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를 지겹도록 보낸 결과 수정이와의 만남이 성사됐다. 그리고 지금 나는 학교 옥상에서 수정이를 기다리고 있다.
"아! 수정아. 이쪽이야. 이쪽"
수정이는 쭈뼛거리면서도 천천히 내 곁으로 다가왔다. 굉장히 오랜만에 대면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녀를 껴안기 위해 다가가자 그녀가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거부의사를 밝혔다.
"앗, 아아.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하지. 헤헤."
"···늦은 시간이라도 껴안거나 하지 않아. 세미야."
"흠흠, 수정아 기억나니. 3개월 전에 이곳에서 내가 너한테 고백했던 거."
수정이가 뭐라고 하건 준비해 둔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내가 그랬지? 우리가 사귀기 시작하면 우릴 몰래 좋아하던 얘들이 질투와 시기에 눈이 멀어 온갖 악담과 날조된 소문을 뿌리고 다닐지도 모른다고."
"···정말 그런 말을 했는지는 차치하고, 너를 좋아하던 애가 있긴 한 걸까?"
"우린 지금 시험받고 있어. 우리의 사랑이 진실한지! 지금이야말로 어느 누구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우리의 사랑을 보여 줄 때라는 것을!"
연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듯 기세 좋게 소리친 것까지는 좋았으나, 반응이 영 시원치 않다. 정적이 길어지자 안절부절못한 나는 수정이의 눈치를 봤지만, 그녀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어 표정이 제데로 보이지 않았다.
"흡, 하아아. 정말 세미는 재미있어. 응, 재밌다."
긴 한숨을 내쉬며 하는 말은 내가 재미있다는 얘기였다.
수정이가 기분이 풀린 것이라 여긴 나는 최대한 밝게 웃으며 말했다.
"헤헤, 수정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라고. 난 수정이의 연인이니까!"
"그래, 넌 내 연인이지."
수정이의 눈가가 촉촉하다. 웃음을 너무 참은 나머지 눈물이 찔끔 나온 것일까. 그녀는 긴 파마머리를 한 번 쓸어넘기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직시했다.
"근데 나한테 왜 그랬어?"
"응? 뭐가 말이야?"
이해할 수 없는 질문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다음 질문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야구권 말이야. 왜 하자고 한 거야?"
"그, 그야. 그런 건 연인들 사이에선 으레 있는 일이잖아. 서로 더 돈독해지고···기분도 좋아지고."
"그래? 근데 난 왜 기분이 좋지 않았을까?"
"왜, 왜 그래?! 수정아. 너도 좋아서 같이 한 거잖아!!"
"하! 좋아서 같이 했다? 아니! 난 네가 하고 싶다고 하도 졸라대서 어쩔 수 없이 해 줬던 거라고! 세미는 정말 내 생각해준 적 있어?"
갑자기 불 같이 화내는 수정이를 보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하는 그녀에게 화가 치밀어올랐다.
"뭐야. 지금! 나 혼자 생떼를 부렸다는 거야?! 결국 받아준 건 너였잖아!"
"말이 안 통하네. 됐어. 더 이상 입씨름하기 싫어. 어차피 너랑은 헤어지기로 했으니까."
"또, 또 그 소리! 뭔 일만 나면 맨날 헤어지자, 헤어지자 노래를 부르고. 나도 더 이상은 못 참아. 그래 헤어져! 헤어지자고!"
보통 때와는 다르게 나도 강하게 나갔다. 수정이도 내 반응은 예상하지 못한 것인지 아무 말없이 날 응시하고 있다.
내가 너무 성급하게 굴었나? 이대로 정말 헤어지면 어쩌지?!
속내는 갈등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알았어. 헤어지자."
뭔가 후련해 보이는 수정이가 그 말만 남기고 뒤돌아섰다.
점점 멀어져가는 수정이를 보자 가슴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어, 어라? 정말 이대로 헤어지는 거야? 헤어지자는 단 한 마디에 이대로 끝난다고?'
어버버하는 사이에 수정이가 옥상 출입문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정신 차리고 뛰어가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수, 수정아 잠깐만!"
수정이를 끌어당겼다. 고개를 돌린 수정이의 두 눈동자에는 금방이라도 넘칠 듯한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내가 멍 때리고 있자, 수정이가 뒤돌아 눈을 훔쳤다.
"뭐야. 왜 잡아?"
"그, 그게 그러니까···"
여, 여기서 어떻게 하면 되지. 싹싹 빌까? 엎드릴까? 역시 사과해야되나?
온갖 생각에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자, 수정이가 그동안 모든 것에 대해 힐난했다.
