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밤. Last Night
신록의 계절이라지만 하늘이 낮게 깔렸음인지 가슴조차 우중충한 월요일이었다. 아침부터 공연한 짜증이 울컥울컥 목구멍까지 치받고 있던 우범곤(27세)은 오전 11시 반쯤 지서를 나왔다. 야간근무 교대를 하려면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 했다.
우라질.
그는 지서 정문에 내 걸린 나무간판을 곁눈질로 흩겨보며 자갈길에다 허리를 굽혀 가래침을 뱉었다.
어쩌다 이런 촌구석에까지 왔는지.
18년간 경찰관으로 재직하다 병사한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전문대학을 다니다 경찰관이 되었고 다부진 몸통에 175cm의 키, 태권도와 합기도 유단자에다 해병대 출신의 민첩한 동작 등, 육체적으로 우수했던 그의 첫 발령지 부산 남부서 관할의 감만 파출소에서 일거에 서울시경의 특별경비단에 자출되었다. 이때만 해도 그는 탄탄대로를 달린다는 뿌듯한 자부심도 있었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은 끝내 화근이 되고 말았다.
조그만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경비단의 임무와 역할 때문인지 우범곤의 이런성격은 가는 곳마다 조직의 단합을 해치는 부적격자로 분류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지방으로 좌천 되었고 이렇게 궁벽한 곳까지 밀려왔다는 생각을 하면 늘 울화가 치밀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시골에서 근무를 시작했더라면 이런 열패감은 덜했을 것이다.
자연 그는 술을 가까이 하게 되었고 취하면 모든 것이 불만족 스러워 주위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곤 했다. 그런데 이런 우범곤의 주벽을 업무처리 능력으로 연결시켜 매사에 못마땅해 하던 지서장이나 차석이 꽤나 떠들고 다닌 모양이었다. 면내에서 행세께나 한다는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는 눈빛은 묘했다. 경멸스러움 같기도 했고 비웃음 같기도 했던 것이다.
이 때문인지 벌써 전입한지 5개월이 됐음에도 이곳은 도저히 정이 붙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 지방유지들은 지서 순경쯤은 아예 무시하고 있었다. 면장이나 간부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마을 이장이나 안면 있는 촌노들까지 지서에 들어오면 지서장이나 차석만 찾아 일을 보았고 말단 순경은 본 체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심호흡을 해봤지만 후텁지근한 공기는 좀체 답답함을 해소해주지 못했다.
우범곤은 매곡부락으로 이어지는 개울을 건너면서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있는 아내 전말순을 생각했다. 그래도 혼인신고는 했으니 마누라는 분명했지만 이 또한 아픈 생채기였다. 8년 간 대구 제일모직 여공으로 일하다가 돌아와 고향에 눌러앉아 있던 26살짜리 처녀를 꿰찬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들전문대 등록금 대느라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집도 처분하여 셋방으로 나앉아 고생하고 있는 어머니와 동생을 생각하면 결혼하겠다는 말이 쉽게 나오질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우범곤에게 그런 속도 모르고 그녀는 기회 날 때마다 결혼식을 올리자고 졸라댔다.
집에 도착하여 아내가 차려주는 점심을 먹고 우범곤은 잠을 청했다. 해만 지면 적막강산이 되는 동네지만 가끔 술 취한 청년들이 벌려놓는 싸움판도 말려야 하고 상급관서의 상황점검 전화도 지체없이 받아야 할뿐만 아니라 몇 구획으로 나눠져 있는 관할구역 순찰도 돌아야 했으므로 근무 중에는 잠을 잘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늘 수면부족으로 시달리게 마련이었다.
그렇다고 자리에 누우면 바로 잠이 드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주위가 환한 낮에 청하는 잠은 그저 정신을 안정시키고 눈 주위의 피로를 쫓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우범곤은 온 몸의 긴장을 풀면서 무의식의 세계로 몰입하였고 오래잖아 비몽사몽간에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런데 뭔가 가슴 께에 갑작스런 충격이 있어서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운동으로 단련된 방어감각이 극도로 예민해 있었던 것이다. 곁에서 아내가 멋쩍게 웃고 있었다. 정신이 멍했다.
뭐꼬?
우범곤은 사납게 아내를 노려보았다. 가까스로 잠이 들었는데 이게 무슨 심술인가? 선잠에서 깨어나 순간적으로 일기 시작한 짜증은 걷잡을 수 없이 끓어올랐다. 그는 백지처럼 웃고 있는 아내를 힘껏 걷어차 버렸다.
잠든 남편의 가슴 께에 앉은 파리를 잡으려고 자신도 모르게 손이 갔다는 설명을 할 겨를도 없이 아내 전말순은 방 한 구석에 쳐밖혔다가 부스스 일어났다. 그녀 역시 악에 북받쳤나보다.
그 깐 일로 사람을 때리고 지랄이가.
뭐라꼬?
그러잖아도 길다란 우범곤의 눈이 더욱 매섭게 찢어졌다.
