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이승윤
출판사 - 문학동네
쪽수 - 248쪽
가격 - 17,000원 (정가)
플랫폼노동자, 콜센터 노동자, 새벽 배달노동자…
디지털 전환 시대, 새로운 형태의 불안정노동에 대한 정교한 연구 노트
근로자 10만 명당 치명적 산업재해 수 3050 클럽 국가 1위
순수 자영업자 고용보험 가입 비율 0.5%에 불과
지난 몇십 년간 노동의 형태가 변하면서 ‘노동자 계급’이나 ‘프롤레타리아트’와 같은 전통적인 범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새로운 형태의 일이 등장했다. 콜센터 노동자, 프리랜서, 새벽 배달노동자,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와 가짜 자영업자(종속적 자영업자) 등이 그 예다. 불안정노동자는 비정규직, 일일 노동자, 단기계약자뿐 아니라 유튜버, 크리에이터, 플랫폼노동자 등 신종 직종으로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 표면적으로 이들은 독립적인 자영업자나 프리랜서로 보이며, 자유롭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노동하는 듯하지만 실상 고용은 더 불안하고, 임금은 더 적게 받고, 일터는 더 위험한 경우가 많다. 기술 발전에 따른 플랫폼경제 확산이라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왜 노동자들의 권리는 발맞추어 신장되지 못하는가? 우리는 왜 일할수록 불안정해지는가?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은 불안정노동자들의 삶에 밀착해 이들의 노동현장을 관통하는 이론은 무엇일지, 불안정노동의 확산은 어떤 메커니즘으로 설명될 수 있을지를 고찰한 연구노트다. 동시에 저자는 불안정노동자들의 삶을 보호하는 데 현재의 사회안전망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진단하고, 이를 넘어설 더 나은 사회보장제도를 제안하고자 한다. 국내외에서 노동 연구로 주목받아온 중앙대 사회복지학부 교수 이승윤의 첫 단독 저서로, 모순의 노동현장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풍부한 데이터, 해외의 사회보장제도 소개는 이 책의 큰 미덕이다. 무엇보다 노동 연구자로서 학문적 성실함과 윤리적 태도를 겸비한 그의 연구는 우리 사회 노동의 ‘실재’를 파악하는 데 좋은 도구가 될 것이다.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의 궁극적 목적은 단순히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이 여전히 가난하고 불안정하다는 익숙한 서사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의 형태가 변화하면서 새로운 불안정성이 어떻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지, 그리고 불안정노동자를 둘러싼 제도적 노력이 어느 부분에서 실패하는지, 무엇보다 불안정노동과 사회정책을 내가 어떻게 연구하며, 무엇을 배웠는지를 공유하고자 한다. 동시에 많은 나를 포함한 연구자, 정책 입안자, 정치인, 그리고 행정가 들이 이러한 현실과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지도 반성적으로 살피고자 했다.
_「책머리에」에서, 15쪽
“우리한테 딱 빨대 꽂아놓고 그냥 빨아당기는 거죠. 죽지 않을 정도만.”
다양한 얼굴의 불안정노동을 관통하는 이론은 무엇인가?
사회안전망은 왜 노동자를 보호하는 데 이토록 무력한가?
노동자 10명 중 4명이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시대, 불안정노동의 현실은 어떤가? 불안정노동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프레카리아트precariat가 쓰이기도 하는데, 이들은 언제든 쉽게 쓰다 버릴 수 있는 ‘일회용’ 노동력으로 취급받는다. 과거 노동자 계급을 대표하던 임금노동자들 역시 고용과 소득의 불안정성을 겪었지만 산업화 이후 정치적 노력, 사회안전망 구축, 법 제도 개선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이나 ‘프롤레타리아트’와 같은 전통적 범주에서 벗어난 비표준적 형태의 불안정노동자들은 노동시장에서 새로운 계층을 형성하면서도 취약한 노동 조건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고용 불안정, 소득 불규칙, 일터에서의 통제권 부재, 사회보장 접근성 제한 등이 그것이다.
