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서가 그대를 노리고 있을 것이오. 경계해두시오."
헤어지기 전에 라이더가 남기고 간 말이었다.
"무엇..."
"자세히는 다녀와서 얘기하리다. 그 자에 대한 처신은 그대의 판단에 맡기겠소."
"......알겠소."
* * *
'라이더 공의 말대로로군. 진짜 이쪽을 노리고 왔을 줄이야.'
"랜서...? 어째서 랜서가..."
"아마 저 자는 실체화 상태로 돌아다닌 제 기척을 감지하고 저를 쫓아온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 그거 때문이 아니라. 왜 랜서가..."
라이더가 앞서 귀띔을 해 주었던 아처와는 달리 성민은 어째서 랜서가 자신들을 노리고 접근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성민의 의문에 답하듯 랜서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그대가, 이 성배전쟁에 참전했다는 왜인인가?"
"......보다시피 왜인이라고 한다면, 일단 왜인은 맞소."
"...그렇다면 배제하겠다."
그렇게 말한 랜서는 죽창을 세워 잡더니 바닥에 앉을 자세를 취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미 보았기에 알고 있었다. 성민이 명령하기 전에 아처는 순식간에 랜서와의 거리를 좁혔다. 랜서가 자리를 잡기 전에 한 발 앞서 아처의 검이 그의 창을 베어내었다. 랜서는 약간 당황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아처의 후속 공격이 날아오기 전에 재빨리 몸을 뒤로 빼냈다.
"그쪽이 그 창을 바로 쥐고 앉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내 모르지 않소. 그쪽이 버서커와 교전을 치룬 사실은 이쪽도 알고 있으니."
"...그 말은, 보았다는 건가."
"그 말대로요. 그러니 이쪽을 상대로 보구를 그렇게 쉽게 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일찍이 넣어두시오. 녹두장군."
자신의 진명까지 말하는 상대의 태도에 랜서는 살짝 동요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다 이내 지면에서 새로운 창을 뽑았다,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그대 역시 그 자와 관계가 있다, 라고 알아들어도 되겠군."
"...아무래도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가 보군."
일반적인 성배전쟁의 양상이 흘러가는 구조를 생각해본다면 랜서와 버서커의 전투 상황을 알고 있는 것은 두 서번트와 그 마스터만의 얘기는 아닐 것이다. 심지어 교전 중에 보구와 진명까지 밝혀진 이상 다른 마스터들은 해당 서번트에 대한 대책을 세우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미 상대에 대한 분노로 투쟁심이 끓어오르는 랜서는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그쪽의 머리를 식혀야 대화가 성립되겠군."
"그대와 대화를 할 생각은, 없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랜서는 아처에게 달려들었다.
"주군! 그것을...!"
"...아!"
아처의 말에 성민은 잊고 있던 물건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야구공 정도 크기의 그 주황색 구체는 만에 하나의 상황에 대비하여 사용하라고 윤아가 건네준 간이 결계 생성 장치였다. 아직 마술이 미숙해서 결계를 펼쳐 주변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것도 어려워하는 성민을 위해 간단하게 만든 물건이며 일회용이니 신중하게 사용하라는 것이 윤아의 설명이었다.
"그러니까... 이걸 이렇게 누르고..."
구체 위에 달린 스위치를 누르고 지면을 향해 던지자 구체가 부서지며 주황색 빛의 입자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설명대로라면 이제 일시적으로 결계가 형성되어 주변에 싸우는 소리가 퍼져 나가는 것을 막아줄 것이다. 결계 생성이 완료됨과 동시에 두 서번트의 무기가 엄청난 속도로 충돌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한 번 무기가 부딪칠 때마다 발생한 충격파가 그들 주위에 펼쳐진 갈대밭을 뒤흔들었다.
'이 속도...!'
버서커전에서 보여주었던 랜서의 모습은 빠른 기동력으로 히트 앤 런을 반복하는 일반적인 랜서 클래스의 서번트들과는 이질적으로 기동력보다는 안정성에 치중한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아처가 상대하고 있는 랜서는 버서커와 교전을 했을 당시보다 움직임이 빨라져 있었다. 버서커에게는 허용했던 공격 사이사이의 빈틈의 간격이 좁아진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읏...!'
오히려 밀리고 있는 쪽은 랜서가 아닌 아처였다. 아슬아슬하게 창끝은 아처의 몸을 빗겨나가고 있었지만 제때 회피하지 않았다면 꿰뚫릴 공격들을 제법 허용하고 있었다.
"조심해, 아처! 랜서의 전반적인 스테이터스가 강화되어 있어!"
성민의 눈에 보이는 랜서의 스테이터스 수치는 버서커와 교전할 당시보다 상승된 상태였다. 라이더의 말대로 모종의 스킬로 인해 스테이터스에 추가 보정을 얻은 것이겠지. 아처는 생각했다.