"거 봐! 넌 항상 제멋대로야. 날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네가 하고 싶은 것들을 이루지. 그게 안 되면 항상 '강제로' 해결해왔잖아."
"···뭐?"
나는 여태껏 수정이와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생각해 왔다. 그리고 같이 해 왔다. 하지만 절대 강제로 한 적은 없었다. 그런 나인데 내가 '강제적으로' 시켰다고?!
너무 열 받으면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 법이다.
내가 아무 말없이 끙끙 앓고 있자, 수정이가 눈치를 챘다.
"그거 적반하장이야. 세미야. 다음 연인한테는 그러지 않는 게 좋아. 파탄 나기 싫으면···."
수정이는 내 손을 뿌리쳤다.
나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러나 동시에 한 가지 욕망이 들끓었다. 말 한 마디도 지고 싶지 않다는 욕망. 나도 사이다 한 방 날리고 싶다는 욕망!
나는 끝없는 욕망을 분출했다.
"소문!!"
수정이는 갑작스러운 외침에 뒤돌아봤다. 그곳에는 세미가 한쪽 팔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나는 모든 눈물을 닦아낸 뒤 방방 뛰며 소리쳤다. 애써 밝게.
"좋아. 헤어져! 근데 말이야. 너무 한 거 아니냐고! 차이는 건 난데, 욕까지 내가 먹는 건 너무하잖아. 적어도 소문은 해결해 달라고!"
"···뭐?"
"그렇잖아. 강제로 한 적 없지. 사실은 같이 즐겼지. 거기다 아무리 전 연인이랑 나쁘게 헤어졌다고 해서 전 연인이 자기 때문에 욕을 먹고 있으면 잠자리가 뒤숭숭해지잖아! 그러니까! 나 대신 소문에 대해 해명 좀 해 줘. 내가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네가 말하면 소문도 금세 잠잠해질 거 아냐."
"···맞네. 맞는 말 하네."
"그치?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그래. 맞아. 처맞는 말! 이 ㅆㅂ년아!!!"
"케엑!!!"
수정이의 풀스윙에 얻어맞은 나는 고대로 쓰러져 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연속 공격은 없었다는 점이랄까.
분을 못 참고 씩씩 거리던 수정이는 자기 가슴에 손을 얹고 속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세미. 너한테 정말, 저어어어엉말 실망했어. 넌 내가 지금도 뭣 땜에 헤어지자고 하는지도 모르지. 너랑 헤어지는 이유는 2가지야. 바로 마음와 육체야. 너랑 나랑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맞지 않다고!"
"으으으, 마, 마음? 유, 육체?"
내가 고통으로 골골대며 정신을 못 차리고 있자, 수정이는 뒤돌아 계단을 내려가며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도 내게는 잘 들렸다.
"정말 실망했어. 세미. 더 이상 너랑 엮이는 일은 없을 거야."
그것은 정말 비참하고 아득한 종말 같은 선언이었다.
더 이상 계단 밟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때 누군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 내 울음소리다. 최대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고개를 무릎에 파묻고 훌쩍이고 있다.
뭐든 게 밉고, 무서워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을 때. 누군게 내게 말을 걸어왔다.
"넌 조상이 탈레반이니. 애가 무슨 자폭만 해대니."
"···느금마."
"이 미친 패드립 ↗같네."
눈앞에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배미였다.
"더 이상 나랑 엮이는 건 사양이라면서···그건 거짓말이었어?"
배미는 천천히 내 곁으로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거짓말 아니야. 너랑 엮이지 않을 거라고."
"근데 왜 여기 있어?"
"회초리 두께라도 알고 있어야 덜 아프다고. 네가 한 방에 쓰러지지 않게 회초리 두께 알려주려고 왔지."
"모르겠어."
"···세미야. 힘들어도 버텨야 돼."
"응. 그건 알아."
"그것만이 아니야. 오늘, 지금, 이 계단을 내려가면 기다리고 있는 건 지옥뿐이야. 그러니깐 힘들어도, 죽을 듯이 괴로워도 버텨야 돼. 절대 자살하지 마."
등골이 오싹해졌다. 배미가 주의를 줄 정도라면 아래에선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약간 자조적인 발언에 배미가 내 양쪽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정 힘들면 내가 데리고 도망쳐줄까?"
"배미야······ 나랑 엮이기 싫은 거 아니었어?"
"거참! 끈질기네."
배미는 괘씸죄로 내 볼을 양쪽으로 잡아당겼다.
5
나는 배미의 손을 잡고 교실 문 앞에 멈춰 섰다. 교실 안은 왠지 모르게 떠들썩하다.