동네사람들 쑤군대는 소리도 안 들리나? 공무원이 결혼식도 안올리고 동거생활을 하니까 손가락질을 당하는 거 아이가. 참말로 창피해서 못 살겠다.
한 방 얻어맞은 전말순의 입에서 또 다시 예의 신세한탄이 쏟아져 나왔다.
결혼비용도 마련하지 못하는 주제에 툭하면 사람을 때리고...
그러다가 전말순은 아차 싶었다. 식도 올리지 않은 처가에 얹혀 살면서 열등감에 젖어 있는 남편이 딱해 보여 되도록 이 말은 삼갔던 터였다. 우범곤은 발작적으로 일어나 그녀의 전신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코피가 터지고 이리 나 뒹굴고, 저리 처밖히며 전말순은 악을 바락바락 쓰며 울었다. 며칠 전에 부산에서 올라와 건넌방에 있던 우범곤의 동생 범호가 밖으로 나와 두 사람을 뜯어 말렸다.
그래 니가 와 있었지.
우범곤은 동생을 보면 늘 미안했다. 자신이 어머니의 가녀린 허리에 지탱하여 전문대학에 다니다 군에 입대했을 때 네 살 아래인 동생은 고등학교를 고학으로 겨우 마쳤다. 그러나 그런 동생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일단 열받아 치솟고 있는 화를 삭이지는 못했다. 우범곤은 동생을 피해가며 또 아내를 차고 밟았다. 고함과 울음소리에 놀라 건너 채에 사는 전경자 여인이 달려와 전말순을 부축하려 했다.
니는 뭐꼬.
우범곤은 전경자씨의 뺨을 세차게 올려붙였다. 그녀의 남동생이 누나를 도우려고 달려나왔으나 우범곤의 무차별 폭행은 계속됐다.
동네사람들아. 여기 큰 싸움 났다. 빨리 나와서 쌈 말리래이.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들렸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 나왔다.
뭐 그 깐 일 갖고 그라노?
저런 사람하고 우찌 살끼고.
마당에 들어선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한 마디씩 내뱉었다.
씨1발.
그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울긋불긋 지천으로 깔린 들판과 산자락의 철쭉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아기자기하게 펄쳐진 봄의 정경에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아직 교대를 하려면 몇 시간이 남았으므로 딱히 갈 만한 곳도 없었던 우범곤은 지서 앞 가게에 가서 술판을 벌였다. 혼자서 술을 시작하기가 멋쩍어 근무 중인 안승섭 순경에게 합석을 권해봤지만 거절당했다. 그러고 보니 술만 한 잔 들어가면 주사를 부리는 우범곤의 술상대가 되어줄 만한 사람이 이 마을에는 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이래저래 속이 상한 그는 소주 한 병을 금방 비워버렸다.
그래 꼭두리 말 마따나 난 여자를 거느릴 자격도 없는 놈이야.
조금씩 가라앉고 있던 울화가 울컥하고 다시 치밀어 올랐다. 사람들은 아내인 전말순을 꼭두리라고 불렀다. 우범곤은 비틀거리며 근무 중인 방위병 박상찬을 데려와서 또 한 병의 소주를 비웠다.
결혼식 올릴 주제도 못 되는 놈이 동거생활부터 한다고 동네 사람들이 나한테 손가락질을 한 대. 지서 순경이란 작자한테 말이다.
좌천에 좌천을 거듭하여 이 궁벽한 산골동네로 흘러온 말단 순경이 결혼할 비용도 마련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처지가 새삼 서럽고 억울했다. 그러고 보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정말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이 지지리도 못난 인간. 쯧쯧쯧.
사람들의 혀 차는 소리가 귓가에 점점 크게 맴돌고 있었다. 그는 더욱 감정이 격해지고 있었다.
직이삘끼다. 죄다.
그는 대상이 특정되지 않은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쩌면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이 궁류면 사람들 모두에 대한 분노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범곤은 정신을 곧추 세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까짓 술쯤은...
주위에는 어느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지서에는 여전히 이승섭 혼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이 순경. 들어가라.
우범곤은 자신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괜찮겠나?
이승섭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우범곤을 쳐다보며 물었다. 함께 있자니 주사를 견디기가 성가실 것이고, 그렇다고 이렇게 술 취한 사람에게 지서를 맡기기도 성큼 내키지 않는 일일 터였다.
내 반성회 참석하고 금방 올끼다. 우 순경. 거기서 한 숨 자래이.
이승섭은 못내 불안한 표정으로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지서를 나갔다.
휴우.
우범곤은 소파로 가서 벌렁 드러누우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찾아온 정적은 숨이 막힐 듯 그의 전신을 눌렀고 가슴은 더욱 답답했다. 홧김에 먹은 술 때문인지 좀체 감정을 걷잡기가 어려웠다. 그때였다. 문이 왈칵 열리며 사내 하나가 뛰어 들었다.
씨1발. 경찰이면 다가. 와 사람을 때리노. 또 때리봐라.
가만히 보니 아까 싸움 말리던 전경자씨의 동생이었다. 그는 머리를 우범곤의 가슴에다 디밀며 대들었다. 그 역시 주기가 있었다. 그러잖아도 울컥거리던 울화통이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것 같았다.
