망의 이 모습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여러 게임 회사들이 이렇게 미화하여 거의 삼국지의 조자룡이나 마초의 포지션을 꿰찼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최근에 NHK에서 방영한 대하드라마 '사나다마루'에서도
나름 간지남으로 묘사돼있다. 약간 호빗이긴 하지만...
하지만 실제 초상화는
이렇게 평범한 일본 사무라이 아재다...
사나다 가문의 문장은 그 유명한
육문전(六文錢)이며 원래는 중국의 민간 풍습으로 사후의 여섯 행로 혹은 삼도천을 지날 때 노잣돈으로 망자에게 넣어주는 것을 불교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원래는 오래 전부터 북시나노 지방의 가문들이 두루 쓰던 것이다. 불법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그리고 유키무라도 그렇고 그의 부하들도 그렇고 붉은 갑주로도 유명한데 이는 아카조나에(赤構え)라고 해서 오리지널은 타케다 신겐의
아카조나에로 그 위력에 감명을 받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부하 이이 나오마사에게 아카조나에를 구성하라고 했고 그것에 또 감명을 받은
사나다 유키무라가 오사카성 전투에서 벤치마킹을 한 것으로 짝퉁의 짝퉁이라 할 수 있다.
붉은색을 한 것은 다른 것보다 3배 빠르게 되니... 붉은색의 위력을 전국시대 무장들은 절실히 깨달은 것이다.
비록 짝퉁의 짝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카조나에 중 사나다 유키무라의 것이 가장 유명해지고 아카조나에의 대명사가 되었으니...
인생은 역시 한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 사나다 유키무라는 대다이묘도 아닌데 이렇게 리뷰를 하게 된 것은 역시 그 인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사나다 유키무라는 오랫동안
일본인들에게서 사랑을 받아온 전국무장으로 지금도 당당히 인기투표 1위를 자랑한다.
이는 아마도 누구보다도 드라마틱하고 불꽃같이 불태운 그의 인생 때문이리라. 불에 타죽은 오다 노부나가보다도 더욱 불꽃같이 목숨을 태웠다.
그리고 딱히 욕먹을 짓을 하지도 않았고... 사나다 가문은 박쥐같은 가문이라고 하는데 이는 거의 유키무라의 아버지 마사유키의 탓으로 여겨지며
사나다 유키무라는 충신의 대명사라 불린다... 뭐 충의만으로 다 설명되지는 않겠지만...
사나다 가문은 세이와 겐지의 후손이라 하나 이는 꾸며낸 것이며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전국시대부터로 쩌리 가문이었다.
유키무라의 가문의 틀을 잡은 것은 그의 할아버지 사나다 유키타카대였으며 육문전이 문장으로 쓰인 것도 이 때부터였다.
원래는 시나노 지방의 작은 호족이었는데 타케다 신겐의 아버지 노부토라가 주변 정벌을 하면서 휘말려 타케다 신겐대에 그의 가신이 되었다.
지략으로 타케다 신겐의 신임을 받아 중신 중 하나로 거듭날 수 있었다 한다.
사나다 마사유키는 사나다 유키타카의 삼남으로 원래는 7살 때 다케다 신겐의 명으로 무토가에 양자로 들어가 무토 키헤에 마사유키였다.
어릴 때부터 지략이 뛰어난 아버지와 타케다 신겐 곁에서 군략을 배워 그도 모사의 달인이 된다.
사나다 마사유키, 시마 사콘, 나오에 카네츠구를 가리켜 천하 3군략이라고 부른다고 하니...
타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의 카와나카지마 전투에도 참여했고 신겐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탈탈 털어먹은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참여해
이에야스를 괴롭혀주었다고 한다. 이 때부터 사나다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의 악연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공을 세워 사나다가는 시나노의 우에노와 코즈케의 누마타를 영지로 받게 된다.
그런데 신겐이 신나게 상락하던 도중 1573년 타케다 신겐이 병사하고 1574년 아버지 사나다 유키타카도 죽고 만다.
