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무임승차」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진 황야를 가로지르며 기차는 달리고 있었다. 자갈과 풀뿌리 사이로 뻗어나가는 선로를 따라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멈추지 않을 것처럼. 선로를 덧쓰며 궤적을 그리는 모래바람을 남기며, 꼭두머리를 향해 세차게 메아리치는 기적 소리를 울리며,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로부터 도망치듯이, 그저 바람처럼 자유롭게.
‘보나레스’라고 불리는 이 기차는 서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한 호화 기차였다. 기관차량이 1량, 1등 차량이 5량, 여가 차량이 2량, 식당 차량이 2량, 2등 차량이 5량, 3등 차량이 4량, 화물 차량이 5량, 마지막으로 차장실 차량이 1량. 이미 그 크기만으로도 압도적인 수준인데다 그 휘황찬란한 차체의 모습은 화려함을 넘어서 거추장스러울 정도였다. 거기에 더해 실력 있는 요리사들을 고용해 식당을 운영하여 먹고 자고 생활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시설들을 갖춘 데다 심지어는 오락을 위한 카지노 시설까지 있었다. 서부의 지상 낙원을 지향한다는 거창한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운 만큼 그 사치스러움은 다른 기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법과 정의가 사라진 무법의 땅에서 성공을 거둔 극소수의 부자들만을 위한 기차. 그야말로 개척시대가 열린 이후로 생겨난 모든 기차들 중에서 가장 독보적인 기차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기차 안. 레드카펫이 깔린 화사한 복도 위에 부랑자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지저분한 청년이 이마가 땅에 닿도록 무릎을 꿇고 빌고 있었다. 화려한 실내장식과 고풍스러운 치장으로 둘러싸인 복도에 부스스한 몰골의 청년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어색한 광경이 아닐 수가 없었다.
“미안! 진짜 잘못했어! 잠깐 정신이 나간거야! 한순간의 실수였다고!”
그렇게 말하는 청년의 모습은 초라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너덜너덜해진 판초와 지저분한 보따리. 그리고 당장이라도 헤질 것 같은 낡은 옷차림. 그 초췌한 모습을 보면 동정심이 울컥 솟구치는 바람에 거칠게 대할 마음마저도 사라질 정도였다. 때문에 청년을 둘러싼 다섯 명 남짓한 남자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난감한 얼굴을 띄우고 있는 까닭이었다.
“이봐, 아무리 그래도 우리도 사정이라는 게 있잖나. 무임승차를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 그것도 이 ‘보나레스’에서는 말이지.”
깔끔한 정장을 빼입은 남자들 사이에서 리더로 보이는 한 남자가 말을 했다. 그러자 청년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다시 한 번 머리를 땅에 박으며 외쳤다.
“진짜 한 번만 봐줘!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돈은 없어! 탈탈 털어도 안 나온다고!”
“그럼 당장 내리는 수밖에 없겠군.”
한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창문 밖을 가리켰다. 무서운 속도로 선로 위를 질주하는 기차의 차창 너머는 화살처럼 지나가는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청년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딱 한 번만! 정말 딱 한 번만 눈감아주면 새 사람이 돼서 열심히 살게! 열심히 일해서 돈 벌면 꼭 은혜를 갚을게! 진짜 부탁이야!”
“허참….”
남자들은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야말로 얼굴에 철판이라도 깔았나 싶을 정도로 뻔뻔한 태도였다. 무임승차는 많고 많다지만 이토록 태평한 녀석은 본 적이 없었다.
“─일단 가진 거라도 전부 털어놓을까. 이야기는 그 다음에 하지.”
한 남자가 그렇게 말하자 청년은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아니, 그건 좀….”
청년은 그렇게 말하며 어깨에 메고 있던 봇짐을 슬그머니 뒤로 감추는 것이었다. 당연히 남자들이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리더가 턱짓으로 봇짐을 가리키자 다른 남자들이 청년을 억누르며 봇짐을 뺏으려 들었다.
“자, 잠깐! 이 천벌 받을 녀석들아! 그건 함부로 손대는 물건이 아니라고! 괘씸한 녀석들!”
나름대로 선처를 해주고 있던 자신들을 향해 천벌 받을 녀석이라는 둥, 괘씸한 녀석들이라는 둥, 그런 욕설을 들으니 화가 난다기 보단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청년은 버둥거리며 저항했지만 네 명이나 되는 장정들의 힘을 견딜 수는 없었다. 청년은 철판에 짓눌린 개구리마냥 남자들에 의해 바닥에 억눌린 상태로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이 도둑놈들아! 주인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이렇게 물건을 갈취해도 되는 거냐?!”
“허참, 뻔뻔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로세.”
리더는 황당함에 혀를 내두르며 봇짐을 풀어 안에 있는 물건을 바닥에 탈탈 털어냈다. 그러자 무언가 묵직한 물건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니, 정확히는 바닥에 꽂혔다.
“응? 이게 뭐야?”
남자들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워낙 예상치도 못한 물건이 나온 터라 당황한 것이었다. 보따리에서 나온 물건은 두 자루의 단검이었다. 서늘한 은빛을 두른 단검들은 서로 크기도 모양도 달랐으나 어딘가 비슷한 분위기가 있었다. 도신에는 화려한 문양까지 새겨져 있어 도저히 싸구려 물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예술적인 품위가 느껴졌다.
“우와…. 이건 또 뭐야? 거지 주제에 뭐 이런 화려한 단검을 가지고 있어?”
“얌마! 이런 걸 가지고 있으면 팔아서 기차표라도 사!”
남자들이 핀잔하자 청년은 못마땅한 듯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건 파는 물건이 아니야. 뭐든 돈으로 생각하다니 이래서 개척민들은….”
청년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리더가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무임승차 주제에 잘난 척은! 네 처지를 알고 있긴 하냐? ‘위즐리 기차역’에 도착하면 당장 보안관에게 넘길 줄 알아!”
“그러지 말고…. 그냥 눈 딱 감고 보내주면 안될까? 날 들들 볶아봐야 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잖아? 서로 귀찮은데 그냥 넘어가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너 사는 게 그렇게 우습냐?”
“인생을 완전히 물로 보고 있고만.”
남자들이 제각각 한 소리씩 거들며 청년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일단….”
한참동안 팔짱을 낀 채 상황을 지긋이 보고 있던 리더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묶어서 짐칸에라도 던져둘까?”
그것이 청년─조니워커가 보나레스의 짐칸에 갇힌 사연이었다.
프롤로그
「말단」
“보나레스를 털자.”
별안간 울려 퍼진 한 마디에 ‘로르 마르텔’은 기침과 함께 입 안 가득 쑤셔 넣었던 음식들을 거하게 흩뿌렸다. 요란한 기침 소리가 주점 안에 울려 퍼지자 동료들은 그 모습을 보며 키득키득 웃음을 흘렸다. 로르 마르텔은 가슴을 두드리며 컵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주점의 모습은 서부에 있는 대부분의 주점들이 그렇듯 투박하고 털털한 인상이 강했다. 중앙 대륙의 주점이 점잔을 차린 사교의 장이라면 서부의 주점은 산만한 술판 외의 어느 것도 아니었다. 술 냄새가 짙게 밴 나무판자와 삐걱거리는 탁자나 의자가 산만하게 놓여있었고 진열장에 놓인 술도 상표조차 없는 꾀죄죄한 술병뿐이었다.
더군다나 바텐더를 비롯하여 주점 안에 있는 이들은 모두 한 인상 하는 험악한 사내들뿐이었다. 청결함과는 담을 쌓은 듯한 지저분한 옷차림에 허리춤에 달린 때 묻은 리볼버. 이유도 없이 괜스레 거들먹거리는 그들의 모습은 확실히 불량배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았다. 그런 이들이 주점 안에 자리 잡고 있으니 주점은 한층 더 험악한 분위기로 빠져드는 것이었다.
로르 마르텔은 그런 사내들 사이에선 유달리 눈에 띄는 편이었다. 키가 작고 호리호리한 몸매인지라 어딘가 앳된 소년 같은 티를 벗지 못한데다 화사한 금발 탓에 한층 더 섬세한 분위기가 강조되었다. 허리에 찬 권총이 퍽 어색해보였고 눈매도 다른 이들과 달리 순박해 보였다. 술집에 들어갔다가 바가지라도 잘못 썼다간 권총이고 뭐고 다 건네주고 일까지 도와주다 맨몸으로 쫓겨날 것만 같은 인상이었다. 허나 이름 뒤에 붙은 ‘마르텔’이 증명하듯 그 또한 정식으로 인정받은 패밀리의 일원이었다. 물론 일당이라고는 해도 갓 들어온 신참. 즉 말단 중에서도 말단이지만.
“보, 보나레스?!”
로르는 입가를 닦아내며 다급하게 물었다. 보나레스는 서부의 개척자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부자들의 기차다. 서부에서 말하는 부자란 단순히 돈이 많은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뺏고 빼앗기는 것이 당연한 무법의 세계에서 부를 거머쥘 정도의 힘을 가진 강자들을 말한다. 그런 이들이 산더미처럼 타고 있는 기차를 털자는 것은 제 아무리 유명한 ‘패밀리’라고 할지라도 쉽게 입에 담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래, 보나레스.”
