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hip of the line -II- 에서 인용함
작은 상선이나 군함들은 틸러(수직 레버) 하나로 충분했지만
즉 요렇게 수직핸들을 썻다는 것
거대한 군함은 오래전에 그것을 능가했다
조타기는 큰 배를 조종하기에 충분한 지랫대를 주지 않았고
그러한 배에서 조타수는 몇 개의 갑판 아래에 파뭍혀서 돛의 다듬어진 부분이나
다른 참조점을 볼 수 없었다 조타수들은 16세기 말에 처음 기록된
휩스태프에서 찾았다.
이것은 단지 틸러 끝의 위를 향한 연장선에 불과했고 약간의 지랫대가 허용되었고
스티어링 위치를 한 덱만큼 높였다.
휩스태프는 나무막대로 틸러가 중앙에 있을 때에 수직으로 세워지고
상부갑판(또는 3층 갑판의 중간갑판)의 고정장치 주위에서 회전했다.
그것의 하단 끝은 틸러 끝에있는 금속막대에 경첩이 달려 있었고,
중심점 위의 끝은 조타수가 잡고 좌우로 밀어서 키를 움직였다
허나 이는 완전히 만족스러운 해결책은 아니었는데
조타수는 2층 갑판에서 창문으로 밖을 내다볼 수 있지만,
3층 갑판의 창문에서는 위쪽 갑판과 4층 갑판 모두 아래에 있었고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채찍꾼이 주는 여분도 작았고(3/4이 그것의 총 길이였다)
틸러를 사용하던 시기 좌우의 움직임은 크게 제한되었다.
1700년대 초에는 배의 측면의 블록을 통해 틸러 끝부분에서 밧줄을 끌고 올라가 갑판에 있는 군함의 윈들러스
-윈들러스로 끌고 올라가면서 상황이 개선되었다.
조타수가 사층 갑판까지 올라갈 수 있고, 방향타에도 훨씬 더 많은 힘을 가할 수 있으며
틸러때보다 훨씬 더 좌우로 멀리 이동할 수 있었다.
-승리의 이중바퀴는 오역으로
빅토리 호의 이중 조타륜을 말함-
다음 개선점인 고전적인 배의 스티어링 휠(조타륜)으로 가는 짧은 단계로
윈들러스는 선체를 가로지르는것이 아닌 앞뒤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손잡이 대신 바퀴살(spokes)과 테두리(rim)를 달아야 했으며
이는 1710년경 대부분의 배에서 달성된 것으로 보인다.
기묘하게도 조타륜이나 바퀴를 맞추라는 해군의 명령은 없지만 이 형태의 증거는 1700년 이후
조타륜의 사용이 빠르게 퍼져나갔음을 사사한다.
초기의 타륜은 미즌 마스트 뒤에 장착되어 있어서 경운기 끝 바로 위에 위치할 수 있었다.
-4번째 돛대가 미즌마스트-
이는 바퀴에 좌우로 이동하는 것을 조절할 수 있는 구부러진 목재 조각인 스윕이 아직 장착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사실 스윕은 바퀴의 연대를 몇년 앞당겼다.
계약서에는 1690년대에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지만 1703년 이전에 타륜이 장착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중요한 점은 타륜의 도입이나 스윕이 아니다.
틸러를 온전히 사용할 수 있는 로프와 블록의 발견으로 틸러가 선체 내에서 가능한 한 좌우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초기의 바퀴는 밧줄을 구입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되기 전에 휩스태프보다 더 많은 움직임을 허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조금 더 정교한 블록채계를 암시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1771년 해군 명령으로 작성된 최초의 증거는 틸러 로프를 팽팽하게 유지하기 위해 '폴라드씨의 노와과 노젓기'의 적합성을 요구한 것이다.
아마도 그 때가 되어서야 방향타의 힘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종장치는 분명히 어떤 배에도 매우 중요했으며 구성요소중 하나가 손상될 경우 몇가지 비상절차를 사용할 수 있었다.
틸러가 하부갑판위에 장착되었지만, 키 헤드는 실제로 상부갑판을 통과하여
정상적인 틸러를 사용할 수 없게 되면 다른 틸러를 갑판에 장착할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이 쇠사슬은 방향타를 제어하기 위해 당겨질 수 있었다. 1822년 이후
철제 틸러가 둥근 선미를 가진 선박에 장착되었는데, 이는 세로운 건조방법에 의해 방향타 머리가 노출된 채로 남겨졌기 때문이다.
조타륜은 18세기 초에나 등장하므로
대항해시대가 끝나갈 시기니까 어지간한 해적물은 결국....
캐리비안의 해적도 낯선조류로 검은수염과 영국왕으로 시대적 배경이 짐작 가능한데
그 때에 조타륜을 쓴 것은..... 뭐 이건 블록버스터니까 넘어가자
번역이 잘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네
조타수를 quater master라고도 부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