사나다 가문의 가독은 적자인 사나다 노부츠나가 이었지만 1575년 타케다가 와장창 박살난 나가시노 전투에서 형들 노부츠나, 테루마사가
둘다 전사하고 만다. 장수들이 잇따라 승천할 정도로 나가시노 전투는 조총으로 병사건 장수건 증발하는 충격적인 전투였다는 것...
가독을 이을 사람이 없어져 결국 마사유키는 다시 사나다로 성을 바꾸고 사나다가로 돌아와 당주가 된다.
1582년 오다가 본격적으로 타케다를 침공하기 시작한다. 이 때 마사유키는 주군 타케다 카츠요리에게 자신이 지키는 이와비츠성으로 오라고
진언했지만 카츠요리는 그를 믿지 않고 오야마다 노부시게의 이와도노성으로 향했으나 오히려 거기서 배신당하고 오갈데가 없어져
자결하여 타케다 가문은 끊어지게 된다. 그런데 이미 사나다 마사유키도 호죠 등과 접촉하였다고도 하니 마사유키 쪽으로 갔어도 결국
카츠요리는 배신당하고 자결할 운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마사유키는 통빡을 굴려 당대에 떠오르는 해인 오다 노부나가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충성을 맹세한다.
그리고 시나노 지방으로 파견된 오다 가문의 중신 타키가와 카즈마스를 도우며 산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가, 오다 가문으로 입장을 바꾸고 불과 3개월만에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다.
오다 가문의 후계가 탄탄했다면 괜찮았겠지만 타케다 가문과 마찬가지로 오다 가문도 곧 빌빌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주군을 갈아타야하는 입장에 놓인 것이다. 타키가와 카즈마스는 곧장 돌아가야 했지만 칸나가와 전투 등으로 지각하여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팽당하고 만다. 시나노, 코즈케 지방은 무주공산이 된 것이다... 이런 것을 주변의 대다이묘들이 가만 놔둘리 없었다.
우에스기, 도쿠가와, 호죠의 세 세력으로 둘러싸인 사나다의 운명은 흡사 러시아, 중국, 미국 사이에 끼인 한국과 비슷하니...
사나다 가문의 생존 투쟁은 한국의 그것만큼이나 눈물겨웠다.
일단 마사유키는 호죠 가문과 결탁하여 호죠를 도운다. 그러다가 호죠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마사유키는 태세를 변환하여 도쿠가와와
결탁을 하게 된다. 이 때 북방의 적을 막겠다는 구실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원조를 요청하여 우에다성을 새로 짓는다.
이에야스는 이 성이 2번이나 도쿠가와를 괴롭히게 될 줄 알았다면 땅을 치며 후회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나다의 배신으로 호죠는 도쿠가와와 화친을 맺기로 했고 도쿠가와도 호죠와 전투를 계속하기엔 부담스러워 이를 받아들인다.
문제는 이 때 화친 조건으로 호죠가 사나다의 누마타를 요구했고 도쿠가와가 이를 허락했다는 것이다.
마사유키는 또다시 태세를 변환하여 에치고의 우에스기 카게카츠한테 붙는다. 이 때 인질로 차남 사나다 겐지로 노부시게를 인질로 보낸다.
이것이 바로 훗날 사나다 유키무라이다. 1차 우에다 전투 때 우에스기에게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인질로 보내졌다고도 한다.
1585년 계속 호죠한테 누마타를 내놓으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자 화난 이에야스는 7천명의 군사를 보내 마사유키의 우에다성을 공격한다.
이것이 1차 우에다성 전투이다. 이 때 마사유키의 병력은 농민까지 합쳐도 2천명이 불과했다. 하지만 마사유키는 농성하며 지략으로
도쿠가와군을 괴롭혀 결국 1300명의 사상자를 내며 후퇴하게 만들었다. 사나다군의 전사자는 4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사나다마루'에서는 유키무라가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허락을 받고 달려가 전투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우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인질 주제에
그렇게 할 수 있었을리는 만무했을 것이다.