"빈틈이, 보이는군."
아처가 상황 판단을 위해 생각을 하느라 움직임이 둔해진 것을 랜서는 놓치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꿰뚫어주겠다는 생각으로 갑옷 사이에 드러난 목을 노려 창을 뻗었다. 확실히 관통할 것이라고 생각한 순간, 금빛 입자와 함께 나타난 무언가가 창을 부쉈다. 생각지도 못한 방해에 랜서는 잠시 주춤했다. 그 틈을 타 몸을 뒤로 뺀 아처가 오른손에 잡고 있던 무언가를 고쳐잡았을 때, 랜서는 무엇이 자신의 창을 부쉈는지 깨달았다.
"제길...!"
창이 파고 든 순간, 아처는 허공에서 조총을 꺼내어 총구부분을 잡아 휘둘렀다. 날 없는 둔기나 마찬가지였지만 죽창을 부수는 데는 충분한 위력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총구는 랜서를 향해 있었다.
"빈틈이, 보이는군."
찰나의 빈틈을 노려 아처의 조총이 불을 뿜었다. 하지만 랜서의 스테이터스 강화는 반응속도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었을까. 어느 순간 지면에서 두 자루의 창을 뽑아낸 랜서는 두 창을 빠르게 교차하며 탄환을 막아냈다. 보구 보정을 받아 강화되었다고는 해도 죽창이 버틸 수 있는 충격은 아니었지만 총탄의 궤도를 비틀기엔 충분했다. 창이 부서짐과 동시에 랜서는 또 한 자루의 창을 뽑아내어 아처를 향해 던지고, 동시에 또 한 자루의 창을 뽑아들어 아처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처는 날아오는 창을 조총을 휘둘러 막아내고 뒤이어 들어온 랜서의 일격을 검으로 막아냈다. 이어지는 맹공도 양 손에 쥔 무기로 번갈아가면서 받아냈다. 랜서의 움직임에 익숙해지면서 몸놀림에도 안정을 찾은 아처는 왼손에 쥔 조총을 마치 또 하나의 검처럼 다루고 있었다. 이도류를 구사하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처음과는 달리 빈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자신의 옆을 노리고 휘두른 랜서의 창도 가뿐히 조총으로 막아내며 검과 교차시켜 부쉈다.
"그 투기, 청렴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자신의 무기가 부서지면서 숨을 조금 고르듯 랜서는 뒤로 물러나면서 새로운 창을 다시 지면에서 꺼냈다.
"허나, 네 녀석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이거야 원, 아직도 머리가 안 식은거요?"
아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면서 조총을 새로 꺼내들고 양손에 하나씩 쥐었다.
"그렇다면, 조금 거칠게 가겠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처의 총이 불을 뿜었다. 그것을 신호로 버서커와 교전했을 때처럼 그의 발밑 주변에 여러 정의 조총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번 사격을 가한 총을 버리고 새로운 총을 쥐어 사격. 버려진 총은 황금빛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총이 빈 자리에는 새로운 총이 나타나 빈 자리를 채웠다. 버서커 전때와는 달리 아처의 등 뒤에 떠오르는 조총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아처의 포화는 상당히 빠른 간격으로 랜서를 향해 날아갔다.
한편 지금보다 더한 화력의 공격도 막아내며 접근하던 버서커와는 달리 랜서는 아처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그나마 죽창이 부서지면 새로운 죽창을 꺼낼 여유 정도는 있었으나 한 번 죽창이 파괴될 때마다 몇 발의 총탄은 그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버티면서 전진하기엔 버거운 수준이었다.
몇 자루째 창이 부숴졌을까. 아처는 포화를 멈추고 자신 주변과 들고 있던 조총을 다시 사라지게 만들었다. 아처가 쏜 총탄 중에서 랜서에게 직격한 것은 한 발도 없었지만 그래도 상당 수의 총탄이 랜서를 스쳐지나간 탓에 랜서는 양손에 죽창을 쥔 채 상당히 많은 상처를 입은 상태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제 머리가 좀 식었소?"
"......"
"이쪽은 그대를 죽일 생각은 없소. 생각이 있었다면 진작에 그대에게 총탄을 직격시켰겠지."
랜서는 여전히 묵묵히 아처를 노려보고 있었다.
"들어주시오. 이쪽은 그대와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소. 그대가 공격하지 않았다면, 이쪽도 무기를 들지 않았을 것이오. 우리는 그 버서커와는 관계가 없소. 오히려 우리도 그 자와 적대 관계에 있는 입장으로 그대와 함께 싸우고 싶소."
구름이 달빛을 가리고, 잠시 바람소리만이 그 자리에 맴돌았다. 양쪽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보고 있었다.
"......가 어째서..."
"...?"
"내가 어째서, 왜인과 손을 잡아야 하는가?"