이 책의 1부 「격랑의 노동현장, 준비되지 않은 사회」에서는 불안정노동자들이 마주한 다양한 현장 가운데에도 특히 몇 년 새 급증한 새벽 배달노동자, 산업재해 노동자, 가짜 자영업자들의 현실을 톺아보았다. 첫 장을 여는「시간과 돈, 모두 부족한 이중빈곤자」는 불안정노동자들이 겪는 공통의 문제로 ‘이중빈곤’ 개념을 제시한다. 모두에게 똑같이 24시간이 주어지는 것 같지만 베블런이 분석했듯 각자 누리는 시간의 양은 사회적 계급에 따라 다르며, 장시간 일하면서도 소득빈곤에 시달리는 이들은 ‘이중빈곤’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누가 어떤 빈곤에 시달리는가’에 대한 연구 결과 저자는 ‘시간빈곤’은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경험할 확률이 높지만, ‘시간빈곤’과 ‘소득빈곤’을 모두 겪는 비율은 비정규직이 훨씬 높다고 지적한다. 이는 낮은 사회복지 지출로 대다수 필수재를 돈으로 구매해야 하고, 유급휴가 보장률이 낮은 한국사회의 민낯이다.
이제 불안정노동의 첫 번째 현장, 새벽 배달노동자들의 삶을 보자. ‘유통 혁신’이라 칭송받으며 파죽지세로 시장규모 11.9조를 기록(2023년)한 새벽노동 현장은 어떤가. 이 시장을 움직이는 빅데이터 기술은 노동자의 동선과 업무량을 통제하는 전자감시 시스템과도 짝을 이룬다. 또한 새벽노동(야간노동)은 세계보건기구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가 지정한 발암물질로 제한 권고사항이지만, 배달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은 기록적이다(택배 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와 택배노조가 2024년 9월에 발표한 「택배노조 실태조사」에 따르면, 쿠팡 택배 노동자의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64.6시간으로 근로기준법상의 40시간을 훨씬 넘는다. 2023년 5월 28일, 쿠팡CLS 남양주 제2캠프에서 새벽배송을 담당하던 40대 택배 기사 정슬기 씨의 사망 사건이 발생했는데 노조 측에 따르면, 사망 당시 고인의 노동시간은 야간노동까지 포함해 77시간이었다). 새벽 배달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은 산업재해 위험과도 맞닿아 있다. 산업재해를 겪을 위험은 하청노동 현장일수록, 중대재해처벌법이 적용되지 않는 5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일수록 커지지만, 쿠팡 등 플랫폼기업의 택배기사는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해 산업재해 처리가 어렵다.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또다른 직군으로 ‘가짜 자영업자’를 들 수 있다. 운송기사들이 대표적인 예인데, 2022년 안전운임제를 요구하며 대대적인 파업을 벌인 화물연대 기사들은 차량을 소유한 만큼 노동자로 보기는 힘든 것일까. 이들은 화물 배차나 운송 일정 등을 회사의 지시에 따르고 이에 따라 수입이 좌우된다는 점에서 근로자와 유사한 지위를 갖지만 노동자성 인정 여부는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하지만 운송기사와 유사한 성격의 업종인 배송기사, 학습지 교사 등 특수고용노동자에 대해 법원은 노동 3권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판단하는 추세고, 국제적으로도 1인 자영노동자에게 노동 3권을 보장해주는 입장이다. 한국이 비준해 2022년 4월부터 발효된 ILO 핵심협약 또한 고용 관계 여부와 관계없이 특수고용노동자에게도 폭넓은 단체행동권을 인정한다.
