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적으면 "도깨비의 전형적인 모습에는 뿔이 없다. 그러나 일부 도깨비는 뿔을 가지고 있었다"
도깨비란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한 귀신이다.
도채비·독각귀(獨脚鬼)·독갑이[狐魅]·허주(虛主)·허체(虛體)·망량(魍魎)·영감(제주도)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삼국유사』 등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어 삼국시대도 이미 도깨비신앙이 존재하였다고 추측된다. 인간을 돕기도 하고 장난을 치거나 해치기도 하지만 살해할 만큼 악독하지 않고, 인간의 꾀에 넘어가 초자연적 힘을 이용당하는 미련함을 보이는 것이 특징적이다.
불도깨비·거인도깨비 등과 같이 눈에 보이는 도깨비와 형체가 없이 사발 깨지는 소리, 말발굽소리, 기왓장 깨지는 소리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도깨비가 있다.
형체가 있는 도깨비는 머리를 산발하고 다닌다든지, 다리가 하나밖에 없어서 껑충껑충 뛰어다닌다든지, 키가 커서 하늘까지 닿고 머리가 구름 위에 솟아 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도깨비는 자연물이나 사람이 쓰던 물건이 변하여 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데, 밤길을 가다가 도깨비가 나타나 심술을 부리기에 칡덩굴로 묶어놓고 다음날 가보았더니 헌 빗자루 하나가 묶여 있었다는 이야기나, 나그네가 밤길을 가다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깨어보니 부지깽이 하나를 안고 누워 있었다는 이야기가 그러한 예화이다.
장계이의 『해동잡록』에 의하면 도깨비는 산과 바다의 음령한 기운이며, 풀·나무·흙·돌의 정기가 변해서 된 것이라 한다. 옛 문헌에 망량은 물도깨비·산도깨비·목석괴를 가리킨 것이고, 양매는 다리가 하나인 도깨비, 이매는 산속의 이상한 기운에서 생긴 도깨비를 가리킨 것이다.
도깨비는 변화무쌍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체가 될 수도 있고, 신통력을 가지고 있어서 초인간적인 괴력을 나타내기도 한다. 도깨비는 한가지 모습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일정한 형태로 묘사할 수가 없다.
『삼국유사』의 비형설화는 도깨비의 초인간적 능력을 잘 나타내어주는 것으로 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도깨비 이야기이다. 신라 진평왕 때 비형은 도깨비의 두목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원사 북쪽 도랑에 큰 다리를 놓아 다리이름을 귀교라고 붙였다는 것이다.
집필 (1996년) 임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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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
용은 용신이나 용왕을 가리킨다. 용신앙의 시원은 인도의 나가(naga)신앙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나가는 독사를 말하는데, 인도에서는 이것을 신성시하여 기원전 400년경부터 비 아리안계 종족 사이에서 신앙되었다. 이 나가가 불교에 받아들여져 용왕이 된 것이다. 한편 중국에서는 상상의 동물인 용이 경이와 신앙의 대상이었고 황제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는데, 용왕신앙은 인도의 나가신앙과 중국의 용신앙이 결합하여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이다.
불교에서 용은 천룡부에 등장하는 천룡팔부중 중의 하나로 비사사와 함께 광목천의 부하이다. 천룡팔부, 팔부중은 원래 인도 고대신화의 신들이었으나 불교에 흡수되어 불교의 신들보다 격이 한층 낮으며 부처의 권속으로 불법수호의 신이 되었다.
옛날 인도 사람들은 비가 내리는 현상을 용이 바닷물을 끌어 올렸다가 인간 세상에 부어 주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중국인도 이런 전설을 받아들였고, 달력에 그려진 용의 숫자로 그 해의 강우량을 표시하기도 했다.
천룡팔부라는 말은 불경에서 나왔으며 『법화경』에는 천룡팔부에 대해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닌 중생이며, 모든 사람들은 용녀가 부처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니라고 함은 모습은 사람과 같으나 실제로는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천룡팔부는 여덟 종류의 신통력이 있는 괴물이며 천(天)과 용(龍)을 우두머리로 한다. 팔부란 천(天), 용(龍), 야차, 건달파,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호라가이다.
