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 미래가 이미 결정된 점의 의미
(지난 해설을 보고 오면 더욱 좋다!)
(*링크 :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70085628)
(*장문이니까 브금 틀고 가자!)
진격의 거인을 결말까지 보고,
작품의 진행에 대해 고민하면
이상한 점을 하나 알 수 있음.
'미래가 이미 결정됐다면,
미래의 에렌은 왜 과거에 개입했지?'
작가가 굳이 땅울림이라는
파멸적인 요소까지 끌고 왔으니,
내심 미래가 결정됐다는 설정을
활용한 이유까지는 수긍이 되는데,
위 질문의 모순은 역설로 보이잖아?
(*베르톨트의 생존을 위해
아버지의 전처인 다이나의 거인을
어머니 쪽으로 유도했다는 진술.)

(*혼자서만 미래의 에렌을 인지한 그리샤.)
ㅇㅇ, 바로 이 장면들이지?
작가는 미래가 확정적으로
이미 결정된 일이라고 하는데,
정작 과거에 개입하는 권능은
왜 필요했냐는 질문으로 이어짐.
이 궁금증을 다른 작품들과
함께 차근히 풀어 보자.
먼저 매트릭스!
매트릭스 시리즈의 주인공 네오는
진격의 거인 주인공 에렌과
같은 조건을 달고, 결말도 비슷하다.
매트릭스 1 편에서 네오는
예언 능력을 가진 조력자 오라클과
비밀리에 접선하여 도움을 받음.
하지만 네오가 정말 '그'인지는
확답을 받지 못하고 헤어졌는데..
"자, 일단 입부터 벌려 봐."
이후로 오라클은 네오에게 언젠가
중요한 선택을 내릴 거란 말만 했는데도,
네오는 보란듯이 '그'가 되어 승천했지.
(*네오는 본인이 '그'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오라클은 정작 여기에도 답을 안 했음.)

그러니까, 오라클은 네오에게
'그'가 맞는지 여부를 알려주지 않고,
일부러 네오를 위기 상황까지 내몰아
'그'로서 각성하도록 만든 셈임.
그럼에도 여전히 매트릭스의 인류를
구원하지 못한 '그'에게 남은 문제 때문에,
2 편의 중반에 가면 아래의 장면이 나옴.
"당신은 일종의 프로그램이군요.
기계 사회에 속한 존재란 말이죠?"
"지금까진 아주 좋아. 그럼 다음은?"
"이제 문제는, 제가 당신을
신뢰할 수 있느냐의 문제군요."
"빙고! 하지만 나쁜 소식은,
네가 그 질문의 진실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 여부야.
내가 널 진심으로 돕는지 알 수 없잖아?
고로, 오롯이 네게 달린 문제야.
내 답을 수용할지 말지는 알아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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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 저도 아닌 답변에 살짝 짜증도 나고,
그런 한편, 너무나 지론에 가까운 말이라
뭐라고 답을 해야 좋을지도 애매하지?
자, 여기서부터 중요해 보이지 않지만
실은 작품의 핵심을 꿰뚫는 질답이 나옴.
"..*캔디 먹겠니?"
(*오라클로부터 받는 도움.)
"제가 받을지 여부도 이미 아시나요?"
"그걸 모르면 내가 오라클(예언가)이 아니지!"
"하지만 당신이 이미 알고 있다면
내가 애초에 어떻게 '선택'을 하죠?"
(= '미래가 이미 결정됐다면,
내가 내리는 선택은 온전한 의미의
선택이라고 할 수 없잖아요?')
"왜냐하면 넌 여기에
선택을 하러 온 게 아니니까!
사실 넌 이미 답을 선택했거든.
네가 여기에 온 건 그저 그 선택을
왜 내렸는지 이해하기 위해서야."
"..그럼 당신은 왜 여기에 온 거죠?"
"같은 이유야. 난 사탕이 좋거든!"
(= '난 선택이 착각이라 할지라도
자유의지의 고양감이 취향에 맞아!')
'쏙!'
사탕 하나 놓고 쓸데없이
말이 많아 보일 수 있겠지만,
이 대화는 사실상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대립과 모순을 여실히 드러내는 대화임.
매트릭스 1 편은 네오가 승천하여
마치 하늘의 뜻을 받든 천상의
전사가 된 것처럼 기독교의
메시아주의에 찬가를 보냈지만,
실상은 기독교의 [자유와 구속]의
모순을 담은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대립 구도를 함께 품고 있었음.

