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오슈의 독안룡 다테 마사무네에 대해서 알아보자
사나다 유키무라를 언급했으니 이제 그의 라이벌(?) 다테 마사무네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라이벌 구도가 된건 전국바사라의 영향이 크지만...
실상 다테 마사무네와 사나다 유키무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격차가 있다. 다테 마사무네는 당당한 대다이묘 중 하나고
사나다 유키무라는 오사카성 전투 전에는 거의 이름이 안알려진 일개 낭인...
하지만 이것을 전국바사라에서는 둘을 동급으로 만들어버렸다.
동인지에서는 서로 엮이기까지(?) 한다고 하니... 잠든 마사무네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피를 토할 것이다.
다테 마사무네는 쇼맨쉽이 있던 다이묘로 실제로 그의 이름도 지금까지 여기저기서 쓰이고 있다.
일단 마사무네의 한자는 정종(政宗)인데 이것이 일본 사케 중 하나인 마사무네(正宗)의 어원이 되었다는 썰도 있고
다테오토코(伊達男)라는 말은 뜻이 아예 멋쟁이, 간지남이라는 뜻이다. 남들에게 보이는걸 중요시했던 마사무네 때문에 만들어진 말이다.
아무튼 그의 인상적인 애꾸눈, 오슈에서의 나름대로의 활약, 여기저기서 쑈를 벌인 행각 등으로 그는 컬트적인 인기를 누린다.
오슈의 독안룡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원래 독안룡은 그가 처음 썼던 말은 아니며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의 군웅인 이극용이 처음 썼으며
마사무네도 생전에 쓰인 것은 아니고 1901년 발행된 책 '독안룡 다테 마사무네'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도요토미, 도쿠가와 등이 득세한 시절에 일개 다이묘 주제에 독안룡 운운하며 영웅시했다간 바로 개역당했을 것이니 어찌보면 당연한 소리다.

미야기현 센다이에 있는 다테 마사무네 동상. 그의 초승달 장식 투구, 애꾸눈은 실제로 간지가 꽤 난다.
그의 초상화. 실제와는 달리 양눈이 멀쩡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왜냐하면 마사무네는 애꾸눈 때문에 컴플렉스가 심했으며
몸이 훼손된 것은 부모에 대한 불효라 하여 자신의 초상화나 동상은 전부 눈이 멀쩡한 것으로 하라고 했기 때문.
하지만 애꾸눈 초상화가 없는 것은 아니며 즈이간지에는 애꾸눈 목상이 있는데 이는 마사무네의 정실 메고히메가 남편의 생전 모습
그대로 남기고 싶다고 하여 그렇게 만든 것이다.
다테의 문장. 대나무 & 참새 문장이다.
마사무네는 오슈 후지와라의 후예인 다테 17대 당주였으며 아명은 본텐마루(梵天丸), 성인식 전까지는 토지로라고 불렸다.
토지로는 다테가 장남에게 대대로 이어지는 이름이었다.
마사무네의 아버지 다테 테루무네는 마사무네의 이름을 다테가를 중흥시킨 9대 당주 마사무네를 따왔지만 17대 마사무네가 워낙에
유명하여 마사무네라 하면 보통 17대 마사무네를 일컫는다.
그는 1567년 다테의 거성 요네자와성에서 다테 테루무네의 적자로 태어난다. 그의 생모 요시히메는 라이벌 모가미가의 딸이었다.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컸지만 5살때 천연두에 걸려 오른눈이 실명되고 평생 안대를 하고 살게 된다.
용맹하고 공부를 많이 하여 똑똑했던 마사무네였지만 어머니가 이때부터 마사무네를 멀리 하는등 애꾸눈이 컴플렉스가 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동생 코지로마저 태어나 어머니의 사랑은 코지로에게 쏠리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 다테 테루무네는 일찌감치 마사무네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계자로 점찍게 된다. 일설에는 부동명왕을 본 다테 마사무네가
부동명왕은 겉은 험상궂지만 이는 악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며 사실은 자비롭다는 말을 듣자 그렇게 되고 싶다는 말을 하여
테루무네가 재능을 알아보았다는 말도 있다.