주점의 그늘진 구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대답했다. 그 엄숙하고 단호한 목소리는 대답이라기 보단 오히려 선포에 가까운 인상마저 풍겼다. 목소리의 주인인 ‘조안 마르텔’은 로르와는 달리 전형적인 서부 무법자들의 인상에 가까웠다. 키가 크고 근육이 단단히 잡혀 남자다운 면모가 강했고 왼쪽 눈에는 길게 찢어진 날카로운 흉터가 있어 위압감을 풍기기에 충분했다. 그가 쓰고 있는 붉은 띠를 두른 검정색 웨스턴 모자는 그가 마르텔 패밀리의 간부 중 한 명임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서부 최대 굴지의 기차를 털자는 이 기묘하고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가 어째서 이런 허름한 주점에서 나오고 있는 것인가. 그 이야기의 시작은 3일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마르텔 패밀리는 삼류 양아치들과는 다르게 엄연한 ‘사업’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었다. 요컨대 단순히 약탈하는 것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활동을 하는 단계까지 오른 조직 중 하나라는 이야기다. 물론 서부에서 이야기하는 ‘경제활동’이란 중앙 대륙의 그것처럼 얌전하고 깨끗한 일은 아니다. 살인, 약탈, 유괴, 절도, 기타 등등. 패밀리들의 ‘사업’이란 많고 많지만 마르텔 패밀리의 주요 사업은 ‘운반’이었다. 운반하는 물건이 무엇인지, 누구에게 운반하는 것인지는 조직원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멀쩡히 법이 성립하는 곳이라면 그 수상함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보겠지만 애초에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서부에선 돈이 들어온다면 무슨 일이던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조직원들이 알고 있는 것은 조직이 운반하는 ‘물건’을 약탈하려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들에게서 ‘물건’을 지킴으로써 사치스럽게 먹고 즐길 수 있는 돈이 들어온다는 것 뿐. 아마 조안 마르텔을 비롯한 조직의 간부들은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고 있겠지만 그들이 조직원들에게 ‘물건’에 대해 말해줄 일은 없을 것이다. 서부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살아남는 법을 몸에 익히고 있었다. 때문에 아는 것만으로도 목숨이 위험해지는 것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물건’이 무엇인지 조금도 궁금해 하지 않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르텔 패밀리의 ‘사업’은 번성하고 있던 것이다.
문제의 발단이 된 것은 3일 전. 마르텔 패밀리의 돈줄인 ‘물건’을 공급해주는 딜러가 보안국에 잡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딜러가 잡힌 것 자체는 그다지 큰일은 아니었다. 사업에 어느 정도 타격은 있겠지만 그래도 치명적인 수준은 아닐 터였다. 다만 문제는 마르텔 패밀리가 얼마 전 사업을 한층 더 크게 확장시키기 위해 큰돈을 투자해 딜러에게서 ‘상질의 물건’을 대량으로 사들였다는 것이고, 비싼 돈을 지불한 물건을 아직 받지 못한 시기에 딜러가 포획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마르텔 패밀리에게 남는 것은 대량의 손실뿐. 그것도 조직의 존망 자체가 위험할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손실이었다.
그들의 사업은 중앙 대륙처럼 건실한 사업이 아니니 당연히 그에 대한 보상제도가 존재할 리가 없었다. 오늘 간부인 조안 마르텔을 비롯하여 패밀리들이 주점에 모인 것은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함이었다. 의리와 명예가 중요시되는 중앙 대륙의 마피아들과 달리 서부의 패밀리는 지극히 합리적인 손익계산에 의해 이루어진 관계다. 따라서 조직원들에게 줄 자금이 확보되지 않으면 패밀리가 붕괴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자금은 나중에라도 다시 확보할 수 있지만 ‘마르텔’이라는 이름으로 얻어낸 신용만큼은 쉽게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간부들은 어떻게 해서든 ‘마르텔’이 붕괴한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만큼은 피해야만 했다.
“하지만 왜 보나레스야? 열차 강도라면 다른 기차도 많을 텐데.”
한 조직원이 묻자 조안 마르텔은 질문마저도 달갑지 않다는 듯이 혀를 차며 대답했다.
“돈이 목적이 아니야.”
조안의 말에 조직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띄웠다. 기차를 터는 이유가 돈 말고 무엇이 있나 묻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워낙 심각했던 터라 누구도 그것을 묻지 않았다. 단 한 명. 이 장소의 분위기를 전혀 읽지 못하고 있는 한 남자를 제외하고서.
“그럼 왜 보나레스를 털자는 거예요?!”
로르는 잔뜩 겁에 질려 외쳤다. 그 말에 주변의 동료들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잖아도 심기가 불편한 조안에게 말꼬리를 잡는 것은 그다지 좋은 생각이라고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탈출시키기 위해서야.”
아니나 다를까 조안은 불편한 얼굴로 혀를 차며 대답했다.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했던 것인지 로르는 정말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자 조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설명을 더했다.
“보안국 놈들이 꼼수를 부려 ‘딜러’를 보나레스에 태워 옮긴다고 하더군. 철도회사 녀석들과도 짜고서 뒤통수를 칠 작정이었던 모양이지. 하지만 이 서부에서 돈으로 사지 못할 것은 없지. 목숨도, 마음도, 정보도 말이야.”
조직원들은 조안이 이런 중요한 정보를 어떻게 얻어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그것을 묻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사건의 개요를 알아도 로르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어찌됐건 마적들조차도 제 발을 절며 도망간다는 보나레스를 털어야 한다는 것이니까.
“로르. 이번에는 네가 ‘승객’이다.”
“히끅?!”
조안의 말에 로르는 대답 대신 요란한 딸꾹질 소리를 울렸다. 열차털이에 있어 ‘승객’이라고 함은 쉽게 말해 앞잡이. 요컨대 평범한 승객으로써 기차에 올라 타 때가 되면 동료들에게 습격신호를 내리는 역할이었다. 물론 그렇게 비중이 큰 역할은 아니지만 이제 갓 들어온 신참에겐 버거운 역할이 틀림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로르한테는 아직 힘든 게 아닐까?”
한 동료가 그렇게 말하자 조안은 비웃듯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이제 저 녀석도 밥값을 할 때가 됐지. 저런 겁쟁이 녀석에게 총을 쏘며 싸우라고 해봤자 의미가 없어. 적어도 이런 쪽으로는 도움이 돼야지.”
조안은 그렇게 말하며 석상처럼 굳어버린 로르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천천히 울려 퍼지는 발소리에 맞춰 나무판자가 끼익끼익 비명 같은 소리를 질러댔다. 마침내 로르 앞에 선 조안은 로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신호를 보내는 법을 알려줄 테니 잘 들어라.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동료가 모두 살아남을 수도, 열 명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
여전히 우스꽝스러운 딸꾹질 소리를 울리며, 로르 마르텔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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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법자」
그곳은 감옥이라기보다는 돼지우리에 가까웠다. 바닥에 깔린 볏짚은 오물에 젖어 있었고 쇠창살은 이미 녹슬어버려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단 한줄기의 빛조차 비추지 않는 까만 어둠 속을 채우는 것은 코가 삐뚤어질 듯한 끔찍한 악취뿐이었다.
하루만으로도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은 감옥 속에서 ‘그’는 며칠씩이고 묵묵하게 버티고 있었다. 오로지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을 주시하며. 마치 무엇인가가 어둠속에 숨어있기라도 한 듯이.
간수들은 ‘그’가 이미 미쳐버린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제 아무리 악명 높은 무법자라도 하루만 머물면 앓는 소리를 내는 구렁텅이 같은 감옥에서 ‘그’는 그저 시체처럼 조용히 어둠을 주시하고 있었다. 때때로 이유 없이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을 볼 때면 간수들은 허술한 우리에 갇힌 맹수를 보고 있는 것처럼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다.
정작 ‘그’는 간수들의 공포심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는 그저 한결같이 어둠을 마주하고 있을 뿐. 하지만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어둠을 감시하는 그 섬뜩한 눈동자만큼은 분명 맹수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커티삭’은 안에 있나?”
언제까지고 영원할 것만 같던 침묵을 깨뜨리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간수들은 허겁지겁 대답을 했다. 그리고 그 직후 감옥의 문이 열렸다. 며칠간 어둠 속에 있던 ‘그’는 갑자기 쏟아지는 빛에 눈을 찌푸렸다.
“흥, 설마 네 녀석이 잡혀있는 꼴을 보게 될 날이 올 줄이야.”
감옥 문을 지나쳐 들어온 것은 무법자들만큼이나 험악하고 거친 인상을 가진 사내였다. 굳이 차이점을 찾자면 가슴에 달린 보안관 배지라고 할 수 있었다. 확실히 정의감에 불타는 보안관들은 개죽음을 당하기 십상이니 실상 경험 많은 보안관들은 절반쯤은 무법자들과 같다고 볼 수 있었다.
