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칼부림에 나온 방패차)
방패차는 작은 수레에 아군 병사들을 화살이나 투창, 총알등으로부터 보호할 가림막(방패판)을 달아 놓은 공성 겸 야전 병기이다. 본디 중화권이 원조이고 그에 따라 명나라 역시도 활용한 병기이나 금나라 멸망 이후의 명대 여진세력들과 그 여진세력들의 통일국가인 후금-청나라 역시도 이용한 병기이다.
여기서 필자는 중화권을 중심으로 방패차를 서술치 않고 여진 세력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후금, 청의 방패차(sejen kalka, 또는 kalka)1 를 서술하고자 한다.
방패차는 별로 특이할 것은 없는 병기이며 어찌보면 지나치게 평범한 병기였다. 그러나 그만큼 제조하기도 쉬운 병기였고, 덕택에 세력이 작은 여진 세력들도 방패차를 다수 제조, 보유할 수 있었다. 세력의 규모가 매우 작았던 1584년 음력 6월 시점의 누르하치 역시도 방패차들을 다수 보유하여 공성전에 가용할 정도로 방패차는 그 생산성이 무척 좋았다.2
뭣보다 방패차는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공성 겸 야전 병기로서 어떤 유형의 전투에서건 제 역할을 톡톡히 하는, 범용성 뛰어난 병기였다. 공성병기로서는 성을 공격하는 아군을 엄호하는 역할을 했고 야전병기로서는 방패차를 부술 능력이 없는 적들을 압박하는데에 쓰이기도 했으며 유사시에는 아군 진형을 보호하는 간이 방어구조물 역할을 하기도 했다.
위 그림에서 보이듯이 방패차는 궁병, 총병들과 짝을 이루어 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방패차에 궁병과 총병을 태운 뒤 그들로 하여금 방패차의 가림막을 엄폐물 삼아 적을 향해 활과 총을 쏘게끔 한 것이다. 이런 운용방식은 무척이나 효율적이어서, 공성전과 야전에서 모두 큰 효과를 발휘했다. 방패차를 가용한 적을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안그래도 방패차의 가림막 때문에 방패차에 올라탄 병사들을 제거하기 쉽지 않은데 방패차에 올라탄 적 궁병과 총병이 시시때때로 활과 총을 자신들을 향해 쏘아대니 여간 까다로운 상대가 아니었다.
관통력 높은 병기, 예컨대 총과 같은 것을 쓰면 방패차의 가림막을 관통하여 방패차에 올라탄 병사 혹은 방패차를 엄폐물로 삼은 병사를 살상할 수도 있었으나, 방패차를 운용하는 군대도 그러한 상황을 상정하여 대비를 했다. 그들은 방패차의 가림막 방호력을 상승시키기 위해 가죽이나 이불등을 가림막에 덮어 씌웠다.3 그로 인해 방패차는 더 뛰어난 방호력을 지니게 되었고 왠만한 보병투사병기로는 견제하기가 힘들어졌다.
방패차는 각각의 여진 세력들이 아주 약했을 때부터 그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그 효율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라서, 건주여진의 누르하치에 의해 통일국가 '후금'이 등장한 뒤에도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당장 대명선전포고 이후 이루어진 후금의 요동 정복 과정에서 방패차는 거의 모든 전역에 사용되었다. 그것은 공성전과 야전을 가리지 않았다.
특히 심양 전투 혹은 요양 전투와 같이 공성전과 야전이 함께 벌어진 대전역에서 방패차는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심양 전투의 경우 공성전이 워낙에 빨리 끝난 지라 공성전 진행 기록서 방패차가 언급될 건덕지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 후금군이 심양에 대한 공성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방패차를 가용한 기록을 통해 공성전에 방패차가 대량으로 동원되었을 것이라는 유추를 할 수 있다.
또한 심양 공성 직후에 벌어진, 후금군과 심양에 지원을 온 명군간의 대회전에서 후금군의 방패차는 진방병이 지휘하는 사천 출신의 강병들을 압박하는데에 쓰였다.4 이 때 진방병이 지휘하는 명군은 악착같이 저항했으나 결국 방패차를 앞세운 압박전에 의해 궤멸될 수 밖에 없었다.
(심양 전투 기록삽화. 만주실록 中. 좌측이 후금군이며 우측이 명군이다. 방패차를 사용하는 것이 눈에 띈다.)
심양 전투 이후 며칠여만에 진행된 요양 전투의 경우에도 야전과 공성에서 모두 방패차가 쓰였다. 해당 전투에서 후금군은 방패차를 이용해 아군의 공성선행작업을 엄호하기도 하고 성밖에 포진한 명군을 상대로 방패차를 앞세워 진격하여 그들을 섬멸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 전투 말고도 많은 전투에서 방패차가 쓰였다. 유명한 영원성 전투에서도 역시 방패차가 쓰였다. 영원성 전투의 경우 누르하치가 철저히 준비한 회심의 공격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방패차 역시 대량으로 동원되었다.
누르하치 시기에만 방패차가 요긴하게 쓰인 것은 아니었다. 홍타이지 시기에도 물론 방패차는 지속적으로 쓰였다. 영원-금주 전투와 이후 이어진 중원침공들, 대릉하 공방전, 병자호란에도 역시 방패차가 동원되었다. 방패차는 후금과 청의 전쟁에서 빠지지 않는 요소였다.
물론 방패차는 명군 역시도 사용했기 때문에, 후금군에게는 본인들이 방패차를 썼을 때에 누린 이점을 그대로 적용받는 명군과 맞붙는 경우가 왕왕 존재했다. 사르후 전역의 부속 전투들인 와후무(와훈 오모) 전투와 피여푼 전투가 대표적 사례였다.
두 전투에서 후금군은 방패차와 방패들로 보호받고 있던 명군을 상대로 공격전을 펼쳐 결국 그들을 섬멸하는데에 성공했다. 와후무 전투는 누르하치의 친정 아래에서 적은 피해로 성공적으로 완수되었으나, 피여푼 전투는 명군의 저항이 완강하여 후금군이 제법 고전을 하였다. 그러나 결국 피여푼 전투에서도 후금군은 명군을 섬멸하는데에 성공했다.5
결론부에서 정리하자면, 방패차는 그 생산성과 범용성이 매우 뛰어난 병기로서 명나라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기술이 낙후된 여진 세력 역시도 폭넓게 이용한 병기였다. 여진이 하나로 결집된 뒤(후금), 후금이 명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개시하고서도 방패차는 후금군에 의해 꾸준히 가용되었으며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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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각주
1.칼카는 방패를 의미하기도 하나 방패차를 의미하기도 한다.
2.현행전례 1584년 음력 6월, 만주실록 동년 동월
3.이민환의 건주문견록에도 이와 같은 방법이 언급된다.
4.만문노당 천명 6년 3월, 청태조실록 및 만주실록 동년 동월. 명희종실록 천계 원년 3월. 단, 청측기록서 명군의 각각의 부대 지휘관은 후금측의 착오로 인해 뒤섞여 있다.
5.만문노당, 청태조실록 천명 4년 음력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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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올린거 각주번호가 잘못되서 재업
허미 정성글 개추' 다루는 내용도 개취라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