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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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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기계음이 카를이 마지막 결단을 내렸음을 알렸다. 서향인 창이지만 이미 해가 저물어 가 많이 어두워져 있었으나 순간 오른쪽 멀리, 그러니까 서북쪽 방향에서 환한 빛이 잠시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렇게 맨체스터 도심에 살던 50여만명, 인근 지역까지 포함하면 200만명 이상의 사람들도 함께 사라졌다.
카를은 온 몸에 힘이 빠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손으로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부담감 때문은 아니었다. 어쩌면 배신감 떄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껍데기만 남은 제니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카를의 곁에서 그를 지켜오며 계획을 도와줬던, 아니 도와줬다고 생각했던 이가 프리드리히였으니. 하지만 카를이 쓰러진 더 직접적인 이유는 왼쪽 옆구리에 난 피가 흘러나오는 구멍이었다.
「미안하네. 이건 모두 인류의 퇴보를 막기 위해서라네.」 프리드리히가 카를의 옆구리를 향했던 총을 내리며 말했다.
「으흐흐흐」 카를이 절규인지 웃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인류를 위해서라고?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그렇다면 왜 사출 전에 쏘지 않았지?」
프리드리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천천히 다시 쓰러져있는 카를의 미간을 향하도록 총구를 옮겼다.
「부르죠아 놈들은 항상 거짓말을 하지. 그래, 다시 만난 처음부터 알았어야 했는데… 자네도 부르죠아 출신인 걸 알았으면서도…」
프리드리히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떻게 SIPHILIS에 영향을 받지 않았던 건가? 난 자네가 처음부터 내 뜻에 공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그래서 자네만은 믿었던 거고」
그제서야 프리드리히가 다시 입을 열었다.
「머큐리를 보고도 모르겠나? 자네는 제니를 위해서 앞만 보고 뛰느라 젊었을 때의 총기는 모두 잃어버린 모양이야.」
「으허허허…휅, 퉤」 다시 한 번 카를이 절규와 같은 웃음을 짓다가 갑자기 피가 섞인 가래를 프리드리히의 발치에 뱉어내곤 말을 이었다.
「그래 내가 앞만 보면 뛰는 동안 자네는 내 등에 업혀 있다가 언제 내 발을 걸 지 기회만 보고 있었다는 거군. 모든 영광을 독차지하려고. 인류의 발전을 위해 왔다느니 입에 발린 말을 해가면서… 핵폭탄은 왜 쏘지 말라고 한 거지? 그렇게 해야 내가 발끈해서 마음을 바꾸지 않을 꺼라고 생각한 건가?」
「지금 상황에서 굳이 변명을 해봤자 소용이 있겠냐만은, 그래도 나도 자네를 친구라고 생각하기에 오해를 안고 가도록 하고 싶지는 않으니 얘기하도록 하지. 내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일을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 했다고 한 것도, 핵폭탄을 쏘지 말라고 한 것도 모두 진심이야.」
프리드리히는 카를이 토해낸 피가 구두에 묻지 않도록 옆으로 한걸음 옮긴 후 다시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멍청한 대중들이 자기 원하는대로 행동할 수 있게 나두어서는 인류는 영원히 발전할 수 없어. 아무리 좋은 것, 옳은 것을 알려줘도 언제나 한무리의 멍청이들이 나서서 우리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고 외쳐대지. 그런 멍청한 욕구들은 인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거세해야만 해.」
「그래, 생각해보면 항상 자네는 그렇게 말했지. 인류의 발전, 인류의 번영. 어떨 때는 인류의 퇴보를 막기 위해서. 자네는 사람이 아니라 인류라는 전체 집단만을 사랑해서 그 집단을 위해서 지금까지 왔다는 거지, 그래서 그렇게 말해왔던 거야.」
「맞아. 우리 인간이 종을 이어가고 더 번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지.」
「그런데 그걸 대체 누가 자네한테 명했다는 거지? 자네는 그저 자네가 원하는 걸 했을 뿐이야. 그걸 사명이라느니 인류의 발전이라느니….웃기지도 않는군.」
「신께서 내게 내려준 사명인 거지, 제니 여신께서 말이야.」 프리드리히는 점점 더 차가워지는 눈빛으로 한쪽 입꼬리만을 살짝 잡아당겨 올려 삐뚤어진 웃음을 지으며 숨을 내뱉었다.
「그럴…리가?」 카를은 순간 총상으로 인한 아픔도, 배신에 따른 분노도 모두 잊고 두 눈을 크게 치켜뜨며 물었다.
