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신) 수메르 서사는 '엉덩이'를 들추면 보인다
안녕? 귀염뽀짝 원신 스토리에
종교랑 철학 들이붓는 빌런쉨이다.
..사실 수메르 스토리 정도 되면
귀염뽀짝 같은 말 붙이는 것도
좀 실례라는 생각이 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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퀄리티가 워낙 좋기도 했고
주는 감동도 그만큼 컸는데,
문제는 서사 내용의 교훈..
그러니까 무슨 주제를 담은 건지
많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잖음?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볼까 함.
먼저,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현대철학의 이항대립 쌍을
이해하고 있어야 읽기 좋으니
안 본 사람은 위 링크를 참고 바람.
저걸 모르면 읽어봐야
핵심을 못 짚을 수도 있거든.
자, 그럼 슬슬 본론인
수메르 서사를 얘기해보자.
혹시 다른 커뮤도 이용하는 사람은
수메르 서사의 직접적인 모티브가
불교 설화모음집인 자타카(본생담),
그 중에서도 줄기가 빈 풀인
'쿠사나리'의 자타카임을 알 것임.
(몰라도 설명할 테니 걱정 ㄴㄴ.)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름.
수메르 서사의 진짜 모티브는
'불교의 탄생 과정'이었거든.
천천히, 하나씩 설명하겠음.
먼저 두 모녀의 이름부터!
룩카데바타(रुक्खदेवता)는 '나무의 여신',
쿠사나리(कुसानाली)는 '길상초'임.
산스크리트어 쿠사나리(कुसानाली)는
직역하면 '속이 빈 줄기의 풀'인데,
실제로도 줄기의 관이 비어서
한아름 모아 깔면 푹신한 모양임.
지금도 인도 사람들은 명상할 때의
방석이나 침구처럼 쓴다고 함.
제목의 엉덩이(..)와도 연관됐는데,
실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득도, 즉 깨우침에 도달할 때
엉덩이에 깔고 앉던 풀의 이름임.
그래서 '길하고 상서로운 풀'이라며
동북아에서는 길상초(吉祥草)라 불렸음.
그리고 쿠사나리 자타카,
즉 길상초 설화를 보면
곤경에 처한 나무요정과
이를 도운 풀의 승려가 나옴.
설화의 내용은 이러함.
어느 왕국 옆의 숲에
나무에 사는 요정이 있었는데,
갑자기 국왕이 목재를 쓴답시고
나무꾼들더러 숲의 나무를
벌목하라고 명령을 내렸음.
하필 그 나무가 요정의 집이어서
그렇게 터전을 잃을 위기였는데
이를 지나가던 쿠사나리 승려,
즉 풀의 승려가 기지를 발휘해
도움을 준 것임.

풀의 승려는 카멜레온으로 변해
나무에 앉아 썩은 나무로 보이도록
나무꾼의 눈을 속여 쫓아냈음.
그렇게 나무요정의 터전을 지켰지.
그러자 나무요정은 기뻐하며
풀의 승려에게 감사를 표했고,
상대의 존재가 크든 작든 도움을 주어
공덕을 베푼 일을 칭송했다고 함.
ㅇㅇ..
누가 봐도 수메르 서사랑 판박이임.
특히나 시각적 기만을 쓴 점이나,
상대가 누구든 도우려 하는 점이
나히다의 특징과 크게 겹침.
금단의 지식에 침식된 룩카데바타가
지혜를 깨우친 쿠사나리 화신에게
도움을 받아 세계수를 구하고,
동시에 티바트 세계의 침식을 막았잖아?
정말 재미있는 점은 불교에서
자타카의 나무요정은 아난다,
풀의 승려는 석가모니의
전생으로 각각 여겨진다는 점임.
아난다는 석가모니의 제자로,
명민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생전에
스승을 보필하며 가르침을 외웠음.
(*사실 평판이 명민하지 않다기에는
말씀 하나하나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웠다고 함.
다른 제자 마하가섭과 비교된 탓인 듯.)
그래서 석가모니가 죽은 뒤,
가르침을 기록하는 1차 결집지인
칠엽굴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함.
