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식
동덕여대 설립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기고한 〈전일본 일억 동포의 환희 - 대세(大勢)에 순응(順應)〉(1938년 2월 25일), 〈성전 일년 - 정신통일, 근검활동, 보건보국에 노력〉(1938년 7월 5일 인터뷰), 〈인생은 물질이 아니오 - 시국일수록 정신 수양이 필요〉(1941년 11월 3일), 〈충성과 효도는 하나 - 일본 국민의 충효정신〉(1942년 3월 9일), 〈군인의 아내를 육성할 여학교 교육의 새 정신〉(1942년 5월 12일), 〈결전하의 시간관념, 목숨도 오고 가는 1분 1초〉(1943년 6월 10일), 〈동원령하의 여학도부대〉(1943년 7월 6일) 등의 글을 통해 '군국의 어머니'로서의 여성의 의무를 강조하고 일본의 침략 전쟁 협력을 위한 여학생 교육을 주장하는 한편 〈철저한 결전 생활, 남자 대신 직장으로 나서자〉(1944년 1월 14일), 〈규율 있는 생활을 - 총후의 단결도 여기에서〉(1944년 1월 29일) 등의 글을 통해 '내선일체'(內鮮一體)와 일본의 침략 전쟁에 협력하는 이른바 '총후생활'(銃後生活)
을 주장했다. 이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교육/학술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아마기 가츠란(김활란)
이화여대 7대 총장, 동구 학원 설립자
그러나 일제강점기 1936년 전후로 일본의 강경노선에 따라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하였다. 그는 강연, 논술활동을 하는 한편 1941년 창씨개명 후 전시 체제에 협력하여 칼럼, 강연, 학도병 독려 등의 활동을 펼쳤다. 1941년 임전보국단 결전부인대회에서 ‘여성의 무장’, 1942년 싱가포르 공략 대강연회에서는 ‘대동아건설과 우리 준비’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그리고 여러 잡지에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뒷일은 우리가’, ‘남자에 지지 않게 황국 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 등의 글을 발표하며 조선 민중들에게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 참여할 것을 활발하게 종용하는 적극적인 친일행각을 서슴지 않았다.[3]
미야무라 요시카네(이숙종)
성신여대 설립자
일제강점기 말기에 국민총력조선연맹 등의 친일 단체에 가담하여 강연 및 좌담회 참석, 《매일신보》에 친일적 발언 기고 등으로 친일 활동을 했다. 《신시대》 등 친일 잡지에 여성들을 대상으로 전시경제 체제에 협조할 것을 요구하는 기고문을 싣기도 했다. 이로 인해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교육/학술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가정여학교(지금의 성신여자대학교)교장이던 이숙종은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에 필요한 쌀을 공출함으로써 식량을 수탈하던 1943년에 《신시대》잡지에 “쌀이 부족해 죽을 먹는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건강을 위해 죽을 마시고, 소화가 잘되게 하기 위해서 채소를 먹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더욱더 맑고 상쾌한 기분으로 능률있게 일하기 위해서 아침은 엽차만으로 때우는 것이라 생각하자”라는 일본어로 쓴 글을 실어서 같은 한민족인 한국 민중들에게 일제의 식량수탈에 따른 빈곤이라는 현실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저항하기보다는, "건강을 위해서 죽을 마신다고 생각해야 한다"느니, "맑고 상쾌한 기분으로 능률있게 일하기 위해 아침은 엽차만으로 때우는 것"라고 생각하라느니 요설을 늘어놓으며 일제의 식량수탈에 순응할 것을 주장했다. 일제는 명랑이라는 말을 언론에서 자주 씀으로써 한민족이 식민통치에 순응하도록 했는데, 이숙종도 "맑고 상쾌한 기분으로 능률있게 일하자"라면서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참고 문헌:역사학 연구소, 《교실밖 국사여행》, 사계절, 252쪽. 2015년.)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정직한 역사교육으로써 청산되어야 할 이유를 말해주는 중요한 사례라고 말할 수 있겠다.
뭔 한결같이 으리으리한 분들이네
이런 사람들을 설립자랍시고 동상까지 만들어서 기려야 하나 어이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