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류 지적하자면 세키가하라 전투는 명목 상으로는 일본 천하를 지배하는 도요토미 가문의 가신 간의 싸움.
동군은 간신 이시다 미츠나리 일당을 몰아내고 도요토미 가문을 바로 잡는다는 명분으로, 서군은 어린 주군을 위협하는 이에야스로부터 히데요리를 지키고 벌하기 위해.
이 때문에 미츠나리에게 반감을 가진 후쿠시마 마사노리나 가토 기요마사 등 히데요시가 직접 키운 칠본창같은 무장들이 동군에 가담했음.
이후 패권을 쥔 이에야스는 야심을 드러내 무사 가문의 수장격인 세이이다이쇼군에 오르고 본거지 에도에 막부를 열고 친 도요토미 다이묘들을 숙청해나가는 식으로 도요토미 가문의 손발을 잘라내다 십수년 후에 히데요리가 장성했을 쯤에 2차례의 오사카의 진으로 도요토미 가문을 멸족시킴.
이순신 사후 많은 무관들은 이순신 의 업적 떄문에 고통에 시달려야 했는데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는 서해 에 자주 출몰해서 어업자원을 쓸어가는 중국어선들을
잡기위해 영조에게 병선을 건조해야하니 지원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영조는 이순신은 국난의 상황에서
스스로 병선을 만들고 조정에 공납도 바쳤는데 넌 왜 못하냐 라는 답변을 받았다고 하지요
순천왜성 부근에 이순신을 기리는 충민사 라는 사당이 있는데 이 사당이 세워진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임진왜란 이 끝난 뒤 세월이 흐르고 왜성 부근에 마을이 형성되어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대 어느날 부터 죽은 일본군의 귀신들이 나타나 자기네들끼리 싸우기 시작하였는데 이를 두려워한
마을사람들은 회의를 열었지만 도통 답이 나오지 않아 답답하던 차에 누군가 이순시 장군과 영우들의 사당을
세우자고 제안하였고 그렇게 충민사가 세워지자 일본군 의 망령들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순신의 업적은 그의 사후 많은 이들에 의해 찬양 되어졌는데
특히 정조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사랑이 깊어서 이충무공전서 와 같은 책자들이 발간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적국인 일본역시 메이지 유신 이후 이순신에 대한 연구 를 하면서 해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고
대영제국 이라 불리며 해상권을 주름잡던 영국역시 자신들의 위대한 영웅 호레이쇼 넬슨 과 감히 비교할수는 없는
영웅으로서 칭송하고 있지요
거기다 서브컬쳐 매체 등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이름을 딴 우주전함이나 작전전술 등에서 이름이 언급 되기도 합니다
일본에서는 사극중 전국시대 를 다르는 작품들에서는 조선수군 때문에 막혔다 등으로 언급되는데 고우 공주들의 전국 이나
군사 칸베에 등에서는 조선수군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고 어떡할래 이에야스 ? 에서는 조선수군에게 화포를 맞는 안택선의 모습이
묘사되어 나오기도 합니다 거기에 시로쿠로 조커 대항해 시대 등 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등장하지요
일본의 전쟁이 끝난이후 조선은 말그대로 잿더미가 되어있었고 조선의 황궁역활을 하던 경복궁은
이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주도하에 다시 복원되어졌습니다
경주의 불국사 역시 영조대에 들어 일부 복원되었지만 거의 폐허나 다름없었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들어 조금 복원되었지만 많은 유물들을 빼앗아갔지요
결국 완전 복원이 된건 광복이후 박정희 정권 시절 들어 완전히 복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이 간과하지 못했던 것은 만주의 여진족이 임란으로 혼란한 상황
속에서 강성해지고 있었고 이것을 잘 대처 못한 탓에 병자년과 정묘년에 엄청난
최악의 사태를 겪고 맙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충무공에게 방탄조끼를 드릴거야
타임머신이 있다면, 충무공에게 방탄조끼를 드릴거야
오류 지적하자면 세키가하라 전투는 명목 상으로는 일본 천하를 지배하는 도요토미 가문의 가신 간의 싸움. 동군은 간신 이시다 미츠나리 일당을 몰아내고 도요토미 가문을 바로 잡는다는 명분으로, 서군은 어린 주군을 위협하는 이에야스로부터 히데요리를 지키고 벌하기 위해. 이 때문에 미츠나리에게 반감을 가진 후쿠시마 마사노리나 가토 기요마사 등 히데요시가 직접 키운 칠본창같은 무장들이 동군에 가담했음. 이후 패권을 쥔 이에야스는 야심을 드러내 무사 가문의 수장격인 세이이다이쇼군에 오르고 본거지 에도에 막부를 열고 친 도요토미 다이묘들을 숙청해나가는 식으로 도요토미 가문의 손발을 잘라내다 십수년 후에 히데요리가 장성했을 쯤에 2차례의 오사카의 진으로 도요토미 가문을 멸족시킴.