테루무네는 당대의 유명한 고승 코사이 소이츠를 스승으로 만들어주고 카타쿠라 키타라는 여성을 보육 담당으로 하고 그녀의 남동생
카타쿠라 코쥬로를 시동으로 만들어주는 등 여러가지로 신경을 써주었다.
1579년 주변의 다이묘 중 하나인 타무라 키요아키의 딸 메고히메와 결혼하였고 1584년 18살에 테루무네는 충격적이게도 마사무네에게
일찌감치 가독을 넘겨줘버린다. 15살에 소마와의 전투에서 활약하는 등 용맹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이는 너무 빠른 상속이었다.
애꾸눈이 된 마사무네보다 동생 코지로를 어미가 더 총애하고 가신들도 동요하는 모습을 보면서 일찌감치 질서를 확립해야 가문의 미래가
밝겠다는 테루무네의 생각이었다.
마사무네가 상속받았을 당시 일본 중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기 시작하는 시점이었으나 다테가 위치해있던 토호쿠는
아직 모가미, 카사이, 오사키, 소마, 이와키, 아시나, 다테 등 여러 다이묘와 타무라, 하타케야마, 이시카와, 니카이도, 시라카와 등
중소 호족들이 난립하고 있는 상황으로 이를 빨리 평정해야 히데요시한테 대항하든가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1585년 오우치 사다츠나가 아시나를 등에 업고 다테가에 복종하기를 거부하자 마사무네는 군사를 일으켜 오우치의 오데모리성을
점령한다. 이 때 사다츠나는 도망쳐버리는데 이에 격노한 마사무네는 오데모리성의 모든 인원을 몰살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800여명의
사람들이 일거에 목숨을 잃는다. 마사무네의 악명은 널리 퍼지게 된다.
주변을 정리하며 마사무네는 니혼마츠 요시츠구를 압박했고 요시츠구는 영지의 반을 바치며 복종하려 했지만 마사무네는 이를 거절하고
작은 촌락 하나만 허락해준다. 하지만 이는 가신 한명도 먹여살리기 어려운 것이었으니... 결국 요시츠구는 계략을 짜낸다.
마사무네의 아버지 테루무네에게 사정을 하러 간 후 구슬려 테루무네가 자신을 배웅하게 만든 후 테루무네를 납치한 것이다.
마사무네는 이를 쫓아가 니혼마츠 요시츠구와 함께 아버지 테루무네를 총포대로 쏘아 죽인다. 일설에는 테루무네가 자신은 상관말고
총을 쏘라고 했다지만 알 수 없는 일이고 당시에는 비정하게 아버지를 죽여버린 자라는 악명이 퍼졌던 모양이다.
아무튼 이렇게 테루무네는 향년 42세로 눈을 감는다. 이 사건으로 어머니 요시히메와는 더욱 사이가 나빠지고 만다.
마사무네는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군사를 일으켜 니혼마츠를 멸망시키러 출전한다. 하지만 오슈 남부의 사타케 요시시게가
아시나, 이와키, 시라카와 등을 규합하여 다테군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오슈의 패권을 놓고 히토토리바시 전투가 벌어진다.
사타케의 귀신 사타케 요시시게. 노부나가의 야망을 해본 사람이면 익숙할 것이다. 절륜한 스탯을 자랑한다.
병력차도 그렇고 경험치도 그렇고 해서 다테군이 쳐발리는 와중에 마사무네는 사촌동생 다테 시게자네의 분전으로 간신히 도망쳤고
호죠가 갑자기 사타케의 통수를 쳐서 사타케군이 급히 퇴각하여 한숨 돌리게 된다. 하지만 남오슈와 아이즈는 사타케에게 뺏기고 만다.