자유의지는 기독교인들이
신으로부터 일종의 축복을 받아
뜻한 바를 이루는 힘을 뜻하는데,
그 선택이 무엇이든 선택만 한다면
하늘의 뜻에 따라 이룰 수 있다고 봄.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그 신께서 '너무 전능하면' 어떡하지?
신은 섭리에 따라서 세상만물을
자신의 뜻대로 미래로 이끄는데, 이러면
기독교인들은 자유의지를 받은 게 맞나?
(*관련 영상 링크 : https://youtu.be/w_1L10oqNjw?si=pnr2P-28H3_RSMDo)
아니, '신께서 결정한 대로만' 따라야 하는데,
그럼 나는 동시에 자유로이 선택할 의지를
'온전한 의미'에서 부여받은 게 맞냐고?
그렇다, 이 [자유의지와 결정론]은
곧 기독교 교리의 [자유와 구속]임.
서로 모순되는 교리들이 대립해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가 없게 됨.
매트릭스에서는 2 편의
캔디에 대한 대화를 통해
인간이 내리는 선택의 의미를
희롱하듯이 뭉갠 셈이 됐지.
(??? : "오라클, 이거 모피어스가 준
빨간 약이랑 되게 닮은 것 같은데,
그냥 제 착각이죠..?")
때문에, 네오의 질문대로 우리는
결정론적인 조건을 따졌을 때,
선택이란 단어가 그 의미대로
'온전한 선택'인지의 여부를 의심함.
이에 대한 의구심을, 내가 지난 해설에서
빌려 쓴 실존주의의 후배인 철학 사조,
구조주의 철학으로 살피자.

에렌, 미카사와 함께 언덕 위 나무로
이유도 없이 내달린 아르민의 추억은
나뭇잎으로 상징될 때, 지크의 추억은
조언자인 톰 쿠사바와의 캐치볼로,
야구공을 통해 상징된 건 기억하지?
인간에게 [실존]이란 존재의 끝,
곧 '나는 지금, 여기에 있음'을 의미하며,
그 탓에 존재의 시작인 [본질]과 무관하게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었음.
실존이 본질과 연관이 없다는 게 아니라,
인간은 실존적인 선택으로 삶의 의미를
주체적으로 실천한다는 거지.

하지만 여기에 인과론의 부조리가
끼어들어 눈치 없게 훼방을 놨다고.
주인공인 에렌의 실존은 자유,
미카사의 실존은 사랑이었으나,
두 사람 모두 이를 성취할 수 없었지.
그럼에도 의지를 꺾이지 않고
다시 실존을 선택함으로써,
절망을 극복하고 삶에의 지탱감을
견지하는 게 작품 전체의 해답이었음.
즉, 프리츠에게 복종적으로라도
사랑을 준 유미르는 실존을 꺾였으나,
미카사를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선택하는 실존'에의 의지를 목격해
유미르가 성불하는 것이 결론이었지.
그래서 환상으로나마 유미르는
사람 같지도 않은 프리츠를 죽게 두고,
본인은 서로의 사랑을 지탱할 세 딸을
껴안아, 거인 계승의 비극도 막은 거지.
하지만 이런 실존주의도 결국
그 약점을 드러내며 패배하고
주류 철학의 자리를 구조주의에 넘겼음.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실존주의의 사르트르를 공격하면서
'스스로의 사유에 갇힌 포로'라고 비판했지.
에렌은 스스로를 '자유의 노예'라 했던가?
눈치가 어지간히 없지 않은 다음에야
레비스트로스의 비판과 맥이 겹쳐 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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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구조주의는 뭘 사유했기에
저런 비판을 실존주의자에게 했을까?
사실 레비스트로스가 사르트르를
공격한 맥락에는 근대 유럽 사회의
독선적인 근대성과 서양 위주의
지나친 인간 중심주의도 있는 등,
역사의 맥락까지 알아야 하지만
우리는 거기까지 갈 필요가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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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의 핵심 개념이자 중추인
이항대립을 통해, 에렌의 자유와
진격의 거인 작품의 결정론적 조건이
왜 그토록 중요했는지 따집시다.
자, 에렌의 실존이 자유였지만,
그는 자유라는 사유에 갇혔기에
모순적이게도 '자유의 노예'였음.
즉, 그의 테마는 [자유와 구속]이지.
ㅇㅇ, [자유의지와 결정론]은 여기서 파생했고.
혹시 위 두 관계가 대립관계로 보이나?
하지만 그 생각은 겉보기에 불과하고,
사실 [자유는 곧 구속]과 같다!
왜냐하면 인간의 선택이란 행위를
그와 결부된 연속적인 과정으로 보면,
선택은 '온전한 선택'이 아니라, 스스로를
선택지에 가두는 기속(얽매임)이기 때문임.
(*여기서부터는 좀 개인적인 구상임.)
어느 테이블 위에 여러 물건이 있다고 치자.
우리가 여기서 뭔가를 선택한다고 하면,
그걸로 선택하는 행위가 완전히 종결되나?
아니지, 선택 이후에 선택지의
변경이 가능한지도 알아야 하고,
처음에 얼마나 많은 선택지가 허용되는지,
다음 기회는 또 얼마 만에 오는지,
애초에 주어진 선택분야 외에도
다른 분야가 있었는지마저 중요함.
즉, 선택의 의미는 선택 이전과
이후에도 여전히 여러 조건이 놓여,
온전히 시작되거나 종결했다고
명확히 짚기가 꽤나 곤란하지.
단순히 말하면 우리는 선택과
연결된 기나긴 맥락에서 오로지
선택하는 순간의 단면만 포착해
'선택'이라는 이름표를 붙인 셈임.
특히나 선택지의 변경이 막히면
이는 결국 내 선택지에 스스로
갇히는 꼴, 즉 기속이 되고 만다!
또, 구체적인 예로 따질 것도 없이
간단한 사유만으로도 자유는
곧 구속이라는 걸 알 수 있다고?