그래. 아예 죽여줄게.
우범곤은 그를 확 떼밀어놓고 지서 안 무기함으로 가서 카빈소총 두 정을 집어 들고 탄창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잡히는 대로 탄약이 가득 채워져 있는 탄창들을 양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가 소총의 노리쇠를 당기고 실탄을 약실에 송탄 시켰다.
이 기세에 놀란 청년은 혼비백산하며 달아나 버렸다. 우범곤은 비틀거리며 예비군 무기고로 다가갔다. 방위병 김해군과 성석현이 앞을 가로막았다.
와그랍니꺼. 우 순경님예. 참으이소.
너거들은 직이고 싶지 않대이. 존 말할 때 비키라. 오늘 내한테 욕한 년 놈들 모조리 직이뿔끼다.
그러면서 우범곤은 방위병들을 향해 두발을 쏘았다. 총알은 무기고 문간에 맞고 어두운 하늘속으로 튕겨 나갔다. 방워병들은 몸을 움츠리고 밖으로 달아났다. 그는 가지고 있던 열쇠로 무기고를 열어 수류탄 8발을 꺼내 호주머니에 넣었다. 지서로 돌아온 우범곤은 천장을 향해 두발을 쏘고 경비전화와 일반전화의 선을 모두 끊어 버렸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비웃는 마을사람들의 조소가 가득했으므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지서 밖으로 나오면서 우범곤은 사무실을 향해 수류탄 하나를 내던졌다. 지난 5개월 여, 수모와 한숨 속에서 보낸 직장을 향한 분풀이였다. 그러나 불발이었다. 다시 수류탄 하나를 더 꺼내 안전핀을 뽑은 뒤 저녁내도록 술을 퍼마셨던 건너편 임정수씨 가게를 향해 내던졌다. 수류탄은 그 집 지붕에 맞고 때그르르 굴러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역시 불발이었다. 그때 마침 마을회관에서 반상회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던 손진태씨가 지서 앞을 지나갔다.
우범곤은 아무 망설임도 없이 그를 향해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첫 번째 희생자인 그는 대구에서 표구사를 경영하는 사람으로 그 날 예비군 훈련 때문에 고향에 들렸다가 변을 당했다.
해병대에 근무할때 우범곤은 특등사수였다. 현실이 아무리 불공평하고 불만스러워도 그는 사격할 때만은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고 과녁의 한 복판을 뚫은 탄착점을 보며 희열을 느꼈다. 이곳에 와서도 그는 매일 공기총으로 사격연습을 하고 있었다. 무슨 총이든 손에만 쥐면 세상을 다 손에 넣은 듯 기분이 고조되곤 하던그는 몇 십 미터 떨어진 나무 위 참새도 쉽게 맞춰 떨어트렸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주사에도 불구하고 동료들은 그에게 '사격 하나는 끝내주는 경찰관'이란 별칭을 붙여주었다.
명중.
첫 번째 희생자가 쓰러지자 그는 대장정의 초입에서, 시선에서와 꼭 같은 희열을 맛보았다.
그래 총이나 실컷 쏴보자.
그렇게 작정한 우범곤은 지서에서 20여 미터 떨어진 궁류우체국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체국 본관은 이미 문이 닫혔지만 별채로 된 교환실에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거칠게 유리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교환원인 전은숙양과 박경숙양이 야간근무를 하고 있었다. 경비전화나 행정전화를 제외한 일반전화의 모든 선은 이 교환기에 연결되어 24시간 가동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범곤은 소총의 조정간을 자동에 놓고 그녀들을 향해 연발로 쏘았다. 전은숙양은 출입구 쪽 바닥에 피를 뿜으며 쓰러졌고 박경숙양은 교환대 의자에 앉은 채 벽에다 상체를 기대며 숨을 거뒀다. 우범곤은 몸을 돌려 교환대를 향해 남은 탄약을 쏫아부었다.
이때 본관 숙직실에 있던 집배원 전직선씨가 총소리에 놀라 달려오다가 역시 명치에 총을 맞고 우체국 바닥에 쓰러졌다. 하루종일 후덥지근하더니 하늘은 마침내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우범곤은 칠흑같은 어둠에 몸을 내맡기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 후련하다.
아직도 귓속을 간질이며 사람들의 쑤군댐은 계속됐지만 네 사람을 향해 총질을 해댄 뒷맛은 개운함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불꺼진 면사무소 앞을 지나 처가가 있는 매곡부락을 향해 걸었다. 그 부락은 한 가구를 빼면 모두 처가의 일가붙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곳이었다. 그 때문에 그에 대한 비아냥과 질책이 제일 심한 곳이었다. 그래서 처가와 뒷간은 멀수록 좋다고 하던가?