2부 「노동자가 쓰러진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는 불안정노동의 그림자가 노동자들의 삶 구석구석에 어떻게 스며드는지, 우리 사회안전망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추적해본다. 2부 첫번째 장에서는 질병과 빈곤의 악순환을 파헤쳐보며,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질병이 소득 단절을 부르고, 어떤 이들에게는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재앙이 되는 과정을 고찰한다. 이어 한때 ‘번영의 상징’이었던 공업도시 울산이 어떻게 대규모 하청노동 시장(전체 한국 조선업 종사자의 약 80%가 하청노동자다)을 형성하며 불안정노동자들을 양산하고 있는지 그 아이러니한 변모 과정을 포착한다. 이어 불안정노동은 비정규직에게만 해당하는 위험이 아님을 쌍용자동차 ‘집단해고’를 통해 살펴보면서 ‘이중노동 시장’ 구조에서 한번 밖으로 밀려난 노동자들이 내부 노동시장으로 얼마나 재진입하기 어려운지, 외부 노동시장의 노동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이를 두고 저자는 “미끄럼틀 타고 쭉 미끄러진 것”이라 표현한다-를 고찰한다. 한편 여성노동자가 집중된 학교로도 눈을 돌려 돌봄서비스의 사회화가 어떻게 여성 불안정노동으로 이어지는지를 젠더 관점에서 살핀다.
1~2부에 선연히 드러난 현실처럼 불안정노동은 직종도, 종사자의 주요 성별 및 연령대도 여러 갈래이지만, 이들에게는 하나같이 사회보험제도라는 보호막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쿠팡 기사 같은 특수형태고용종사자의 경우 산재보험의 적용비율이 16.84%에 그치며(2020년), 한시적 근로자의 고용보험 가입률은 51.2%에 그친다(2022년). 또한 노동자들이 해고되었을 때 실업보험이 안전망으로 기능해야 하는데도 한국의 실업급여는 낮은 소득 대체율과 짧은 지급 기간 탓에, 노동자들이 직업 훈련을 통해 내부 시장으로 진입하는 데 실질적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저자는 문제를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해외의 제도를 제안한다. 산재사고 신청주의(피해자가 신청 뒤 모든 필요 절차를 완수해야만 사후 보상을 받는 방식)가 아닌 국민의료보험체제와 연동되어 신고 없이 보상해주는 유럽의 시스템, 자영업자이든 노동자이든 소득활동을 하는 이들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소득 기반의 보험료 책정, 실질적 소득 대체를 가능하게 할 실업보험 개선안 등이 그 예다. 이 가운데에는 다행히 한국에서도 시범사업중인 제도가 있으니, 바로 아픈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병수당이다.
서구 복지국가에서는 이미 오래전 자리잡은 제도이지만, 한국에서는 2022년 7월에야 서울 종로구, 경기 부천시를 비롯한 전국 6개 지역을 대상으로 1단계 상병수당 시범사업이 시행된 것이다. 상병수당 1단계와 2단계 시범사업의 결과는 매우 고무적이다. 시범사업 기간 동안 급여를 받은 많은 노동자들이 질병이나 부상으로 인한 소득 공백을 상병수당으로 메꿀 수 있었다. 경제적 부담에서 벗어나 온전히 치료에 전념하거나, 건강을 회복한 후에는 안정적으로 직장에 복귀할 수 있었던 사례들도 소개되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시범사업이 자영업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까지 포괄하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인데, 덕분에 고용 형태가 불안정하거나 취약한 노동자들도 이 사업을 통해 소득 감소에 대한 불안을 덜고 자신의 건강 관리에 집중할 수 있었다.
_「아프니까 가난이다」에서, 79~80쪽
세대론이 지운 청년노동자,
그 많던 청년들은 어디로 갔을까?