만약 감옥으로 빚은 세계가 있다면
그 안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죄수라고 사유할 수 있을까?
그 세계의 '바깥'을 인지하지 못하면
사실상 죄수로 사는 이들이 과연
구속감을 사유할 수 있느냐는 거지.
에렌이 태어난 파라디 섬은
물리적인 벽이 있었을 뿐더러
거인이라는 명확한 위협도 있었지만,
저 세계의 사람들은 아니잖아?
ㅇㅇ, 마치 어느 동굴에 빛이 가득하면
그림자가 질 수 없기에, 이 동굴에서
태어난 사람이 있어도 그가 그림자는
없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꼴과 비슷함.
(*파르메니데스 :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떠올릴 수 없다면, 있을 수 없는 거지.
이를 뒤집어 말하면, 인간의 특정한 사유는
그와 대립되는 사유를 불현듯 깨달아,
구조주의의 '이항대립'이라는 구조를 이룸.
[자유]를 사유하면 으레 그 사람은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고,
[구원]을 사유하면 이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타락]을 경계하게 되며,
[축복]을 바라 기도하는 구도자에게는
[저주]로부터 이탈하는 희망이 싹트겠지.
(*기호학자 그레마스의 기호 사각형.
소쉬르의 이항대립보다 한 발 더 간 이론.)
결국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는
이원적인 사유의 구조는 알고 보면
겉보기에는 대립하지만, 각 항이
서로의 존재를 지탱하는 구조를 가졌음.
이런 관계의 구상이 바로
구조주의의 '이항대립'임.
서로 모순되거나 개별적으로
보이는 관계는, 그 차이로 인해
오히려 굳게 얽힌 지탱의 관계임.
구조주의는 언어학에서 출발했기에
언어와 그 의미의 전달 체계를 놓고
[*랑그와 파롤], [**기의와 기표]를 제시했고,
인류가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구조를
개별적인 '차이'와 그 차이로 형성된
'관계'가 관건이라고 봤음.
(*언어의 보편적 체계 / 개인의 사용례.)
(**기표로써 담아내는 대상의 의미
/ 표기할 문자와 발음할 음성 체계.)
자, 자유의지와 결정론은 대립한다고?
구조주의의 입장에서 이는
선택이라는 맥락을 그저
극단적으로 찢은 착각처럼,
인간의 인식을 양분한 허상임.
물론 단어의 의미가 쓸모없다는 게 아니고.
당연히 선택도 하지만, 그렇다고
오롯이 선택의 의미만 고정되어
연속한다고 여기면, 그건 오류라는 거지.

