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 명작이다, 누군 망작이다, 군국주의 비판이다, 자연주의 이야기다, 애니메이션 제작 인생에 대한 이야기다..
하야오 감독 작품들이 안 그런적이 있나 싶긴 하다만 이 작품도 해석하면 깊이가 엄청난 편
일단 단순히 난해해서 해석 방향이 갈리는게 아니다.
마히토(미야자키 하야오의 꿈을 꾸는 소년의 모습)
미야자키 하야오를 순수한 꿈을 꾸는 소년으로 보면
반전주의자, 자연주의, 강인한 여성에 대한 같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꿈에 관련된 이야기로 해석 가능
왜가리 남자 - 의지할 수 있는 친구
펠리컨 - 자연주의
앵무새 - 군국주의
키리코, 히미 - 강인한 여성(어머니)
이세계 - 아픔을 치유하고 현실을 바꾸어나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
창조자(미야자키 하야오의 창작자로서의 모습)
반대로 미야자키 하야오를 철없는 꿈을 꾸는 노년의 거장으로 보면
애니메이션 제작, 애니메이터, 오타쿠들에 대한 같은 세상에 불만이 많은 창작자로서의 모습과 관련된 이야기로 해석 가능
왜가리 남자 - 의지할 수 있는 친구(동료)
펠리컨 - 애니메이터
앵무새 - 오타쿠들
키리코, 히미 - 동료 애니메이터
이세계 - 현실의 죄악과 아픔을 꿈으로 보상받고 순수한 꿈의 세계를 만드려했지만 실패한 곳(지브리)
결국 미야자키 하야오를 어떤 인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해석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게 정교하게 구성해서 그런것이다.
즉 마지막 저 둘의 대화는
소년 하야오와 거장 하야오의 자아정체성의 충돌이고
소년으로 해석의 방향을 잡으면
꿈이 붕괴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친구를 만들어 문 밖(꿈 너머)의 붕괴해가는 현실을 바꾸어 나갈 것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거장으로 해석의 방향을 잡으면
지브리를 포함한 자신의 작품은 아름다운 세계를 만드는데 실패했다고 자조 하지만 아이들(소년 소녀)은 문 밖(꿈 너머)에 아직 기회가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느 쪽이건 간에 자신의 작품에 주저앉지 말고 문 밖(꿈 너머)으로 나가기를 메시지로 표현했다.
그래서 결말에 문 닫고 나가는 장면으로 끝나는 것이다..
이러니 이 사람 말이 다르고
저 사람 말이 다르고
평가도 갈리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관객 : 자연주의? 반전주의? 오타쿠? 애니메이터? 세계? 노인? 소년?
관객 입장에서는 한개의 아이템에서 여러 개로 은유가 나오니까 일관적인 해석이 힘들 수밖에 없다
그나마 위 해석도 쉽게 얘기하려고 축약한거인데다 다르게 해석하는 방향도 많다.
그러니 이해한 관객들도 평가고 해석이고 다 다른 방식인게 하야오 감독 의도 맞다..
(근데 평론가들도 덩달아 해석하기 힘들어한다..)
* 그어살이 미화 영화가 아닌 이유(스포)
철이 없어도 어지간히 없어야지 눈치도 없잔어
개인적으로 상업 영화, 애니에서 이런 작가주의적인게 강한 작품은 별로더라 너무 불친절하고 이걸 이해 못하는건 너가 무지몽매한 탓이다 해버리는 악성빠들도 있어서(작성자가 이런 악성빠라는거 아님)
이모는 왜화낸거임
일부로 이모가 이세계 간 이유를 말 안해서 해석의 여지를 많이 만든건데, 가장 쉬운 추측은 뱃속의 아이를 이세계에 바쳐 후계자로 만들고 마히토를 지키려는 의도였다고 생각할 수 있고, 다른 해석은 이모가 죽어가는 모습을 표현 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이세계 = 꿈의 공간으로 볼 수도 있지만 죽음의 공간(지옥)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탑 입구에 적힌 문구는 단테의 신곡(지옥편)에 나오는 '나는 신의 힘으로 만들어졌다'이고 마히토는 잃어버린 어머니(친어머니, 이모 둘 다 같은 개념을 공유합니다)를 되찾으러 지하(지옥)로 내려갑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어머니로서 지옥에서 마히토를 만났으니 이런 곳에서 뭘하는거냐고 화낼만한 상황이기도 합니다. 또 이세계에서 이모를 만나는 공간은 무덤(생명의 끝)이 있는 출산실(생명의 시작)입니다. 모순적인 공간입니다. 이모가 화내는 행동은 결국 현실(생명의 공간)에서 처럼 마히토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에서 나오는 모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