용신은 신라시대부터 호법, 호국용으로서 신앙되어 왔고 고려시대에는 농경에 도움을 주고 비를 다스리는 힘을 가진 용왕을 섬기는 관례가 많았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경기도 해룡왕사에서 기우제를 베풀었다는 기록과 화룡, 사룡기우를 행하였다는 기록 등을 통해서 용신신앙이 여전히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중국에서 용은 기린, 봉황, 거북과 더불어 사령이라 불려온 상상적 동물이다. 용은 고대 이집트, 바빌로니아, 인도, 중국 등 문명의 발상지 어디에서나 이미 오래 전부터 상상되어온 동물로서 신화나 전설의 중요한 제재로 등장되어왔으며 민간신앙의 대상으로서도 큰 몫을 차지해왔다.
중국의 문헌인 『광아』 익조에는 용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해놓았다. 용은 인충(鱗蟲, 비늘 달린 것) 중의 우두머리로서 그 모양은 다른 짐승들과 아홉 가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는 낙타와 비슷하고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덜미는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하다고 한다. 또한 각 동물이 가지는 최고의 무기를 모두 갖춘 것으로 상상된 용은 그 조화능력이 무궁무진한 것으로 믿어져왔으며, 특히 물과 깊은 관계를 지닌 수신(水神)으로 신앙 되어왔다.
『관자』 수지편(水地篇)에서는 "용은 물에서 낳으며, 그 색깔은 오색(五色)을 마음대로 변화시키는 조화능력이 있는 신이다. 작아지고자 하면 번데기처럼 작아질 수도 있고, 커지고자 하면 천하를 덮을 만큼 커질 수도 있다. 용은 높이 오르고자 하면 구름 위로 치솟을 수 있고, 아래로 들어가고자 하면 깊은 샘 속으로 잠길 수도 있는 변화무일(變化無日)하고 상하무시(上下無時)한 신이라."라고 설명되기도 하였다. (같은 모습이 없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뜻)
중국민족이 상상해온 이와 같은 용의 모습이나 능력은 그것이 거의 그대로 우리 민족에게 수용되었다.
상상적인 영물이라고 말하는 동양의 용은 비록 동물세계에 실존한 존재가 아니나 동양인의 마음과 정신생활에 5,000년 동안이나 영향을 끼쳤고, 조형적으로 표현된 지도 4,000년이나 되어 문화사적 측면에서 실존물로 느끼게 된다.
용의 모습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있어서는 용의 탄생론보다 화생론(化生論)이 중요시된다.(어떤 동물이 깨우쳐 용으로 거듭난다는 설) 용의 형상에 있어 뱀과 잉어의 요소가 지배적으로 나타나 있으니 이러한 화생론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뱀의 화룡설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본초강목』의 기록과 같이 석척(도마뱀, 도룡뇽)이 용이 된다는 설과 『시경』의 훼사, 훼훼 등의 기록을 중심으로 한 독사뱀의 화룡설이다. 어룡설에 있어서도 잉어의 화룡설과 문어의 화룡설 두 가지가 대립되고 있다.
이러한 실존동물의 화룡설을 떠나서 용을 선행하는 기(具)라는 괴물이 용이 된다는 기룡설(具龍說)도 나타났다. 기의 모습은 도깨비얼굴을 가지고 올챙이같이 생긴 외다리 괴물인데 그것이 자라 기룡이 된다는 설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무기라는 특이한 이름이 있으며 이것은 요의 새끼를 뜻한다.
그래서 훼룡이나 어룡이 다 이무기로 해석되고 그러한 것을 뒷받침할만한 조형물도 풍부하게 남아 있다. 훼는 은나라 때 동기문에 많이 나타나며, 두개의 훼룡 측면도를 합쳐서 하나의 도철문(중국 은나라·주나라 때에 도철이라는 상상 속의 동물 모양을 본떠 종(鐘)이나 솥 따위의 동기(동으로 만든 그릇)에 새긴 무늬)을 형성시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훼룡이 자라서 500년이 지나면 교룡(蛟龍)이 된다 하고, 용의 조형도 이 과정을 따르고 있다.
『대자전』에 교룡은 용의 새끼이며, 모양이 뱀같이 생기고 길이가 열 자나 되며 네 개의 넓고 짧은 발이 있다고 하였다.
