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괄의 난 이후 북방방어선 복구에는 손 반쯤 놓은 주제에...
후금을 무슨 ㅂㅅ 취급하고 있었다는 거임.
이게.가장 잘 드러나는 사례가 정충신과의 대화인데
정충신은 광해군때부터 후금 방비를 위해 북방에서 활동한 양반이라
후금의 군사력에 대해 많이 연구하고 염탐도 많이 해서
후금 군사력을 높이 평가합니다.
정충신 : "병마(兵馬)가 정예롭고 강성하여 참으로 대적하기 어려운 적이었습니다. 군사가 얼마쯤 되는지 상세히 알 수 없었으나, 팔부 대인(八部大人)이 있다는 말을 들었고 또 4백 명을 1초(哨)로 한다는 말이 있으니 대략 9만여 명은 될 것입니다. 이른바 장갑군(長甲軍)·중갑군(重甲軍)이란 것이 각각 1백 인으로서 모두 수은갑(水銀甲)을 입었는데 따로 한 초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씩씩하고 용맹한 자를 따로 뽑은 것으로서 성을 공격할 때에 쓰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근데 인조가 한 말이 가관입니다.
인조 : 오랑캐의 추장은 한낱 하찮은 자일 뿐이다. 우리 나라 수천 리의 지방에 어찌 적을 제어할 만한 사람이 없으랴마는, 찾는 데에 정성스럽지 못하므로 쉽게 얻지 못할 뿐이다. 지금 장신(將臣)들이 모두 들어가 지킨다는 것으로 말하면서 출전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이때가 이괄의 난이 거의 끝나가던 시점이라 이괄이 통솔하던 북방군도 와해된 상황
바로 이전에 6000까지 있었던 정충신이 통괄하던 안주의 군사가 2000까지 줄어들고
정충신이 후금에 대비해 3000은 있어야 한다고 상신한 상황임
근데 뭐? 왜 나가서 싸울 생각을 안하냐고????
정충신 입장에선 진짜 이괄 마려운 소리 아니었을까요. 그래도 왕이라 한번 참고
그게 안된다는걸 설명합니다.
"우리 나라는 본시 군사가 없는 나라인데 아무리 훌륭한 장수가 있더라도 누구와 함께 싸울 수 있습니까. 지금 10여 만의 무리를 뽑아서 1∼2년 동안 훈련시킨다면 요동(遼東)도 진격하여 빼앗을 수 있을 것인데, 어찌 반드시 수어하려고만 하겠습니까. 지금 창성(昌城)·의주(義州)·안주(安州)의 제진(諸鎭)이 가장 요충지인데 이들 본진에 각각 민병(民兵)을 거느려 굳게 지킬 계획을 세우도록 당부하고, 입방(入防)하는 군사에 있어서는 그 수의 다소에 따라 편의대로 수어하도록 하고, 패강(浿江) 이서에는 가을 이후에 청야(淸野)하여 대비하도록 경계하면, 적이 오더라도 그 형세가 반드시 오래 머무르지 못할 것입니다."
요약 -> 하고 싶으면 10만 준비 하시던가.
결국 이괄의 난 이후 10년후 호란때까지
10만 대군은 커녕 북방 방어의 최저선도 못복구한 인조는
그냥 그동안 입으로 후금 적대만 외치는 놈이었다는 겁니다.
진짜로 실록보면 호란때 한탄하는 인조를 보며 신하들이 반쯤 비아냥대며 깝니다... 광해군이 기와장 염초로 구워 국방력 낭비했다 어쩐다 했는데.. 적어도 최소 방어병력 2배를 북방에 배치할 정도의 정신은 있었음
반정 일으켜서 왕 처먹은 놈인데 공신들이 싫어할 군사 늘리는건 못하지 인조의 유일한 업적은 유연한 허리놀림으로 후금 추장을 탄복하게 한것 뿐임
태어난게 최대문제점이 아니었다니
병자호란 끝난 다음에도 밉상짓을 계속한게 가관이지 (대표적인게 자기 장남과 며느리 손자들을 죽인거....)
선조는 침공 예상 경로에 믿을만한 지휘관을 배치해두긴 했습니다. (그 균빼고). 실제 임란때 침공예상숫자가 선조와 신하들이 사전예측한 숫자였으면 충분히 막을 정도였고, 하다못해 균이 아닌 반대쪽에 계시던 분이 균자리에 있었으면 충분히 막았을 정도인데....
선조는 일본 영 분위기 안좋으니 방어용 성 축조하려다가 농민들이 아 힘들다구요~ 하고 반대가 터져서 제대로 안됐다라는 변명이라도 있지 인조는..하...
정묘호란 이후에라도 정신 차리고 국방 강화에 신경 썼으면 또 모르겠는데, 지 애비 추숭(임금으로 추존)하겠다고 신하들과 대립각. 척화파가, 국방 관련으로 지원한다 - 그렇게 착취하면 민생 파탄난다!!! 청나라와 외교적으로 교섭하자 - 오랑캐와는 결코 협상할 수 없다!!! 이러면서, 뭐만 할라치면 어깃장을 놓아댔는데, 임금이 지 ㅈ대로 행동하니, 가만히 있다가는 자기들도 모가지 날릴 거 같아서, 반청을 정쟁의 도구로 활용하게 된 거. (오늘날의 반공 페미안페미 같은 프레임 짜기ㅇㅇ) 광해군 : 폐모살제 + 자기 엄마 중전으로 올리려 함 인조 : 며느리를 죽이고 손자도 죽게 만듬 + 자기 애비 왕으로 올림. 광해군 욕하며 왕이 되더니 광해군의 전철을 그대로 밟은 새끼. 참된 씹새끼.
