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하면 뭐가 먼저 생각나시나요?
아마도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이겠죠?
근데 5.18 민주화 운동 사.유적지 하면 떠오르는곳이 몇군데나 되나요?
아마도 구도청 상무지구 5.18공원 운정동 5.18 민주화 묘지 용봉동 전남대학교 정도 겠죠?
하지만 광주에 5.18 민주화 운동 사.유적지는 알려진것 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다 돌려면 한 1박 2일은 잡고 오셔야 할정도죠
5.18 민주화 운동 사적지를 통틀어 광주 오월길이라고 하는데 한번 오월길을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5월길
사적지 1호 전남대학교(용봉동)
1980년 5월 17일 밤 전남대에 진주한 계엄군은 도서관 등에서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불법 구금하였다. 계엄군은 5월 18일 아침 학교에 등교하거나 5‧17비상계엄확대조치에 항의하기 위해 정문앞에 모인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강제해산시켰다. 이에 학생들이 항의하면서 항쟁의 불씨가 되었다
사적지 2호 광주역 광장(중흥동)
무자비한 살육 앞에 나도 광주시민!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민과 계엄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 5월 20일 밤 광주역에 주둔해 있던 계엄군이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발포,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고 21일 아침 주검 2구가 발견되었다. 전남도청 앞 광장으로 주검을 옮겨오자 이 소식을 들은 시민 수십 만 명이 민주화운동에 적극 동참하면서 항쟁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사적지 3호 시외 버스 공용 터미널 옛터(농성동)
계엄군에 의해 피로 얼룩지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외버스공용터미널이 있던 곳으로 전남 일원을 잇는 교통 중심지였다. 5월 19일 오후 계엄군의 과잉진압을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는데, 계엄군은 대합실과 지하도에까지 난입하여 시민들에게 총검을 휘둘러 이곳은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소식은 시외버스를 통해 시외로 나간 사람들에 의해 곳곳에 전파되어 항쟁이 전남 전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적지 4호 금남로 5.18 기록관 (금남로)
항쟁·민중·민주의 거리
1980년 5월 18일 가톨릭센터 앞에서 최초의 학생 연좌시위가 있었고 5월 19일부터는 수많은 시민들이 투쟁의 대열에 동참했다. 5월 20일 저녁에는 택시와 버스를 중심으로 100여대의 각종 차량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이 거리를 가득 메웠고,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에도 수십 만의 시민들이 매일 모여, 계엄군에 맞서 민주화를 촉구했던 5·18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거리다.
사적지 5-1호 구 도청 (금남로 광산동)
가자, 도청으로! 최후의 결사항전지
5·18민주화운동 당시 항쟁 본부가 있던 곳이다. 시민·학생수습위원회 활동이 있었고, 시민공동체 활동의 중심이었다. 또한 이곳은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무력진압에 맞서 싸운 시민군의 최후 결사항전지로 마지막 항전에서 수많은 시민군들이 산화하였다
사적지 5-2호 민주화 광장 (금남로 광산동)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5월 18일 이전 3일 동안 학생과 시민들은 이곳에 모여 대규모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열고 시국선언문을 발표해 군사통치 종식과 민주화를 촉구하였다. 특히 5·18 사적지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된 분수대와 30여년 만에 복원돼 제자리로 돌아온 5·18시계탑으로 인해 5·18민주광장은 시민들의 피끓는 함성이 울려퍼지던 옛 전남도청 앞 현장의 본래 모습을 어느 정도 되찾게 되었다. 매일 오후 5시 18분에는 5·18시계탑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 차임벨이 울려 퍼진다.
사적지 5-3호 구 상무관 (금남로)
계엄군의 총칼에 희생된 주검이 있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잔인한 학살과 집단 발포로 희생된 이들의 시신을 모셔놓고 통곡하며 분노했던 곳이다. 항쟁기간 동안 시민들은 상무관 앞 빈소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지어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민주화투쟁 의지를 더욱 불태웠다. 계엄군이 점령한 뒤 5월 29일, 상무관에 모셔져 있던 시신은 청소차에 실려 망월동 시립묘지로 옮겨져 묻혔다
사적지 5-4호 광주 YMCA (금남로)
60년대 이후 반독재·반유신운동의 거점지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항쟁지도부가 자주 옥내 집회를 열었던 곳. 5월 26일에는 계엄군의 무력진압을 막기 위해 자위적 수단으로 시민군에게 총기훈련을 실시했으며, 항쟁이후에도 광주항쟁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수많은 집회가 열렸다. 이곳은 60년대 이후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반독재·반유신운동의 거점이었다
사적지 6호 광주 YWCA 옛터 (금남로)
항쟁의 산실
광주 여성운동의 산실이자 1970년대 이후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이끌어냈던 장소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민주인사들은 이곳에서 시민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대책회의를 수시로 가졌고, 투사회보(민주시민회보)를 제작하고 시민궐기대회를 준비했다. 이곳은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을 공략하던 계엄군의 주요 공격목표가 되어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사적지 7호 광주 MBC 옛터 (궁동)
왜곡보도, 시민이 심판하다!
