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한스 블루멘베르크
역자 - 임홍배
출판사 - 도서출판 길
쪽수 - 348쪽
가격 - 28,000원 (정가)
은유학Metaphorologie의 창시자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유고
“궁극적인 진리는 벌거벗은 채로 다니지 않는다.”
은유는 개념의 ‘체계적 결정結晶, Kristallisation을 위한 배양액’이다
개념의 장식물이 아니라 질적 구성 요소로서의 은유
은유(Metapher)란 “사물의 상태나 움직임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수사법”이라고 정의된다. 사물의 본뜻을 숨기고 비유만을 나타내는 것으로, 명확한 인식의 결과가 아닌 문학적이고 장식적이며 은근한 표현으로 쓰여왔다. 따라서 통상 은유는 ‘신화에서 로고스로’-즉, 허구적 상상에서 이성적 인식으로-나아가는 사유의 도정에서 명확한 인식에 도달하지 못한 사유의 ‘잔여물’로 간주되어 왔다. 다시 말해 엄밀한 개념적 인식에 미치지 못하는 불완전한 사고의 산물로 여겨졌던 것이다.
진리가 종교의 절대적 소유물에서 벗어난 근대 이후, 진리는 명석판명함이라는 판단 기준을 통과한 개념의 몫으로 넘겨졌다. 그러나 과연 그 개념(들)은 진리의 자격을 부여받기에 충분한가?
20세기 독일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 하나인 한스 블루멘베르크(Hans Blumenberg, 1920~1996)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태에 대한 사유의 전개를 탐색했다. 개념적 사고의 한계를 간파하고 그 한계가 은유에 의해 허물어질 수 있음을 주장한 그는, 은유가 개념의 장식물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의 지평을 확장하고 사유의 자양분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결과 개념사를 중심으로 한 기존 사상사의 통설을 전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은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절대적 은유’ 가운데 하나인 ‘벌거벗은 진리’라는 은유를 니체, 프로이트, 카프카, 칸트, 쇼펜하우어, 키르케고어 등의 25개의 사유에서 읽어낸 유고로, 블루멘베르크가 창시한 ‘은유학’(Metaphorologie)의 진면목을 확인케 한다.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새로운 의미 지평을 열어주는 은유의 기능
블루멘베르크는 하이데거의 존재철학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철학과 함께 20세기 독일 철학을 삼분한 ‘은유학’의 창시자이다. 1980년 우수학술논문에 수여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상을 수상했고, 현재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다. 국내에서는 뒤늦게 이제 막 소개되는 참이어서 2021년에 『난파선과 구경꾼』(새물결, 2021)이 출간되어 주목을 받은 바 있고, 그 외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들』(고대 출판부, 2011)이 나와 있다.
그가 탐구한 분야는 매우 다양하고 방대한데, 그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대표작 『은유학을 위한 패러다임들』(Paradigmen zu einer Metaphorologie, 이하 『패러다임들』)은 은유가 사유의 자양분으로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를 규명한다. 종래의 철학이 개념으로 파악된 인간 사유만을 다루었다면, 그의 은유 이론은 개념 형성 이전의 사고 과정뿐만 아니라 나아가 개념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한계 영역까지도 표현하는 은유의 적극적 기능을 조명하고 있다. 블루멘베르크가 은유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끊임없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새로운 의미 지평을 열어주며, 개념을 통한 이론적 탐구의 기반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은유 이론은 프로이트의 꿈 해석이 ‘의식’보다 광대한 ‘무의식’의 영역을 개척한 것에 비견될 수 있다. 블루멘베르크의 저술 중 상당수는 『패러다임들』에서 제시한 주제들을 확장 심화한 것이다.
은유학은 블루멘베르크의 계몽주의 연구 프로젝트에 속한다. 처음에는 3권으로 계획했다가 나중에 5권으로 바뀌었는데, 그중 세 권을 생전에 출간할 수 있었다.(『난파선과 구경꾼』(1979), 『세계의 해독 가능성』(1981), 『동굴의 출구들』(1989)) 이 세 책은 블루멘베르크가 자신의 “개념화할 수 없는 것들의 이론”의 계획하에 집필한 것들로, 인문학계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전통적인 통설을 뒤집고, 세계를 해석하는 데 있어 은유가 개념에 필적할 만하다고 장려했기 때문이다.