반정 일으켜서 왕 처먹은 놈인데 공신들이 싫어할 군사 늘리는건 못하지 인조의 유일한 업적은 유연한 허리놀림으로 후금 추장을 탄복하게 한것 뿐임
진짜로 실록보면 호란때 한탄하는 인조를 보며 신하들이 반쯤 비아냥대며 깝니다... 광해군이 기와장 염초로 구워 국방력 낭비했다 어쩐다 했는데.. 적어도 최소 방어병력 2배를 북방에 배치할 정도의 정신은 있었음
광해군고 앞뒤 선조 인조 그리고 왜란때 분조로 싸운것 그리고 선조가 인성질 한 공이 많아서 궁궐병 있어도 나름 올려치기 해주는거지 선조 나름 평화시기에 한거 많고 정치질도 적당히 잘했고.... 근데 인조는 ㅋㅋㅋ
태어난게 최대문제점이 아니었다니
선조는 이순신 등용 으로 넘어가면 인조는 어쩌죠
병자호란 끝난 다음에도 밉상짓을 계속한게 가관이지 (대표적인게 자기 장남과 며느리 손자들을 죽인거....)
이거 완전 읍읍
하다못해 사기나 통감절요만 읽어봐도 북방민족 때문에 한고조도 포위당하고 한무제때 사마천도 고자된거 다 알텐데
선조는 일본 영 분위기 안좋으니 방어용 성 축조하려다가 농민들이 아 힘들다구요~ 하고 반대가 터져서 제대로 안됐다라는 변명이라도 있지 인조는..하...
선조는 침공 예상 경로에 믿을만한 지휘관을 배치해두긴 했습니다. (그 균빼고). 실제 임란때 침공예상숫자가 선조와 신하들이 사전예측한 숫자였으면 충분히 막을 정도였고, 하다못해 균이 아닌 반대쪽에 계시던 분이 균자리에 있었으면 충분히 막았을 정도인데....
하다못해 이괄만 잘 달래줬어도 정묘호란 병자호란 둘 다 막을 수 있었을텐데
괜히 이이가 만언봉사를 저술했던게 아닌데
선조때는 그래도 명종때 만들어진 제승방략체제가 완전히 카운터 먹어서 그런거란 변명이라도 하지
ㅇㅇ 제승방략을 간단히 요약하면, '집결지를 설정하였습니다.' 한 다음에 중앙에서 관료를 파견해서 'n번 부대' 지정하고 그걸로 싸우는건데, 임진왜란 때는 그 이전에 고속도로가 휑하니 뚫려버렸죠... 근데 또 반대로 원래 소집하기로 되어있던 군대는 온전히? 남은 상태니까 각지에서 그대로 소집되서, 지휘권이 지방관에게 있으면 관군, 지역 명사에게 넘어가면 의병 이런 식으로 운영했으니까요. (조정에서도 이걸 적극 채택해서, 선조는 런에만 집중하고 별개로 광해군은 지방 순회공연 돌면서 위문 + 공식으로 지휘권 인정해주고 다녔고요.)
런도 못한 조 무능 그 자체 선조가 욕 먹어도 저때 임금이 선조였음 어찌어찌 막아내긴 했을 것임
솔직히 왜란 준비기에 선조가 한거 보면 선조 있었음 저 상태까지 가지도 않았음.
정묘호란 이후에라도 정신 차리고 국방 강화에 신경 썼으면 또 모르겠는데, 지 애비 추숭(임금으로 추존)하겠다고 신하들과 대립각. 척화파가, 국방 관련으로 지원한다 - 그렇게 착취하면 민생 파탄난다!!! 청나라와 외교적으로 교섭하자 - 오랑캐와는 결코 협상할 수 없다!!! 이러면서, 뭐만 할라치면 어깃장을 놓아댔는데, 임금이 지 ㅈ대로 행동하니, 가만히 있다가는 자기들도 모가지 날릴 거 같아서, 반청을 정쟁의 도구로 활용하게 된 거. (오늘날의 반공 페미안페미 같은 프레임 짜기ㅇㅇ) 광해군 : 폐모살제 + 자기 엄마 중전으로 올리려 함 인조 : 며느리를 죽이고 손자도 죽게 만듬 + 자기 애비 왕으로 올림. 광해군 욕하며 왕이 되더니 광해군의 전철을 그대로 밟은 새끼. 참된 씹새끼.
군대를 자국 지키는 존재가 아니라 잠재적 역적으로 본 거려나. 이괄도 반정공신이었는데, 야망으로 배신하려고 맘먹고 난을 일으킨 게 아니라 인조가 ㅈ같이 굴어서 어쩔 수 없이 그랬단 게 중론이니까....
임진왜란을 겪어놓고도 북방의 여진족의 힘을 방심했다는게 더 ㅂㅅ같은 짓이었음 옛말에 여진인 1만이면 막을수가 없다는 말이 있었고 조선은 건국때부터 꾸준하게 북방의 여진에 대한 경계를 늦춘적이 없는데 뻔히 여진이 통일되어가는 꼴을 보고도 준비하지 않았다는건 인조가 얼마나 무능하고 어리석은지 보여주는 좋은 예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