“이제 밖으로 나올 시간이다. 경사스럽게도 그 유명한 ‘보나레스’가 네놈을 위해 기다리고 있다더군. 처음이자 마지막 호화 여행이 되겠지. 하지만 너한테는 마냥 기쁜 일도 아닐 테지? 네 사형 날짜가 확정되었다는 이야기니까.”
보안관은 그를 향해 비웃듯이 말했다. 그러자 ‘그’는 그제야 빛이 눈에 익은 것인지 천천히 눈을 뜨며 보안관을 바라보았다.
“죽음은 내게 안식일뿐이지, 친구.”
친근하기 짝이 없는 ‘그’의 말에 보안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악명을 떨친 무법자라 하여 마냥 거칠고 험할 줄 알았더니 오히려 선선한 인상에 가까웠다. 보안관이 그 말에 대한 의미를 물어보려고 한 순간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산다는 것은 나 같은 사람에겐 일종의 고행이지. 죽음이야 말로 안식이자 평화일세. 그럼에도 끈질기게 이 몸뚱이를 붙들고 있는 건 꼭 보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지.”
“보고 싶은 것?”
보안관의 물음에 ‘그’는 나지막이 미소를 지을 뿐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보안관은 코웃음을 치며 간수들을 향해 턱짓을 했다. 그러자 간수들은 물통을 가지고 오더니 ‘그’를 향해 물을 끼얹었다. 한차례 물세례를 쏟은 후에는 ‘그’를 감옥 밖으로 끌고나갔다.
“어차피 가는 길도 멀 테니 한 번 이야기 해봐. 철도 회사도, 패밀리의 히트맨들도, 내노라 하던 현상금 사냥꾼들도 손대지 못하던 무법자 ‘커티삭’이 어쩌다 잡힌 거지?”
간수들이 ‘그’의 팔에 몇 개씩이고 수갑을 채우는 동안 보안관은 ‘그’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그’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름답더군.”
“흠?”
“아주 아름다운 여자였어.”
전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지껄이며, 무법자 ‘커티삭’은 처음으로 흡족스러운 듯이 미소를 지었다.
프롤로그
「보안관」
코든올츠의 대로에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 총성에 마을은 소리를 빼앗긴 것처럼 조용해졌다. 적막의 시선으로 물든 거리에 남은 것은 서서히 쓰러지는 보안관의 몸뚱이 뿐. 탄환은 보안관 배지를 관통해 심장을 꿰뚫었고, 보안관은 단말마조차 없이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 죽음에 탄식하는 이도, 애도하는 이도 없이. 시체는 누군가가 잊고 간 보릿자루처럼 길 한복판에 버려졌다.
“입만 산 놈이군. 마을을 지킨다느니 큰소리를 치더니 총을 뽑지도 못했잖아?”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는 리볼버를 건들거리며 복면을 두른 무법자가 말했다. 그 뒤에 있는 여섯 명 남짓한 동료들은 마을의 젊은 여자들에게 자루를 씌워 납치하고 있었다. 대로 주변을 둘러 싼 주점이나 건물 창가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 둘씩 창문을 닫았다. 마을은 죽은 것처럼 조용했고 무법자들의 조롱 섞인 웃음소리만이 바람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 더 이상 그 참담한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그 모든 것의 바깥에 서있던 단 한 명을 제외하고서.
코든올츠로부터 700야드 정도 떨어진 바위언덕 위에서 ‘리제 아너스팅스’는 모든 자초지종을 지켜보고 있었다. 메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놓인 바위에 걸터앉은 채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장총에 탄환을 재고 있었다. 진홍빛깔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뽀얀 피부 위에 연회복 같은 화사한 옷을 뒤집어쓴 그 우아한 모습은 개척민보단 고풍스러운 귀족에 더 가까웠다. 굳이 말하자면 머리에 눌러 쓴 카우보이 모자 정도가 서부인다운 유일한 요소였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붉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황야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노을로 물들어가는 황무지의 풍경과 썩 어울렸다. 아마도 그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황혼만큼이나 붉고 선명한 탓이었으리라. 이윽고 장총을 건들거리며 벼랑 끝에 선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 마리의 매였다. 내리지는 황혼을 똑바로 응시하며 카우보이 모자를 눌러쓰는 그 모습을 보며 누가 귀족을 연상할 것인가. 제 아무리 치장하고 덧대어도 그녀는 분명 서부인이었다.
그녀가 장총을 겨누는 동안에도 코든올츠의 무법자들은 그저 태연하게 납치한 여자들을 옮기고 있을 뿐이었다. 700야드는 시야의 밖이자 상식의 밖이다. 지평선 끄트머리에 걸쳐 풍경마저 흐릿한 그 속에서 차갑게 식은 총구가 자신을 향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그들의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그들 하나하나의 모습을 선명하게 붙잡고 있었다. 지평선뿐만 아니라 그 너머에 펼쳐진 모든 풍경까지. 그 눈동자로 바라보는 풍경은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할 장엄한 광경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격철을 당겼다. 묵직한 쇳소리를 울리며 공이는 당장이라도 뇌관을 때릴 준비를 했다. 방아쇠에 올려둔 손가락은 섬세하게 그리고 조용히 움직였다. 마지막 순간 그녀는 호흡을 멈췄고, 그 순간 그녀의 시야는 더할 나위 없이 선명해졌다. 바람에 휘날리는 천막의 흔들림과 깃털을 흩뿌리며 날아가는 새의 날갯짓까지. 마치 그 찰나의 시간마저 눈동자에 새기듯이.
끝내 탄력의 한계를 넘어선 방아쇠가 당겨졌다. 한계까지 비틀렸던 용수철은 온 몸을 풀어내며 격철을 움직였다. 격철은 뇌관을 향해 내리꽂혔고 공기를 울리는 저릿한 총성과 함께 총구가 치솟았다. 총구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찰나를 찢어 뚫고서 날아간 총탄은 무법자의 두건과 모자 사이의 관자놀이를 정확히 관통했다. 선혈이 꽃처럼 피어오르며 몸뚱이는 망치에 얻어맞은 것처럼 바닥에 내리꽂혔다.
그것은 사냥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동료가 쓰러지자 무법자들은 재빨리 흩어지기 시작했다. 리제는 바로 레버를 당겼다. 탄피가 등 뒤로 튕겨나가고 다음 탄환이 약실에 장전되었다. 총구는 마을 대로를 달리고 있는 두 번째 표적을 향했다. 바람과 거리. 총구와 목표물 사이에 놓은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 차곡차곡 풀려갔다. 딱 맞는 열쇠로 자물쇠를 여는 것처럼. 마치 그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순인 듯이.
도망치는 무법자를 향해 리제는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울리자 필사적으로 달리던 무법자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 바닥을 굴렀다. 망설일 틈도 없이 리제는 다시 레버를 당겼다. 장전이 끝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빠른 템포로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은 나무 뒤로 몸을 숨기려던 무법자의 머리에 정확히 명중했다. 잎사귀를 선혈로 물들이며 남자는 수풀 속으로 쓰러졌다.
노도와 같은 기세는 멈출 기색이 없었다. 연달아 총성이 울렸고 그 때마다 누군가가 쓰러졌다. 영문도 모른 채 차례차례로 살해당하는 동료들을 보며 남은 이들은 공포에 질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살기 위한 발버둥도 모두 무의미했다. 달리는 정도로는 그녀의 총탄을 피할 수 없었고 어딘가에 몸을 숨기더라도 아주 작은 틈새만 있다면 그녀의 총탄은 빗나갈 일이 없었다.
마침내 남아있는 무법자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무엇하나 무서울 게 없어보이던 자신만만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저 겁에 질려 실성할 것만 같은 꼴사나운 남자 한 명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동료가 차례차례로 죽는 모습을 최후까지 지켜보았으니 그 공포에 정신이 나가버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납치하던 여자를 방패로 삼은 채 머리에 총을 겨누고선 무어라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외침은 리제에게 닿지 않았다.
리제는 천천히 호흡을 내뱉었다. 느리게 폐를 빠져나가는 호흡에 맞춰 시간마저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세상의 소리가 멀어지고 몸속을 맴도는 고동 소리가 선명해져갔다. 마침내 모든 소리가 정적으로 물들었을 때, 끼릭거리는 소리를 울리며 방아쇠가 움직였다. 격철이 뇌관을 때리자 불씨가 터졌다. 폭발하는 불꽃을 딛고서 탄환은 총신을 벗어나 목표를 향해 똑바로 나아갔다. 섬광처럼 쏘아져나간 총탄은 인질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가 정확히 남자의 미간에 꽂혔다. 인질에게 씌워둔 자루에 피를 튀며 마지막으로 남은 남자는 고개를 젖히듯 뒤로 쓰러졌다.
상황이 일단락되자 리제는 짧게 한숨을 쉬며 모자를 벗었다. 챙에 걸려있던 탄피가 툭 떨어지며 사냥의 끝을 알렸다. 어느 새 하늘은 완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고 언저리에 걸쳐있던 구름들도 물러가고 없었다. 선명한 황혼이 그녀가 서있는 바위 언덕을 비추고 있었다.
“이보시오! 대체 무슨 일이오?”