전투가 교착 상황에 이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서서 둘 사이를 중재한다. 이 때 사나다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의 중신 혼다 타다카츠가
사돈 관계가 되는데 혼다 타다카츠의 딸 이나를 마사유키의 적자 사나다 노부유키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이 때의 인연이 나중에 사나다 가문을
살리게 해주었으니... 인생사는 정말 모를 일이다.
이러저러한 과정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나다 마사유키,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모두 상경하여 복종하게 되고
사나다 유키무라는 우에스기의 인질에서 풀려나 오사카에서 히데요시의 곁에 있게 된다. 뭐 형식 상으로는 히데요시의 호위대였지만 실상
우에스기의 인질에서 도요토미의 인질이 된 것일 뿐... 하지만 이 때 히데요시가 유키무라를 총애하고 오타니 요시츠구의 딸과 결혼시키는 등
좋은 대접을 받았던 듯. 후에 유키무라가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하는 계기가 되었던 듯 하다.
호죠는 계속해서 히데요시의 상경 요구에 응하지 않고 사나다의 나구루미성을 공격하는 등 히데요시를 자극했고 결국 진노를 일으켜
호죠는 히데요시의 대군에 철저히 박살나고만다.
1592년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에는 조선에 출병하지는 않고 큐슈의 히젠 나고야성에 머무르며 후방 지원 임무를 맡았다.
출병하지 않은 이유는 도쿠가와가 출병하지 않았던 것과 비슷한 이유였을 것...
그러다가 1598년 히데요시가 결국 사망하게 된다. 이제부터 도쿠가와의 천하가 시작되는 것이다.
1600년 형식 상으로는 도요토미의 가신으로서 도쿠가와의 우에스기 정벌에 참여하던 와중 이시다 미츠나리로부터 서군에 가담하라는 서신을
받는다. 이 때 마사유키는 엄청난 갈등을 겪는다. 도쿠가와 밑에 붙으면 이제부턴 큰 공을 세울 기회도 별로 없고 미카타가하라 전투, 우에다성 전투
등으로 이에야스를 괴롭힌 과거가 그를 불안하게 했다. 하지만 서군에 붙어서 승리하면 사나다는 대다이묘로 우뚝 설 수 있는 기회...
도박사 기질이 있었던 마사유키는 또다시 도박을 한다. 2명의 아들들과 모여 앉아 토론을 한 끝에 도쿠가와의 사위인 노부유키는 도쿠가와의
동군에 붙으라 하고 마사유키와 유키무라는 서군에 붙기로... 그리고 어느 쪽이 이기든 진 쪽을 구명하자고... 꼼수를 부린 것이다.
그리고 사나다군은 우에다성으로 돌아간다. 거기서 도쿠가와의 군대를 방해할 심산이었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로 향하며 군을 2개로 나누어 도쿠가와의 본대 38000명은 삼남 히데타다에게 맡겨 우에다성 쪽으로 지나게 했다.
이에야스의 생각으로는 1차 때는 7천명이어서 졌지만 이번에는 38000명이어서 무난하게 제압하고 빨리 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다시 오산이었으니... 마사유키는 또다시 2천명으로 38000명을 1주일동안 막아내는 기적을 일으킨다. 2차 우에노성 전투이다.
히데타다는 우에다성을 포기하고 바로 세키가하라로 달려갔지만 결국 5일이나 늦게 도착하고 히데타다는 이에야스의 진노를 오롯이 받는다.
서군이 패배하자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 마사유키는 도쿠가와의 항복 요구를 받아들인다. 다 끝난 것이다...
이에야스는 마사유키와 유키무라의 목을 베려 했지만 노부유키와 그의 장인 혼다 타다카츠가 죽음을 불사하고 구명을 요청했고 결국
영지를 몰수하고 키이 쿠도산으로 유폐되는 정도에서 그쳤다. 사나다의 영지는 사나다 노부유키가 맡게 되었다.