하늘을 나는 완성된 용을 응룡(應龍)이라고 하는데, 문헌상에는 흔히 나타나지만 일반적으로는 쓰이지 않는 이름이다. 고대의 유물에는 날개가 달려 있으나 한나라 이후의 것은 불꽃무늬 화염문(화염 무늬)으로 바뀌어 동양 특유의 비룡상을 창작해내었다. 그러나 화염문은 사자, 해태, 기린 등의 영수에도 달았으니 그것은 상징적인 성화문(성스러운 불꽃을 나타낸 무늬)이며 날개 대신 나타낸 것은 아니다.
동양의 용이 하늘에 오르기 위해서는 여의주(如意珠)라는 구슬을 지녀야만 한다. 원래는 척목(尺木)이라는 공작 꼬리무늬같이 생긴 보물로 되어 있었다.
『유양잡조』에 말하기를 용머리에 박산(博山: 바다 가운데 있는 신선이 산다는 집)과 같이 생긴 척목이 있어야 승천할 수 있다고 하였다. 박산이라는 특이한 용의 보물은 보주로 변하고, 불교의 참여로 인하여 여의주로 발전하여 용 몸에서 분리된다.
또, 용의 턱밑에 보주가 감추어졌다는 장자(莊子)의 이야기가 용궁에 가서 여의주를 얻었다는 『태평어람』의 이야기로 발전된다.
동양 고유의 용은 당나라 때에 완성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이래로 광범위하게 그 조형미술이 발달되어 회화부문에 있어서나 조각, 공예부문에 있어서 걸작들이 창작되었다.
용의 코밑에서 양쪽으로 뻗어나간 촉각은 일반 귀면(鬼面: 귀신의 얼굴)과 구별하는 데 있어서 지표가 된다.
뿔이 있는 도깨비 이야기
신라 시대 서라벌의 남산이 바라다 보이는 황천 너머 신원사의 북쪽 시내에는 귀교라 불리는 다리가 있다. 이 다리는 비형랑이 도깨비 무리의 도움을 받아 놓은 것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 비형랑의 아버지는 신라 제25대 임금인 사륜왕이며 어머니는 사량부 백성의 딸이었다. 사륜왕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로, 태자인 동륜이 일찍 죽자 형을 대신하여 왕위에 오른 사람이다. 그는 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재위하다가 조카인 진평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비형랑의 이야기는 사륜이 아직 왕의 자리에 있었을 때로부터 시작한다. 사륜은 비형의 어머니 '복사꽃 아씨' 도화랑의 아름다움을 듣고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이는데, 도화랑은 지아비가 있어 왕의 유혹을 거절하였다.
사륜은 도화랑에게 지아비가 없으면 뜻을 받아들일 것인지 묻고 도화랑을 돌려보낸다. 세울이 흘려 사륜은 폐위되어 죽고 진지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동륜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왕이 죽은 지 2년 만에 도화랑의 지아비 또한 세상을 떴다. 지아비가 죽어 열흘이 지난밤에 사륜왕이 도화랑의 방에 들어와 도화랑은 약속대로 사륜을 받아들인다.
사륜왕의 넋은 이레 동안 그녀의 방에 머무르다 자취를 감추었고 여인이 이로 인하여 사내아이 하나를 낳았으니, 이 아이가 바로 비형이었다. 아비는 귀신이고 어미는 사람인 이 반인반신의 아이가 태어나는 날 온 서라벌이 뒤흔들렸다고 한다.
태자 동륜의 아들이며 사륜왕의 조카인 진평왕이 이 소문을 듣고 비형을 데려다가 궁궐에서 길렀다. 아이는 왕인 아비의 위엄과 기세를 물려받고 어미의 미모를 닮아 아름답고 재주 있는 소년으로 자라났다. 소년 비형은 귀신과 정령·도깨비의 모습을 보고 그들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았다.