언덕 아래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제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언덕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한 남자가 말을 탄 채 언덕을 올려다보며 외치고 있었다. 그 손은 여차하면 말을 타고 도망가기 위해 고삐를 꽉 쥐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쪽 마을에 도적들이 들어온 것 같아서요.”
리제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미소를 보자 남자는 비로소 안심이 되는지 어깨를 축 떨어뜨렸다.
“도적들이 코든올츠로 달려들었다고? 거긴 보안관이 한 명 밖에 없는데. 정말 큰일 났군. 이 근방에 있는 도적이라면 아마도 로튼 갱 패밀리일 텐데, 그 녀석들은 여간 악질이 아니라고 들었소.”
“그래요? 여긴 제 관할이 아니라 잘 모르겠네요.”
리제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남자는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관할? 당신 혹시 보안관이오?”
그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리제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그런 것보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남자가 ‘그게 뭐요?’라고 묻자 모자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서 머리에 쓰며 말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기차역이 어디죠?”
“기차역? 여기서 말을 타고 가면 3일 정도 떨어진 곳에 간이 기차역이 하나 있긴 있소만…. 무슨 기차를 타려고 그러는 거요?”
“보나레스에. 중요한 일이 있거든요.”
리제는 모자를 꾹 눌러쓰며 기대감에 부푼 미소와 함께 말했다.
프롤로그
「현상금 사냥꾼」
“그 때 내가 말했지. ‘이봐, 커티삭. 어딜 그렇게 급히 가시나?’ 그러자 그는 뒤를 돌아보았지.”
서부의 주점치곤 제법 깔끔한 어느 주점이었다. 평소에도 사람이 북적거리는 주점이었지만 그날따라 사람들이 한 테이블 주위에 모여 있는 기이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군중의 중심에는 삐딱하게 의자에 걸터앉은 한 남자가 있었다. 얼굴이나 몸은 한동안 씻지 않은 듯 꾀죄죄했고 옷은 때가 묻어 있어 그다지 깔끔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서부의 남성상에 가까웠으며 깡마른 체격에 어딘가 얄궂은 인상을 풍기는 남자였다.
“무법자라고 으스대는 녀석들은 산더미만큼 봤지만…. 세상에, 그런 남자는 정말로 처음 봤어. 한 눈에 그가 서부 최악의 무법자라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지.”
남자는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펼치며 술병채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쪽 다리를 허벅지 위에 올리고서 거만한 시선과 말투로 주변을 대했지만 누구 하나 그것에 대해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마저 선망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듯 했다.
“우리는 한 눈에 서로가 대등한 숙적임을 알 수 있었어. 복잡한 설명 따위는 필요 없었고 오로지 삶과 죽음의 언어만이 그 자리에 있었지. 그건 그야말로 최후의 무대였어. 보통 그 순간이 되면 잔챙이들은 눈물을 짜내거나 허세를 부리곤 하지만 그에겐 그런 것이 없었어. 마치 오랜 친구를 바라보듯 침착하게 웃을 뿐이었지.”
장황하게 펼쳐대는 남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들은 저마다 수긍을 하기도, 감탄을 하기도 했다. 몇몇 여자들은 남자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아양을 떨기도 했다.
“그는 확실히 무법자였지만, 그래도 그런 모습을 보니 일종의 존경심이 생기더군. 하긴 ‘늑대’라면 무법자라도 다른 녀석들과는 질이 다른 셈이었지. 중앙 대륙으로부터 서부를 해방시키기 위해 싸우는 자유의 전사들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 자리에서 그는 현상수배범이었고, 나는 현상금 사냥꾼이었지. 그를 놓아줄 수는 없었어. 대신 나는 동전을 한 닢 꺼내들며 말했지. ‘이걸 신호로 하지. 정정당당하게. 뒤탈 없이 결판을 짓자고.’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 ‘죽음과 삶이군.’ 나는 대답했지. ‘우리들의 언어잖나’ 그리고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었어.”
남자는 목을 축이려는 듯 나무잔에 담긴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취기가 돌아 얼굴이 반쯤 빨갛게 물들었지만 그래도 말은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승부에서 이길 자신은 없었어. 물론 등 뒤에서 쐈다면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됐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명예를 아는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장면이었어. 그래도 역시 서부 최악의 무법자를 눈앞에 둔 순간 나도 모르게 겁이 나더군. 솜씨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지만 그래도 커티삭보다 빨리 뽑을 자신은 없었거든. 그래서 나는 내 목숨을 신에게 맡기기로 했지.”
“그래서? 어떻게 됐죠?”
주점에 있는 남자들 치고는 꽤 어려보이는 소년이 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말을 이었다.
“동전을 던졌지. 그렇게 되면 이제 누구도 승부를 멈추지 못해.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어.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거든. 나는 동전이 닿기 직전에 총을 뽑으며 서서히 몸을 옆으로 움직였고, 커티삭은 믿기지 않을 속도로 총을 뽑았지. 먼저 총을 뽑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커티삭이었어. 설령 몸을 움직인다고 해도 그처럼 대단한 총잡이에게 실수라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 하지만 그 순간 신이 날 도왔어. 빗나갈 리가 없던 총알이 볼을 스치며 날아간 거야. 그리고 그 직후 나는 총을 쐈지. 하지만 움직이면서 쏜 탓인지 조준이 약간 빗나갔어. 심장을 노리고 쏜 것이 어깻죽지에 명중한 거야. 하지만 그 한 발 때문에 커티삭은 총을 떨어뜨리고 말았어. 그 순간 내 승리는 굳어진 셈이지. 그걸 알고 있던 커티삭은 피가 흐르는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어. ‘끝인가.’ 나는 물었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그러자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하더군. ‘없군. 진정 자유로운 땅에 묻히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 그 말을 들은 나는 총을 내릴 수밖에 없었지. 여태껏 무법자들에게 동정이나 자비를 베푼 적은 없었지만 서부의 자유를 위해 싸운 자를 죽일 수는 없겠더군.”
“하지만 보안관에게 그를 넘기셨잖아요? 어차피 사형당하는 것 아닌가요? 이미 사형 집행일이 정해졌는데.”
“뭐 그렇긴 하지. 결국 제일 중요한 건 돈이니까. 하지만 운이 좋다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 ‘늑대’의 동료들이 구해줄지도 모르고. 어쨌든 이제 그의 운명은 신이 결정할 테지.”
그렇게 이야기는 일단락을 맺었지만 군중들은 물러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온갖 질문 공세를 퍼부었으며 또 다른 현상수배범을 잡았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남자는 신이 나서 이야기를 계속 했고 주점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몰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 한 남자가 외쳤다.
“거짓말 하지 마 이 사기꾼아! 내가 피츠노빌의 보안관에게 이야기를 들었다고! 커티삭을 잡은 건 ‘나탈리 리들’이라는 여자야! 그래서 커티삭이 총을 뽑지 못한 거라고! 진정한 사나이는 여자를 쏘지 않으니까!”
자신이 사기꾼으로 몰리기 시작하자 이야기를 하고 있던 남자도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어디서 그딴 이야기를 주워들은 건지는 모르지만 날 사기꾼으로 몰 생각이라면 각오는 돼 있는 거겠지? 내가 커티삭을 잡았어. 이 개자식아, 넌 사나이들끼리의 결투를 모욕할 수 없다고!”
“개소리! 아주 소설을 쓰고 계시는군. 어디 한 번 커티삭을 잡은 그 잘난 솜씨를 보여주시지! 응? 장담하는데 넌 이 마을에 있는 멍청한 보안관만큼이나 느려 터졌을걸!”
언성을 높이는 두 사람을 보며 사람들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워 했다. 언성은 잦아들 기색이 없었고 그저 소란스러움을 더해갈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주점 안에도 유달리 조용한 곳이 있었다. 주점 안쪽에 놓인 바테이블이었다. 테이블 안쪽에 서서 유리잔을 닦고 있는 늙은 바텐더를 비롯하여 그곳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강 건너 불구경을 하듯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쪽이든 내가 아는 이야기와는 다른걸.”
바테이블에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한 여성이 중얼거렸다. 마치 눈과 얼음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여성이었다. 머리카락과 피부는 설원처럼 새하얀 빛깔이었고 눈동자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청량한 푸른빛이 감돌았다. 반면에 몸에 걸친 기다란 코트나 짧은 반바지. 그리고 목에 두른 머플러나 머리에 쓴 모자는 하나같이 짙은 검정색이었다.
“손님께서도 알고 계신 이야기가 있으신지요?”
그녀의 이야기에 흥미를 가진 바텐더가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유리구슬이 흘러가는 듯한 유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듣기로도 커티삭을 잡은 건 여자라더군. 하지만 저 남자가 하는 말과도 조금 틀린 점이 있어.”
“호오, 어떤 점이 틀린 걸까요?”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말을 꺼냈다.
“사실 커티삭은 소문과는 달리 그다지 총을 쏘는데 자신이 있는 편은 아니라더군. 그래서 그는 믿을 수 있는 부하 두 명을 항상 데리고 다니지. 그들이 휘스트 타운에 있던 보안관 사무실을 폭파 시킨 후 마을을 빠져나가려 했을 때, 갑자기 한 여자가 그들의 앞을 막아섰어. 커티삭의 부하들은 바로 총을 뽑으며 말했지. ‘아가씨, 험한 꼴 보기 싫으면 당장 꺼져.’라고. 그들은 상대가 여자라고 방심을 하는 얼간이들이 아니었거든. 총이 있으면 어린아이라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도 했고, 뭐…. 여자가 허리에 총을 차고 있는걸 보기도 했으니까.”