계엄 하에서 군부의 검열을 받던 언론은 항쟁 열기는 물론 계엄군의 과잉진압 행위마저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시민들이 진상을 사실대로 보도하라고 거세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5월 20일 밤 광주MBC와 서석동 광주세무서 건물에 불길이 타올랐다. 다음날 새벽에는 광주역 앞 광주KBS 건물이 불탔다. 국민의 세금으로 유지되는 계엄군의 과잉 진압과 언론의 왜곡에 대한 항의와 응징의 표현이었다
사적지 8호 녹두서점 옛터 (장동)
항쟁대책 논의장소
유신체제 말기 암울한 시대에 민주 청년 학생들이 모여 열띤 시국 토론을 벌이던 사랑방이었던 이곳은, 1980년 5월 17일 밤 전국에서 많은 민주인사들이 예비 검속되자 청년 학생들이 민주화를 촉구하는 궐기대회를 준비하고 대책을 논의한 항쟁의 산실이다.
사적지 9호 전남대병원 (학동)
5·18민주화운동의 야전병원
부상당한 시민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하고 돌본 5‧18민주화운동의 야전병원이었다. 당시 긴박했던 상황에서도 복도까지 밀려든 부상자, 치명상을 입고 신음하는 중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의사와 간호사들의 혼신의 노력이 있었고, 자발적인 시민 헌혈 행렬이 이어졌다
사적지 10호 광주 기독교 병원 (양림동)
5·18부상자를 헌신적으로 치료하다
이 병원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부상당한 시민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한 민주의료현장이다. 병원에 있던 의료진은 일시에 밀려든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침식을 잊었으며 수혈할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시민들이 헌혈에 동참했다. 당시 긴박한 상황에서 광주시민은 남녀노소 구분없이 하나가 되어 서로 돕고 위로하였다.
사적지 11호 구 광주 적십자 병원 (불로동)
뜨거운 시민정신이 빛나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부상당한 시민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하고 돌본 곳이다. 당시 긴박했던 상황에서도 의료진은 부상자들의 생명을 돌보고 살리기 위해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활동을 펼쳤다. 피가 부족하다는 것이 알려지자 시민뿐만 아니라 인근 유흥업소 종업원들까지 헌혈에 참여, 뜨거운 시민 정신을 발휘했다. 항쟁 후에도 계속 부상자들을 따뜻하게 치료해 주는 등 적십자정신을 빛낸 곳이다
사적지 12호 조선대학교 (서석동)
계엄군의 주둔과 시민들의 고난
조선대학교 학생들은 전남대학교 학생들과 더불어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으며, 항쟁기간에 시민군 지도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80년 5월 19일부터 21일까지 시내 곳곳에서 계엄군에게 마구 끌려온 수많은 시민들과 학생들이 체육관에 수용되어 잔혹한 폭행과 고문을 당한 현장이다
사적지 13호 배고픈다리 일대 (소태동)
시민군의 모범적인 지역방위 현장
여기 있던 배고픈다리(현 홍림교) 일대는 5·18민주화운동이 치열하던 1980년 5월 21일, 시민군이 시내 중심가에서 계엄군을 물리친 후 모범적으로 지역 방위를 했던 곳이다. 조선대학교 뒷산을 통해 퇴각한 계엄군이 다시 시내로 진출할 것에 대비, 그날 해질 무렵부터 이 지역 예비군 등 젊은이들이 주축이 되어 시민군을 편성하고, 이 다리를 중심으로 방어망을 구축하여 물샐틈없는 경계를 폈다.
사적지 14호 주남마을 양민 학살지 (월남동)
누구도 광주를 빠져 나가지 못해!
1980년 5월 21일 광주 시내에서 퇴각하여 주남마을에 주둔한 계엄군들이 광주-화순간 도로를 지나가는 미니버스, 대형버스, 앰블런스 등에 무차별 공격을 자행한 곳이다. 5월 23일에는 승객 18명을 실은 미니버스에 무차별 사격을 가해 탑승자 가운데 단 3명만이 살아남았다. 계엄군은 이들 3명 중 부상당한 청년 2명을 주남마을 뒷산으로 끌고 가 살해하였다. 그 후 이곳에 묻혀 있던 시신은 항쟁이 끝난 뒤 주민의 신고로 발굴되었다.
※ 주남마을에 가보면 집집 마다 사슴이나 동물 같은 벽화가 있습니다 그 벽화를 보고 대부분 아름답다 이쁘다 이럴겁니다. 하지만 그 벽화의 뜻을 알고 가면 가슴속부터 엄청난 눈물이 나올겁니다 왜냐구요? 그 동물 벽화는 바로 5.18 민주화 운동 희생자들의 초상벽화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왜 관광을 답사로 만들어요...
답사도 관광인데
주 들어간 도시는 왠만해선 유적 많은 편 아니던가?
다른곳은 유적 광주는 사적
광주오면 오리탕이랑 떡갈비 묵고 가면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