보통 사람들은 귀신의 아들이며 그 자신이 갖지 못한 재능과 미모와 배경을 가진 소년을 질시의 눈, 혹은 두려움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비형은 답답함을 달래기 위해 자주 궁궐의 담을 넘었다. 하루는 군사들이 그의 뒤를 밟아서 월성(月城)을 넘고 서라벌 밖 서쪽 끝의 황천까지 이르렀다. 거기서 그들은 비형이 도깨비와 귀신의 무리와 놀이판을 벌인 것을 보았다. 사람이 보기에는 어른어른한 도깨비불이나 살아 움직이는 부지깽이·멍석·버려진 빗자루 몽둥이 같은 것들이며 보기에 흉측하고 기분 나쁜 울음소리나 내는 이물들이었으나 비형은 날마다 이 도깨비들과 함께 어울려 놀다가 새벽 종소리와 닭 우는 소리에 그 무리가 흩어지고 나서 궁궐로 돌아왔다.
진평왕은 비형을 불러 도깨비들과 어울리지 말 것을 당부했다. 왕은 황천의 북쪽에 하룻밤 안에 다리를 놓으면 비형이 그것들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믿고 도깨비들과 어울려도 된다고 한다.
비형이 어울리던 도깨비 무리 가운데 길달이라는 이가 있었다. 술과 고기와 여자를 좋아하고 힘 좋고 놀기 좋아하는 이 도깨비는 비형이 어울리는 무리 가운데서도 가장 친하게 여기는 단짝으로 키는 8척이 넘어가는 듯 몸집이 크고 온 몸에 북실북실 털이 나 있고 검붉은 몸빛에 눈은 무섭게 크고 허벅지에는 창포를 두른 도깨비인데 이마 양쪽에는 솟구쳐 나온 뿔이 있었다.
비형의 말을 들은 길달은 새벽닭이 울기 전에 북쪽 시내에 다리를 놓을 테니 새참을 준비해 달라 하고는 비형이 장만한 메밀묵과 고기와 술을 게걸스럽게 먹고 도깨비들과 신원사 북쪽 시내로 달려가 아침 해가 떠오르기 전에 다리를 완성한다.
왕은 약속대로 비형이 길달의 무리와 어울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평왕은 비형이 도깨비의 힘을 빌어 다리를 놓은 것을 보고, 귀신들 중에 인간의 모습으로 나라의 일을 도울 자가 있는가 묻는다.
비형은 하늘과 땅의 기운을 빌어 길달이 낮에도 사람의 모습으로 나다닐 수 있도록 하고 다음 날 길달과 함께 왕을 알현했다. 왕이 보니, 길달의 모습은 헌헌장부로 사내다운데다 허우대도 좋았다. 벼슬을 주고 몇 가지 일을 보게 하였더니 비형이 자신하는 대로 과연 믿을 만 하였다.
임금을 충심으로 모시고 아비를 효심으로 섬기던 길달은 어느 날 사람의 모습을 버리고 여우의 모습으로 서라벌을 빠져 달아났다. 진평왕이 길달을 잡아들이도록 하여 비형은 다른 도깨비 무리를 풀어 길달을 잡아오게 하였으나 길달의 신력이 뛰어나 다른 무리들은 그를 뒤쫓을 수 없었다. 마침내 비형은 자기 손으로 길달을 잡으러 나서 복숭아나무 가지로 만든 화살을 쏘아 길달의 목숨을 빼앗았다. 그리고 나서 궁궐에서 나온 비형은 길달의 죽음을 애도하며 사람과 이물이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없는 것을 새삼 느껴 데리고 있던 도깨비 무리들이 제 갈 길로 가도록 놓아주었다. 그 뒤로 귀신의 무리들은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겁을 내고 달아났다고 한다.
명부에서 죽은 자의 죄업을 심판하는 열 명의 대왕 중 세 번째 왕인 송제대왕은 명부에서 죽은자가 세 번째 맞이하는 칠일간의 일을 관장하는 관리이다. 송제대왕은 대해(大海)의 동남쪽 아래의 대지옥에 거주하면서 대지옥 안에 별도로 16지옥을 두어 죄의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죄인을 각각의 지옥으로 보내는 일을 맡으며 주로 사람들의 사음(邪淫)(마음이 요사스럽고 음탕함, 오악의 하나로 남의 남자나 여자와 음탕한 짓을 하는 일)의 일을 다스린다.