같은 청년, 다른 삶… 양극화된 삶과 위태로운 생존 조건
최근 통계청 조사 결과(2024 경제활동인구조사 근로형태별 부가조사)에 따르면 20대 임금 근로자 중 비정규직 비중이 43.1%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또한 한 기사에 따르면(「‘비수도권 청년들 빨아들인 일자리 ‘블랙홀’은?」, 전혜원 기자, 〈시사인〉 2024년 10월, 892호) 다수 청년들이 서울로 이직해 얻는 일자리 대다수 역시 비정규 파견직이다. 이승윤 교수 또한 청년노동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데, 여기에는 저자의 몇 가지 경험이 자리한다. 우선 그는 불안정노동자 연구 진행중 불안정노동 시장으로 주요하게 유입되는 이들이 청년층임을 확인했으며, 2020~2022년 국무총리실 직속 청년정책조정위원회의 초대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중 청년이라는 ‘세대’와 불안정노동자라는 ‘계급’의 교차점을 목격했다. 청년층은 노동시장에 새롭게 진입하는 집단으로 변화의 최전선에 있는 만큼, 그 불안정성은 노동 연구에 있어 세대 변수를 고려하도록 자극한 것이다. 3부 「청년노동, 누가 무엇을 말하는가?」가 한 부로 다뤄진 배경이기도 하다.
심층적으로 연구한 청년 불안정노동자들의 실상은 어땠을까. 연구 결과 청년들은 ‘매우 불안정한 집단’과 ‘전혀 불안정하지 않은 집단’으로 양극화되었으며 불안정노동 경험은 새로운 형태의 계급 분화로 이어지고 있었다.
분석 결과가 보여준 양극화 경향[표7]은 놀라웠다. 2002년 청년들 중에서는 ‘약간 불안정’한 상태로 일하고 있다고 분류된 집단의 규모가 가장 컸다. 그리고 중간층은 많아도 매우 불안정한 청년의 비율과 전혀 불안정하지 않은 청년(안정)의 비율은 적었다. 하지만 2022년에는 그 양상이 달라졌다. 매우 불안정한 집단과 전혀 불안정하지 않은 집단, 다시 말해 양극단의 경험을 하는 청년의 비율이 각각 1.5배, 2배 가까이 높아졌다. 그리고 중간적 위치를 차지한 ‘약간 불안정한’ 집단에 속한 청년의 비율은 60%가량 줄었다. 아주 불안정한 청년들과 동시에 불안정하지 않은 청년들이 늘어나면서 심각한 양극화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19~34세 청년들이 2008~2020년 12년에 걸쳐 노동시장에서 어떤 불안정성을 겪었는지를 추적하고 분석했다. 분석 결과, 2008년 시작 시점의 청년 3명 중 1명 이상의 청년이 지난 12년 동안 계속 불안정한 상태였다. 반면에 청년 4명 중 1명은 12년간 안정적인 삶을 살아왔다. 같은 청년이지만 이들은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_「매우 불안정한 삶 vs. 불안정하지 않은 삶」에서, 138~140쪽
이 외에도 디지털 전환기 숙련 종류별 일자리 진입에 초점을 맞춘 연구, 청년 불안정노동의 주관적 만족도를 고려한 연구 등 사회변화 속 세대 내 격차를 세밀하게 살핀 연구들도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연구는 흔히 청년의 삶을 언급할 때 뒤따르는 MZ세대론이나 공정주의 담론이 누구의 얼굴을 지우는지 그 한계를 여실히 지적한다. 특정 담론이 어떤 청년의 얼굴을 표상하는지, 그 얼굴들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 무슨 분석 도구를 들이댈지를 정교하게 사유할 때 더 나은 청년정치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과도한 일반화로 점철된 MZ세대론은 세대 내 다양성을 과소평가하고, 전체 세대를 하나의 동질적인 집단으로 보는 경향을 가져왔다. 세대 내 다양한 계층, 지역적 차이 그리고 노동시장과 경제적 측면에서 우려되는 불평등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_「청년과 ‘MZ’ 사이」에서, 131~132쪽
‘액화노동’의 시대,
근무시간, 고용 기간, 일터, 고용주의 경계가 녹아내리다
노동의 액화와 경직된 제도의 간극 사이에서
불안정노동자라는 새롭게 대두한 계급의 윤곽을 그려보는 과정에서 저자는 ‘액화노동melting labour’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액화노동은 전통적인 노동 개념을 구성하던 여러 경계가 녹아내리는 현상을 뜻한다. 앞서 언급했듯 불안정노동은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일의 방식, 작업장 범위, 정해진 노동시간, 고용주와 노동자의 명확한 관계에서 벗어난 노동 형태를 포괄하며 변모중이다. 이렇듯 노동은 ‘액화’하는데, 제도는 여전히 경직되어 있다면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데 실패하고 말 것이다. 이러한 간극은 저자로 하여금 어느 지점에서 우리 사회의 제도가 현실과 맞지 않는지, 그 누락된 지점에서 노동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불안정해지는지의 문제에 천착하게 했다.