“그럼 대체 어떻게 커티삭을 잡은 거죠?”
“아주 간단한 이야기야. 여자가 총을 뽑았지. 그들이 눈을 깜빡이는 것보다 짧은 찰나였어. 여자의 허리춤에서 섬광처럼 무언가가 반짝이더니 정신을 차렸을 땐 두 명의 부하들은 모두 쓰러진 후였지. 그들은 여자가 총을 뽑는 순간도, 총을 다시 집어넣는 순간도 보지 못했다고 하더군. 그저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이 그들의 앞길을 막은 채 서있는 여자의 모습이 그곳에 있을 뿐이었지.”
그 말을 들은 바텐더는 한동안 그녀가 농담이라도 하는가 싶어 벙찐 표정을 짓더니 이내 허탈한 쓴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흥미롭긴 하지만 그건 조금 믿기 힘든 이야기군요.”
“그래?”
“서부 최악의 무법자라는 남자가 부하 두 명을 데리고서 고작 여자 한 명에게 당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이야기 같군요. 조금 황당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네요.”
“…”
바텐더의 말에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대신 자리를 일어나며 물었다.
“얼마지?”
“괜찮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으니 받은 셈 치죠.”
그 말에 그녀는 미소를 지을 뿐, 아무런 대답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점을 나갔다. 문을 열고 한 발짝 나서자마자 산만한 군중의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복잡하게 비틀린 길을 따라 뻗어나가는 시장가. 발을 디딜 틈도 없이 꽉 들어찬 무수한 군중들과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호객 소리. 조악한 간이 상점이나 아예 바닥에 천을 깔고서 물건을 파는 장사꾼까지. 파는 물건도 도무지 일관성이라고는 없는 혼잡스러운 꼴이었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섞여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축음기를 통해 재생되는 누군지 모를 여성의 흥겨운 노랫소리. 때때로 조잡한 잡음이 섞이긴 했지만 그 노래는 어딘가 시장의 풍경을 독특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활기차게 떠들어대는 시장을 향해 그녀는 차분한 발걸음으로 뛰어들었다. 음악소리는 등 뒤로 남겨져 시끄러운 호객소리에 지워지고 산만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자자, 보고 가세요! 서부에서 가장 튼튼한 냄비입니다! 코끼리가 밟아도 멀쩡해요!”
“영웅이 되고 싶다면 메이든 헤더슨 사의 총을! 악당이 되고 싶다면 리든 홀 사의 총을! 이것만 있으면 보안관이든 늑대든 무서울 게 없답니다!”
지나쳐오는 사람들과 마차를 피해가며 그녀는 시장가를 가로질렀다. 세상의 모든 물건이 거기에 있는 것만 같았지만 그래도 그곳에 그녀가 원하는 것은 없었다. 묘기를 펼치는 광대에게서도, 돈 통을 앞에 두고서 기타를 연주하는 거지에게서도 눈길을 돌린 채. 북적한 시장 틈새 사이로 좁다랗게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갈 길을 서둘렀다.
마침내 시장을 빠져나와 그녀가 향한 곳은 기차역이었다. ‘위즐리 기차역’이라고 적힌 요란한 간판을 지나치자 커다란 건물이 드러났다. 황야의 여기저기에 놓인 간이 기차역과는 딴판이었다. 커다란 건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모습은 마치 호화로운 은행 같은 모습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네 개나 되는 매표소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녀는 늘어선 사람들의 꼬리에 달라붙어 자기 차례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때때로 기차의 기적이 울렸고 여기저기서 안내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례가 다가오는 것은 생각만큼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가 매표소가 다가가자 유리 안쪽에 있던 남성 안내원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어딜 가시건 언제 가시건 위즐리 기차역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용건은 어떻게 되시나요?”
“‘보나레스’에 예약을 했는데.”
“예약이요? 실례지만 성함을 물을 수 있을까요?”
안내원은 서랍 안에서 ‘보나레스’이라고 적힌 커다란 장부를 꺼내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나탈리 리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지금 확인하겠습니다.”
안내원이 장부를 보며 확인하는 동안 그녀는 매표소에 기댄 채 기차역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황당한 이야기’라….”
그렇게 중얼거리며 천장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희미하게 미소가 어른거렸다.
프롤로그
「현상수배범」
“역시 불을 붙일까?”
“안 돼. 그러면 큰일 날거야.”
아무것도 없는 까만 어둠 속에서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행여 누군가 들을까 싶어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한 쌍의 남녀. 그 비밀스러운 목소리는 마치 장난칠 준비를 하는 어린 아이들처럼 들뜬 기색이 엿보였다.
“그치만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그럼 어떡하지?”
“살살 붙이면 괜찮지 않을까?”
“맞아, 그러면 괜찮을 거야.”
“살짝 붙여보자.”
“사알짝….”
화악, 성냥에 불이 붙는 소리가 들리며 어둠 속에 자그맣게 불빛이 피어올랐다. 어스름하게 빛나는 성냥불에 마치 쌍둥이처럼 꼭 닮은 두 사람의 얼굴이 비추었다. 남자 쪽은 단정하고 깔끔하게 정돈한 머리카락에 어딘가 피곤한 듯한 눈초리였고 여자 쪽은 양 갈래로 묶은 부스스한 머리카락에 각성제라도 먹은 것처럼 번쩍 뜨인 눈초리였다. 두 사람 모두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내리고 있었고 시선은 어딘가 흐리멍덩했다. 복장 또한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었는데, 남자는 깔끔한 검정색 정장을. 여자는 화사한 검정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예쁘다아.”
흔들리는 불꽃을 보며 여자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기웃거리는 모습은 사랑스럽기 짝이 없었으나 성냥불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는 어째 묘하게 초점이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말투도 묘하게 음률이 제대로 되지 않아 마치 약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
“봐, 불꽃이 이렇게나 많아.”
그렇게 말하는 성냥불을 들어 올리자 희미한 불빛은 그들의 어깨 너머를 비췄다. 어둠 속에 떠오른 성냥불이 비추는 것. 그것은 방 안을 가득 채운 무수한 양의 다이너마이트였다. 두 사람만으로도 꽉 찰 정도로 좁다란 방 안에는 오로지 벽에 세워진 선반 밖에 없었으며, 그곳에는 모두 다이너마이트만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남자는 한숨과 함께 말했다.
“이걸 어떻게 다 옮기지?”
“수레차가 있어야 할지도.”
“우리는 수레차가 없으니까 힘들겠네.”
"어쩌면 좋을까?"
““으음~~””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똑같은 타이밍에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와중에도 성냥은 서서히 타들어가고 있었다. 무수한 폭발물 사이에서 성냥불을 켜고 있다는 위험성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그들은 눈을 질끈 감은 채 고뇌를 흘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때 여자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사람들한테 도와달라고 하자!”
“그래! 그러면 되겠네! 다 함께 이걸 던지면서 놀자고 하면 모두 도와줄 거야!”
“그치만 사람들한테 전부 도와달라고 말하려면 큰일이겠네.”
“이럴 때는 마을의 높은 사람한테 부탁해야지.”
“와아, 만사형통이네!”
“그럼 빨리 높은 사람한테 부탁하러 가야겠다.”
“근데 높은 사람이 누구야?”
“글쎄? 마을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아닐까?”
“무서운 사람….”
“으음….”
두 사람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을 시작했다. 오랜 고뇌 끝에 침묵을 깨뜨린 것은 남자였다.
“아까 봤던 고양이가 정말 무서웠지?”
“응응, 우리들을 노려보고 있었어.”
“핫도그를 팔고 있던 이상한 아저씨도.”
“고기의 맛을 아는 눈이었지.”
“모자 가게의 할아버지도 무서웠어.”
“주름이 몇 개인지 셀 수 없어서 쇼크였어!”
“길거리에서 본 아줌마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패션센스였지!”
“누가 제일 무서운지 모르겠네.”
“세상은 무서운 것투성이구나.”
“역시 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무서운 것 아닐까?”
“황야의 무법자!”
“하지만 무법자들은 보안관을 무서워해.”
“정의는 언제나 악을 짓밟으니까.”
“그럼 가장 높은 사람은 보안관이겠다!”
“공포야말로 권력이구나!”
“빨리 보안관한테 폭탄을 훔치는 걸 도와달라고 부탁하러가자!”
“이걸로 사건 해결이네!”
그렇게 말하며 그들은 자리를 박차고서 뛰쳐나갔다. 창고를 빠져나가 햇볕이 내리쬐는 번화한 마을의 거리를 자유롭게 내달렸다. 마치 춤을 추듯이 변덕스럽고 유쾌하게. 그들이 들고 있던 성냥이 폭발물로 가득 찬 창고 바닥에 떨어져 있다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로부터 2분 후. 마을의 역사에 길이 남을 대참사를 일으킬 이 기묘한 남녀의 정체는 같은 시각 마을 광장의 벤치에 앉아서 신문을 읽고 있던 한 귀머거리 노인이 쥐고 있었다.