「크하하하, 자네 말이 맞아. 이미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을 예전부터 제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럴 리가 없지. 자네 반응을 한 번 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렇지만 말이 나왔으니 하는 얘긴데, 자네는 도대체 무슨 명분으로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잔혹한 폭탄을 자국민을 대상으로 터트린 건가? 설마 제니가 시켰다고 하진 않겠지, 내가 없을 때에도 그녀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다네.」
「제니가 나한테 무언가를 말할 필요는 없어. 나는 그녀를 사랑하니까, 내가 그녀를 위해서 해온 거니까.」
「그러니까 자네 말은 제니가 자기를 박제하고, 사람들을 세뇌해서 자기를 믿도록 하고, 자신을 믿는 광신도들을 마음대로 조종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박멸할 무기를 만들도록 하기를 원했다는 거로군」
「함부로 말하지 마! 나는 그저 그녀가 영원히 여신으로 남길 바랐을 뿐이라고!! 그리고…네놈이… 네놈도 다 같이 한 일이잖아!」
「그래 맞아, 나도 같이 했지. 왜냐하면, 그게 인류를 위한 일이니까..」
「뭐라고?」
「자네와 내가 다시 만났던 1858년, 그 무렵 대영제국의 영아사망율이 얼마였는지 알고 있나? 무려 14%였다네. 일곱 명의 아이가 태어나면 한 명은 아직 엄마 젖을 떼기도 전에 죽었다는 거지. 지금은 어떤지 아나? 사실 정확한 수치는 나도 몰라. 이미 1%도 되지 않는 미미한 수치가 되어 버렸으니. 또, 1800년대 중반의 평균 수명은 48세에 불과했지. 하지만 이제 자네와 내 나이가 몇살이지? 심지어 우리처럼 AIDS를 받지 않은 보통의 인류도 이미 사고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80세 이전에 죽는 자는 흔치 않다네. 분명 그 동안 인류는 엄청나게 발전해왔다네.」 프리드리히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이제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말 한마디 하기도 힘들어하는 카를을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는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겠지. 내가 한 것은 껍데기뿐인 한 사람을, 떠나고 싶어하는 한 사람을 억지로 이곳에 잡아놓고, 각각의 사람들이 가진 욕망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고 그걸 이용해서 제멋대로 이용한 것뿐이라고.」
「맞아 사실이야, 하지만 자네의 경우와는 달리 내 입장에선 그건 전혀 모순이 아니야. 예전에, 자네가 이 모든 일을 시작하기 전에 사람들은 나를 보고 정이 없다고들 했지, 사랑을 모른다고도 하고. 하지만 그런 게 아니야. 사실은 나도 진정으로 사랑을 하고 있다네, 그 대상이 자네처럼 한 인간이 아니라 인류 전체일 뿐. 인류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한 인간의 욕망을 희생하는 건 그저 너무 길어져 내 몸을 다치게 하기 전에 손톱을 잘라내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그렇게 손톱을 잘라내서 몸에 상처가 나지도 않게 하고 손톱에 낀 때나 세균들 때문에 병이 나지도 않도록 한다면 그건 바람직한 일 아니겠는가?」
카를은 이제 더 이상은 정신을 유지하기도 힘든 몸으로 거의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매우… 바람직하지. 만약에, 자기가… 바로 그 깎여나가는 손톱만, 아니라면 말이야…」
프리드리히는 카를이 더 이상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앉아있을 수조차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총을 집어넣고 카를에게 다가와 쪼그려 앉아 이야기했다.
「그래, 그런 관점도 있을 수 있지. 그 말이 자네 입에서 나왔다는 게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쯧- 하고 한번 혀를 찬 뒤, 프리드리히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이제 마무리해야 할 시간인 것 같군. 자네와 나는 여러 모로 다른 생각에서 이 일을 시작했지만 어찌됐건 가는 길은 같았어. 그리고 자네 덕에 내가 쉽게 그 길을 갈 수 있었고. 그 점을 존중해서 일을 이렇게 마무리하기로 했지.
자네는 공식적으로 죽는 거야. 여신님의 뜻을 멋대로 왜곡해서 사람들을 학살하였기에 여신님에게 버려지고 타락한 자가 되어 새롭게 대리인으로 정해진 나한테 처단을 당한 거지. 하지만, 실제로 죽지는 않을 꺼야. 자네는 여기서 발걸음을 멈추더라도 인류는 계속 나아가야만 하네, SIPHILIS는 계속 돌아가야만 한다고. 자네가 의식을 잃으면 자네의 뇌만 이 통 속으로 옮기고 전극을 붙여 계속 제니의 꿈을 꾸게 할꺼야. 이거 자네한테도 이익인 거 아닌가?」
프리드리히는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열심히 꿈을 꾸는 게 좋을 꺼야, 그래야 제니도 언제까지나 인류에게 여신으로 남아 있을테니. 그게 자네가 해오던 일하고도 맞고.
정말 모든 일을 끝마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나?」
카를은 크게 웃음소리를 내며 웃으려 했으나 계속해서 각혈을 하느라 이제는 제대로 웃을 수도 없었다. 카를이 꿈꾸던 것을 이루는 데까지는 이제 딱 한 걸음 남았고, 가증스럽기는 하나 자신이 더 이상 갈 수 없는 그 남은 한걸음을 프리드리히가 대신 걸어주겠다고 하기에 이제 미련이 남지는 않았다. 그래도 프리드리히에 대한 배신감, 증오, 분노의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기에 비꼬며 말했다.
「꺼져! 유언이란 살아서 자기 할 일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한 얼간이들이나 남기는 거야!」
마지막 마디까지 뱉어낸 후 모든 힘이 다한 카를은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눈꺼풀을 들어올릴 힘조차 없이 천천히 숨을 쉬었다. 이런 게 주마등이라는 건지, 카를의 머릿속으로 지난 백여년의 세월이 빠르게 흘러 지나갔다. 그러다 문득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걸 깨달은 카를은 감겨져가던 눈을 번쩍 뜨고 프리드리히를 노려보면서 이야기했다.
「제니는? 어떻게…」
프리드리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카를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서서히 어두워져가는 시야 속에서 프리드리히의 싸늘한 웃음뿐이었다.(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