그는 처가로 들어가서 우선 아내를 찾아보려고 했다. 그런데 집 입구에서 어떤 여자가 살금살금 도둑고양이 형상을 하고 다가왔다. 아마 개울건너에서 났던 총소리 때문에 무슨 일이 났는가 확인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우범곤은 물체를 향해 겨누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여자가 쓰러졌다. 처가 입구의 전인배씨 부인인 강판임씨였다. 총성이 울려도 전인배씨의 집에는 불이 켜지지 않았고 쥐 죽은듯 조용했다. 아내는 집에 없었다. 아내뿐만 아니라 집에는 입구에 매어놓은 누렁이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집을 나와 이장댁인 전용덕씨 집으로 갔다. 방안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지만 그 집에는 그집 막내딸인 미숙양만 자고 있었다. 그는 그 아이에게도 총격을 가했다. 그러나 미숙인 다리에 총상을 입었을 뿐 목숨을 잃지 않았다. 이장댁을 나온 우범곤은 마을을 가로지르고 있는 한길을 따라 걷다보니 전용줄씨 집이 보였다. 그곳에는 막 반상회를 끝낸 10여명의 부인들이 낮에 파리 한 마리 때문에 일어났던 그 사건을 화제로 하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범곤은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느린 동작으로 전용줄씨 집으로 들어갔다.
전양! 여기 전양있나?
그는 마루로 올라서며 자신의 아내를 그렇게 불렀다. 문이 열리고 전용줄의 모친 최분이씨 얼굴이 나타났다.
씨1발년들. 모두 죽어봐라.
자신에 대한 모든 소문은 이곳에서 만들어져 온 동네로 퍼진다고 생각하니 저녁 내내 끓어오르던 적개심이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그는 총구를 방안으로 향해놓고 무차별 난사를 했다. 비명소리, 고함소리, 총소리에 뒤엉켜 방안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곳에서 전용줄씨의 모친 최분이씨, 사촌형수인 유순례씨, 우체국에서 사살 당한 집배원 전진석씨의 부인 백점악씨, 이웃집 친척인 손정희씨, 유백암씨가 숨졌다. 이때 함께 방안에 있었던 우범곤의 아내 전말순은 동맥이 끊어지는 중상을 입었으나 목숨을 건졌다. 우범곤은 이 집 마당에 또 한발의 수류탄을 까서 던졌지만 역시 불발이었다.
다시 한길로 나온 우범곤의 눈에 왼쪽 편으로 불빛이 들어왔다. 이 마을의 유일한 타성받이 이춘수씨 집이었다. 마당으로 들어서니 TV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왔다. 우범곤은 목청을 돋우며 소리쳤다.
아무도 없소?
문이 열리고 중늙은이 한 명이 목을 빼며 밖을 내다봤다. 우범곤은 방안을 향해 네발을 쏘았다. 중늙은이 이춘수씨가 쓰러지고 부인과 딸 상남양도 맞았으나 이 집은 가장만 목숨을 잃었다.
열다섯쯤 됐나.
우범곤은 자신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수를 대충 세어보면서 그 집을 나왔다.
우범곤은 새삼 전의를 불태웠다. 그는 이번에는 동네유지들을 향해 적개심을 불태웠다. 오늘 낮에 지서장 허창순과 차석 김진우를 부곡온천에 데리고 간 미성건설 현장감독인 김성남이나 장한수, 신태현 같은 마을 유지들도 모두 그랬다. 엄연히 담당 직원이 있음에도 동네유지라는 인간들은 지서에 들어와서도 눈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모조리 거드름을 피우며 지서장과 차석의 자리로 몰려가 일을 해결하려고 했다. 법적으로나 행정절차상 허용해서는 안될 일도 지서장은 쉽게 일을 풀어주었다. 그들의 눈에 순사는 개똥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우범곤은 가래침을 내 뱉은뒤 담배를 뽑아 물었다.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지만 손아귀 속의 담배는 구수한 연기를 흩날리며 조금씩 타들어 가고 있었다. 시계는 10시 10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매곡리를 싹슬이한 우범곤은 어깨에 맨 카빈소총의 멜빵을 고쳐 메고 운계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곳은 면사무소와 지서가 있는 토곡리보다 상가가 많고 장도 크게서기 때문에 인가도 많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가장 번화가인 삼거리 동네는 적막상산처럼 조용했다. 불과 몇 분전에 지서의 방위병들이 달려 뛰며 불을 끄도록 독려한 사실을 우범곤은 알 턱이 없었다. 시장통의 시멘트 길을 따라가면서 불빛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운계리의 첫 타겟은 시장통 입구에서 살고 있는 택시운전사 전용길씨였다. 그는 매곡리 전용줄씨의 친동생이었는데 우범곤이 나타나기 조금 전에 전용줄씨가 달려와 다짜고짜 아이 둘과 잠을 자고 있던 동생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끌어냈다. 잠결에 형의 손에 끌려 도망가면서 비로소 매곡리의 사고소식을 전해들은 전용길씨는 집안에 남아있는 아이들 생각 때문에 더 이상 달아나지 못하고 돌아오던 도중에 바로 자신의 가게 앞에서 우범곤과 맞닥뜨린 것이다. 우범곤은 이 사람에게 세발을 쏘아 쓰러뜨렸다. 한 발은 허리를, 두 발은 가슴을 관통하여 그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전용길씨를 죽인 뒤 가게 안을 기웃거리다가 우범곤은 불이 환하게 켜진 건너편 미장원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미장원의 문을 드르륵 열면서 청년 한 명이 나왔다. 사람만 보면 즉각 발사하던 우범곤은 잠시 뜸을 들이며 그 청년이 가까이 오도록 지켜보고 있었다.