『시왕찬탄초』에 보면, 송제대왕에게로 나아가는 길에는 관문이 있어 업관이라 부른다. 여기에는 문을 지키는 도깨비가 하나 있는데 그 형상은 머리에 뿔이 열여섯 개 있고 얼굴에는 열두 개의 눈이 있다. 이 눈을 움직일 때 번개같은 빛이 나오고 입에서는 불꽃을 내뿜는다. 도깨비는 눈을 부릅뜨고 크게 성내며 "이 관문에 올 정도의 죄인은 사람을 죽이고 남의 물건을 억지로 빼앗는 부류이다. 이와 같은 류의 죄는 모두 손발로 만드는 것이니 너의 손발을 관세로 내야 한다"고 말하며 죄인의 손발을 잘라낸다.
송제대왕은 죄인이 평생 지은 죄업을 직접 읽어주는데 살아생전 지은 살인, 도둑질, 음란, 나쁜 말 등 중한 죄와 남도 모르는 마음 속에 묻어둔 곳의 죄 등을 털끝만큼도 감추지 않고 소상히 읽어서 들려주면 죄인은 다만 눈물로 흐느껴 운다고 한다.
야차는 인도의 『베다(Veda)』에 나오는 신적 존재이다. 산스크리트어 야크샤(Yaksa)의 음역으로 약차라고도 쓴다. 약차, 열차라고도 하며 능감귀, 첩질귀, 경첩, 용건, 포악 등으로 한역된다. 야차는 본래 놀라게 한다는 뜻인데 거기에 민첩, 용맹, 교활, 비밀 등의 뜻이 보태졌다. 볼 수 없고 초자연적인 힘을 지니고 있어 두려워하게 되는 귀신과 같은 성격을 가졌는데, 공양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재보나 아이를 갖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후에는 귀신의 하나로 여겨졌고, 불교에서는 불교를 지키는 신으로 되어 있다.
『베다』에도 나타나지만 원래 비 아리안적 민간신앙의 신으로, 야크샤는 남신(男神)이고 여성신 야크시니는 지모신(地母神), 수신(樹神)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인도의 신화시대에는 북방 산악지대에 사는 쿠베라(Kubera)의 권속으로서 사람을 잡아먹는 포악한 귀신이었지만, 불교에 들어와서는 8부중의 하나가 되어 나찰 등과 함께 북방 비사문천의 권속이 되었다. 위덕, 포악, 귀인, 사제귀 등으로 번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야차 역시 다른 8부중들처럼 특정한 고유 명사는 아니고, 비사문천의 권속인 귀신을 총칭하는 말이다. 불법 수호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나, 북방의 수호 또는 재보를 지키는 성격도 아울러 갖고 있다.
야차라고 할 때는 보통 악귀라는 의미로 쓰나 불경에서는 야차가 매우 좋은 중생으로 묘사되어 있고, 야차팔대장의 임무는 중생계(중생이 사는 세계, 십계 가운데 불계를 제외한 아홉 세계를 통틀어 이르는 말)를 수호하는 것이라 했다.
형상으로 표현할 때에는 사자, 코끼리, 호랑이, 사슴, 말, 소, 양 등의 형태로 표현하기도 하고 사람으로 표현할 때에는 얼굴을 둘 또는 셋으로 나타내기도 하고 손에는 모두 무기를 들고 있다.
인도에서의 야차상은 불상이 출현하기 이전 마우리아 왕조 때부터 만들어져 현재 탑문의 부조 등에 많은 예가 남아 있다. 상반신은 나체로 가슴과 허리에 띠를 매고 얇은 치마로 하반신을 감싸고 있으며 손은 합장하고 있다. 원래는 인도 민간 신앙의 신이었던 야차가 탑을 보호하는 수호신으로서 적극적으로 불교에 들어왔다고 생각된다.
숭복사지 3층 석탑과 같은 우리나라의 부조 상에서는 보통 양손을 가슴에 대고 새의 부리에 보관을 쓴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통일신라시대의 석굴암 8부중 상에는 머리 위에 불꽃 무늬가 있고, 입에는 염주를 문 모습이다. 또한 선림원지 석탑에서는 머리 위해 물고기를 얹은 모습으로 나온다.
동양문화사에 있어서 어떤 문제이든 간에 불교 이전의 것이냐 불교 이후의 것이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따라서 도깨비문화에 있어서도 불교 이전의 도깨비냐 불교 이후의 도깨비냐는 문제가 중요시된다. 불교 이전의 세계에서 중국은 도깨비를 귀신이라고 했고, 한국은 도깨비라고 불렀고, 일본은 오니라고 불렀다.