그래서 [자유는 곧 구속]이며,
순전히 자유만을 누릴 수 있다던
에렌의 희망과 복수심의 실존(자유)은
처음부터 이항대립의 구조에 갇힌 망상임.
그리고 여기서 처음의 질문이 돌아옴.

'미래가 이미 결정됐다면,
미래의 에렌은 왜 과거에 개입했지?'
이제 자유의지와 결정론이
결국 한 묶음인 걸 알잖아?
독자의 눈에 에렌이 과거에 개입한 일은
자유의지를 일부나마 실천한 것 같으나,
실상은 오히려 결정론을 더욱
강화시키는 구속의 실천이었음.

해리포터 시리즈를 본 사람들 많지?
3 편의 아즈카반의 죄수에서는
허마이.. 헤르미온느가 시간을 돌리는
회중시계 '타임 터너'를 이용해서
시간을 역행하며 문제를 해결했지.
해리와 헤르미온느는 억울하게
처형될 위기의 벅빅을 구출하고,
마찬가지로 결백한 대부 시리우스도
호그와트에서 빼돌려야 했다.
그래서 타임 터너로 시간을 되돌리는데,
이러면 심각한 문제들이 생긴다!
일단, '과거의 해리와 헤르미온느'는
시간을 돌린 시점(미래)의 본인들이
넘어왔다는 사실을 몰라야 함.
왜냐하면, 저 두 무리가 서로 만나면
여러 모순이 생기기에 위험하거든.
과거의 본인들은 스스로가
일종의 저주에 걸렸다고 인지하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존재의 모순에 따른
여러 파급 효과들을 걷잡을 수 없지.
만에 하나 해리와 허마이.. 헤르미온느가
저능아라서 누가 미래에서 왔는지
혼동이라도 하면 다른 쪽은.. 음..;
(*이 장면에는 안 나오지만,
달팽이에 머리를 맞은 과거의 해리는
미래의 해리에게도 통증을 공유했음.)
즉, 위험도가 굉장히 높은 작업임.
하지만 에렌의 '과거 개입'은 달랐음.
일단, 과거 시점으로 가기는 하지만
스스로의 존재를 감출 수도 있으며,
심지어 과거의 누군가에게
정보를 선택적으로 제공하고는,
언제든지 원래 시점으로
원할 때에 복귀할 수 있었음.

위 장면에서 그리샤는 미래의
에렌을 시각적으로 인지하지만
다른 가족들은 그렇지 않았는데,
이는 동시에 그들에게 제공된 정보가
에렌에 의해 선별됐다는 뜻이지.
특히 저 '원래 시점으로의 복귀'가
자유롭다는 점이 아주 큰데,
해리와 헤르미온느가 진 위험을
에렌은 전혀 질 필요가 없기 때문임.
(*작전 성공을 보고하는 해 & 헤 커플.
사실 이 장면에서의 덤블도어는
'과거의 해리와 헤르미온느'를 막
타임 터너로 과거로 보낸 시점.)
해리와 헤르미온느는 에렌과 달리
'과거 시점의 본인들'이 타임 터너를
사용하는 시점까지 도피해야 했거든.
그래야 원래의 시간선이
정상 궤도로 복구되니까.
즉, 에렌의 과거 개입은
'책임 없는 쾌락'인 거지.
다시 말해, 에렌은 시간을
단순히 역행한 게 아니라
결정론을 보다 강화시킨 것임.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합니다..!)
'과거의 에렌', 곧 우리가
계속 주시하던 에렌은 한 번도
저 미래 시점에서의 결정을
벗어날 수 없는 감옥에 있으니까.
시간 역행보다 훨씬 편의적이고
효과가 극대화되는 과거 개입으로
'미래의 에렌'이 정한 땅울림을
'과거의 에렌'은 억지로 떠맡게 됨.
이걸로도 모자라 작가는 아예
관짝에 못을 박고 공구리까지 치려고
콘크리트 수 톤을 들이붓는데..