이러한 유효성 덕분에 ‘액화노동’ 개념은 국제적으로 주목받아 동아시아 사회정책 국제학술대회를 비롯한 많은 학회에서 이승윤 교수의 발표가 진행되었으며, 이 논의를 바탕으로 한 영문 단행본 Varieties of Precarity: Melting Labour and the Failure to Protect Workers in the Korean Welfare State(『불안정노동의 다양성: 액화노동과 한국 복지국가의 실패한 노동자 보호』, Policy Press, 2023)가 영국에서 출간되기도 했다. 갈무리된 논의가 국내판 단행본에는 최초로 수록되어 국내 독자들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이 책의 마지막 장 「연구 노트: 불안정노동의 다양성과 액화노동」을 참고하라).
“학자는 왜 무지한가?”
노동자와 연구자, 경계에서 만나다
학자로서의 위치성을 자각하는 연구자의 윤리
책의 마지막 부「경계에서의 고민」은 노동이 멸시되는 시대, 노동 연구자로서 살아가며 통과한 학문적 고뇌를 담아냈다. 이 장에서 그는 불안정노동에 대한 연구 결과를 나열하는 것을 넘어, 연구과정에서 직면한 다양한 윤리적, 방법론적 딜레마들을 솔직하게 풀어낸다. 학자의 무지, 여성 연구자로서 특별한 경험, 그리고 연구자와 연구 대상자와의 복잡한 관계 등 학문의 경계에서 던진 다양한 질문들이 담겼다. ‘교수’라는 사회적 위치와 불안정노동자들의 실존적 현실 사이에서 느끼는 괴리감과 모순을 고백하며, 또 때론 반문하며 스스로를 해부하듯 쓴 이 글은 사회분석으로서의 자기 분석을 담은 글의 전범이 될 만하다. 연구자로서 인식적 한계가 어떻게 노동자의 실제 모습을 왜곡시키는지에 대한 성찰은 전문가, 학자에 대한 권위를 과도하게 부여하는 시대에 지식인의 한계를 성찰하게 하며, 현장 활동가들의 지워진 역할에도 빛을 되비춘다. 조문영 교수의 추천사처럼 “그가 경험으로 쓰고 내가 다짐으로 읽은 이 책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내며 연구하는, 연구하며 살아내는 모두에게 힘이 되길 바란다.”
내 주위의 많은 교수자들은 자녀가 대학 진학보다는 당장이라도 소득활동을 해서 가계에 도움이 되길 간절히 바라본 적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좋은 일자리만 선호하는 청년세대의 나약함에 대해 논할 때, 대상이 되는 청년에 자신들의 자녀는 포함될까? 생계급여를 신청하기 위해 동사무소에 다양한 서류를 제출하며 모멸감을 이겨내고 자신의 빈곤을 증명해본 경험이 없는 연구자라면, 빈곤층에게 ‘철저한 자산조사를 통한 급여 지급이 효율적’이라고 주장할 가능성이 크다. 장애인 혹은 이주노동자처럼 일상 속에서 다양한 배제와 차별을 경험해보지 못한 연구자는 집단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이들의 투쟁에 대해, 조금이라도 법을 어기면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할지도 모른다.