우 순경님 아입니꺼?
청년은 운계리에 사는 21살 허헤도 군이었다. 우범곤은 그의 정강이를 구둣발로 걷어찼다. 그런 뒤 쓰러지는 그에게 두 발을 쐈다. 총탄은 모두 그의 엉덩이에 맞아 즉사를 면했다. 허헤도 군은 마을 이장 장장수씨와 함께 한달 반전에 백혈병으로 죽어 상심해 있는 이 미장원집 주인인 박명연씨를 위로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앞집에서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나서 나왔다가 우범곤을 만난 것이었다.
총소리가 나자 방안에 있던 10명의 위문객들은 깜짝 놀라 모두 창이나 현관을 통해 도망을 쳤는데 자리에 누워있던 박명연씨는 우범곤을 피하지 못하고 발과 복부 팔 등 세 군데에 총상을 입고 죽었다. 그녀의 딸 넷 중 첫째인 영희는 정강이에, 둘째 현정인 엉덩이에 총을 맞았다. 셋째 정아와 막내 미아는 다행히 다치지 않았다.
미장원을 나온 우범곤은 역시 불이 켜져 있는 철물점으로 다가갔다. 그는 그곳에서 철물점 안주인 박갑조씨에게 총을 쏴서 그를 14번째 희생자로 만들었다. 우범곤은 계속 불켜진 집만 찾아들었다. 바로 윗집은 철물점 주인 유동순씨의 동생인 유동근씨 집이었는데 문이 잠겨져 있었다.
문열어. 경찰이다.
우범곤은 대문을 흔들며 소리쳤다. TV를 보고 있었던 듯 이 집의 딸 유점순양이 경찰이라는 말에 반가워하며 대문을 열었다. 그는 유 양의 가슴에다 한방 쏘았다. 유 양은 그대로 힘없이 고꾸라졌다. 우범곤은 유 양의 시신을 뒤로한채 안쪽을 살폈다. 그때 유 양 곁에서 잠을 자고 있던 어머니 이경연씨가 딸의 비명소리에 놀라 잠이 깨어 밖으로 나왔다. 우범곤은 아직 잠에 취한 채 딸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그녀에게도 총을 쏘았다.
자식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것도 지나치면 죄인 기라. 그냥 잠이나 자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우범곤의 귀에 어디선가 불을 끄라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빈 탄창을 바닥에 버리고 새 탄창으로 끼우고는 노리쇠를 힘껏 당겨 탄알을 장전했다. 몇 걸음 걷지 않아서 창을 통해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집을 발견한 우범곤은 합판으로 만들어 단 부엌 문을 두드리며 다시 소리쳤다.
문열어. 경찰이다.
집주인 진필리씨가 문을 열었다. 우범곤은 그녀의 왼쪽 배에다 총을 쏘았다. 그녀는 총을 맞은 부위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손가락 틈 사이로 피거품이 흘러 나왔다. 우범곤은 그 틀어막은 손 위에다가 한발을 더 쏘았다. 이때 방안에 있던 진씨의 딸이 뛰어 나와 어머니를 부축하려고 했다. 그는 딸의 배와 손에 두 발을 쏘았다. 딸은 요행히 살았지만 진씨는 오래잖아 숨을 거두었다.
우범곤은 다시 불이 켜져있는 옆집, 궁류약방을 향해 걸어가서 약방 안에 있던 전달배 군을 쏴 죽인 뒤 바깥의 소란을 확인하러 나온 그 건너편집 진일임씨에게도 여러발 쏘았다. 배에 두 발의 총상을 입은 진일임씨는 숨이 붙어있을 때까지 사람 살려라. 하고 고함을 질러댔다. 그러나 아무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우범곤은 잠시 진저리를 치고 있는 진씨의 마지막 안간힘을 지켜보다가 몸을 돌려 막 걸음을 옮기려하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군가를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그 방향을 향해 두방을 쐈다. 면사무소에서 숙직을 하고 있는 손태열씨의 부인인 김월순씨였다. 그녀는 귀에 익은 진씨의 신음소리를 들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문을 열었다가 머리와 가슴에 총을 맞고 죽임을 당했다.
아 참, 이 부근에 경숙의 집이 있었지.
우범곤은 자신의 총에 세 번째 제물이 된 우체국 교환원 박경숙을 생각해냈다. 그가 전말순의 결혼독촉에 전전긍긍하고 있을 무렵인 지난 식목일 연휴 때 벚꽃이 만발한 콧대더미라는 바위 부근에서 비로소 그녀의 존재를 발견하곤 아쉬움 속에서 새삼 욕심을 냈던 처녀였었다. 아직 19살의 어린 나이이긴 했지만 이 동네에서 6대째 살고 있다는 그녀의 집안은 궁류면 전체에서도 가장 안정된 듯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범곤은 애증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왕 그녀가 가버린 마당에 이 기회에 그 집도 박살을 내어버리고 싶었다. 그녀의 집은 시장통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다. 우범곤은 그집 대문을 탕탕탕 두들겼다.