언제나 정해진 시간이 되면 광장으로 나와 신문을 읽는 것이 취미인 노인은 그 날도 여지없이 마을 광장에 나와 있었다. 제법 번화한 마을인터라 지나가는 사람들은 많지만 광장의 벤치에 앉아 신문을 읽는 것은 꺾일 수 없는 고민이자 유일한 취미라고 할 수 있었다. 청각을 잃은 이후로 그는 세상의 재미를 3할 정도 잃어버렸고 오로지 무언가를 보는 것만이 취미였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처럼 마을 광장의 벤치에 앉아 즐겨 읽던 ‘레일로드 데일리’의 신문을 펼쳤다. 신문의 1면을 장식한 기자는 ‘로이 부쉬’라는 이름의 기자. 두 달 전부터 두각을 드러내며 자주 특종을 올리기에 눈여겨보고 있던 기자였다. 이렇듯 기자의 이름을 외우는 것 또한 그의 사소한 취미였다.
‘공포의 폭탄마 2인조. 이번에는 론울드의 폐광을 폭파!’
커다랗게 적힌 기사의 제목 밑에는 광부 복장을 입은 한 쌍의 남녀가 도망치는 사진이 찍혀있었다. 사진 밑에는 이 사건의 상세와 더불어 이 ‘폭탄마’에 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었다. 금광에서 금을 캐던 광부가 일이 힘들어서 고된다는 내용의 잡담을 흘린 것이 그 사건의 시작. 그 이야기를 들은 정체불명의 남녀가 일을 도와주겠다며 나서더니 그대로 금광에 대량의 폭탄을 처박아 금광을 붕괴. 아이러니하게도 덕분에 대량의 금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부당한 체포로 마을을 떠들썩하게 한 보안관의 사무실을 폭파한 스코치 마을 사건이나 울타리가 망가져 두 목장의 소가 섞이자 싸움을 막기 위해 목장 전체를 폭파시킨 사건들이 적혀있었다. 정작 그 스코치 마을 사건 또한 이들 덕분에 보안관이 무법자들과 결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목장이 파괴된 두 목장 주인들은 힘을 합쳐 목장을 재건한 이후 어마어마한 대성공을 거머쥐었다고 한다. 분명 하는 일은 터무니없지만 어째서인지 결과적으로 행운이 따르기 때문에 극히 일부 세간에서는 그들을 행운의 요정으로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흠, 아주 정신 나간 녀석들이로군.)”
노인은 활짝 미소를 지은 채 도망치는 2인조 폭탄마의 사진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이토록 만천하에 사진이 공개될 정도로 조심성이 없는 무법자들이 왜 아직도 활개치고 있는 것인가 궁금해 하던 참에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이 적혀있었다.
‘이들은 범죄자와 너무나도 동떨어진 인상이기 때문에 목격자들도 착각인가 싶어 무시하고 만다. 어느 특정 마을에 길게 머무르는 일도 없고 사건을 일으키는 이유도 워낙 제각각이라 추적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들에게는 고액의 현상금이 걸려있지만 현상금 사냥꾼들 또한 그들을 보고도 놓치기 십상이라고 한다.’
그 말에 노인은 의문을 감출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거액의 현상금까지 걸린 이들을 쉽게 착각하는 일이 있을 수나 있을까? 현상금 사냥꾼들이라면 자기가 노린 사냥감들의 사진이나 몽타주를 끈질기게 들고 다니는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정작 중요한 현상범을 눈앞에 두고도 몰라본다는 것은 조금 믿기 힘든 일이었다.
어딘가 찝찝한 마음을 남긴 채 다음 신문을 넘기려던 참에 갑자기 멀리서부터 한 남녀가 바쁘게 달려오고 있었다.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에 들뜬 어린아이 같은 해맑은 미소를 짓고서.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화사한 옷차림은 크리스마스 그 자체였다. 그렇게 어린 나이는 아닌 것 같았지만 표리가 없는 웃음 때문인지 유치하다고 해야 할지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바람처럼 달려가는 그들의 모습을 무심코 쫓으며 노인은 그들의 모습이 신문에 붙어있는 사진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싶어 그들의 얼굴을 다시금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에이, 설마. 착각이겠지.)”
그리고 그로부터 2분 후. 그 마을이 서부에 세워진 이후 최악의 사건이라 부를만한 폭발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폭발 사건 때 발생한 소음에 의해 청각을 잃었던 한 노인이 기적적으로 청각을 회복했다는 기사가 3일 후에 레일로드 데일리를 통해 실리게 된다. 그들은 어째서인지 사건이 일어난 시각 보안관이 있는 사무실로 찾아갔지만 그 당시 보안관은 폭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나가있었던 터라 그들을 잡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기묘한 폭탄마들은 아직도 잡히지 않은 채 서부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위즐리 기차역’에서.
“있잖아, 헨젤.”
“왜 그래? 그레텔.”
“왜 여기엔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야?”
“사람은 누구나 가고 싶은 곳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와아, 철학적이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으니까.”
“고기도 야채도 편식하지 말고 먹어야지.”
오늘도 번성하고 있는 위즐리 기차역에 기묘한 커플이 출연했다. 마치 무도회장에 나갈 것처럼 옷을 차려입은 화사한 남자와 여자가 한 쌍. 그들은 손을 맞잡은 채 춤을 추며 기차역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음악조차 없는 무대였지만 어째서인지 서로 닮은 두 사람이 물 흐르듯 춤을 추는 모습은 제법 볼만한 구석이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어디선가 그들을 본 것 같다고 중얼거리기도 했으나 이내 그럴 리가 없다며 고개를 저으며 떠나버렸다.
“여긴 기차도 참 많다.”
유려한 스텝을 밟으며 그레텔이 물었다.
“그야 기차역이니까.”
그레텔에 맞춰 춤을 추며 헨젤이 대답했다.
“우리가 타는 기차는 뭘까?”
“‘보나레스’라는 기차야.”
“빨리 보고 싶다.”
“곧 기차가 도착하겠지.”
“어떤 기차일까?”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기차래.”
“와아, 굉장하다.”
“분명 수많은 시련과 아픔을 이겨낸 기차겠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슬픔의 대서사시구나.”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두 사람은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근처에서 그 자초지종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황당함에 허탈한 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물론 두 사람은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관객이고 이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자기들만이 주역인 듯이.
“그런데 헨젤, 우리들은 왜 기차에 타는 거야?”
“그거야 물론 ‘웨스트우드’라는 마을에 가기 위해서지. 거기서 커다란 축제가 열린다고 하더라고! 뭐라고 하더라? ‘범죄와의 전쟁’이라던가?”
“축제 이름이 참 이상하다.”
“거기서 ‘늑대’를 처형해서 뭔가 마을의 안전을 기리는 그런 풍습인 것 같아.”
“히야, 야만적인 축제구나.”
“인간은 때때로 야만적인 존재인거야.”
“불꽃놀이도 있으면 좋을 텐데.”
“없으면 만들면 되잖아. 다이너마이트를 잔뜩 가져가서 사방팔방에 뿌리고 다니는 거야.”
“와아, 헨젤은 천재!”
어쩐지 어마어마한 범죄 공모가 세워진 모양이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농담 내지는 우스갯소리 정도로 흘려듣는 듯 했다. 실제로 그들이 하는 말은 황당하고 현실성이라고는 없는 말들뿐이었다. 행여 누군가 그들이 폭탄마라고 외친들 누가 그 말을 믿을 것인가. 시끌벅적하게 웃으며 춤을 추는 두 사람의 모습은 순진무구한 소년과 소녀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빨리 기차가 왔으면 좋겠다.”
“생각만으로도 두근거리지?”
“응!”
“축제에 도착하면 맘껏 즐기는 거야.”
“먹는 것도 노는 것도 마음껏!”
“이 세상이야말로 천국이 틀림없다니까.”
서서히 도착 시간이 가까워지는 가운데, 기대감에 들뜬 기차역 한복판에서 그들은 그렇게 춤을 추고 있었다. 음악 따윈 없었지만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웃음소리만으로도 그들에겐 충분했다. 때마침 어디선가 요란한 기적 소리가 들려왔고 뒤늦게 멀리서부터 철로를 따라 달려오는 기차가 보이기 시작했다. 밀려드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 춤을 추고 있던 두 사람도 삼켜져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없었다는 것처럼. 그저 한 순간의 환영이었다는 듯이. 하지만 조만간에 그들이 또 다시 큰일을 저지르게 될 것이라고 그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생각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또 다시 그들을 알아보지는 못할 테지만.