불교의 근본적인 교리들은
거의 여기서 확립됐거든.
근데 사제 관계가 좀 이상하지?
아니, 위대한(Greater) 어머니가
제자인 아난다의 전생이라면서,
미약한(Lesser) 딸인 나히다가
스승인 석가모니의 전생이 되잖아?
사실 저 구도가 핵심임.
석가모니는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가르침을 남길 때에도,
타인과 다른 대상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스스로를 *섬으로 삼아 의지하여
부지런히 정진하고 깨우치라고 했음.
그냥 귀의처 정도로 보면 됨.)
근데 구출되기 전의 나히다는?
모든 이들을 보살피면서도
오직 스스로만은 사랑할 줄 몰랐지.
석가모니의 스스로에게 의지하라는
중요한 가르침을 모르고 있었음.
스스로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룩카데바타 같은 위대한 존재에게
자신은 한사코 다다를 수 없다며
절망을 자처하고도 이를 몰랐지.
ㅇㅇ, 나히다는 '몰랐음'.
이게 바로 수메르의 근본문제,
[지혜]를 배척한 [무지]의 실체였음.
룩카데바타를 숭앙하면서
지혜의 신에게 존경을 표하고도,
실상 하는 말은 결국 [지혜]를
등지는 언사였다니, 웃기지?
룩카데바타는 [위대]하고,
쿠사나리 화신은 [미약]하다고
서사 내내 귀에 딱지 앉도록
대사가 나오던 것도 기억하잖아?
그래서 나히다의 별명도
'*작은 쿠사나리 화신'이었고?
(*Lesser Lord Kusanali,
룩카데바타는 반대로
'Greater Lord Rukkhadevata'.)
그러나 서사의 결말에 다다르면
우리는 이게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됨.
여행자로부터 도움은 받았지만,
결국 스스로의 선택으로 당당하게
자신을 가둔 절망을 허물고 나왔음.
일단, 결말 전까지는 모두
위대함은 한 존재에게 머물러
고정불변하는 게 아님을 몰랐음.
그렇게 [지혜와 무지]가
수메르의 이항대립이 된 셈.
수메르 서사의 본체는
사실 불교의 탄생 과정이라고
서론에서 내가 주장했지?
마치 몬드의 서사가
기독교의 탄생 경과와
유대교로부터의 독립을
묘사하고 있던 것처럼,
불교는 인도의 고대종교인
브라만교에서 파생했음.

불교의 탄생 원인은 바로
브라만교의 차별교리이자
신분제인 카스트제도이기 때문.
석가모니는 이 제도에 반발했지.
카스트제도에 따르면,
인간은 전생의 업보에 따라
현생의 신분을 지정받는 것임.
선업을 쌓았다면 고귀하게,
악업을 쌓았다면 미천하게
다음 생애를 누리게 되는 구조지.
그 때문에 억압적인 신분제가
합당하다는 논리를 펼치면서
안 그래도 생로병사에 시달리는
민중을 가축 취급하기도 했음.
이게 수메르에서는 사막인이나
쿠사나리 화신을 믿고 따르던
바자르 상회 사람들에 대해
제도적인 차별을 가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던 거지.
특히나 도금여단의 경우는
아예 그 이름부터가 멸칭인데,
중국에서는 '도금'의 뜻이
단순히 금속 도색이 아니라
'미약한 기술력과 재능을
가리기 위한 가림막'이거든.
즉, 도금여단이라는 이름은
아카데미아 현자들이 사막인더러
"어휴 ㅆ.. 미개한 새끼들.."
정도의 의미로 붙인 이름인 것.
(인성 한번 어질어질하구먼..)
그리고 브라만 신분은
대현자 아자르를 비롯하여
아카데미아의 고위직들이었지?
브라만 신분은 브라만교에서
사제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그 교리를 다른 신분들과
공유하지 않는 게 특징이었음.
이게 묘사된 모습은 바로
나히다를 정선궁에 가두고
허공 시스템을 장악한 것.
지혜의 도시에서 핵심체계를
독식했다는 죄상도 있겠지만,
*정선궁의 뜻은 '정갈한 선량함'인데
그 안에 지혜가 갇힌 꼴이지?
