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밥은 소위 드퀘 같은 일본 판타지보다 그런 게임북이나 TRPG 같은 서양 판타지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편집자
연재가 시작되기 전에 쿠이 씨 집에 찾아갔어요. 그때는 아직 몇 번이나 퇴짜를 놓은 '뇌 속을 그린다'는 SF만화 네임 상담을 했죠. 쿠이 씨는 그 SF만화를 연재하고 싶다고 해서...네번째 정도 때 '아니 이건 무리 아닐까?'라고 말하면서 책상 옆에 있는 낙서 메모를 봤습니다. 이미 '던전밥의 원형'이 그려져 있었죠?
쿠이 료코
...기억 안 나요.(웃음)
근데 연재를 시작하기 전부터 '위저드리' 같은 어두운 던전을 탐색하는 만화를 그리고 싶다고는 생각했어요.
초등학생 때부터 노트에 연필로 검과 마법의 판타지 만화만 그렸거든요. 한번은 제대로 된 작품을 그리고 싶기는 했어요. 근데 당시 서점에는 요즘만큼 판타지 만화가 없어서 '판타지는 안 팔리는 걸까'라고 생각했죠.
편집자
당시 픽시브를 비롯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모이는 커뮤니티에는 판타지 일러스트를 올리는 10대~20대가 많았고 쿠이 씨도 그 중 한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판타지를 그리고 싶어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이 세대를 위한 판타지를 그리면 잘 팔리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쿠이 씨의 메모를 본 순간, 나도 '괜히 삐딱하게 나가지 말고 판타지 만화를 하자'고 생각한 거죠.
쿠이 료코
근데 그 던전을 탐색하는 만화는 당초 취미로 그릴 생각이라서...히로이 씨한테 '일단 코미티아에 그려도 될까요?'라고 물었다가 혼났습니다.
편집자
코미티아에 그릴 거면 제대로 연재로 그려!(웃음)
그 시점에서 쿠이 씨는 단편집을 2권 냈고 중판도 했습니다. 요컨대 던전밥 연재 시작 전부터 일정한 팬이 계셨던 거죠. 그래서 그 팬들을 겨냥해서 순수한 판타지를 그린다면 큰 실패는 없지 않을까?하고 판단했습니다. 만약 실패해도 '역시 판타지는 어렵구나'하는 경험도 얻을 수 있으니까요.
던전밥은 판타지라는 장르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타이틀입니다. 판타지를 다루면서 설정이나 세계관 구축은 어떻게 하시나요?
쿠이 료코
기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에는 다들 크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려고 해요.
아무래도 좋은 설정을 지리하게 생각하는 걸 좋아하는데 '실제로 이 설정을 만화로 그렸을 때, 다들 아마 이 이야기에 관심 없겠지'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어요. 따라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걸 넣거나, 집중력을 떨어트리는 요소는 되도록 덜어내고...
예를 들어 던전밥도 당초에는 다양한 국가의 언어를 말하게 하고 싶었어요. 그런 설정에서 '이 사람은 일개국어밖에 못한다'는 캐릭터성을 주고 싶었는데...히로이 씨가 '그건 하지마'라고.(웃음)
내가 그리면서도 '이 설정을 설명하는데 6컷은 필요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고, 필요이상으로 설정을 떠들면 이야기의 템포도 나빠집니다. 심지어 던전밥은 월간연재라서 주간과 다르게 여유로운 이야기를 할 틈이 없었습니다. 구체적으로 한달에 30P 전후로 하나의 에피소드를 그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실은 뒤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었다' '사실 이개국어를 할 수 있다' 같은 설정을 넣을 틈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명확한 취사선택이 있었다기보다 '그냥 할 여유가 없었다'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만약 주간연재였다면 조금은 더 넣었을지도 모릅니다.
칠책이 모국어로 매도하는 장면은 '억지로 우겨넣은' 느낌인가요?
쿠이 료코
그렇죠.(웃음)
1컷으로 가능해...찬스!라는 느낌입니다.
그런 가공의 언어도 전부 구상한 것은 아니군요?
쿠이 료코
만약 그 작품이 라이프워크고 '평생에 걸쳐 이 세계를 만든다'는 경우라면 생각하는 편이 즐겁겠지만...애초에 던전밥은 몇 년 안에 끝낼 생각이었거든요.
편집자
당초에는 5권 정도 연재하면 좋겠다고 하셨죠.(웃음)
다만 쿠이 씨 초고는 정말 아이디어가 가득해서....편집자 입장에서 덜어낼 때가 많죠. 독자 입장에서는 읽고 싶은 부분이라고 이해하고 있지만, 본궤도에서 벗어난 부분은 잘라냅니다. 그러니까 거의 덜어내고 싶지 않은 작가와 덜어내고 싶은 편집자의 싸움입니다.