연구자와 연구대상의 실존적 계급성과 위치성의 차이는 분석 대상의 현실을 굴절할 수 있다. 학자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로 인해 생기는 편향성에 대한 지속적인 자각이 필요하며, 이 격차에 대한 자각은 중요하다. _「학자는 왜 무지한가?」에서, 171~172쪽
목 차
ㆍ책머리에
불안정노동자들의 삶을 좇다, 그 유동하는 세계를 해부하다
1부 격랑의 노동현장, 준비되지 않은 사회
1. 시간과 돈, 모두 부족한 이중빈곤자
2. 새벽노동, 퇴행적 혁신
3. 산재사고 이후, 남겨진 사람들
4. 화물연대 파업과 ‘가짜 자영업자’
2부 노동자가 쓰러진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5. 아프니까 가난이다
6. 공업도시 울산으로
7. 해고, 추락의 시작
8. 아이들이 먹는 밥이 누군가의 삶을 담보로 한다면
3부 청년노동, 누가 무엇을 말하는가?
9. 청년과 ‘MZ’ 사이
10. 매우 불안정한 삶 vs. 불안정하지 않은 삶
11. 청년 담론에서 ‘계급’이 지워질 때
12. ‘시그니처 정책’이라는 주문
4부 경계에서의 고민
13. 학자는 왜 무지한가
14. 한국에서 여성 연구자로 산다는 것
15. 연구자의 쓸모
16. 주류 학자집단에 속한다는 것
17. 연구 대상자와 연구자 사이
연구 노트: 불안정노동의 다양성과 액화노동
추 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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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경이로웠다. 노동시장에 대한 정교한 분석과 엄밀한 논증을 하는 연구자가 이토록 뜨거울 수 있을까. 지난 10년간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그는 문제가 자신에게 다가오길 기다리는 연구자가 아니었다. 머리만큼이나 부지런한 발로 현장을 먼저 찾아간다. 새벽배송을 마친 노동자를 만나고, 조선소에서 일하다 동료를 잃은 하청노동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산업재해로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손을 잡는다. 자신은 그 자리에서 살아본 적 없는 대학교수이기에, 그 슬픔에 온전히 다가가기 어렵다고 언제 그 고통을 대상화할지 모른다고 인정하고 또 내내 의심하면서, 그는 전진한다. 자신의 빈곤을 증명해야 하는 빈곤층이 복지제도 앞에서 겪는 모멸감에 분노하고 낯선 연구자들을 만나 화물연대 노동자 파업에 연대를 호소하며, 지식인의 책임이라는 그 고루하고 빛바랜 이름을 기꺼이 자신의 몫으로 끌어안는다.
‘한쪽의 책임은 너무 가볍고, 다른 쪽은 너무 무거운’ 세상을 견딜 수 없는, ‘아이들이 먹는 밥이 누군가의 삶을 빼앗은 덕분이라면 그 밥은 맛있으면 안 된다’ 말하는 사람. 이승윤의 첫 책이다. -
빈곤과 불안정성에 관한 나의 연구는 회의와 무력감으로 길을 잃곤 했다. 삶의 안정성이 뿌리 뽑힌 시대에 정규직 교수라는 희귀종이 사회를 논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내가 ‘위선’이란 두 글자 사이에 끼여 옴짝달싹 못하고 술만 축내던 사이, 어떤 이는 지독히도 성실히 살아 사회를 조금이라도 바꿔내고 있었다. 이 책의 저자 이승윤 교수다. 젊은 여성 연구자인 그에 대한 대한민국 주류 학계의 인정이 굼떴을 뿐, 이승윤은 불안정노동과 사회보장 연구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연구자다. 이번에 출간된 그의 연구 노트에는 모순을 직시하되 쉽게 냉소하지 않는 지식인의 건강함이 배어 있다. 우리가 잠시 안타까워하며 지나친 노동현장에서 새로운 형태의 불안정성을 포착하기. 고매한 학자가 발을 담그기 주저하는 정책 입안의 난장에서 고민과 통찰을 길어내기. 숫자와 그래프 너머 번잡한 삶을 기꺼이 마주하며 논쟁을 이어가기. 그가 경험으로 쓰고 내가 다짐으로 읽은 이 책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내며 연구하는, 연구하며 살아내는 모두에게 힘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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