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 이 글에서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스파이의 아내' '크리피:일가족 연쇄 실종사건' '큐어' '회로' '절규' 다섯 작품의 내용을 직간접적으로 노출합니다.
우선 내가 봤던 일본영화의 대부분은 영화로써 받아들이기 애매하거나 혹은 모자란 작품밖에 없었다. 동아시아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는건 한국이 유일하다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는게 정확하겠다.
그러던 중, 우연히도 '아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소설같은 영화 없나?' 라는 생각이 들어 추리&미스테리물들을 찾아보던 중 발견한 것이
바로 이 영화 '크리피: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
어쩌다가 이게 연상되었던지 여하간 일단 생각이 들면 보고 생각하자는 주의기때문에
이 영화를 감상하게 되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인물들과 관객의 멘탈을 쥐어잡고 졸라대는듯한 카리스마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특히 마지막 머릿속에 스트레스가 폭발 직전에 절묘한 타이밍으로 범인을 총으로 쏴 죽이는 장면에서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더라.
그런데 엔딩에서는 정말 소리질러 '와 씨1발!!!' 외쳤고 일순간 희열이 느껴지더니 오열하는 주인공의 아내를 보여주며
희열은 온 데 간 데 없고 또다시 숨이 턱 막히면서 영화가 끝이난다.
그리고 '일본이 아직 영화를 만들줄 알았다???'
라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되는데, 이 영화를 시작으로 현재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종말 3부작 '큐어(1997)' '회로(2001) '절규(2016)'을 몰아보고
유명하다는 도쿄 소나타를 볼까하다가 갑자기 선회해서 '스파이의 아내'를 보기에 이르렀는데, 이 게시글에서는 이 영화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영화는 만주에서 돌아와 일본 제국의 '생체실험' 즉, 이른바 731부대로 알려진 그 지옥도를 목격하고 돌아와
이것에 대한 일지 그리고 영상필름을 미국으로 유출하려는 '후쿠하라 유사쿠'와
그런 남편의 행동에 위험을 느끼고 정의보다는 둘만의 행복을 원했던 아내 '후쿠하라 사토코
자상함이 국가와 사회로 인해 변질되어 후쿠하라 사토코를 연모했으나 끝내 후쿠하라 부부를 스파이로써 배제하게 되는 군인 '츠모리 타이지'
이 세명의 인물이 3강체제를 이루며 이야기를 진행한다.
여기까지 들어보면 '일본제국의 만행'을 노출한다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그냥그런 스파이 로맨스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도 그럴게 어디서 많이 들어본 구도이기도 하고, 한일관계를 무시하고 보면 어느 소설이나 옛날 무성영화시절에나 볼법한 인물관계이다...
스파이와 아내와 경찰or군인.
영화 내에서도 후쿠하라 부부가 취미로 만든 무성영화가 딱 이 느낌이다.
뻔하고, 쓸데없는 로맨스와 서로 배신하고 절규하고는 끝내 파국의 사랑으로 이어지는 뭐 그런...
실제로 영화 자체도 상당히 옛날 느낌나는 진부한 스타일이다.
스파이물로 받아들이기에 서스펜스도 없고
로맨스물로 받아들이기에 로맨스도 부족하고
무성영화처럼 뭔가 답답하게하는 관객들에게 무언가 단절된 전달을 이어간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더 디테일한 줄거리가 포함되므로, 주의바람.
만주로 여행가는 '후쿠하라 유사쿠'와 그의 회사 직원인 '타케시타 후미오'는 유사쿠의 아내 '사토코'를 뒤로하고 길을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목격한 것은 산처럼 쌓인 검은 시체더미들, 일본군의 인체실험. 전쟁의 폐허...
그곳에서 유사쿠와 후미오는 간신히 살아남았던 일본군 간호사 '코마코'를 데리고 일본으로 귀국한다.
그리고 이어서 유사쿠를 의심하기 시작한 일본군 '츠모리 타이지'
타이지는 그의 아내 사토코를 출두시켜서 얼마전 유사쿠와 후미오가 만주에서 어떤 여자를 데려왔으며, 그녀가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사토코는 자신에게 이 사실을 숨긴 유사쿠를 불신하기 시작한다. 일본 외부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그녀는 이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해석한다.