쿠이 료코
설정을 짜면 넣고 싶어지고, 덜어내라는 말을 자꾸 들으니까 처음에는 세계를 확장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이야기도 던전 안에서 완결시키려고 했어요. 되도록 국가 이름도 나오지 않게 하고 싶었고, 캐릭터한테 성도 붙이고 싶지 않았죠. 근데 작품 후반에 히로이 씨가 '세계가 너무 좁으니까 조금만 더 크게 하는 편이 낫다'고 하셔서 '그래도 돼!?'라고 생각했죠.
편집자
작품 후반이 되면서 던전밥이라는 작품이 '던전에서 여동생을 구하는 걸로 끝인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세계의 명운을 좌우하는 이야기인데, 바깥 세계가 전혀 개입하지 않는 건 설득력이 없는 게 아닐까 판단을 내렸죠.
예를들어 현실 회사에서도 뭔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려고 할 때는 윗사람 랭크가 올라가는 법이잖아요? 그렇게 생각해 봤을 때 라이오스 파티만으로 세계의 명운을 결정하는 건 역시 위화감이 있었습니다. '일절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그 결정을 내릴 수 있을리가 없는 거 아닐까?'하고요.
카나리아대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 사실을 카나리아대의 윗사람이 모를리 없는 거잖아요. 여기에는 절대적인 보고, 연락, 상담이 있을 거고 '사회'나 '조직'은 그런 법입니다.
요컨대 그런 상황에 대해서 '세계를 구하는 일에 조직이 개입하려고 하고, 현대의 사회 시스템을 비춰봐서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부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쿠이 료코
처음부터 '세계를 구하는 이야기'로 그릴 생각이긴 했지만 나는 '던전 안에서 일부의 사람들만 사정을 알면서 세계를 구하는 이야기'도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여기에 히로이 씨가 설득력을 생각해준 형국입니다.
전반부를 그릴 때 히로이 씨가 '아직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하셨어요. 나는 빨리 스토리 진행을 해야한다, 세계관 설명을 해야한다고 조바심을 냈는데 '4권까지는 네명의 소개로 그치는 게 낫다'고 하셨죠. 그래놓고 후반부에는 '캐릭터를 더 많이 등장시켜, 세계를 넓혀'라고...
마지막까지 그려보니 '자제할 부분과 확장해야 할 부분의 조절은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는 법이구나'하고 통감했습니다.
먹는다/食는 테마에 대해 특별한 추억 같은 게 있나요?
쿠이 료코
으음...어느쪽인가 하면 원망이 강해요.
어릴적에는 편식이 심해서 식사 시간이 고통이었습니다. 남들 앞에서 식사하는 게 싫었고, 남이 먹는 걸 보는 것도 싫은 시기가 있었어요. 사람이 잘 오지 않는 화장실을 찾아서, 소위 변소밥도 했어요. 내가 그랬을 당시에는 변소밥이라는 단어가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 세상에 변소밥이라는 단어가 등장했을 때는 '다들 했었구나!'하고 엄청 기뻤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건 최악이겠지...?'라고 생각하면서 했던 일이, 다른 사람도 했었구나 싶으니 안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식육을 테마로 고른 계기가 있나요?
쿠이 료코
편식에 애를 먹은 부모님이 삼각식사(국-밥-반찬을 순서대로 먹는 식습관)를 비롯해 여러가지 지식을 가르쳐주셨는데 그런 보람도 없이 편식가인채로 어른이 되었습니다. 식사에 관한 지식은 부모님을 통해 주입됐지만 실천은 못하고 있었죠.
그래서 음식이나 식사에 대해서 엄청 죄악감을 느끼는 감정만 남았고...
편집자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굉장히 부정적인 발상에서 연재가 출발했네요.
쿠이 료코
그래도 현재는 타인과의 식사를 극복...이랄까 오히려 좋아졌어요. 편집자도 여기저기 맛있는 가게 데려가 주셨고요.
쿠이 선생님과 히로이 씨는 어떻게 만나게 됐나요?
편집자
내가 스카우트 했습니다.
쿠이 씨가 픽시브에 올린 단편을 보고 '직접 만화 그려보지 않을래요?'하고 메일을 보냈습니다. '코로 소바를 먹는다'는 4컷 만화가 굉장히 재밌었죠. 코로 소바를 먹고 아파하는 내용의 만화로...그걸 본 순간 '우와 진짜 아프겠다'고 느끼게 만드는 그림 실력에 끌렸습니다.
그렇게 연락을 해서 지금에 이르게 됐습니다.
쿠이 료코
어 그랬던가요...?
진학천사가 아니었던가요?
편집자
아니죠!
코로 소바를 먹는 만화는 진학천사보다 전이었어요. 참고로 그 만화는 낙서책에 실을 예정이었는데 쿠이 씨한테 물어봤더니 굉장히 싫어했죠...
쿠이 료코
아니 별 상관은 없는데...그거 다른 사람은 그렇게 웃겨하지 않을 거예요.
마르실이 작가 본인 투영이구나.........
그래서 코로 소바먹는 만화가 뭔데!
일본의 만화 산업은 편집자의 역할도 엄청나게 중요해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