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지고 무너진 회백색 석조 신전, 나무 뿌리에 휘감긴 곳에 한 여인이 고개 숙여 흐느끼고 있었다.
만일 인간 여성이었다면 따스한 덕담 한마디라도 던졌겠지만 상대는 뾰족한 귀를 가진 여자 엘프였다.
엘프는 가라진 천장에서 쏟아지는 별빛 아래서 주저앉아 서럽게 울고 있었다.
"속았어..."
사무친 원망과 후회, 슬픔과 자책으로 가득찬 말이었다.
"속았어, 속았어, 또 속았어...!"
눈앞의 엘프가 흐느끼며 자책하는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을 따끔거리게 만드는 동정과 연민이 솟구쳤다.
괜히 다가가 거리를 좁혀 따스한 말로 위로하고 싶었다.
"즙 짜지 마라, 엘프."
"왜 우리가 죽어야 하죠? 왜, 왜 우리가 사라져야 하죠? 당신들을 위해, 운명을 되찾고 싶어하기에 도와줬는데, 이상하잖아요...
이상하잖아요, 이상해야 하지 않습니까! 도와줬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죽임당해야 한다니?!"
"내 백성들의 비통한 탄원조차 듣지 않았는데 이제 와 네년 따위의 절규를 들을 것 같으냐?"
나르바는 검을 뽑아들었다.
"안 돼!!!"
야니드라의 비명은 절박했다.
울음소리와 눈물로 멈춰세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아기 사슴처럼 커다란 눈망울을 바들바들 떨다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그곳엔 섬뜩한 외형의 검이 자리잡고 있었다.
기습은 재빨랐다.
하지만 상대는 엘프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던 존재였다.
야니드라는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도 발을 뒤로 물리며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야니드라는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망토처럼 두른 채 쉬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
그 사정을 아는 자라면 안타까움에 혀를 찰 것이다.
그러나 나르바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폭군이었다.
나르바는 끼릭대는 쇳소리를 감미로운 연주회 듣듯 만끽하며 이빨을 드러냈다.
"더 없어?"
유백색 검이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엘프 여왕 야니드라의 타고난 신체 능력과 축복어린 재능, 자연신이 마지막으로 부린 최후의 기적이 천천히 밀리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업의 무게가 다르다.
고작 종족의 명운을 짊어졌다는 정도론 당해낼 수 없는 업의 무게였다.
애초에 종족의 명운은 상대도 똑같이 짊어지고 있었다.
잔인하고 편협한 악인은 한때 평화로운 공존을 꿈꿨던 선인을 죽이려 들었다.
찬탈자는 자신을 동정했던 정의로운 전대 왕을 시해하려 들었다.
언젠가 진실이 알려졌을 때, 후세의 인간들은 주저없이 과거의 잔인함을 규탄하며 수치스러워 할 터였다.
그러나 잔인한 폭군의 칼날 아래 죽임당한 자들의 시체 위에서 인간들은 살아남아 번성할 것이다.
후세는 인간을 동정했던 선량하고 순수한 엘프 여왕을 추모하고 기념할 테지만 여왕과 엘프는 그 기도를 듣지 못할 것이다.
야니드라는 자신에게 베풀어질 연민과 동정을 짐작하며 더 크게 흐느꼈다.
지독한 죄책감에 사무친 울음이었다.
(중략)
결착이 났다.
야니드라는 자신이 쏟아낸 피웅덩이 위로 쓰러졌다.
그녀는 상처를 통해 끊잉없이 토해내는 제 핏물을 멍하니 바라보다 새하얗게 질려가는 입술을 간신히 떼며 말했다.
"아...아이.. 아이만, 남았어..."
"..."
"제발..."
야니드라는 나르바의 대답을 듣기 전에 숨이 다해버렸다.
곧 숨막힐 기세의 정적이 찾아왔다.
조막만한 발소리가 들려온 건 이때였다.
말라죽은 나무 뿌리를 툭툭 끊으며 조그마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투명한 보석같은 눈동자와 특유의 투명한 피부, 뾰족한 귀를 모두 갖춘 중성적인 외모의 엘프 꼬마였다.
이제 갓 16세가 됐을 법한 외형의 엘프 꼬마는 담담한 표정으로 쓰러진 여왕의 시체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차라리 당신이 우리의 왕이었다면 좋았을텐데."
"너도 인간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엘프 꼬마는 살짝 떨리는 어깨를 감추고자 숨을 한차례 고른 후, 보다 단단해진 눈빛으로 나르바를 올려다봤다.
"너희 모두 죽였어야 했어. 전부. 너 같은 놈이..."
한참동안 말없는 대치가 이어진 후, 숨을 고르던 엘프 꼬마가 말했다.
"...너 같은 놈이 우리의 왕이어야 했어."
최고의 극찬이었다.
나르바는 기분좋게 웃으며 말했다.
"마지막 엘프, 참고로 알려주자면."
그 웃음엔 후회도 미련도 없었다.
"난 어린애 상대로도 진심으로 싸운다."
싸움은 단번에 끝났다.
나르바가 죽은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