바로 시조 유미르의 '좌표'에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하나로 묶어
동시에 연동하게 만든 점임.
아까의 과거 개입과 합치면
이게 무슨 의미가 되겠어?
뭐긴 뭐야, 절대 회피할 수 없도록
미리 짜인 미래가 기다린다는 거지.
그야말로 완벽한 외통수임.
때문에 시조 유미르 본인은 물론,
그 힘을 빌린 에렌이라도
결정된 미래 자체는 못 바꿈.
'과거로의 개입이 없었더라면'이라는
가정 자체부터 그냥 틀어막는 셈.
단지 과거 개입이라는 수단이
우리에게는 의지적인 선택처럼 보여,
미래 개변까지 가능해 보이는 허상을
은연 중에 착시시킬 뿐임.
그런데 이미 아니란 걸 알잖아?
가령, '온전한 과거 개입'이 가능하다면
시조 유미르는 파라디 섬의 운명 따위는
알 바가 아니고, 그냥 본인의 인생을
원하는 대로 개변하면 됐단 말이야.
인성을 죽 쑨 프리츠는 죽이고,
세 딸이랑 오순도순 살다가
시조의 거인도 자연 소멸시켰겠지.
즉, 우리가 진격의 거인에서
만화로든, 애니로든, 혹은
극장판에서조차 어떤 식으로라도
'땅울림과 연관없어 보이는 장면'을
목격한다면, 그건 전부 환상이 됨.

대표적인 게 종미의 거인과
한참 전투하던 중에 에렌이
미카사에게 '도피 생활'의
환상을 보여주던 일이 그 예시임.
(혹은 아르민과의 세계 탐험이라든지.)
어떤 식으로든 땅울림의 비극이
'없었고, 없으며, 없게 될 세상'은
작가가 강제로 조건부터 지운 거라고.
여기까지 설명한 이유들로 인해
에렌이 벌인 학살극은 결국
시조 유미르를 성불시키기 위한
오직 하나뿐인 미래의 징검다리가 됨.
자, 다시 따져볼까?
'미래가 이미 결정됐다면,
미래의 에렌은 왜 과거에 개입했지?'
이 질문은 애초에 무의미했음.
처음부터 있을 수 없던 질문이니까.
선택은 '선택으로 보이는 허상'이므로,
이런 시각에서 모든 등장인물들은
절대적으로 인과론에 묶였기에
우리는 공연한 질문조차 필요없'던' 셈.

물론 마냥 부정적으로만 볼 이유도 없음.
진격의 거인 세계 속에서는
우리의 같잖은 의구심마저 결정됐지만,
그럼에도 실존적인 사유를 하듯이
자유의지가 꺾인 것만도 아님.
에렌의 감옥인 '자유'는 처음에는
매트릭스의 네오와 비슷하게 시작해,
점차 오라클과 같은 시각으로 옮겼음.
(*이때의 스미스 요원은 결정론에
좌절한 허무주의적인 종말론자.)
"왜지, 앤더슨, 왜냐고?!
대체 왜 저항하는 거야?!"
"그러기로 했으니까."
그리고 네오는 3 편에서 결국
결정론적인 조건을 앎에도 불구하고
다시 운명에 맞서는 길을 '선택'했음.
사탕의 맛이나 수가 결정됐다고
그게 사탕을 맛보려는 의향까지
좌지우지하는 건 아니라고.
저 선택으로 매트릭스 시리즈는
인간과 기계의 평화 교섭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기계 사회는 인간처럼 감정을 배워
모순적인 관념의 구조에 갇히더라도
결국 선택은 가능하다는 학습에 이름.
그래서 에렌은 땅울림의 비극을 일으키더라도,
소중한 인연들만은 자신과 다르게
한시적이나마 평화와 자유를 누리도록
스스로를 희생하는 '선택'을 한 거였음.
지난 해설에서 미카사는 결국
사랑의 노예였으나, 에렌을 베더라도
실존감을 다시 선택해 시조 유미르를
성불시켰다고 마무리했던가?
특정한 사유가 그 사람을
한정하는 구조로 작용할지언정,
이게 그 구조를 한사코 감옥으로 여기는
확정적인 절망을 의미하는 게 아님.
에렌의 자유도 당연히 예외는 아니었고.

앞서도 선택의 경위를 풀었듯이,
그건 단어라는 이름표를 붙인 사람들이
멋대로 그 이름표에 집착한 우행이 됨.
그러니 헛된 분별심으로 공연히
좌절감에 휩싸일 이유가 없는 거지.
이만하면 과거 개입이 있는데
왜 미래가 결정되어 고정됐다는지,
그리고 이게 작품에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던 사람들한테 해명이 좀 됐나?
..된 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