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중국 삼국시대에 이각과 곽사의 난이라 알려져 있는 삼보의 난은
수백년 한나라 수도로 기능해온 장안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수많은 백성들이 학살당하거나 굶어죽었고 관중을 탈출한 이들은 비교적 안전한 땅으로 도망쳤다.
도겸이 자사로 다스리고 있던 서주는 그런 땅들 중 하나였다.
황건적의 난이 준동할 무렵에는 서주도 혼란한 땅이었으나 도겸이 황건적을 토벌하고 이후 백성들이 모여들었다는 기록이 있어
이 당시 서주가 상대적으로 통치기강이 서 있던 땅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3,4년 불과 2년을 거치며 서주는 생지옥으로 변한다.
初平四年, 太祖征謙, 攻拔十餘城, 至彭城大戰. 謙兵敗走, 死者萬數, 泗水為之不流. 謙退守郯. 太祖以糧少引軍還.
초평사년, 태조정겸, 공패십여성, 지팽성대전. 겸병패주, 사자만수, 사수위지불류. 겸퇴수담. 태조이양소인군환.
초평 4년(193년), 태조(조조)가 도겸을 정벌해, 10여개 성을 함락시키고, 팽성에 이르러 크게 싸웠다.
도겸의 병사들이 패주하고, 죽은자가 수만이며, 사수는 이로써 흐르지 못했다.
도겸이 퇴각해 담현을 지키니, 태조가 군량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회군했다.
위서 - 도겸전
初平四年, 曹操擊謙, 破彭城傅陽. 謙退保郯, 操攻之不能克, 乃還.
초평사년, 조조격겸, 파팽성부양, 겸퇴보담, 조공지불능극, 내환.
過拔取慮, 雎陵, 夏丘, 皆屠之.
과발취려, 저릉, 하구, 개도지.
凡殺男女數十萬人, 雞犬無餘, 泗水為之不流, 自是五縣城保, 無復行跡. 初三輔遭李傕亂, 百姓流移依謙者皆殲.
범살남녀수십만인, 계견무여, 사수위지불류, 자시오현성보, 무부행적. 초삼보조이각란, 백성유이의겸자개섬.
초평 4년, 조조가 도겸을 공격해, 팽성의 부양현을 함락시키니,
도겸이 퇴각해 담현을 지켰고, 조조는 능히 공격해 이기지 못함을 알고, 돌아왔다.
돌아오며 취려, 저릉, 하구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모두 죽였다.
죽은 남녀의 수가 십만이고, 닭과 개도 보이지 않았으며, 사수는 이로써 흐르지 못했고,
이후 다섯 현의 성곽에는 사람의 행적을 볼 수 없었다.
처음 삼보(장안지역)가 이각의 난을 만나, 백성들이 도겸에게 의지해왔는데 모두 죽었다.
후한서 - 도겸열전
(興平元年) 夏, 使荀彧, 程昱守鄄城, 復征陶謙, 拔五城, 遂略地至東海.
(흥평원년) 하, 사순욱, 정욱수견성, 부징도겸, 발오성, 수략지지동해.
還過郯, 謙將曹豹與劉備屯郯東, 要太祖. 太祖擊破之, 遂攻拔襄賁, 所過多所殘戮.
환과담, 겸장조표여유비둔담동, 요태조. 태조격파지, 수공발양분, 소과다소잔륙.
흥평원년(194년), 여름, 순욱과 정욱에게 견성을 지키게 하고, 다시 도겸을 정벌하니,
다섯개 성을 함락시키고 마침내 동해현에 이르렀다.
돌아오는 중 담현에 이르러, 도겸의 장수 조표와 유비가 담현 동쪽에 주둔하며, 태조(조조)를 노렸다.
태조가 이를 격파하고, 마침내 양분을 쳐서 빼았고, 지나는 여러 곳마다 잔인하게 죽였다.
위서 - 무제기
前討徐州, 威罰實行, 其子弟念父兄之恥, 必人自為守, 無降心, 就能破之, 尚不可有也.
전토서주, 위벌실행, 기자제념부형지치, 필인자위수, 무항심, 취능파지, 상불가유야.
전에 서주를 토벌할 때, 위벌이 실행되어, 그 자제들이 부형의 치욕을 생각하여,
필히 스스로를 지킬 것이고, 항복할 마음이 없어, 능히 격파할 수는 있어도,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위서- 순욱전
後雄傑並起, 中州擾亂, 肅乃命其屬曰 : 中國失綱, 寇賊橫暴, 淮, 泗間非遺種之地 ...