'아, 남편이 여행을 가더니 외간여자와 놀아났다.'
그리고 이 사실의 확인을 위해 후미오를 찾아가 사실을 털어놓을 것을 요구하는데
후미오는 남편을 의심하는 사토코를 매도하며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못했고 알지도 못해. 그러면서 남편을 의심해?' 라며 소리지른다.
하지만 이미 일본군의 의심을 받던 후미오는 자신이 만주에서 가져온 생체실험일지의 영어 번역본을 사토코에게 맞기며
'남편에게 가져가라. 그를 믿는다면 증명해라.'
라는 식으로 영문 번역된 731부대 실험일지를 유사쿠에게 가져가게한다. 물론 이 때까지도 후미오가 일지를 읽지 못하게 하였기에
사실에 당도하지 못하는 사토코.
그러나 끝내 남편 앞에 봉투안에 밀봉된 일지를 전달하기 직전 도저히 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읽게된다.
결과적으로 유사쿠는 아내에게 만주에서 목겨한 일본의 진실을 알려준다.
멀리서보면 검은 산처럼 보이고, 가까이서 보면 산 곳곳에 손발이 보이며, 모두 검은빛으로 물들었던 광경을.
만주에서 일본군은 페스트균을 이요해 인체실험을 벌였고, 그곳에서 발생한 셀 수 없는 시체가 산처럼 쌓여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사쿠는 그곳에서 봤던 것들을 국제사회에 폭로하겠다고 밝힌다.
이 말에 다소 충격을 받는 사토코였으나.
사토코는 이에 대해
'당신은 매국노가 될 참이냐'
라며 현실을 부정한다. 당장 눈앞에 있는 후쿠하라 부부의 행복이 있는데, 고작 그런것 때문에 조국을 배신하고 파국으로 향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유사쿠는 '나는 이 나라에 충성하지 않는다. 나는 정의에 충성한다' 라며 맞받아친다.
이어서 사토코는 그가 만주에서 촬영한 영상필름을 목격한다.
결국, 일본의 만행을 인정하고 유사쿠를 응원하게 될 것 같았던 이 시퀀스에서 사토코는 사뭇 다른 행동을 하게된다.
일지의 원본을 일본군에게 넘겨 유사쿠와 뜻을 함께하던 후미오를 팔아넘긴것...
일본군은 후미오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그의 손톱과 이빨을 모조리 뽑아버렸다.
그리고 그 내용물을 유사쿠에게 보여주며 사토코의 신고였다고 말하는 '타이지'
그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없었던 타이지는 '이게 마지막 기회다. 조국에 충성하고 살아라'라며 그를 풀어준다.
유사쿠는 집으로 돌아와 자신을 팔아넘긴 사토코를 쏘아붙인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와 뜻을 함께하겠다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오는 사토코...
그런 그녀의 생각은 이랬다.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이것때문에 자신의 행복이 망가지는 것은 싫다.
자신의 행복은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하는것. 그런데, 그것에 후미오는 자신의 자리를 대체하는 걸림돌과 같은 존재였고
그런 후미오를 일본군에 넘겨 유사쿠가 자신과 함께 스파이가 되도록 만든것.
결국 유사쿠는 사토코와 함께할 것을 허락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군의 의심을 피하며 미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함께 움직일 수 없다는 유사쿠.
유사쿠는 사토코와 각각 다른길을 통해 미국으로 가는 계획을 설명한다.
그리고 계획을 실행하게된 날. 사토코는 배에 올라타 유사쿠가 섭외한 외국인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화물선의 화물박스 안에 들어가 미국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어느 순간,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며 일본군이 화물선을 급습한다.
이 일에 더 이상 엮이고싶지 않았던 화물선의 선장은 그녀가 숨은 화물박스를 알려주게 되고
사토코는 끝내 일본군에 의해 체포된다.
그리고 일본군은 사토코를 심문하며, 그녀가 가지고 있던 만주의 영상필름을 틀어보게 되는데
혹시나가 역시나.
사토코가 가지고 있던 필름은 만주의 생체실험을 담은 영상이 아니었다.