가신과 부하 몇명만 데리고 아무 영지도 없는 상태에서 산 속에 갇혀 살아가는 것은 다이묘로서는 참기 힘든 생활이었을 것이다.
노부유키는 지원을 계속해서 보내 아버지를 보살폈지만 요구가 많아 까다로웠다 한다. 마사유키와 노부유키는 끊임없이 이에야스에게 탄원을
요청했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고 여생을 일개 백성처럼 살아가야 했다. 이 때 생계를 위해 끈을 만들어서 판게 사나다끈이라 하여 유명하다.
마사유키와 유키무라가 굶어죽지 않으려고 만들었던 사나다끈... 이것 또한 무스비???
1611년 마사유키는 향년 65세로 눈을 감는다. 그 긴 세월동안 그는 군략을 차남 유키무라에게 전수한다. 유키무라 전설의 시작이다.
1612년 유키무라는 출가하여 고하쿠라는 법명으로 바꾼다.
1614년 호코지 사건으로 도쿠가와가 도요토미를 본격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하자 오사카성으로 낭인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엥간한 다이묘들은 죄다 도쿠가와측에 포섭되어 있었기에... 몰락한 낭인들밖에 도요토미가 기댈 구석이 없었던 것이다.
쿠도산에서 얌전히 살고 있던 유키무라한테도 금은과 함께 참전 요청이 들어왔고 유키무라는 이를 승락하고 아들 다이스케 유키마사와 함께
도쿠가와의 감시병들을 속이고 탈출하여 오사카성에 입성한다. 이 때 이에야스는 사나다가 오사카성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냐,
아들이냐!"라고 했는데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안심했다고 한다. 그만큼 사나다 마사유키와 우에다성은 그에게는 악몽이었다는 뜻...
하지만 사나다 유키무라도 이미 군략의 천재가 되어있었으니... 이에야스는 안심한 댓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이 때 사나다 유키무라는 이름을 유키무라로 바꾸게 되는데 '사나다마루'에서는 '유키'자는 아버지한테서 빌리고 나머지 1글자는
여러 글자를 적은 통 안에서 아들 다이스케보고 아무거나 꺼내보라 했는데 무라(村)자가 나와 유키무라로 정했다고 묘사된다.
아무리 그래도 그딴 식으로 이름을 짓는건 좀... 유키무라라는 이름을 언제부터 썼는지, 왜 그렇게 지었는지에 대해서는 썰들이 분분하다.
1671년 출간된 소설 난바전기(難波戦記)에 유키무라라는 이름이 등장했고 딸이 만든 가묘에도 유키무라라 써져 있는등 썼던 것은 맞는듯하다.
1614년 오사카 겨울의 전투가 시작되기 전 유키무라는 농성이 아니라 쿄로 진군하여 요충지들을 선점하여 도쿠가와를 압박하자고 했다.
그러나 한낱 객장에 불과했던 유키무라의 의견은 묵살되고 농성으로 가닥이 잡힌다. 그러자 유키무라는 오사카성의 약점인 남쪽의
타마즈쿠리구치쪽에 성채인 '사나다마루'를 짓는다. 그리고 자신과 부대의 갑주를 빨간색으로 만들어 아카조나에를 만든다.
그리고 시작된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 적군을 유인하여 다테 마사무네, 에치젠 마츠다이라, 카가 마에다의 부대들을 박살내
사나다 유키무라의 위명을 전국에 떨치게 된다. 하지만 도요토미의 수뇌부 요도도노와 그녀의 총애를 받던 오노 하루나가는 ㅂㅅ이었으니...
유키무라의 형이 도쿠가와측에 있고 하니 언제 배신할지 모른다고 사나다마루 뒤에 총포병을 두기까지 했었단다.
요도도노와 오노 하루나가는 유키무라팬들한테는 도요토미를 말아먹은 ㅂㅅ들로 두고두고 까이고 있다. 지금도 오사카에 가보면 여기저기
육문전과 사나다 유키무라를 칭송하는 모습은 보이지만 요도도노와 오노 하루나가는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요도도노의 병크로 오사카성의 해자와 사나다마루를 철거하는 조건으로 도쿠가와와 강화를 맺어버리고 사나다마루는 철거되고 만다.
