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이전의 글에서 필자는 사료의 분석을 통하여, 후금이 1618년 음력 4월 무순 전역에 투입한 병력이 약 2만여명 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이는 후금 국내의 팔기 전력에 더불어서 후금군 본대에 함께 종군한 몽골계 연합군과 사할차의 군대를 도합한 수치이다.
그런데 사실 2만명의의 군대라는 것은 대군이긴 하되 누르하치가 이전에 대규모 전역에 동원했던 병력 규모에 비하자면 오히려 적은 축에 속한다.
예컨대 1612년과 1613년에 존재했던 1·2차 울라 공략전에서 누르하치는 이미 3만에 달하는 병력을 매 회마다 동원했던 전례가 존재한다.1 뿐만 아니라 울라를 멸망시킨 뒤 존재했던 1613년 음력 9월의 대규모 여허 침공에서, 누르하치는 그보다도 많은 4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했다.2
울라 공략전에 투입된 건주군(후금군의 전신)의 규모는 무순 전역에 투입된 후금군의 1.5배에 달했으며, 여허 공략전에 투입된 병력은 무순 전역에 투입된 후금군의 2배에 달했다. 두 세력 모두 명나라라는 패권국과 직접적으로 단순 국력을 비교하자면 미약하기 짝이 없는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누르하치는 해당 세력들을 대상으로 한 전쟁에서 사실상 자신이 투입할 수 있는 최대 전력을 투입한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후금은 명나라라는 대국을 상대로 벌인 최초의 원정인 무순 전역에는 이전보다 훨씬 적은 병력을 투입했다. 당시 후금의 국력은 요동을 점령한 뒤나 차하르를 완전히 복속한 뒤에 비할 바는 못되었으나, 1612~13년 시기의 건주보다는 명백히 국력이 신장되어 있었다. 당장 또 다른 여진 세력인 울라를 병합했으며, 지속적인 동해 여진 원정으로 포로와 귀순자들을 후금에 내속시켰기 때문이다. 즉, 마음만 먹는다면 2만 이상의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르하치가 명나라를 향한 최초의 공격에 그 정도의 병력만을 동원한 이유는 무엇일까.
삽화 출처 : 칼부림
일본육전사연구보급회의 경우 당시 후금의 니루당 갑병 차출 체계에 대해 꽤 의미있는 분석을 내놓았지만, 무순 전역 당시의 후금군이 갑옷과 투구, 말등 군사물자의 부족으로 인해 팔기 자체에서 최대 1만여명의 갑병만을 '차출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 추정하는 우를 범했다.3
이러한 논증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무리가 많다. 특히 해당 주장은 니루당 차출 갑병 수효의 유동성을 간과하고, 또 후금이 건주이던 시절부터 1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사례가 존재했음을 간과한 것에서 비판의 소지가 다분하다. 뿐만 아니라 일본육전사연구보급회의 경우 후금군이 자체적으로 차출하는 보조병력인 쿠툴러의 존재를 배제하고, 후금의 명나라 공격에 종군한 타 세력의 군대마저도 계산에서 누락시키는 모습을 보이면서 옥의 티를 범하고 있다.
지금서 결론을 말하자면, 누르하치가 무순 전역에 2만여명의 병력만을 동원한 것은 굳이 그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명은 틀림없이 여허나 울라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강한 상대였으나, 그것은 각 세력의 국력을 단순 수치화해서 비교했을 때의 문제였다. 당시 요동의 각지에 분산주둔한 명군의 전력은 각각의 부대의 수효가 그리 많지도 않았고 역량이 아주 뛰어나지도 못했다.
누르하치가 공격 대상으로 삼은 무순과 그 인근 지역에 주둔한 명군의 전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거점당 주둔군 배치 규모 수준은 누르하치가 지금껏 상대해왔던 여허, 울라등의 세력은 커녕 1607년에 멸망시켰던 호이파보다도 부족하다고 평할 만했다. 물론 당시 요동의 상황과 여허, 울라, 호이파의 세력 특성을 생각해 보자면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었지만 실황을 놓고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누르하치 역시 명나라와 지금껏 수십년간 교류를 주고받고 정보를 수집해오면서 그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대상들을 공략하기 위해 여허나 울라를 공략했던 때마냥 대군을 동원하는 것은 누르하치로서는 비효율적인 행동이었다. 3만, 4만의 병력을 동원하지 않아도 충분히 자신의 전략 목표를 큰 피해 없이 달성할 수 있는데 구태여 필요 이상의 대군을 동원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삽화 출처 : 칼부림
작전에 있어서 필요치 이상의 대군을 동원하는 것은 분명 이점도 존재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놓고 보았을 때 후금의 입장서는 이점보다는 문제점이 많은 행동이었다. 대군을 동원하면 보급품도 추가로 소모되고, 기동도 늘어지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레 명군에게 의도를 발각당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뿐만 아니라 당시 후금은 팔기의 장정들이 생산활동에도 종사하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대군을 소집하여 원정에 종군시킨다면 필연적으로 그 동안의 국내 생산활동 역시 정체되게 된다. 누르하치는 그러한 비효율적인 상황을 굳이 감당할 필요가 없었다. 4
뿐만 아니라 무순 전역과 비교되는 대규모 전역인 여허나 울라 공략전의 경우, 비록 그 전쟁의 전개가 적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긴 했으나, '가능하다면' 적대 세력을 멸망시키는 것을 전제로 한 전략이 모토가 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누르하치는 상당한 대군을 동원했으며, 실제로도 울라·여허를 대상으로 한 세 차례의 대규모 원정중 한 번은 적대 세력을 멸망시키기도 했다.(1613년 2차 울라 공략전)