후웅걸병기, 중주요란, 숙내명기속왈 : 중국실강, 구적횡포, 회, 사간비유종지지 ...
후에 영웅호걸들이 나란히 일어서 중주(중원)가 요란하니 노숙이 그 일족에게 명하며 이르길:
중국이 기강을 상실하고 도적들이 횡포하니 회수와 사수 사이(=서주 하비땅)는 자손을 남길만한 땅이 못된다 ... (하략)
오서 - 노숙전
-------------
기록에 따르면 조조는 193년부터 194년 사이 서주를 공격해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살육해
사수는 시체로 강물이 막히고 여러 현에서 사람의 행적은 물론 개와 닭도 찾아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정사를 집필한 진수는 여러 곳에서 서주에서의 행위가 당시에서도 용인될 수준을 벗어나는 것임을 분명히 기록했다.
사수의 물이 흐르지 못했다는 기록이나, 잔륙 등의 표현 등...
조조가 아버지 조숭의 죽음으로 이성을 잃었다 했을지라도 용납받을 수 있는 행위는 아니었다.
이후 서주는 도겸으로부터 서주자사직을 양도받은 유비가 200년 다시 한번 조조에 의해 쫓겨날 때까지
수년에 걸쳐 직접적으로는 조조, 유비, 여포, 멀리는 원소, 원술 등이 얽혀 싸우는 전쟁터가 된다.
수많은 서주의 사람들이 또 한번 난리를 피해 손씨일가가 지배하던 강동이나 유표의 형주로 도망갔다.
이 사건을 마음에 담고 삼국지의 기록들을 보면 의미심장한 부분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신야에서 유비가 탈출할 때 10만에 달하는 백성들이 유비를 따라갔다는 기록이나 손책의 조조가 서주에 해악을 끼쳤다는 발언 등
더욱이 후일 삼국이 정립되고 각국에서 중용된 인재들을 보면 서주출신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굵직한 인물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오나라
장소 - 서주 팽성
노숙 - 서주 임회
제갈근 - 서주 낭야
엄준 - 서주 팽성
보즐 - 서주 임회
여대 - 서주 광릉
촉나라
제갈량 - 서주 낭야
미축 - 서주 동해
연의가 아닌 정사 기준으로 보면 모두 한 국가의 내로라하는 중신이자 개국공신들이다.
이들의 이주가 조조의 서주공격에 의한 것이라는 명확한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모두 전란을 피해 이주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이 시기 즉 이들이 전란을 피해 이주했다고 추정되는 시기인 190년에서 200년(유비의 서주상실, 손책의 죽음) 사이
서주에서 대규모 전란이라고 할 만한 것은 도적떼들보다는 조조와의 전쟁에 의한 것이었다.
설령 조조의 공격이 이주의 직접적 원인은 아닐지라도
이들의 고향인 서주에서 조조가 자행한 행위가 서주 출신들의 심상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서주에 대한 조조의 공격과 학살행위는
유비가 서주를 차지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유비에게 조조와 대적하는 명성을 안져다 주었고
수많은 인구와 인재들을 강동과 형주로 밀어내었다.
그리고 이후 이들은 오와 촉의 기둥이 되어 조조를 대적하는 힘이 되었다.
특히 촉오동맹의 축으로 활동했던 노숙, 제갈량, 제갈근이 모두 서주 출신들이었음은 재미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조가 삼국통일 못한 제일 큰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서주 이야기할껄
사실상 원소가 삽질만 안했어도..
사실 오래 못살아서 통일 못한거지-ㅇ- 조조가 사마의만큼 오래살았으면 통일은 조조가 했겠지
그런데 조조 나이보면 나름 오래산편 아닌가
사마의가 넘사벽으로 오래산거-ㅇ-a
근데 조조랑 사마의랑 죽은 나이보면 그렇게 많이 차이나진 않던데 7살정도 차이였던가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 일으키고 2년뒤에 죽었잖아 모든걸 이뤄놓은 말년에 7년이면 무슨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모르는 시간이지
하긴 역사를 보면 오래사는게 최고의 능력인거 같긴해
저 위인들뿐만 아니라 서주대학살떄문에 민심도 많이 돌아섬 관우가 북상할떄 반란일어나고 별별일 일어난 이유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