“블루멘베르크의 은유 이론은 개념으로 설명되거나 입증될 수 없지만 인간이 맞닥뜨리는 근본적인 문제들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준다. 그럼에도 종래의 철학적 탐구에서 은유가 간과된 이유는 은유를 단순히 수사적 기법으로 간주하거나 명확한 개념적 인식에 이르지 못한 불완전한 인식과 추측의 표현이라고 폄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유 중에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없지만 ‘철학적 언어의 근본 바탕’이 되는 은유도 존재하는데, 블루멘베르크는 이런 은유를 ‘절대적 은유’(absolute Metapher)라 일컫는다.” (「옮긴이 해제」 중에서)
명석판명함이라는 척도로 확보된 순수한 개념만을 진리로 보고 다른 모든 것은 선입견이나 성급한 예단으로 배척하는 근대의 진리관은 개념과 인식의 역사성을 배제하고 결국 진리를 ‘검증 가능성’으로 축소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반면
“은유는 단지 개념의 장식물이 아니라 질적 구성 요소라는 것을 ‘개념의 체계적 결정을 위한 배양액’이라는 화학적 은유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은유의 ‘배양액’은 그러한 화학작용을 통해 소진되거나 고갈되지 않는다. 개념의 결정체가 마모되어 기능을 다하면 그것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기능까지도 수행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유는 개념의 형성을 위한 의미 지평과 관찰 방식 자체의 변화까지도 수반하기 때문에 개념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역사성을 띤다.” (「옮긴이 해제」 중에서)
이 책 『벌거벗은 진리』는 그가 계획했던 프로젝트의 다섯 번째 책으로, 그의 사후에 출간되었다.(2019)
궁극적인 진리는 벌거벗은 채로 다니지 않는다
절대적 은유는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고 원칙적으로 최종적인 답변이 불가능한 문제에 답하려는 시도이다. “절대적 은유는 얼핏 생각하면 소박하지만 원칙적으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답한다. 그런 질문은 우리가 제기하는 게 아니라 우리 존재의 근저에서 이미 주어져 있는 질문이기 때문에 중요하다.”(『패러다임들』)
블루멘베르크가 제시하는 절대적 은유의 패러다임은 매우 다양하고 범위가 넓다. 절대적 은유로서 가장 오래되고 지속적인 탐구의 대상은 ‘진리의 은유’이다. 개념이나 명제를 사용해 진리에 관해 최종적이고 직접적으로 진술하기란 불가능하다. 보편타당한 진리가 과연 ‘적나라하게’-문자 그대로 ‘그 자체’로-표현되고 인식될 수 있을까? 인식 주체의 경험과 이해 지평, 특정한 이론 체계와 방법, 시간과 공간의 역사적 제약을 초극한 불변의 보편타당성이 과연 성립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 앞에서 ‘적나라한/벌거벗은 진리’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인식 목표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은유를 통한 간접적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필연적인 귀결이다. 『패러다임들』에서도 전체 10개 장 중에 7개의 장을 진리의 은유에 할애하고 있다. 진리 내지 진실 그 자체를 가리키는 은유인 ‘벌거벗은 진리’의 은유는 진리의 은폐성과 개방성에 대한 다양하고 상반되는 태도들을 입체적으로 살펴보기에 적절한 척도가 된다.
무엇보다 ‘벌거벗은 진리’의 은유는 은유 자체의 핵심적 특성인 다양한 ‘함의’(Implikation)의 양상을 가장 잘 보여준다. 우선 우리말 ‘진리’로 옮긴 Wahrheit의 함의가 매우 폭넓다. 보편타당한 ‘진리’에서부터 세부적인 ‘사실’에 이르기까지 의미의 스펙트럼이 끝없이 확장될 수 있다. 불변의 보편타당성, ‘적나라한/벌거벗은 진리’에 비해, ‘적나라한 사실’의 확정은 더 수월해 보이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성을 인식하는 것도 용이해 보인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니체의 생각을 빌리면 우리가 ‘사실’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도 어디까지나 ‘해석’일 뿐이다. ‘사실’에 대한 이해는 사실이 의미를 획득하는 맥락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Wahrheit를 체험적 특성이 강한 ‘진실’로 이해할 경우 진실을 베일로 감추는 것과 그 베일을 벗기는 것 사이의 경계는 매우 유동적이고 모호하다.