(*서구권에서는 '신의 성역' 정도임.)
즉, 아카데미아와 현자는
깨끗하면서도 선한 마음이
[지혜]를 품는다는 사실을 몰랐음.
오로지 건조한 지식만으로 세상의
본질에 다다른다고 착각했지.
그리고 그 [본질]로의 길을
직접 신까지 창조하면서,
지혜와 생명을 모독하는
배율적인 걸음으로 걸었음.
스카라무슈로부터 태어난
'정기의 신'은 본디 일본불교에서
사악한 존재마저도 포용하여
깨달음으로 이끄는 정기사상을
참고하여 붙인 이름임.
그러나 실상은 분노에 의지하여
제 뜻에 벗어난 존재는 억압하고
원치 않는 만상을 짓이기는 등
폭력에 기대는 오만에 불과했음.
그래서 등장대사가 바로
"칠엽 아래, 나만이 영원하리!"
-라는 가련한 대사였음.
앞에서도 말했지?
칠엽굴에서 불교의 근본교리가
처음으로 정리되고 기록됐다고.
불교의 핵심 교리 중
연기설(緣起說)은 세상만물이
서로에 의지하여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세계가
유지된다고 믿었음.
그런데 자신만이 영원하다니,
애초에 불교는 영원마저도
부정하면서 무상을 가르치는
생멸과 변화의 종교라고.
아카데미아와 스카라무슈가
얼마나 멍청했는지 감이 오지?
또한, 불교의 지혜인 혜업(慧業)은
곧 타인에게 공덕을 베풀면서
자비를 실천하고 더불어 사는 일임.
작은 선행이라도 함께 나누어
그 행복을 공유하는 지혜라고.
그러나 브라만교는 그러지 않았지.
때문에 아카데미아는 브라만교처럼
신분제를 화합의 제도가 아닌
압제로서 활용했을 뿐이고,
이게 아카데미아의 [무지]가 된 셈.
수메르 마신임무 종막쯤이 되면
아마 자주 느꼈을 것임.
아카데미아 하는 짓이
정말이지 촌극이라는 생각.
이는 [무지] 중에서도
가장 실수가 잦기 좋은
'확실히 안다는 착각'이었음.
미국의 유명작가 마크 트웨인이
아래와 같은 격언을 남긴 바 있지.
"사람이 곤경에 처하는 것은
무언가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확실히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카데미아와 현자는
알하이탐의 농간 따위로
쉽게 공략당한 것임.
특히 허공 시스템을
너무 과신한 일이 치명적이었고.
알하이탐의 주된 전략은
한결같이 '안다는 착각'을
살짝 비틀어 파고드는 거였지.
심지어 일부는 제 발로 거짓을 빚어
그걸 철썩같이 따르기도 했음.
(엌ㅋㅋㅋㅋㅋㅋ)
[지혜와 무지]란 생각 이상으로
한끗 차이에 불과하다는 걸
분명히 보이는 장면이 많았지.
자, 그래서 수메르에서의 여정은
불교의 [지혜]인 혜업으로
나아가는 과정임을 알게 됐음.
실은 이 서사를 간단하게 푼
대형 이벤트가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성대한 지혜의 축제'.
여기에 나온 허무주의의 카베와
그런 카베를 제자로 들이려던
절망의 철학자 사카인의 관계는,
실은 나히다와 룩카데바타를
축소시켜 옮긴 것이기도 했지.
이때 사카인이 미끼로 낸
상징적인 기물이 '통찰의 왕관'.
모든 학술인의 덕목인 [통찰]이
부와 명예를 축제 우승으로
한번에 얻을 수 있다는 [맹목]을
바보들에게 심고 있었고,
카베만은 여기에 넘어가지 않았음.
그래서 사카인의 눈에는
카베야말로 자신의 절망을
극복할 후임으로 적합했지.
줄곧 해오던 주장이지만,
티바트 전체의 서사 주제는
곧 이원론의 극복이라고 했잖아?
사실 브라만교의 [지혜]가
그런 이원론의 예시 중 하나임.