요컨대 울라와 여허를 상대했던 때의 누르하치는 필요하다면 상대를 멸망시키기 위해, 상대 세력을 향해 자신이 당시에 실제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총전력을 투입하는 '전력투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무순과 그 주변 진, 보에 대한 공략은 전략적 측면에서 그 이상의 단계로 이행되지 않는다. 누르하치의 목표는 딱 그들 지역의 함락이었을 뿐이고, 무순 이외의 대형 거점-청하나 개원, 철령등의 지역에 대한 공략등은 당시로서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얼마만큼의 군대를 동원하던 마찬가지였다. 즉, 누르하치로서는 딱 무순과 주변 진, 보를 큰 피해 없이 함락할 작전병력만을 대동하고 출격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누르하치는 원정병력뿐만이 아니라 국내방위병력 역시 그리 많이 소집시켜두지 않았다. 이 때 누르하치는 고작해야 니루당 10명 정도의 병사만을 허투 알라의 방위 병력으로 소집시켜놓았다.5 갑병들만 계산하자면 2천에서 2,500 여명 정도. 이들이 모두 저마다 쿠툴러를 차출했다고 하더라도, 누르하치가 무순을 공격할 동안 허투 알라에 소집된 후금의 국내에서의 유사(반란, 침공등의 상황)에 대한 긴급 대응 전력은 5천여명을 채 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삽화 출처 : 칼부림
물론 타 세력의 침공 상황의 경우 각 지역의 부락마다 존재하는 팔기 장정들이 1차 대응을 할 터이고, 소집된 대기 전력으로 처리하지 못할 문제가 발생한다면 추가적인 병력 소집과 누르하치의 회군이 이루어질 터이나, 2천~5천이라는 숫자는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소집된 유사시 국가 방어 전력으로는 그 수가 그리 많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위에 언급했던 효율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시기 후금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은 현저히 적었다. 이미 보지리의 난 진압으로 후금 권역의 동해 여진 세력들이 후금에 반기를 들 가능성은 제거되었다. 갈등의 핵심이었던 누르하치의 장남 추영 역시 이미 숙청, 처형되었다.6
또한 누르하치가 원정을 나선 틈을 이용해 후금 영토를 공격할 세력 역시 주변에 그리 많지 않았다.
가장 강력한 변수는 후금의 오랜 적대 세력인 여허였다. 하지만 누르하치가 이전의 글에서 언급했던 만문노당의 기술처럼 '10만'에 달하는 대군을 총동원해 원정에 종군한 것도 아니고 고작 해야 2만의 병력만 이끌고 출정한 상황에서, 그들이 누르하치가 명에 대한 공격에 나선 것을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후금 국내에 대한 공격을 시도할 가능성은 현저히 적었다. 몽골계 세력 역시도 후금의 영토가 무주공산 상황도 아닌 이상 후금을 배신하거나 뒤를 치는 도박을 할 가능성이 없었고, 조선 역시도 경계의 대상은 대상이되 당시의 상황상 실제적인 위협은 되지 못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누르하치로서는 구태여 많은 수의 군대를 소집대기 시켜 둘 필요가 없었다. 팔기 장정들의 경우 군역에 소집대기 되어 있는 동안에는 생산활동에 종사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적은 병력을 운용하는 것이 이익이었다. 그렇기에 일부러 그 정도의 최소병력만을 소집대기 시켜두어 최악의 상황만을 대비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누르하치는 외교적 사세를 고려하여 자신이 2만의 군대를 데리고 원정을 나서는 동안 후금을 침공할 세력이 마땅히 없음을 고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고작 니루당 10명의, 최소 방위병력만을 허투 알라로 소집시켜 두며 최대한의 효율을 추구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누르하치가 1618년 음력 4월에 원정병력으로 약 2만, 유사시 대응 전력으로 허투 알라에 최소 2천에서 최대 4, 5천을 조금 넘는 병력만을 가용한 것은 당시 후금의 최대 병력동원가능 역량이 그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병력을 운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상으로 운용해보아야 효율-그것이 군사분야에서건 국가적 측면에서건-이 떨어지기에, 누르하치로서는 굳이 그러한 리스크를 감당치 않고 최대한의 효율을 확보하며 전략을 운영했다고 보여진다.
1.『만문노당』 임자년 음력 9월 29일, 계축년 정월 17일.
2.『만문노당』 계축년 9월 10일
3. 『명과 청의 결전』, 육전사연구보급회, 1966, 18쪽.
4. 해당 부분은 일본 육전사연구보급회에서도 일부 거론한 논지이기도 하다.
5.『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4월, juwan uksin i niyalma be hecen tuwakiyame tebu, 해당 기사에서 나온 '성(hecen)'은 허투 알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으로 사료된다.
6.보지리의 난 진압은 『만문노당』의 병진년 보지리의 난 관련 기사들 참조. 추영 처형은 『구만주당』의 갑묘(을묘)년 8월 22일 삽입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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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필자
추천주시면 감사
이런 작품들 덕분에 [오랑케]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됨 중원만이 천하가 아니고 저들에게도 오랑케는 있을진데
이런 작품들 덕분에 [오랑케]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됨 중원만이 천하가 아니고 저들에게도 오랑케는 있을진데
논문급 글이네;
명청교체ㅇㄷ
견적나왔으니 딱 견적만큼만 보냈구만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