프롤로그
「빨간 망토」
기차가 멈추는 곳에 마을이 있다. 서부에서 기차란 그런 의미를 지닌 존재였다. 대도시에 자리 잡은 커다란 기차역부터 황무지의 한복판에 놓인 간이 기차역을 포함해 서부의 기차역 근처에는 항상 사람이 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때때로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해 버려지는 기차역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되면 마을 또한 기차역과 운명을 함께 했다. 번화하던 마을은 순식간에 허전해지고 화사했던 과거의 잔재만이 남은 거리에는 쓸쓸하게 바람만이 불었다. 그렇게 마을은 숨을 죽인 채 끝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바람이 불어와 모래 먼지가 일어나고, 벽에 붙어있던 현상수배지가 바닥을 나뒹구는 거리를 걷는 소녀가 있었다. 붉은 후드코트를 뒤집어 쓴 터라 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후드에 가려진 그 얼굴은 때마침 바닥을 굴러다니던 현상수배지에서 찾을 수 있었다. 수배지에 그려진 얼굴은 마치 인형처럼 앙증맞았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게 건방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밑에는 ‘구불구불한 금발, 파란 눈동자, 상당히 어려보임, 지저분한 말투, 성격이 매우 더러움, 항상 빨간 망토를 입고 있음.’이라며 특징이 적혀있었다. 하지만 남아있는 것이라곤 노인이나 의욕 없는 젊은이들 밖에 없는 그 마을에서 그녀가 누구인지 눈치 챌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여 누군가가 묻는다면 그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 유명한 ‘늑대’의 일원 5명과 주점 하나를 통째로 박살낸 끔찍한 무법자 ‘에리카 레드후드’가 바로 그 소녀라고.
간만에 찾아온 방문자를 향해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무대 위를 걷는 배우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당당히 걸어왔다. 이내 그녀가 멈춰 서자 얼마 없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외쳤다.
“빌어먹을 기차역이 대체 어디야?!”
서부 최대의 무장 집단인 ‘늑대’가 한 소녀를 찾아 서부 전체를 뒤지고 있다는 소문은 비교적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 소녀가 대체 누구이기에 서부에서 가장 큰 조직이 움직이는 것인지 사람들은 입을 모아 저마다 추측을 내세웠다. 조직의 리더가 낳은 사생아, 간부의 속여먹은 희대의 악녀, 조직을 배신하고 뛰쳐나간 배신자. 무수한 추측이 오고 갔지만 무엇 하나 정확한 것은 없었다. 최근 들어서 늑대의 일원들이 ‘빨간 망토를 두른 어린 여자’를 찾아다니는 것에 대해 소문이 돌았지만 그 소문은 간부인 커티삭이 보안국에 잡히는 사건으로 인해 깨끗이 묻혀버리고 말았다.
에리카 레드후드는 두 말할 것도 없이 그 소문의 주인공이었다. 내리흐르는 붉은 코트자락을 등 뒤로 넘실거리며, 후드에 가린 얼굴은 불편한 심기로 삐뚤어져 있었다. 마을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그 모습은 틀림없이 서부에 새로이 악명을 떨치는 무법자 ‘빨간 망토’였다. 마을 한복판에 당당히 서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주민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누가 먼저 말을 걸지 서로 미루는 분위기였다.
“무슨 벙어리 새끼들 밖에 없냐? 쳐다만 보지 말고 누가 말을 좀 해봐!”
그러고도 목소리를 높이는 이가 없자 그녀는 질렸다는 듯이 짜증을 냈다. 구슬이 비단을 타고 흐르는 듯한 여린 목소리로 지껄이는 거친 말투는 실로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저기….”
마침내 한 남자가 그녀를 향해 말을 걸었다. 남자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상당히 머뭇거리는 눈치였지만 그녀가 발을 굴리며 재촉하자 할 수 없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여기 기차역은 벌써 2년 전에 사라졌는데요.”
“…시방 뭐라고?!”
걸진 촌놈 같은 말을 내뱉으며 그녀는 당황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그러자 남자는 확실하다는 투로 다시 한 번 말했다.
“이 근처에 기차역이란 하나도 없어요. 가장 가까운 역도 여기서 말을 타고 하루는 꼬박 달려야 할 걸요?”
그 말에 그녀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멍하니 있다 이내 ‘젠장, 그럼 이딴 똥통 같은 왜 마을에 온 거야?’라며 홀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물이라도 한 잔 마시고 갈래요?”
보다 못한 남자가 묻자 그녀는 그게 대체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대체 무슨 개소리야?”
“아니, 하루 꼬박 말을 타려면 힘들 테니까요.”
“그야 지랄 맞게 힘들겠지! 말이라고 하냐?!”
“가기 전에 목이라도 축이고 가면 어떨까 해서요.”
“그래, 졸라게 친절하구나. 싸대기를 한 대 갈겨주고 싶다.”
그러자 남자는 알겠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물러섰다.
“마구간에 말이 있으니 돈만 내면 가져가실 수 있어요.”
걱정스런 목소리로 한 아줌마가 말을 걸었다. 그러자 그녀는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며 말했다.
“그거 알아? 나한테 더 좋은 생각이 있어.”
그로부터 20분 후. 목재를 덧붙여 만든 조잡한 마차가 마을 정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급하게 판자를 덧대어 구색만 갖춘 터라 지붕도 없어 마차보다는 수레에 더 가까웠지만 어쨌든 말이 끌고 있으니 마차라고 불러도 뭐라 할 수는 없었다. 마부로 앉아있는 것은 방금까지 말을 걸던 남자였다. 그리고 에리카는 볏짚이 쌓여있는 수레에 드러누운 채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짜로 기차역까지 가면 돈을 주는 건가요?”
“그래. 물론이지.”
“마을에서 받은 물이랑 음식도 전부 돈을 내고요?”
“두 배로 내고말고.”
“사기 치는 거 아니죠?”
“속고만 살았냐? 빨랑 가기나 해.”
그렇게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삐를 쥐었다. 이윽고 마차는 마을 밖을 빠져나가 황무지를 달리기 시작했다. 수레에 누운 채 새파란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그녀는 느긋한 여행길을 즐기는 듯 했다. 물론 돈을 지부할 용의는 애당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지만.
접속장
「탑승」
뿌옇게 먼지가 이는 황야의 저편에서부터 철로가 뻗어왔다. 풀뿌리와 바위를 가로질러 시대와 희망은 선로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광활한 황야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한 줄기의 실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그 한 줄기의 철로야말로 개척 시대가 시작된 이후로 가장 큰 개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새파란 하늘을 등진 선로를 바라보며 ‘노스 위든 기차역’은 황무지의 한복판에 서있었다. 자그마한 매표소와 정류장을 알리는 작은 표지판 밖에 없는 ‘노스 위든 기차역’에 빨간 망토를 두른 소녀가 나타났다. 멀리 떨어진 등 뒤에서는 마차에 탄 마부가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이 사기꾼아! 보안국에 신고할 줄 알아!”
그렇게 외치며 돌아가는 마차를 흘깃 쳐다보며 에리카 레드후드는 ‘할 테면 해봐라! 어차피 이미 현상수배범이라고 이 자식아!’라며 외쳤다. 그러자 남자는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어 대답했다. 에리카는 코웃음을 치며 매표소로 향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작은 매표소 안에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지저분한 남자 한 명이 앉아있었다.
“뭐 필요한 거 있나? 물이나 화장실에 대한 이야기라면 사양하겠지만.”
“보나레스 한 장.”
“보나레스? 그 정신 나간 기차 말인가?”
“뭐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긴 하던데.”
그러자 건방지게 앉아있던 남자는 바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미소를 지었다.
“예예, 물론입죠. 바로바로 끊어드리겠습니다. 보이시는 거랑 달리…. 아니, 보이시는 데로 상당히 돈이 많으신가 보네요.”
손을 싹싹 비비며 말하는 남자를 바라보며 에리카는 시큰둥한 태도로 돈다발을 꺼내 집어넣었다.
“뭐 훔친 돈이니까.”
“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기차 하나 타는데 이 돈을 내려니까 속이 쓰려 죽겠군.”
“아하하, 보나레스가 좀 비싸긴 하죠.”
남자는 그렇게 웃으며 바로 표를 끊어주었다. 생글생글 웃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에리카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표값을 빼돌릴 생각이라면 관두라고. 험한 꼴을 보게 될 테니까.”
이윽고 등을 돌려 정류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그 뒷모습을 향해 남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지가 무슨 상관이야?’라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에리카는 할 만큼 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벤치조차 없는 작은 정류장이었기에 에리카는 표지판 옆에 선 채 기차를 기다려야만 했다. 새파란 하늘이 그녀를 향해 내리고 있었다. 어디까지고 펼쳐진 광활한 황야를 내다보며 그녀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적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때마침 수평선의 끄트머리에서 시꺼먼 연기가 보였다. 이윽고 도무지 제정신이라고는 볼 수 없는 커다랗고 화사한 기차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1
요란한 기적 소리를 울리며 기차는 리제 아너스팅스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후미진 기차역의 벤치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리제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모자를 슬쩍 들어 올려 기차를 바라보았다. 다른 기차의 두 배는 될 법한 높이와 요란한 장식으로 치장된 기차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끄트머리는 한참 먼 곳에 떨어져 있었고 도무지 몇 칸인지 눈으로는 쉽게 짐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개척의 시대가 시작된 이후로 가장 호화로운 기차. 보나레스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커다란 증기 소리와 함께 서서히 문이 열렸다. 리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기차역의 안쪽에서 네 명이나 되는 보안관들이 자루를 뒤집어씌운 죄수 한 명을 끌고 나왔다. 자루로도 모자라 손에는 네 개나 되는 수갑까지 차고 있었고 각각의 수갑에 연결된 쇠사슬을 네 명의 보안관이 서로 나눠 쥐고 있었다.