가장 전형적인 도깨비로서 뇌공(雷公)은 중국 사람들은 뇌신(雷神)이라고 불렀고, 한국 사람들은 벼락장군이라고 불렀고, 일본사람들은 가미나리사마라고 불렀다. 일본말 표현의 가미(神), 나리(鳴), 사마(님)(かみなりさま[雷様])는 보림, 신울림하는 님이라는 뜻이 된다. 『산해경』에는 용신인면의 괴물상으로 나타나 있지만 결국 삼국이 다 뇌공을 신으로 모셨다는 점은 삼국의 뇌신신앙만 살펴보아도 확실하다. 신으로만 믿고 있던 도깨비가 불교전래의 뒤를 따라서 불교전통의 야차나 나찰같은 흉물로 급변하고 사람을 해치고 잡아먹는 악마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런데 동양전통의 특이한 도깨비신상이 야차나 나찰의 흉측한 모습으로 쓰인 것이다.
도깨비는 음허기로서 원시신앙적인 귀신사상에 의하여 형성된 잡신이지만, 음귀로서의 귀신과는 다르다. 진(晉)나라의 갈홍(葛洪)은 저서 『포박자』에서 "산정(山精) 도깨비는 모양이 어린애와 같고 외발로 뒷걸음질쳐 걸으며 밤을 좋아하고 사람을 해치는데 그 이름을 소(籍)라고 한다."고 기록하였다.
뾰족한 뿔에 커다란 몸집을 가지고 있고 힘이 아주 센 신비한 존재이다. 무엇이든지 이루어지게 하는 신기한 도깨비 방망이와 모습을 안 보이게 하는 도깨비감투를 가지고 있다.
도깨비의 어원은 박은용이 목랑고 - 도깨비의 어원고 -(대구가톨릭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한국전통문화연구 2권, 1986)에서 밝힌(논문을 다운로드 하지 않아서 이 논문인지 확실하지 않음) 두두리에서 변화한 것이란 설과 돗과 가비의 합성어인 돗가비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두두리는 경주 지역의 독특한 민간신앙으로 두두을이라고도 한다.
두두리 신앙은 신라시대부터 존재했으며 『삼국유사』에 전하는 비형랑 설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 비형랑은 신라 25대 진지왕(사륜왕)의 혼령과 도화녀 사이에 태어나 귀신을 부리는 존재였고, 그래서 신라 사람들은 대문에 비형랑에 관한 노래를 붙여 귀신들의 침입을 막았다고 한다. 두두리 신앙은 고려시대로 이어져, 경주 출신들은 다른 지역에서 살더라도 두두리를 신앙했다.
무인집권기의 집정무인의 한사람이었던 이의민은 자신의 집에 신당을 차려놓고 두두리 신의 화상을 모셨으며, 이의민이 패망할 무렵에는 두두리 신이 울면서 이 신당을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고려 고종 18년(1231) 몽골군이 침입했을 때는 두두리 신이 무당을 통해 무기와 말을 제공하면 몽골군을 격퇴해 주겠다고 공언했다고 전한다.
두두리는 목랑(木郞) 또는 목매(木魅)라고도 하는데, 목매는 나무도깨비란 의미이며, 두두리는 두드린다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두두리의 신체(神體)(신을 상징하는 신성한 물체)는 나무방망이 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 나아가 도깨비의 신체가 나무방망이였다는 설화가 전승되는 사실로 미루어, 두두리를 도깨비의 원형으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 또 두두리는 대장장이의 옛날 이름이란 점에 착안하여, 금속신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두두리는 경주 남쪽 10리에 있는 왕가수란 수풀에서 제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왕가수가 지금의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다.
두두리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실은 두두리를 신앙하는 집단이 다리를 만들었다거나 하룻밤 사이에 연못을 메워 영묘사란 저을 지었다는 등, 각종 토목공사에 동원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두두리 신앙 집단이 협업집단으로 공동노동에도 참여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후 두두리 신앙은 쇠퇴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그 흔적을 발견하기 어렵다.-
http://folkency.nfm.go.kr/kr/topic/detail/2024
'목도자'에 나오는 '두두리'는 절구질 할 때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농경사회의 방아작업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도깨비 내용이 삽입된 방이설화나 도깨비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제물이 메밀묵인 것에서 알 수 있다.