아이즈의 아시나의 3살짜리 당주가 급사하자 다테 코지로를 당주로 삼느냐, 사타케 요시시게의 아들을 당주로 삼느냐가 고민이었는데
히토토리바시 전투 이후로 사타케가 아시나의 후계자를 꿰차게 된다.
이후 마사무네는 처가인 타무라가와 합심하여 노력한 끝에 니혼마츠를 멸망시키게 되나 이후 다테가에 종속돼있던 오사키 가문이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다테는 전투에 패배하여 오사키가의 독립을 허용하고 만다. 오사키가는 모가미 요시아키의 처가로
모가미 요시아키는 이를 기회로 여기고 아시나, 니카이도 등을 선동하고 함께 다테를 침공한다.
역시 노부나가의 야망을 해본 사람이라면 익숙할 모가미 요시아키. 역시 절륜한 스탯을 자랑한다.
다테의 대위기였으나 마사무네의 어머니이자 모가미 요시아키의 여동생인 요시히메가 직접 가마를 타고 전장으로 나가
요시아키를 설득한다. 심각한 시스콘이었던 요시아키는 후방의 혼죠 시게나가의 위협도 있고 해서 별 조건없이 퇴각한다.
이후 드라마틱하게도 모가미와 다테는 강력한 동맹관계가 된다.
이후 이를 갈던 마사무네는 사타케 요시시게의 아들이 다스리는 아시나를 공격한다. 아시나를 다스리던 사타케 요시히로는
인망이 없어 배신자가 속출하며 결국 스리아게하라 전투에서 패배하며 아시나가는 멸망한다.
이렇게 마사무네는 23살의 나이에 다테가 역사상 최대의 영지를 획득하기에 이른다.
이 전투는 마사무네 인생 최대의 승리였기에 마사무네는 자주 "가문의 명운을 건 전투였다."고 떠들었으며 도쿠가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에게 이를 들려주기도 했다.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칸파쿠에 오르며 전국의 다이묘끼리 전투를 금지하는 총무사령을 내렸는데 마사무네는 이를 거역하며
사타케와 전투를 계속했다. 마사무네는 시라카와, 이시카와, 이와키 등을 계속해서 정복했으며 이때 호죠의 거역에 빡친
히데요시가 대군을 거느리고 오다와라를 침공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오슈의 패자 마사무네에게도 자신에게 복속하여 호죠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사무네는 오랜 동맹관계였던 호죠와 도요토미를 저울질하다가 결국 답이 없다고 결론지었고
느지막히 히데요시를 찾아가 복종을 맹세한다. 히데요시는 매우 빡친 상태라 마사무네를 어떻게 조질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흥미로운걸 좋아한다는 히데요시의 성격을 캐치하여 마사무네는 흰 소복을 입고 이목을 집중시키며 히데요시에게 사죄했다 한다.
이에 히데요시는 용서하며 지팡이로 마사무네의 목을 치며 "조금만 늦었어도 네 목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한다.
소복을 입고 히데요시에게 사죄한 마사무네.
그리고 미천한 신분 탓에 고상한 취미를 동경하는 히데요시에게 다도에 대한 소양을 드러내며 호감을 얻었다고 한다.
아무튼 호죠가 멸문당한 후에도 마사무네는 아이즈만 잃고 본래 영지는 보존할 수 있었다.
1590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마사무네는 동생 코지로를 죽인다. 호사가들은 다테 코지로가 어머니 요시히메와 작당하고 마사무네를
독살하려 했다는 썰이 있지만 이후 8년이나 요시히메가 다테가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이는 가능성이 떨어진다.
아무튼 어지간히 빡쳤는지 마사무네는 코지로를 죽이고 향후 7대동안 절연을 선언한다.
김정은이 김정남을 죽인 이유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얼마후에 벌어진 잇키의 배후에 마사무네가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이를 심문하기 위해 히데요시는 오사카로 마사무네를 부른다.
목숨의 위험을 느낀 마사무네는 또다시 똥꼬쑈를 하게 되고... 이번에는 수의에 황금 십자가까지 들고 간다.