외진 곳에 위치하여 시장통의 광란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던 듯 그녀의 어머니 최정녀씨가 문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던 우범곤은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최씨가 쓰러지자 안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남편 박인길씨가 곡괭이를 집어들고 밖으로 달려나왔다. 우범곤은 침착하게 그의 동작을 지켜보고 있다가 총을 쏘았다. 총알은 겨낭한대로 정확히 그의 손에 맞았다. 박씨는 쥐고 있던 곡괭이를 떨어뜨리고 잠시 멈칫했다. 그는 천천히 총을 들고 다시 그의 머리를 향해 두 발 째 총알을 날렸다. 박시는 머리에 정통으로 맞고 맥없이 쓰러졌다. 그러자 공부를 하고 있다가 총소리에 놀란 이 집의 막내인 박현숙양이 사랑채 방문을 열었다. 우범곤은 싱긋 웃으며 현숙양을 향해 또 한 발을, 놀라서 바깥쪽 문을 열고 달아나는 그의 언니 미해양에게도 또 한 발을 날렸다.
자매는 맥없이 푹 고꾸라졌다. 우범곤은 신을 신은 채 방안을 뒤져 잠을 자고 있던 재철군 마저 목숨을 끊어 일가족을 몰살시킨 후 유유히 그 집을 빠져나왔다.
우범곤은 실성한 듯 히죽히죽 웃으며 다시 삼거리로 돌아 나왔다. 목이 말랐다. 술이 깨고 있었다. 시계는 어느덧 11시가 지나고 있었다. 평촌으로 가려던 우범곤은 발길을 돌려 이리저리 상가를 기웃거리다가 불이 꺼진 신외도씨 가게의 옆 창문을 두들겼다. 순찰 돌면서 가끔 술 한 잔씩 하며 제법 친하게 얼굴을 익혀놓은 집이었다. 조금 있으니 방안에서 신씨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에 누고?
궁류지서 우 순경임니더.
이 야밤에 우 순경이 우짠 일이고?
간첩이 나타났다고 해서 나왔는데 예. 목이 말라서 그랍니더. 사이다 한 병만 주이소.
신씨 부인 손원점씨는 경찰관이라는 말에 밀려오는 잠을 쫓으며 문을 열었다. 손씨는 사이다를 찾다가 없어서 냉장고에서 콜라 한병을 꺼내 뚜껑을 따고는 컵에다 가득 따라서 우범곤에게 내밀었다. 목이 갈라질 것 같았던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반잔을 마셨다. 그때 가게의 이웃집에 사는 김주동군이 우범곤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가게로 나왔다.
참말로 우 순경 아저씨네.
김 군은 의령종고 2학년 학생으로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한데도 공부를 잘했다. 1학년을 마치면서 학교장 상과 함께 장학금 95,340원을 타서 난생 처음으로 새 교련복을 구입했다. 김 군은 어쩌면 열심히 공부해서 우 순경과 같은 멋진 경찰관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그 늦은 밤에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달려 나온 것이리라. 그러나 우범곤은 그 아이에게도 예외 없이 총질을 했다. 목을 관통 당한 김 군은 총을 맞는 순간 재빨리 몸을 돌려 달아나다가 시멘트길에 쓰러져 숨을 거뒀다. 난생 처음 입어보는 새 교련복이 그의 수의가 된 셈이었다.
이기 무슨 짓꼬?
김 군이 총을 맞고 쓰러지는 광경을 목격한 손원점씨는 격렬하게 우범곤을 나무랐다.
무슨 짓 좋아하네.
우범곤은 손원점씨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손씨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문을 열어놓고 방안에 앉아 가게에서 일어난 일을 세세히 지켜보고 있던 손씨의 남편 신외도씨는 재빨리 전깃불을 껐지만 우범곤은 동작 빠르게 그를 향해 쏘았다. 그는 세 발을 맞았지만 죽지 않았다. 그러나 총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난 그의 두 딸 청순양과 수정양은 겨드랑이를 관통 당해 목숨을 잃었다.
몇 명이나 죽였나?
세기를 단념하려고 뭐라고 중얼중얼 거리기도 하고 낄낄낄 음산하게 웃기도 하며 우범곤은 봉황교를 건넜다. 다리 아래에는 평촌리에서 흘러온 유곡천이 흐르면서 제법 쏴아쏴아 소리를 내고 있었다. 11시 30분. 평촌리 쪽으로 막 방향을 틀었는데 그는 왼편에서 불빛 하나를 발견했다. 유동숙씨 집이었다. 불빛은 건너 채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주인 있소?