'돗가비'설은 '돗+가비'의 합성어로 돗은 불(火)이나 종자(種子)의 의미로 풍요를 상징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단어이고 '아비'는 아버지의 의미로 '장물애비', '처용아비' 등의 통계로 볼 때 성인남자로 이해된다.
이들 용어는 돗+가비>도ㅅ가비>도까비>도깨비 와 돗+가비>도ㅅ가비>도비>도채비의 발전과정을 보여준다. 위의 예로 보면 농경사회를 배경으로 도깨비는 복(福)을 가져다주는 신격임을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의 토착 신격 중에 하나로 전승되어 왔음은 분명하다.
도깨비이야기에서 묘사되고 있는 도깨비의 형체는 대부분이 도깨비불로 상징된다. 일반적인 불빛은 밝은 색인데 도깨비불은 파란 불빛을 지니고 있다고 제보자들은 인식하고 있으며 아무런 불의 색이 없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가 둘이 되기도 하고 둘이 하나가 되고 여러 개로 분리되거나 합쳐지는 등의 변화를 보이면서 도깨비불의 신비성을 간접적으로 강조한다.
도깨비와 직접 대면하는 이야기의 경우 형체는 사람의 모습과 유사하지만 특이한 체형으로 제시되는 경향이 강하다. '키가 팔대장 같은 놈', '커다란 엄두리 총각', '다리 밑에서 패랭이 쓴 놈', '장승만한 놈', '팔대상 같은 놈' 일반적으로 표현되는 도깨비는 남성이며 이들은 총각이나 젊은 계층으로 나타나고 있다.
도깨비이야기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도깨비의 냄새에 대한 것이다. 도깨비는 일반적으로 노린내가 심하게 난다고 하며 키가 일반인에 비해 훨씬 크고 털보인 경우가 많다.
한국의 도깨비는 중국이나 일본의 귀와 공통분모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도깨비의 본래적 존재양상과 달리 도깨비의 왜곡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왜곡의 면모는 일본의 오니와 결부시켜 도깨비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 고대미술에서 도깨비 형상은 각기 다음과 같은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고구려 시대의 안악3호분의 팔각석주 주두에 그려진 귀면은 두 귀가 쫑긋하고 입가에 수염이 털복숭이 모양으로 난 것이 사자 같은 동물형상을 하고 이싿. 이 형상은 서역 계통의 성전에서의 사자형상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잡신을 막는 벽사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귀면와당(귀신 얼굴을 새긴 기와)의 도깨비 형상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귀면와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사용하여 왔는데 그 표현 수법은 시대를 따라 조형양식의 차이가 있다.
도깨비와는 다른 귀면과 다르게 특별히 강조되는 부분이 있으니 이마에 표현된 양쪽 뿔의 표현이다. 용각을 나타낸 것으로 얼굴 전체를 자세히 보면 일반적인 동물의 얼굴이 아니라 최대한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독특한 얼굴을 나타내고 있다.
이 기와는 일반적으로 도깨비기와라고 불리고 있지만 실은 용의 앞 얼굴을 나타낸 것이라는 의견이다. 본래 도깨비 얼굴 모양이 궁궐건축이나 무덤에 장식된 것은 주로 맹수의 얼굴로 표현되었으나 점차 불교 의장으로 변화되면서 용의 얼굴로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점차 시대가 바뀌면서 사람 얼굴에 가까운 도깨비 얼굴이 나타나는데 고려 때의 망와에서는 마치 장승의 얼굴모습 또는 가면의 모양이 특징을 이루고 있어서 그야말로 도깨비의 참모습이라 할 수 있는 형상이 일반적으로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을 미루어 보아 2000년대 가까이에 쓰인 글인듯 하다)
혹부리 영감이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해가 저물어 주위가 캄캄해졌다. 혹부리 영감은 숲 속의 낡은 집 한 채를 발견하고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밤이 점점 깊어지자 혹부리영감님은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흥얼거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머리에 뿔이 달린 험상궂게 생긴 도깨비들이 나타났다.