심문 때 마사무네는 자신은 편지를 쓸 때 바늘구멍을 뚫어 자신의 것임을 증명한다고 했고 문제의 서신에는 이것이 없어
결백을 주장했다. 히데요시는 이를 인정해 다른 영지로 전봉시키는 너그러운 처벌로 그쳤으나 실상은 잇키의 배후에
다테 마사무네가 실제로 있었고 이를 기지로 극복하는 마사무네를 가상하게 여기고 아직 정권이 안정기에 들어가지 않아
마사무네같은 거물을 제거하는 것은 부담스럽고 해서 너그럽게 처벌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후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자 참전한다. 이때 히데요시는 1500명을 동원하라 했는데 히데요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2배를 동원하고 히데요시의 원조도 거부한다. 그리고 기상천외한 복장으로 시중의 주목을 끌었다.
뭐든 화려하고 쑈를 좋아하는 마사무네의 군대. 이때 간지라는 뜻의 다테모노라는 말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즉 다테=간지.
하지만 정작 전쟁 중에는 그다지 의욕없게 싸웠다고 한다.
이후 히데요시의 아들 히로이마루가 태어나면서 히데요시는 히데츠구의 트집을 잡고 숙청한다.
마사무네는 평소 미래의 권력자 히데츠구와 친하게 지내두었기에 위기가 또다시 찾아왔다. 어찌보면 사나다 마사유키보다 한 수 더한
기회주의자... 결국 기름장어처럼 위기를 또 벗어나게 된다. UN 사무총장의 그릇?
정유재란 때 히데요시는 마사무네에게 출병을 명령했지만 이때 말을 듣지 않고 출병하지 않았다. 아마 이때부터 도요토미는
이미 멸망할 운명이라는 것을 읽은게 아니었을까?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 재빨리 태세를 변환하여 딸 이로하히메를 이에야스의 6남 마츠다이라 타다테루에게 시집보낸다.
우디르급 태세변환이 아닐 수 없다.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역심을 이유로 군대를 일으켰고 마사무네도 이에 호응하여 시라이시성을
함락시킨다. 이에야스는 마사무네에게 50만석의 영지를 추가로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무튼 그런 약조를 지키든 안지키든 희대의 기회주의자 마사무네로서는 이에야스에게 붙을 수밖에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 때를 틈타 거병하였고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상대를 마사무네에게 맡기고 세키가하라로 떠난다.
우에스기의 명장 나오에 카네츠구가 모가미를 공격하자 마사무네는 원군을 보내 이를 격퇴시킨다.
마사무네는 우에스기와 적당히 싸우면서 난부가의 영지에 잇키를 일으켜 영지 확장을 시도한다. 이에 이에야스는 빡쳐서
50만석을 주겠다는 약속을 취소해버린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마사무네는 센다이 등 60만석을 다스리게 되었으며 센다이번 초대 번주가 되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어지간히 빡쳤는지 마사무네를 에도에 붙들어두며 에도성 공사를 하게 만들었다. 결국 1603년이 돼서야 마사무네는 영지로
돌아갈 수 있었고 영지는 엉망에 재정은 빈털털이였다.
이후 야망은 포기하고 열심히 영지를 경작하며 도쿠가와와 친목을 다지는데 주력했다.
이때 마사무네는 유럽과 통상하여 이득을 증대하려고 하세쿠라 츠네나가를 유럽으로 파견하는 등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일개 다이묘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1614년 도쿠가와가 도요토미를 멸망시키기 위해 오사카성 전투를 일으키자 마사무네는 전투에 참여한다.
하지만 사나다 유키무라가 세운 사나다마루에 데이는 등 별다른 활약은 못하고 전투는 끝이 난다.
이후 오사카성 해자 매립에 다테군이 동원된다. 도쿠가와의 편리한 시다바리 다테...