우범곤은 건너 채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역시 방에서 TV를 보고 있던 안주인 설순점씨가 바깥의 기척에 놀라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습관처럼 방아쇠를 당겼다. 설씨는 맥없이 마당에 쓰러져 버렸다. 이어서 이 집의 딸 유순자양도 총을 맞고 마루 쪽으로 쳐밖혔다. 그는 막내딸 성희 양에게도 한 발을 쏘았지만 성희 양은 이웃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술기운이 빠져나갔음인지 우범곤은 자신이 점차 지쳐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더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광란이 어디까지 가서 멎을 것인지 자신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조금씩 일렁이기 시작한 불안감을 짖누르기 위해서라도 빨리 다른 목표물을 찾아야만 했다. 어둠 속에서 두리번 거리던 우범곤은 외딴집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찾아내면서 다시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그는 거침 없이 마루로 올라서서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이곳은 평촌 이발소 주인인 곽기달씨의 집이었다. 방안에는 모두 5명의 식구가 있었는데 곽씨와 아들 주일군이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하고 있었고 부인과 다른 자녀 둘은 이미 잠에 취해 있었다.
우범곤은 그들을 향해 소총을 난사했다. 곽씨는 아들 주일 군을 끌어안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지만 박순득씨는 오른쪽 귀밑과 턱밑에 총상을, 딸 도희 양은 오른쪽 어깨에, 막내아들 정일 군은 오른쪽 턱에 총상을 입었다.
일가족을 향해 총을 난사하면서 다시 힘을 얻은 우범곤은 비가 쏟아져 점점 거세게 흐르고 있는 유곡천의 물소리를 벗삼아 저벅저벅 자갈길을 힘차게 걸었다. 그러나 그는 금방 자신의 신체에서 뭔가가 쉴새없이 빠져나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그것은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알코올 부족.
소심한 그는 술의 힘을 빌어 평소 주저하던 일을 많이 해결하는 편이었다. 아직을 할 일이 남았으나 우선 이 알코올부터 채우는 게 시급한 일이었다. 아까 신외도씨 가게에서 술이나 몇 병 가지고 오는 건데 참 잘못한 것 같았다. 그러다가 그는 평촌리에 상가가 있음을 퍼뜩 깨달았다. 어제 교대 무렵 평촌리 이장이 허 지서장에게 부고장을 갖다주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문두출씨가 결국 죽었구만.
부고장을 펄치며 담담하게 말하던 지서장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래 문씨 상가야. 어쨋든 그 동네에 가면 상가는 먼저 눈에 띄겠지.
마음이 조급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중간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예동부락을 지나쳐 버렸다.
11시 50분. 우범곤은 마침내 평촌리로 들어섰다. 그는 오른속에 움켜쥐고 있던 카빈소총을 어깨에 걸어 매고 다른 하나는 든채로 상가로 들어섰다. 그곳은 늦은 시간임에도 내일 반일준비에 상주들의 움직임이 바빴다.
우 순경이 우짠 일이고?
어디선가 굵직한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평소 동네유지라고 행세깨나 하던 한명규씨였다.
비상이 걸려서예.
우범곤은 무뚝뚝하게 대꾸를 한 뒤 안채로 갔다. 마루 끝에 소총 두정을 세워놓고 상주를 찾았다. 날 때부터 벙어리인 상주 문천웅씨 대신에 큰사위인 이정오씨가 그를 맞았다. 우범곤은 호주머니에서 돈 2천 원을 꺼내 조위금으로 내밀었다.
빗 길에 멀리 걸어서 왔더니 발이 말이 아입니더. 이래 갖고 절은 우째 하겠심니꺼. 술이나 한 잔 얻어 묵고 갈랍니더.
그러면서 그는 안채에서 물러나와 사랑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박종덕씨와 한명규씨가 그에게 술을 권했다. 우범곤은 단숨에 두 사람이 권한 술잔을 들이킨 뒤 손등으로 입을 닦고 주위의 사람에게 일일이 잔을 권했다.
그라고 본께네 총이 두 자루네.
별채로 안채로 바쁘게 들락거리던 서진규씨가 어느 틈에 사랑채를 기웃거리며 말을 붙였다.
한 자루는 안 순경 낀데 어디 좀 둘렀다 온다 캐서 내가 가지고 왔심니더.
우범곤은 별것을 다 간섭한다싶어 서진규씨를 힐끗 쳐다보며 대답했다.
치아라. 야. 한 자루모 어떻고 두 자루모 어떤노. 실탄도 없는 총 어디다 써먹을라꼬 가지고 댕기나.
한명규씨가 끼어 들며 핀잔을 줬다. 우범곤은 피씩 웃었다. 그는 연거푸 몇 잔을 들이킨 뒤 슬며시 일어나서 소총을 잡고 안정장치를 풀어 합석을 했던 한명규씨와 박종덕씨에게 한 발 씩 쏘았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우범곤은 신속한 몸짓으로 안채와 바깥채를 오가며 상주와 문상객을 향해 난사를 시작했다. 부엌 앞에서 고인의 부인인 조을순씨가, 안방과 윗방에서는 그녀의 언니인 조맹률씨와 조귀남씨, 친척인 조용덕씨, 큰 사위 이정오씨의 딸 유랑양이, 마루에서는 사위 이판준씨, 딸 문순이씨가, 뜰에서는 서진규씨의 부인 박봉순, 그리고 허이중씨가 각각 목숨을 잃었다. 고인의 손자나 문상객의 손녀인 아이들 4명도 이때 함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상가에서 모두 12명의 목숨을 빼앗은 우범곤은 재빨리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때 상가에서 나는 총소리에 놀라 동네사람들이 달려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이 사람들을 향해서 다시 난사를 시작했다. 서형수, 성소남, 최경조, 이타순씨가 영문도 모르고 총에 맞아 유명을 달리했다.