랜서는 한 손에 쥔 창을 아처를 향해 던졌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아처는 당황했지만 급하게 검을 빼들고 막아낼 수는 있었다. 하지만,
"아처, 랜서를 조심해!"
"...이런...!"
정신을 차리고 랜서 쪽을 보았을 때, 이미 때는 늦었다. 정좌 자세를 취하고 있는 랜서는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던 창을 똑바로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랜서의 입에서 그 영창이 흘러나왔다.
"『앉으면 죽산이요.』"
* * *
총성이 울렸다.
아처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아처가 다시 조총을 꺼내 창을 노리고 쏘기에는 이미 늦은 시기였다. 하지만 어디선가 들려온 총성과 함께 랜서의 창은 부서져 있었다.
"뭣..."
"...누구냐."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당황하며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총성이 들려온 방향을 향해 돌아보았다.
그곳에 누군가가 있었다. 그림자 속이라 잘 보이진 않지만, 그의 한손에는 방금 전 방아쇠를 당긴 것처럼 보이는 권총이 연기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강력한 마력 반응.
"서번트...!"
"어새신...인가...!"
성민은 당황했다. 제3의 서번트의 참전을 예상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저쪽의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아처나 랜서에게서 느낀 기운과는 달랐다. 마치 더 큰 중압감을 주는 듯한 묵직한 기운이었다.
"자네와 나는 초면은 아닐 테지. 랜서."
어새신이 그들에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 땐 잘도, 날 방해해주었더군."
"방해라... 단지 우연히 목표가 겹쳤고, 그 땐 자네가 누군지 확인되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뿐이었네. 폭탄에 휘말리게 한 건 사과하지."
"그래서, 이번에도 그 때처럼, 나를 방해하러 온 것인가?"
"그럴 리가. 자네의 보구 행사를 막은 것은 무리하지 말라는 의미였네."
어새신은 묘하게 랜서에게 친근한 투로 얘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미루어보았을 때 아처에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 말은, 그쪽도 이쪽에게 적대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알아들으면 되겠소?"
"그렇게 되겠지. 왜인이라 한다면,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서 말일세."
"...역시 그렇게 되는 것인가."
세 사람의 거리가 좁혀지고 랜서는 다시 일어나 창을 새롭게 꺼내들었다. 이대로 두 사람이 협력해서 싸우게 된다면 아처 입장에서도 곤란한 상황이었다.
"이쪽이 그대가 생각하는 왜인이 아니라고 얘기해도, 당장에는 믿지 않겠지."
"유감스럽게도 왜인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 내 관념이라 말일세."
세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바람과 함께 구름 사이에 가려진 달빛이 다시 그들이 있는 자리를 비추고, 그림자 속에 가려졌던 어새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진회색의 플랫캡에 폴로코트. 거기에 검은색 가죽장갑을 낀 손에는 방금 전 방아쇠를 당겼던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멋드러진 콧수염을 기른 중년 남성의 얼굴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네 녀석은...?!"
침묵을 깨고 반응을 한 것은 랜서였다. 어새신의 얼굴을 본 랜서는 크게 동요하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
"무슨...?!"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성민과 아처는 당황했다. 그에 비해 어새신은 그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듯 가볍게 랜서의 창격을 피해 물러났다.
"...자네라면 날 보고 그렇게 반응할 줄 알았지."
"잘도, 뻔뻔하게, 내 앞에 나타나 협력을 요구하는 거냐, 네 녀석?"
랜서의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것은 처음 아처와 조우했을 때 보였던 분노보다 크면 컸지 결코 작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것은 오해일세."
"닥쳐라! 그대는, 나와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을 탄압했다! 그대가 아무리 후세에 위대한 업적을 세웠다 한들, 나는 그것을 용서할 수 없다!"
"자네는 동학교도의 이름을 빌린 도적떼도 동지라고 받아들일 셈인가? 그들은 오히려 자네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이들이었네."
"그것을, 어찌 증명할텐가?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증명할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의 대화는 현세에서 얽힌 인연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과거 그들이 살아있을 적의 이야기. 랜서, 전봉준이 이끌었던 동학 농민 운동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면서 랜서의 원한을 살 인물... 순간 성민은 머리 속에 누군가가 스쳐 지나갔다.
"...설마?!"
그리고 곧이어 랜서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성민의 추측이 맞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대답해라. 그 자들이 죄인이었는지, 무고한 동지였는지, 지금 여기서 내게 증명해봐라! 안응칠!!"
부록
음... 제가 생각한 녹두장군과 다른 성격이네요. 뭔가 포용력이 좀 더 있는 분으로 상상했는데... 여기선 좀 더 완고한 느낌이시네요.
네, 반도성배대전의 녹두장군은 여러가지 요인으로 인해 다른 때보다 성향이 다소 완고해진 경향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