이후 이에야스는 도쿠가와의 가신이었던 유키무라의 숙부 사나다 노부타다를 여러번 보내서 영지 10만석을 주겠다, 시나노를 주겠다며
회유를 많이 했지만 유키무라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여기서 그의 충의를 엿볼 수 있다. 단지 자신의 보신이나 출세만을 위해
도요토미에 가세했다면 10만석이나 시나노의 다이묘가 되는 조건이라면 받아들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도요토미측의 승산이 거의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으니 더욱 그러하다. 세키가하라의 이시다의 서군은 그나마 비등한 세력을 갖고 있었기에 마사유키도 도박을 걸어봄직 했지만
오사카성 전투의 도요토미측은 수뇌부도 그렇고 병사의 구성, 질도 그렇고 전혀 도쿠가와군에 비할바가 못되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충의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인으로는 임진왜란의 원흉인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겠지만...
과도한 충성을 맹세하는 모정치인에게서 사나다 유키무라의 모습이 겹쳐져보인다고 한다면 실언일까?
아무튼 오사카성을 벌거벗은 성으로 만들어버린 이에야스는 이듬해 여름 낭인들을 해산하지 않고 에도로 히데요리가 상경하지 않는다는 등
트집을 잡고 다시 군사를 일으킨다. 이것이 오사카 여름의 전투이다.
성을 방어할 수단이 없어져 유키무라 등 무장들은 야전을 감행한다. 한때는 다테 마사무네 부대를 퇴각시키는 등 분전을 했으나
고토 마타베, 키무라 시게나리 등이 전사하는 등 점점 밀리게 되자 유키무라는 필사의 돌격을 결심한다.
이 때 유키무라는 거듭 히데요리의 출전을 요청했으나 요도도노 등이 반대하여 결국 무산된다. 히데요리가 출전했으면 도요토미가의 명줄은
조금 길어졌을까?
사나다 유키무라는 모리 카츠나가, 아카시 타케노리 등과 함께 빛이 되어 이에야스의 본진으로 영혼의 닥돌을 한다.
에치젠 마츠다이라 부대를 박살내고 이에야스의 본진까지 돌격하여 미카타가하라 전투 이 후 2번째로 이에야스의 대장기를 부러뜨린다.
이 때 이에야스는 도망치며 2번이나 할복을 시도하려 했을 정도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결국 중과부적으로 도쿠가와군에게 밀려 퇴각하여 야스이 신사에서 에치젠 마츠다이라 부대의 니시오 무네츠구에게 죽는다.
향년 49세였다.
이후 오사카성은 도쿠가와의 공격에 몰려 요도도노와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견디다 못해 자결하고 그 곁을 지키던 유키무라의 아들
사나다 유키마사도 자결한다. 이후 사나다 가문은 유키무라의 형 사나다 노부유키가 잇게 되어 오사카성 전투의 공로를 인정받아
마츠시로로 옮겨 13만석의 다이묘이자 마츠시로번의 초대 번주가 된다.
사나다 유키무라를 가리켜 일본 제일의 츠와모노(강자)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시마즈 타다츠네가 유키무라의 분전을 듣고 한 말이다.
10-20대의 인질 생활, 30-40대의 유배 생활이라는 안습한 일생을 살긴 했지만 오사카 전투 하나로 톱클래스 전국 무장의 반열에 올랐으니
역시 인생은 한방이다. 사후 그의 머리카락을 갖겠다고 도쿠가와 무장들이 다퉜으며 그의 딸들도 결혼 대상으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전국바사라 등의 애니메이션에서는 아예 주인공으로 그려지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사나다 유키무라.
이 세상 모든 사나이들은 그와 같은 불꽃같은 삶을 살고 온 세계에 명성을 떨치고 싶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