혹부리영감님의 노래에 맞춰 도깨비들은 흥겹게 춤을 추고는 그 아름다운 노래가 어디서 나오는지 물었다. 무심코 혹부리 영감님이 볼에 달린 혹을 쓰다듬자 도깨비가 영감님 볼에 달린 그 큰 혹이 노래 주머니로군, 하고 금은보화를 줄 터이니 우리에게 팔라 하였다. 그러고는 도깨비들은 방망이를 이리저리 휘두르더니 할아버지의 혹을 뚝 떼었다.
도깨비들이 떠난 후 혹부리영감님이 뺨을 만져보니 정말로 혹이 없어지고 옆에는 금은보화가 가득 담긴 자루가 놓여 있었다. 혹부리영감님이 혹도 떼고 부자가 됐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지자 같은 마을에 사는 욕심쟁이 혹부리영감은 산으로 올라가 도깨비들 무리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노래를 불렀다. 도깨비들은 혹이 노래 주머니라 하는 욕심쟁이 할아버지 볼에 다른 혹을 철썩 붙여주고 매를 때려 돌려보냈다.
귀면문
녹유 귀면와
8세기 통일신라 시대의 유물로 토기 표면에 녹색·청색을 내는 유약(녹유)을 입혀 구운 기왓장이다. 이마에 난 뿔이 특징적이며 질병, 죽음, 재앙 등을 가져오는 사악한 귀신을 막는 벽사의 의미를 가진다.
부여 외리 문양전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외리에 있는 옛 절터에서 출토된, 다양한 문양과 형상을 새긴 후 구워서 만든 백제 때 벽돌이다.
산수문전·산수봉황문전·산수귀문전·연대귀문전·반용문전·봉황문전·와운문전·연화문전으로 8매의 벽돌이다. 정사각형에 가까우며 한 변이 29cm 내외, 두께 4cm로, 네 모서리에는 각기 홈이 파여 있어 각 벽돌을 연결하여 바닥에 깔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이 벽돌은 성격이나 만든 방법이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으며, 일본 오사카에서 출토된 봉황문전 등에 영향을 주었다.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1103430000&pageNo=1_1_1_1
사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7188#
도깨비같은 얼굴이 새겨진 기와를 일본의 영향을 받아 귀면와라 부르기 시작했다고도 하고, 귀신과 도깨비는 다르다고도 한다. 생김이나 쓰임이 용을 묘사한 기와와 닮아 용을 묘사한 것이라고도 한다. 용인지 도깨비인지 정확한 것은 밝혀지지 않았다.
고구려, 백제 때의 귀면와에는 뿔이 묘사되지 않으며 신라 때의 귀면와에는 뿔이 묘사되어 있다. 고려 때에는 다시 뿔을 묘사하지 않게 되어 조선 때는 사람에 가까운 얼굴로 변한다.
백제의 산수귀문전에는 산과 강과 도깨비의 몸이 묘사되어 있다.
도깨비를 피부가 붉고, 머리에 뿔이 돋았으며 허리에는 가죽 치마를 두른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은 일본의 영향이라고 하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본 오니의 모습은 야차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모습이며 또한 그와 비슷한 모습의 도깨비 역시 한국의 민속에 존재한 적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전형적인 일본 오니의 모습으로 도깨비를 묘사하는 것은 사양하되, 뿔이 돋고 치마를 입었다 하여 모두 오니라 하는 것도 자중하는 것이 옳다.
도깨비란 형태가 있고, 없고, 괴기한 일을 하며 사람의 혼을 빼놓는 장난을 치는 것이지 꼭 어떠한 빗자루고, 낡은 패랭이고 하는 정형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조사한 자료 중 비교적 신뢰도가 높은 사이트의 내용을 바탕으로 글을 썼으나, 연구된 시기가 오래되어 현재와 맞지 않거나 개인의 조사 역량의 미비로 오류가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역사 연구에 밝은 제현 여러분의 지적을 달게 받겠다.
그러니까...뿔이 있을수도 있고 없을수도 있다 그건가
네 맞아요 밤에 저 혼자 굴러다니는 절구통, 이유없이 나는 우다닥 소리, 대낮인데 뿌연 안개처럼 어둑한 것, 밤길에 둘러앉아 씨름을 하자 하는 것 모두 도깨비이기 때문에 그중에 뿔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었습니다.
형태가 없는 귀신 같은 거구나 기묘한 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