이후 오사카성 여름 전투에서는 고토 마타베를 격파했으나 사나다 유키무라군에 또다시 데인다. 그 후 그는 전투를 미적미적한다.
사위인 마츠다이라 타다테루가 사나다 유키무라를 공격하려 했을때도 이를 만류한다. 이는 후에 타다테루가 개역당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게다가 마사무네는 아군인 진보 스케시게 부대를 향해 총포를 발사해 300여명의 아군을 죽이기도 했다. 팀킬.
사유는 "아군의 전방으로 들어오는 자는 아군이라 해도 적군과 같다."는 것.
아무튼 별다른 처벌은 받지 않고 그는 영지로 돌아가 영지 경영에 힘쓴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으니... 자신의 뒷통수를 칠 자는 다테 마사무네임을 알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일부러 마사무네의 사위이자 아들인 타다테루만 다른 아들들에 비해 영지를 적게 주는등 차별을 하다가
싯세이 오쿠보 나가야스의 모반 연판장에 타다테루의 이름이 거론되어 있고 뒷배에 다테 마사무네가 있는 등 모반 혐의가 있고
타다테루가 철없이 오사카성을 달라고 하는등 택도 없는 소리를 하자 히데타다와 함께 타다테루를 개역시켜 유폐시킨다.
이로하히메는 이혼당하고 다테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마사무네는 큰 처벌은 당하지 않았고 이후 이에야스가 죽을때 이에야스는 마사무네를 불러
히데타다를 부탁하고 죽는다. 다테 마사무네는 이에야스도 인정할 정도로 도자마 다이묘(즉 외부인) 중 1인자였던 것이다.
이후 막부의 원로 대접을 받으며 지냈고 히데타다는 죽을 때 아들 이에미츠에게 마사무네를 아버지로 여기라는 말을 남긴다.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나는 날 때부터 쇼군이다."라는 말을 자주 한 것으로 유명한데 마사무네가 이를 부추겼다는 썰이 있다.
1635년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천하의 다이묘들을 모아놓고 참근교대를 강요하며 이의가 있다면 싸울 준비를 해라고 하자
마사무네는 나서서 "이의가 있는 자가 있다면 이 마사무네가 가장 먼저 토벌하겠다."라고 하며 다시 똥꼬쇼를 벌인다.
이에미츠는 어지간히 마사무네를 마음에 들어한 듯 쇼군 앞에서도 칼을 찰 수 있게 허락했다.
이후 1636년 건강이 악화된 마사무네는 참근교대를 위해 에도를 방문한 후 병석에 누웠다. 아내 메고히메와 딸 이로하히메가
보기를 원했지만 다테오토코는 추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오오 다테오토코...
이후 에도의 자신의 저택에서 향년 70세로 눈을 감는다. 마사무네 사후 이에미츠는 도자마 다이묘로서는 이례적으로 사람들에게
에도에서 7일, 쿄에서 3일동안 상복을 입도록 명했다.
다테 마사무네는 자신이 좀 더 일찍 태어났다면 천하는 자신의 것이라는 말을 했고 그 말은 일리가 있다고 인정되기도 한다. ㅇㅈ?ㅇㅇㅈ
그의 내정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58만석에 불과했던 영지를 열심히 개간하여 100만석까지 늘렸다. 이에야스가 50만석을 주지
않았지만 결국 자신의 능력으로 100만석을 만든 것... 그리고 탁월한 외교력으로 여러 위기들을 헤쳐나간 것...
그의 초승달 장식은 인기가 많아 센다이의 미야기 스타디움은 초승달 모양이다.
전투는 별다른 공적은 없지만 눈부신 내정, 외교 능력과 애널써킹 능력으로 살아남아 도자마 다이묘 중 최대 세력을 구축한
다테 마사무네... 비록 지금은 토호쿠 대지진으로 무덤이 망가지고 센다이현이 어려워지는 등 안좋아졌지만
그 토호쿠 벽지에서 아등바등 노력하여 인정받는 대다이묘로 성장한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