이순신 사후 많은 무관들은 이순신 의 업적 떄문에 고통에 시달려야 했는데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는 서해 에 자주 출몰해서 어업자원을 쓸어가는 중국어선들을 잡기위해 영조에게 병선을 건조해야하니 지원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영조는 이순신은 국난의 상황에서 스스로 병선을 만들고 조정에 공납도 바쳤는데 넌 왜 못하냐 라는 답변을 받았다고 하지요 순천왜성 부근에 이순신을 기리는 충민사 라는 사당이 있는데 이 사당이 세워진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임진왜란 이 끝난 뒤 세월이 흐르고 왜성 부근에 마을이 형성되어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대 어느날 부터 죽은 일본군의 귀신들이 나타나 자기네들끼리 싸우기 시작하였는데 이를 두려워한 마을사람들은 회의를 열었지만 도통 답이 나오지 않아 답답하던 차에 누군가 이순시 장군과 영우들의 사당을 세우자고 제안하였고 그렇게 충민사가 세워지자 일본군 의 망령들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순신의 업적은 그의 사후 많은 이들에 의해 찬양 되어졌는데 특히 정조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사랑이 깊어서 이충무공전서 와 같은 책자들이 발간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적국인 일본역시 메이지 유신 이후 이순신에 대한 연구 를 하면서 해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고 대영제국 이라 불리며 해상권을 주름잡던 영국역시 자신들의 위대한 영웅 호레이쇼 넬슨 과 감히 비교할수는 없는 영웅으로서 칭송하고 있지요 거기다 서브컬쳐 매체 등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이름을 딴 우주전함이나 작전전술 등에서 이름이 언급 되기도 합니다 일본에서는 사극중 전국시대 를 다르는 작품들에서는 조선수군 때문에 막혔다 등으로 언급되는데 고우 공주들의 전국 이나 군사 칸베에 등에서는 조선수군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고 어떡할래 이에야스 ? 에서는 조선수군에게 화포를 맞는 안택선의 모습이 묘사되어 나오기도 합니다 거기에 시로쿠로 조커 대항해 시대 등 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등장하지요 일본의 전쟁이 끝난이후 조선은 말그대로 잿더미가 되어있었고 조선의 황궁역활을 하던 경복궁은 이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주도하에 다시 복원되어졌습니다 경주의 불국사 역시 영조대에 들어 일부 복원되었지만 거의 폐허나 다름없었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들어 조금 복원되었지만 많은 유물들을 빼앗아갔지요 결국 완전 복원이 된건 광복이후 박정희 정권 시절 들어 완전히 복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이 간과하지 못했던 것은 만주의 여진족이 임란으로 혼란한 상황 속에서 강성해지고 있었고 이것을 잘 대처 못한 탓에 병자년과 정묘년에 엄청난 최악의 사태를 겪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