서양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인
플라톤주의가 본질을 깨우치자고
이성과 지식을 강조한 것처럼,
브라만교는 우주의 본질인
'브라만'을 깨닫는 것을
지혜로 보는 종교였거든.
근데 차별 정책을 끼얹어
대중의 구원을 막아선 것을,
즉 지혜에 벽을 세운 폐단을
석가모니가 포용으로써 와해시켰고,
그렇게 모두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위대한 종교가
지금도 세계 3대 종교의
하나로 자리매김한 거지.
[지혜]로 향하자면
지식을 쌓아야 하게 마련이고,
그러자면 누구나 질문을,
즉 자신의 [무지]로써
시작되는 의문을 품어야 함.
"난 문제를 내는 사람이자,
답을 구하는 사람이야."
룩카데바타의 마지막 말씀,
다시 한번 들어볼까?
"꿈속에서 밤이 되면 사람들은
모두 꿈나라로 빠져들었어."
"그들만이 그 광기를
완전히 쫓을 수 있고,
오직 꿈만이 가장 깊은
어둠 속 의식을 깨울 수 있어."
모두 설명하기에는 너무 길지만,
룩카데바타는 본질주의보다는
개별적인 꿈, 즉 개인의 상념이
진정한 해결책이라 보고 있었음.
벤티도 몬드를 방임 중이고,
종려 역시 리월을 필멸자의
시간론적 순환성에 맡겼지.
이걸 이해 못하던 라이덴은
결국 백성의 염원을 품어
영원으로의 다른 길을 제시했고.
이들이 낸 답은 결국
[본질]보다는 [실존]을 택하여,
근본적으로는 전부 같은 답임.
'영원불변'이야말로
보편적이고 절대적이라는
믿음이 헛됨을 깨달았으며,
본질로부터 빚은 실존이
비록 불안하고 미약할지라도
질문에 답을 낼 수 있다는 소리.
그렇기에 수메르 서사는
티바트 전체 서사에서도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었음.
본질로의 길을 제시할 때
항상 등장하는 게 지혜이기에,
지혜를 규정하는 이야기에서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다잡아
흔들림 없는 의지를 품은 나히다가
자타카의 스승 역할이 되어
어머니를 구하는 인물이 된 거지.
그러나 룩카데바타의 역할도
결코 한미한 것은 아니었음.
그녀는 지혜의 어머니답게
자신의 소멸이 끝은 아님을 알아,
수메르에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침식의 절망에 응수했음.
그녀가 죽어 없어지더라도,
그 은혜는 세상에 남아
비늘병을 지우고, 칠흑을 정화하고,
또한 이로써 생애에의 의지를
이어갈 존재들이 다시 나타나기에
그녀의 끝맺음을 새로운 시작의
발판으로 삼아 세상에 흔적을 남겼음.
실제 역사의 아난다 역시
스승의 후광에 기대지 않기 위해
그의 가사(袈裟, 승려의 의복)를
물려 입기를 거절했다고 함.
석가모니의 권위를 빌려
승단의 헛된 위세나 늘리는 일에
낭비하지 않기로 한 것.
언젠가 허물어질 허상보다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서
스스로 정진을 거듭했고,
명민하지 못하다는 평판에도
끝내 수행을 통해 열반에 들었음.
(실은 그 과정이 좀 다이나믹한데,
굳이 궁금하지는 않을 걸..)
그렇게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불교의 경과 율은 아난다가
구전으로 끝날 뻔한 가르침을
1차 결집 때 모아 정리하여
지금도 거의 그대로 이어지는 중.
정리하면, 수메르 서사의 의미는
억압적인 차별주의를 벗어나
포용주의를 재차 강조하며,
그 존재가 크든 작든
불교의 혜업으로써 타인에게
공덕을 베풀어 도우라는
지혜로운 말씀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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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궁금한 게 하나 있지?
왜 하필 이 지혜의 힘이
꿈과 환상을 부린 걸까?
이 얘기를 하자면,
우리는 브라만교로부터
타종교의 대중성을 포섭하여
재탄생한 힌두교를 알아야 함.
이건 다음 기회에 다루겠음.
p.s. 혹시 내가 써놓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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