1시 30분.
다시 술로 의식을 다독거린 우범곤은 얼근한 기분이 되어 마을 안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희부염하게 누군가가 마주 걸어오고 있었다. 우범곤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그 사람이 다가올 때까지 노려보고 있었다.
우 순경님.
반갑게 소리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방위병 서정수였다.
혼자 오셨십니꺼? 어디서 무장공비가 나왔심니꺼? 몇 명이나 된답니꺼?
그는 우범곤이 대답할 여유도 주지 않고 계속 물어댔다.
이리로 오이소.
그는 서정수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서정수의 큰댁이었다. 그 집에는 그의 큰아버지 서인수씨, 큰어머니 전복순씨, 서재갑씨, 서점도씨, 서점도씨의 부인 이순두씨, 박금수씨, 서종수씨 등 7명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무장공비가 출현했다는 말을듣고 한결같이 불안한 표정들이었다.
이렇게 무장을 하고 나왔응께네 인자 아무 걱정 하지 마이소.
우범곤은 7명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좁은 방으로 들어가 그들을 안심시키며 한쪽 공간을 차지하고 앉았다. 후덥지근한 방안공기 때문인지 금방 졸음이 몰려왔다. 우범곤은 방안과 바깥을 드나들며 깜박깜박 졸기도 하고 담배를 피워 물고 잠을 쫓기도 하면서 버틸 수 있는 시간까지 버티고 있었다.
새벽 3시 40분.
평촌리 문두출씨 상가 뒷 쪽인 서인수씨 집 안방에서 집단으로 엉켜 불안한 잠을 자고 있던 서점도씨와 서종수씨는 소변이 마려워서 엉금엉금 기어 화장실로 향하다가 자동차의 엔진소리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자동차다.
하도 구석진 곳이어서 하루에 몇 차례 다니는 버스 외에는 전혀 교통편이 없었던 평촌리 주민에게 자동차는 비행기만큼 귀하고 새로운 문명의 이기였다. 방안에서 이들의 외침을 들은 방위병 서정수는 마루에서 잠에 곯아떨어진 우범곤을 흔들어 깨웠다.
우 순경님. 경찰이 왔십니더. 빨리 일어나이소.
이 말에 벌떡 일어선 우범곤은 자지러지게 놀랐다. 서정수는 그가 심하게 떨고 있는 것을 알았다.
와 그라십니꺼. 우 순경님.
그러나 서정수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범곤은 잽싸게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어서 콰광하고 천지가 진동하는 폭음소리를 들으며 서정수는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깊은 수면 에 빠져들었다. 계속 불발만 되던 우범곤의 수류탄이 마침내 그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이 마을의 마지막 사망자는 전복순씨, 이순두씨, 방위병 서정수씨, 그리고 우범곤이었다.
헐!!!
이거 실제로 있었던 일인가요? 죄송하지만 너무 길어서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요. 세 줄 요약 부탁드릴게요.. ^^
시골에 근무중이던 어떤 경찰관이 총이랑 수류탄 가지고 일곱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사건. 이유는 세상에 대한 원한과 분노. 이로 인해 남녀 노소 할거 없이 몇십명이 죽었음. 대한민국 살인 사건 역대 최다 사상자를 낸 사건이기도 함. 물론 실제 사건.
한 사람이 한번에 가장 많이 한꺼번에 죽인 사건으로 기네스에 실려있었죠 노르웨이 총기난사 사건으로 인해 내려오게 되었지만, 정말 그때 당시만 해도 충격과 공포였죠 전쟁터도 아닌데, 하루만에 50명 넘게 죽인겁니다.
참고로 이 사건은 일본의 그 사건이랑 많이 닮았네요. 고등학생인가 하는 놈이 홧김에 마을 사람 일본도랑 총으로 참살시킨 사건. 살해 동기도 비슷하고 스케일도 비슷하고
서프라이즈에 나왔던 이야기 같은데요?? 맞나??
저게 우경장사건인가요?
경장이 아니라 순경요;;
DevilMakeLie 님이 언급하신 사건은 일본의 '도이 무츠오 사건'입니다. 요코미조 세이지의 '팔묘촌 살인사건', 시마다 소지의 '용와정 살인사건'등의 수많은 추리소설에 영향을 끼친 실제 사건이었죠.. 윗글을 대충 보아하니 우범곤 순경 사건을 소설화한 것 같네요... 도이 무츠오 사건과 우범곤 순경 사건.... 원래 도이 무츠오 사건이 단기간 최다 살인 기록이었는데 우범곤 순경 사건이 갈아치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