진리는 자명하게 주어져 있지 않고 베일에 가려져 있다
견딜 수 없는 진리, 추한 진리는 어떻게 표현되는가
이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진리/진실을 추구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벌거벗은 진리/진실을 추구하는 것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어 왔다. 진리/진실은 응당 규명되고 폭로되고 벌거벗겨져야 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것은 진실이 자명하게 주어져 있지 않고 대개는 베일에 가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에 옷을 입히거나 그것을 베일로 가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실을 은폐하고 호도하려는 기만적 의도를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진실을 베일로 가려야 할 이유는 의외로 많아 보인다. ‘옷’이나 ‘베일’은 벌거벗은 상태의 치부와 수치심을 감추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진리가 매우 추하다고 말했다. 이 철학자가 보기에 진리는 명백히 견딜 수 없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벌거벗은 진리에 관해서도 역시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생각을 했다. … 벌거벗은 진리는 아름답지 않고 치장을 하지도 않는다. 이 진리가 나타나는 곳에서 그것은 당황스러움을 자아낸다. 구차한 변명은 당장 들통이 난다. 그리고 벌거벗은 진리의 가차 없음에 직면해서는 가장 정교한 정당화조차 궁색한 변명으로 보이지 않는가? 더욱이, 면전에 대고 거리낌 없이 말해서는, 바로 거기에 벌거벗은 진리의 요점이 있기 때문에, 상처를 주게 마련이다.” (프랑크푸르트 룬트샤우)
진리는 모욕과 좌절 속에서 드러나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표현되어야 한다. 블루멘베르크가 니체를 다룬 챕터에서 분석했듯 절망에 빠지더라도 말이다. 니체는 이미 다음과 같이 냉정하게 파악한 바 있다. “진리는 추악하다. 진리 때문에 파멸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예술을 가지고 있다.” “벌거벗은 진리는 절망을 가져”오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환상을 통해 베일에 싸인” 것이 특히 중요해진다. 진리를 위장시키는 새로운 기능은 예술에 귀속되었다. 벌거벗은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폭로뿐 아니라 위장도 생각하게 하고, 계시뿐 아니라 덮음도 생각하게 하며, 따라서 깨달음도 생각하게 한다.
25개의 스케치에 담긴 벌거벗은 진리의 다양한 함의들
진리의 은유가 거쳐온 역사적 의미 변화에 관한 탐구
성경의 비유는 진리와 복음을 표현하기 위한 불가결한 수단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성경의 진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남김없이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성경적 은유는 성경의 성스러운 의미를 고갈시키지 않고 계시의 무궁무진한 원천을 간직하기 위한 보호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은유는 그 자체로는 표현할 수도 인식할 수도 없는 진리를 가리키는 절대적 은유가 된다.
다른 한편 ‘벌거벗은 진리’를 옹호하는 입장도 다양하다. 루소는 인간 사회가 ‘복잡한 위장 체계’로 발전하면서 불평등을 은폐한 것을 비판하면서 ‘자연상태’의 벌거벗은 진리를 옹호한다. 일찍이 하느님 앞에서 벌거벗고자 했던 아우구스티누스에겐 순수한 신앙고백의 신조였던 ‘벌거벗은 진실’이 루소에 이르러 사회적 불평등을 혁파하려는 사회 변혁 이념의 슬로건이 된다. 동일한 은유가 전혀 다른 맥락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다.
