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전
1. 이 글의 내용은 개인 생각을 GPT를 통해 정리한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GPT는 사용자의 의견에 되도록 동의하는 대답을 만들어내며, 사용자의 관념을 극단화시킬 위험이 있으므로, 비판적으로 읽어야 함에 유의해야 한다.
2. 이 내용을 작성하면서 GPT만 사용한 것은 아니고, 브런치스토리 등 다양한 사람들이 올려놓은 사설들도 몇 개 참고하긴 했지만 비전공자의 비전문적 사고의 결과물이므로, 마찬가지로 비판적으로 보면 좋을 것 같다.
(다다이즘의 예시, '샘', 뒤샹)
'포스트모더니즘'
20세기 중반에 등장한 철학적, 문화적 사조
기존의 모더니즘적 가치에 회의를 드러내고, 모더니즘적 가치에 해당하는 보편진리, 합리주의, 거대담론 등을 해체하고자 하는 특징을 보인다
대신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양성, 상대성, 개인의 경험과 같은 보다 개인적이고 보다 소수의견에 가까운 방향성을 옹호한다
모더니즘에 대한 회의감이 왜 발생했는지를 보면, 이러한 '소수의견에 대한 옹호' 는 무엇을 향해 있는지 윤곽이 잡힌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이, 그리고 그 세계대전 중에서도 가장 악독했던 나치의 무서울정도로 차갑고 합리적인, '이성적'(이라고 생각되어지는) 학살을 벌였던 모습은 이성의 결과물을, 모더니즘적 폐단으로 인식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이 주장하는 절대성이란 강력한 권력으로 수렴하며, 이러한 관점에서, 나치는 그야말로 절대주의적 폐단이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것이 상대적이고, 진리는 다원적' 이라는 관점을 제시하게 된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 아니, 정답을 찾고자 하는 관념이 오히려 악을 불러일으켰다.
이성이 권력을 만들었고, 권력 하에 사람들을 억압했다. 억압의 결과,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어떤 정답이 있다는 생각을 멀리해야 한다.
전쟁을 만들어낸 전통적 권위에 의심을 가지고, 억압받아 온 소수자, 타자를 옹호해야 한다.
고정된 기준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
온전히 창작되는 것만이 예술이 아니다. 기능이 있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상대성을 찬양하라! 우리는 드디어 우리가 찬양해야 할 진리를 찾았도다"... 어색하다면, 그 어색함이 맞을지도 모른다
이미 여기서, "상대성을 추종하는 것만이 진리인가? 그 진리에 대한 해체는 어떻게 이뤄지는가?" 에 대한 질문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질문이 만들어지기에, 혹은 제시되기에는
해당하는 시대는 너무나도 억압적이었고, 구시대 친화적이었다
심지어 나치에 대한 청산이 독일에서조차 지지부진, 혹은 역전되는 경향마저 보였다
부모세대로부터 나치에 대해 배운 것과 반대로, 부모세대는 나치를 망각하는 것 같았다
청년들은 지쳐 있었고, '내가 배운 나의 정의' 가 구현되기를 바랬다
68혁명은 실패했다. 분명히, 프랑스 68혁명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이 드골의 보수파를 당선시켜주었다.
시위의 과격성과 천만명 이상이 참여한 총파업이 역풍을 일으켜버린 탓에, 무관심한 계층마저 보수정당을 찍는 현상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8운동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인해 정당화된다.
포스트모던 철학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와 '천개의 고원'의 서문에서는
68혁명을 철학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으로써 해당 서적을 자평하고 있다.
포스트모던이 옹호했던 운동의 성격으로 보아도
포스트모던이 추구하는 다양성의 면모에서 보아도
포스트모던은 개인의 가치와 관점에 대한 신뢰를 충분히 심어주었다
역사 이래로, 현대 문명은 그 이전까지의 어떤 문명보다도 개인의 가치를, 소수자의 가치를 존중하고 인정한다.
심지어 개인 외부의 관점, 관념을 의심할지언정 개인을 존중할 수 있게 한다.
그런 관점에서, 현재의 인터넷문화는 포스트모던에 의한, 개인의견에 대한 존중의 경향성에서 탄생한 수많은 가지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논리보다, 논의보다, 재미가 더욱 중요한 경향성.
68혁명에서의 슬로건 중 "내가 춤출 수 없다면 그건 혁명이 아니다" 를 보아도, '개인이 느끼는 선호' 를 강조한다
'숨막히는 집단적 합리성에서 벗어나 개인을 바라보자' 라는 현재의 가치관은 포스트모던에 의해 촉발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글 초반에 이야기했던 질문인 '상대성에 대한 추종은 상대적인가' 는 여기서 시작된다.
"숨막히는 집단적 합리성을 벗어난 개인은, 그 스스로 '벗어났다' 고 판단할 수 있는가?"
개인은, 온전히 상대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가?
개인은 '상대적인 나' 를 위해서 자기성찰이 필요하지 않은가?
개인이 생각해내고 사람이 옹호하는 상대성은, 그러한 상대성을 바라보는 관점은
혹시 '절대적' 이지 않은가?
'상대성' 은 자기성찰을 하는가? 아니, 자기 성찰이 필요한 개념으로써 존재하는가?
자기성찰이라는 점을 고려하기 위해, 먼저 '나치' 로 돌아가보자.
포스트모던의 관점에서 나치는 그야말로 절대성의 폐단, 모더니즘의 극단에 위치한 현상으로 이해될 것이다.
그런데 궤벨스는 이러한 말을 남겼다.
"내게 한 문장만 다오.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생각해보자. "누구든" 이다.
범죄를 저질렀던, 저지르지 않았던, '절대적인 사실에 대한 기준 없이' 궤벨스는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자신한다.
'절대성의 폐단' 인 나치, 그 나치의 폐단을 만들어낸 인물이
'절대성은 신경쓰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실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절대선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치의 집단은 궤벨스에게 선동당해서 그들 나름의 이성, 그들 나름의 절대 가치를 행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위에서 내려온 명령에 따른다" 따위의. 혹은, "위에서 악이라고 말한 사람들을 죽이는" 따위의.
그러나 그 핵심인 궤벨스의 가치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 이었다.
깡통 안에 무언가 단단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면, 깡통은 그야말로 단단한 벽돌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깡통을 열어보기 전, 깡통이 비었는지 비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나치라는 이성' 안에는 상대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나마도, 온전히 자리잡고 있던 것도 아니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의 악을 '무사유의 악' 으로 이야기했다.
생각 없이 행동할 정도로 평범해지는 악. 악의 평범성.
깡통 안쪽은 때로는 무사유로 텅 비어 있었다. 무사유는 이성이 아니다.
이것은 포스트모던에 자기성찰이 있는지를 이야기하기 위해 꺼낸 소재이다.
포스트모던은 나치에 대한, '절대성의 폐단' 이라는 평가를, 이해를
'자기성찰' 해본 적이 있는가?
해체속의 자유가 비자유를 낳을 수 있겠지만 그 비자유를 해체하는 것도 누구일질 생각하면
해체속의 자유가 결과적으로 비자유를 낳았다면 그 해체는 비자유를 해체하지 못함. 해체하려는 바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해야 하니까.
그건 니가 진영적으로 매몰돼서 그럼
자유는 해체의 목적이고 비자유는 해체의 결과물임. 그렇다면 비자유를 해체하는 것은 해체의 중단, 혹은 자기성찰이겠지
무슨 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