유사쿠와 함께 영화놀이를 하며 만든 스파이와 스파이의 아내가 풀어가는 무성영화.
그것의 필름이었다.
진실을 깨달은 사토코는 절규하며 그 상태로 정신을 잃게된다.
유사쿠는 사토코를 신뢰할 수 없었다. 자신의 동료를 팔아넘긴 그녀를 자신의 아내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믿고 함께할 수 있었겠나. 그렇기 때문에 아예 사토코를 역으로 신고해 일본군에게 넘겨버린것.
그리고 영화는 잠시 암막으로 가려지고, 뒤이어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어 감금된채 살아가는 사토코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어서 사토코를 면회왔던 옛 지인과 하는 대화 중 이런말을 남기는데
그녀는 자신의 행동과 그 결과를 통찰하고 있었다.
사토코는 단 한번도 일본의 진실을 제대로 보려한 적이 없다.
영화 내내 사토코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혹은 그래봐야 영상을 통해서나 그것을 목격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집 안에서, 헌병의 취조실에서, 화물박스 안에서
그리고 또한 유사쿠의 품 안에서 그것을 보고 느낄 뿐이며, 직접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오히려 그것들이 자신의 행복을 앗아가는 것이 두려웠으며
유사쿠가 곁에 있어준다는 사실만으로 마치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고
스파이의 아내가 된 그녀는 자신이 출연하여 유사쿠와 함께 만들었던 무성영화처럼
그것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애초에 사토코는 일본의 만행따위 관심도 없었다. 그저 그것을 연기하고
'그런일이 있었구나'라고 전해들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행복 혹은 사랑으로 연결시켜 왜곡시킨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의 행복이 사라진 현재.
자신의 행동들을 냉정하게 그리고 긴 시간동안 곱씹은 끝에
'나는 미치지 않았다. 다만 필시 이 나라에서는 미친것이 맞다'라는 말을 남긴다.
'큐어 (1997)'
'회로(2001)'
'절규(2006)'
구로사와 기요시는 '감금'을 통해 인간을 성찰시킨다.
어느 한 좁은 공간에
어떨 때는 모니터 화면 속에
그리고 또 어떨 때는 창문의 틀 속에 혹은 거울 속에
인간을 가두어두고 진실과 마주하게 만든다.
영화 '스파이의 아내'에서 사토코 역시 마찬가지다.
각각의 화면에서 사토코는 계속해서 갇혀있다.
그것이 장소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곁일 수도있다.
나아가 구로사와 기요시는 사토코를 일본 그 자체에 감금하며 이와 같은 말을 하게 만든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 다만 필시 이 나라에서는 미친것이 맞다.'
'나는 이제서야 진실을 알았다. 내가 한 짓을 알게되었다. 무엇을 왜곡하여 멀리하고 있었는지 깨달았기에 나는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나는 정신병원에 갖혀 이런 나를 비정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있다. 즉, 이 나라에서는 미친것과 마찬가지이다.'
뒤이어 공습으로 인해 정신병원이 무너지고 사토코는 정말로 진실을 목격한다.
그러면서 다시 대사를 읽는다.
'이 나라는 끝내 멸망하겠지. 정말 옳게된 일이로다....'
마지막으로 그런 일본에서 뛰쳐 도망가 바다를 바라보는 사토코의 뒷모습으로 영화가 끝난다.
영화가 왜 이런 뻔한 로맨스 드라마를 선택했던지
왜 진부하고 무성영화처럼 답답한 느낌이 드는지.
마지막 사토코의 성찰을 통해 보는 사람들을 납득시켜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물론, 호불호가 갈릴거라 생각되는 연출과 스토리텔링이지만 어느정도 곱씹어보면 생각보다 괜찮은 경험이 될 수도 있겠다.
대부분의 스토리를 글에서 밝히고 있으나 혹시 보지 못했더라도 관심이 생긴다면 한 번쯤은 봐도 좋을 영화.
일본이 아직 영화를 만들수는 있구나 를 느끼고 싶다면 적당히 추천드립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 '스파이의 아내'를 보고 남긴 후기이며,
필자 마음대로 해석한 부분들이 있으므로 감상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