"세미야. 오늘 하루동안은 누구하고도 대화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아니 그냥 아예 자버려. 아니면 조퇴를 하던가. 괜히 말 잘못했다간 진짜 지옥행이야."
"응 알았어. 주의할게.“
조심스럽게 교실 문을 열었다.
반의 친구들이 나를 발견하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떠들썩하던 분위기에서 초상집 마냥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나는 그런 불편한 공간에 억지로 발검음을 옮기며 내 자리에 착석했다. 배미도 자기 자리에 가서 앉았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무거운 분위기의 교실도 조금씩 활기를 되찾아갔다.
그때였다.
아무도 나에게 다가오지 않던 와중에 나보다 더 늦게 들어온 친구, 영희가 소리치며 다가왔다.
"야! 주세미. 넌 도대체 어떻게 된 애니?!"
이목이 집중되자 당황한 나는 실수로 대답하고 말았다.
"뭐, 뭐가 말이야?"
"저 바보!"
배미는 어느 정도 상황을 예견한 듯 영희가 접근할 때부터 미리 내 옆에 와 있었다. 그녀는 영희를 막아서며 말했다.
"야. 고영희.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네 자리로 돌아가지."
"뭐야. 주배미. 네 언니라고 감싸는 거냐. 네 언니가 지금 뭔 짓을 한지 몰라서 그래?"
"그래 봤자 딱히 대단한 일도 아니잖아? 너무 호들갑 떠는 거 아냐?"
"미쳤어. 미쳤어. 동생년이 한 술 더 뜨잖아!"
점점 격해지는 말싸움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체 그저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지금,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내가 한 짓이 정말 성추행일까? 수정이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피해를 호소한 걸까? 그럼 나는 가해자가 되는 거고 경찰서로 끌려가게 되는 건가?
수정이가 나에게 가지고 있는 불만의 정체는 뭘까? 아니지. 그건 이미 들었지.
온갖 잡생각에 빠져 있던 중, 영희가 배미를 밀쳐 내고 내 목덜미를 낚아챘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든 나는 그대로 영희와 눈을 맞췄다. 진지한 기색이 다분한 그녀가 내게 말했다.
"야. 너 진짜 변태냐?"
나는 시선을 아래로 피했다. 지금이라도 책상과 하나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아니야!"
그때 나 대신 소리친 배미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세미는 그저 조금 모자란 애새끼일 뿐이라고. 본성은 착하다니깐. 내가 보증할게."
"본성은 착해. 이 지랄. 야 주세미 넌 네 친구 마음도 헤아릴 줄 모르냐. 왜 그렇게 막살아?!"
맞는 말이다. 나는 수정이의 마음을 모른다. 수정이도 내가 자기 마음을 모른다고 화냈었지. 그리고 또 뭐가 안 맞는다고 했더라?
"주세미. 근데 너 정말 수정이랑 사귀기는 했던 거냐? 너 혼자 사귄다고 착각한 거 아니야?"
나는 영희의 막말에 발끈해 소리쳤다.
"아니야. 난 정말 수정이랑 사귀었었다고! 이건 진실이야."
"그래도 말이 안 되잖아. 네가 어떻게 수정이랑 사귀어?! 수정이는 여자잖아."
"뭐가 말이 안 돼! 서로 좋으면 사귀는 거지!"
그리고 또 뭐가 안 맞는다고 했더라?
"서로가 좋다고 무조건 사귀는 건 아니지. 무엇보다 넌, 넌 '여자'잖아!!!
"뭐?"
털썩. 나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갑자기 내가 주저앉자 배미가 옆을 지켰고 영희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깨달았다.
그렇구나. 수정이는 그 말하고 싶었던 거구나. 내가 여자니까. 여자니깐 안 되는 거야.
나한테는 남자에게 달려 있다는 예의 물건이 없으니깐.
나한테도 그게 있었더라면
원해. 그걸 원해!
"세미. 괜찮아? 정신 좀 차려 봐!"
옆에서 배미가 뭐라고 소리치지만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내 의식은 점점 어두워지고 깊이 빠져들어 갔다.
그러나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단 한 가지 소망만은 뚜렷하게 기억난다.
고추를 원해!!!
저번것까지 합쳐서1화인데
내용은 길어지고 ㅜ
ts로 연결시켜야하니 주인공이 급발진해버리네요
아직은 고추에 뇌가 지배 당하지 않고 있군요.
ㅋㅋ 일단 왕도로 나가고 중요 사건 정리되는대로 주인공이 고추 고찰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