벌거벗은 진리의 은유가 가장 큰 힘을 얻는 것은 근대 과학을 통해서다. 계몽 정신의 정수라 할 근대 과학은 사물을 감추는 모든 베일을 걷어내고 사물을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 인식하고자 했다. 말하자면 ‘벌거벗은 진리’를 추구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래 특히 실증주의가 표방하는 진리의 객관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대두하면서 ‘벌거벗은 진리’의 문제는 인간 행위와 사고의 근본적 동기를 해명하려는 시도로 옮아가는데, 여기서 니체와 프로이트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근대 과학에 대한 니체의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우리는 우리가 훤히 꿰뚫어 보는 모든 것을 경멸한다.”(이 책 72쪽)라는 것이다. 사물의 베일을 벗긴 적나라한 모습이 허상이거나 또 다른 베일로 가려져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적나라한 모습도 또 다른 외피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그 모습이 궁극의 실체라고 여기는 자기기만을 통해서만 인식의 욕구는 충족되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든 ‘적나라한 진리’는 우리를 실망시킨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특히 꿈 해석은 진실을 베일로 가리는 작업과 다시 그 베일을 벗겨내는 작업이 교차하는 전형적인 표본이라 할 수 있다. 괴테상 수상 소감문에서 프로이트는 자신의 작업이 무의식을 가리는 모든 베일을 찢어버렸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으며, 아직도 얼마나 많은 베일을 찢어야 할지 모르겠노라고 말했다. 그것은 단순한 겸손의 말이 아니다. 무의식을 감추는 베일은 한 꺼풀 벗겨낸다고 해서 바로 ‘벌거벗은 진리’를 드러내는 얄팍한 것이 아니라 수없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와 프로이트는 ‘벌거벗은 진리/진실’의 요청을 가장 충실히 이행한 사상가라 할 수 있다. 니체는 종래의 진리 탐구가 추구한 모든 가치의 근본적인 전복을 시도했고,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는 전인미답의 신촌■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블루멘베르크가 니체와 프로이트를 『벌거벗은 진리』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루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와 프로이트는 진실을 은폐하는 가식을 철저히 해부하면서도 벌거벗은 진리에의 요구 자체에 내재하는 또 다른 함정도 경계했다. (「옮긴이 해제」 중에서)
또한 카프카의 문학세계는 허위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그 어떤 보호막도 없이 자신의 맨몸을 드러내고, 그럼으로써 이 세계의 불안을 온몸으로 겪을 때만 그 불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카프카는 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벌거벗은 사람 같다.” 그렇게 벌거벗은 몸으로 감지되는 카프카의 세계는 기성의 관념과 인식 체계로는 좀처럼 해명되지 않는 “절대적 형상 세계”로서, 그것은 블루멘베르크가 말하는 절대적 은유에 상응한다. 그렇게 구현되는 카프카 문학의 ‘진실성’은 “기만이 횡행하는 세상에 저항하는 실존의 형식이다.”(이 책 132쪽)
이렇듯 은유의 의미와 기능은 다양한 텍스트 속에서 그리고 역사적 맥락 속에서 부침하는데, 이 궤적에 관한 메타적 성찰이 은유학의 탐구 주제가 된다.
25개의 스케치로 이루어진 이 유고작에 담긴 블루멘베르크의 언급은 여러 면에서 단편적인 것, 아포리즘 또는 분석으로 남아 있으며, 벌거벗은 진리의 역사를 역사적으로 관통하는 검토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블루멘베르크는 역사적 연속적인 일관성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고, 오히려 역사적 노선의 지속적인 단절에 대해 확신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진리란 은유와 언어의 사용 이면에 놓여 있으며, 이데올로기로부터 가장 멀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생각일 것이다. 블루멘베르크는 계시된 진리, 절대적 진리의 지배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 | 옮긴이 해제 | 블루멘베르크의 은유 이론과 ‘벌거벗은 진리’의 패러다임
한스 블루멘베르크 연보
1 니체
2 프로이트
3 아도르노 이후
4 반전反轉
5 카프카
6 진실의 벌거벗음 그리고 양의 탈을 쓴 늑대
7 피에르 벨
8 파스칼과 초기 계몽주의
9 베르나르 드 퐁트넬
10 진리는 위안이 되지 못한다
11 루소
12 독일 계몽주의
13 베살리우스
14 샤틀레 부인
15 악타이온
16 레싱
17 경험주의
18 알레고리의 후기 형식
19 테오도어 폰타네
20 카를 아우구스트 파른하겐 폰 엔제
21 쇼펜하우어
22 칸트
23 계몽주의
24 키르케고르
25 리히텐베르크
참고 문헌
인명 찾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