“정확히 시간에 맞췄군요. 길을 잃어서 민폐를 끼친 것 같은데, 전보를 보내자마자 와줘서 고마워요.”
리제는 여전히 기차를 바라보며 말했다. 죄수를 끌고 있는 보안관들은 그런 리제의 말에도 바위처럼 그저 묵묵하기만 했다.
“소식은 들었소. 당신이 리제 아너스팅스인가?”
“연방보안관. 리제 아너스팅스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리제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보안관들 사이에 희미하게 당혹감이 감돌았다.
“소문으로는 들었지만, 보안국도 정말 미쳤군! 여자에게 서부 최악의 범죄자를 이송시키다니!”
한 보안관이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다른 보안관들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내심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제는 생글생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자, 그럼 기차가 출발하기 전에 가야겠네요. 이쪽으로 인도해주시겠어요?”
그 말에 보안관들은 머뭇거리는 듯 했으나 이내 한 명씩 쇠사슬을 놓았다. 하지만 마지막 한 명. 큰소리로 외치던 보안관 한 명만은 끝까지 쇠사슬을 놓지 않았다.
“이 자는 내가 직접 데려온 자요. 내 관할 지역에서, 내 감옥 안에서 데려온 자요. 당신 같은 연약한 보안관에게 맡겨 일을 초칠 생각은 없소. 나도 직접 따라가겠소.”
“어머나, 괜찮나요? 당신 관할 지역을 두고서 따라오다니. 보안관 배지를 놓게 될지도 몰라요?”
“이 녀석을 잡아넣는다면 보안관은 그만둬도 만족할 수 있소. 보안국의 뇌도 없는 놈들이 무슨 생각을 하던 알 바 아니지만 당신 같은 사람에겐 이 자는 맡길 수 없소. 이 자는 극악무도한 ‘늑대’의 간부! 서부 최악의 범죄자 ‘커티삭’이란 말이오!”
보안관의 발언에 리제는 싸악 웃음을 가셨다. 웃음으로 가려져 있던 차가운 눈매가 드러나자 보안관들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연방보안관이라는 작자들이 어떤 자들인가? 전쟁에 참가한 참전 군인이나 무수한 사람들을 죽인 무법자들이 모인, 말하자면 일종의 살인자들의 집단이 아니던가. 눈앞에 있는 그녀도 마냥 가냘파보였지만 그 속내가 얼마나 끔찍한 인간인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허나 리제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저야 좋죠. 저처럼 연약한 여자 혼자서 범죄자를 이송하려니 무서워서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듬직한 남자가 같이 가준다면 좋은 일이죠.”
그 한 마디에 보안관들은 허탈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언성을 높이던 보안관은 아니나 다를까 한심하기 짝이 없다며 코웃음을 쳤다. 이내 리제는 자루를 뒤집어쓴 간수를 향해 다가갔다. 거의 코가 맞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가 말했다.
“즐거운 여행이 될 것 같네요.”
“…”
상대는 비록 한 마디도 없었지만 리제는 조금도 꺼려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싱긋 웃더니 두 팔을 활짝 펼치며 말했다.
“자, 그럼 가볼까요? 영광의 보나레스를 타고서 ‘웨스트우드’를 향해. 이 서부 최악의 범죄자를 15일까지 이송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이니까요.”
마치 축제의 시작과도 같은 밝은 한 마디에 죄수의 사슬을 꽉 쥔 보안관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2
위즐리 기차역은 한창 혼잡스러울 무렵이었다. 워낙 커다란 기차역이다 보니 그곳에는 기차를 타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많았다. 보나레스의 도착에 수많은 사람들이 기차를 오르내렸고 커다랗고 화려한 기차를 구경하며 그 기차를 타는 사람들을 부러운 눈길로 구경하는 이들까지 있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헨젤과 그레텔은 흥에 겨워 떠들고 있었다.
“저것 봐, 헨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뚱뚱한 옷을 입었을까?”
“그레텔, 자세히 봐. 옷 때문에 뚱뚱한 게 아니야.”
그 말에 힘겹게 계단을 오르던 몇몇 부인들은 자기를 말하는가 싶어 불쾌한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눈치라곤 애저녁에 팔아먹은 두 사람은 그런 시선 따윈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나저나 보나레스는 정말 커다란 기차구나.”
“온 세상 사람이 다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몰라.”
“오오, 전 세계 사람들이 다 기차에 타서 여행을 가는 건가? 재밌겠네!”
“요리사가 있으면 온 세상의 진미도 마음껏 먹을 수 있겠다!”
“그야말로 천국이구나.”
“와아, 죽지 않아도 천국에 갈 수 있는 거구나.”
두 사람이 떠드는 사이 다시 한 번 기차의 기적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보나레스 앞에 서있던 승무원이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보나레스에 타실 승객 분들은 빨리 탑승해주세요! 곧 출발합니다!”
그 말에 헨젤과 그레텔은 단숨에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빨리 타야겠다!”
“이러다간 기차를 놓칠지도 몰라!”
“기차는 엄청 빠르니까 쫓아가기 힘들다고!”
“기차 찾아 삼만 리구나! 큰일이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다급하게 보나레스를 향해 뛰어들었다. 덕분에 표를 확인하지 못한 승무원이 그들을 무임승차범으로 알고서 다급하게 뒤를 쫓았다.
/3
“손님! 표를 보여주시지 않고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헨젤, 이상한 사람이 쫓아오고 있어!”
“그레텔, 저건 승무원이야. 보아하니 어떤 녀석들이 말썽을 일으켰나봐.”
“아니, 당신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나탈리 리들’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기차 바깥에서 소동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금세 흥미를 잃고 말았다. 그녀의 흥미는 그런 소동보단 보나레스 내부의 풍경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보나레스의 내부는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바닥에 깔린 화려한 레드카펫과 천장에 달린 호화로운 조명등까지. 때때로 눈에 밟히는 장식들은 눈이 부실 정도로 선명한 황금빛 윤택을 자아내고 있었다. 중앙 대륙의 예식장이 떠오를 정도로 호화로운 풍경은 서부의 그 어떤 건물들과 비교해보더라도 빛을 바라지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그녀는 대체 기차에 왜 이토록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 부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잘나봐야 기차는 결국 기차일 뿐이라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나탈리는 바로 2등 차량을 향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1등 칸에 타고 싶었으나, 1등 칸에 타기 위해서는 돈 말고도 나름대로의 사회적 지위 같은 것이 필요했다. 일개 현상금 사냥꾼에 지나지 않는 그녀에게 그런 지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바꿔 말하자면 돈은 충분할 정도로 있던 셈이었다. 서부 최악의 범죄자 ‘커티삭’을 잡아 넘긴 현상금이 꽤나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지루하기 짝이 없군.)”
보나레스를 가볍게 둘러보며 그녀는 그런 감상을 품고 있었다. 그야 화려하다고 하면 화려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저 그 뿐이었다. 식당이나 카지노도 그녀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배가 고파지만 식당 정도는 갈지도 모르지만 도박은 애초에 그녀의 무대가 아니었다. 언제나 훨씬 더 웅장한 도박에 온 인생을 걸고 살아가는 것이 그녀였기에.
어쩌면 괜한 돈을 썼을지도 모른다는 막심한 후회감이 들어올 무렵, 때마침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한 소녀가 달려오고 있었다. 빨간 후드코트를 뒤집어쓰고 있었기에 성별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걸음걸이나 체형을 보면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무엇이 그리 바쁜 것인지 후드를 뒤집어 쓴 채 바쁘게 달려 나갔다. 아무래도 후드 때문에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인지 나탈리의 옆을 지나가며 어깨에 부딪히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일언반구의 사과도 없이 재빨리 어디론가 달려가고 말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 뒷모습을 쫓으며 나탈리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보통 이렇게 애매하게 기억이 날까 말까한 상대는 현상범일 확률이 높았다. 대부분의 지명수배지는 한 번식 훑어봐두는 편이지만 그래도 그 많은 현상범들을 전부 외울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내 그녀는 짧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오늘 기차에 탄 것은 ‘웨스트우드’에 갈 겸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다. 어차피 돈이라면 커티삭을 잡아넣은 건으로 충분히 벌어둔 셈이었다. 설령 이 기차에 흉악한 범죄자가 타있더라도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녀가 2등 차량에 들어설 무렵, 문 안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좌석에 앉아있던 몇 명의 여자들이 조심스럽게 떠들고 있었다.
“방금 봤어요? 보안관이 탔죠? 한 명도 아니라 두 명씩이나.”
“저도 봤다니까요. 1등 칸에 들어가더라고요. 그것도 범죄자를 데리고서! 보나레스로 죄인을 이송할 생각인걸까요?”
“어머나, 야만스럽기 짝이 없어라. 이래서 보안국은 믿지 못하겠다는 거예요. 비싼 돈 주고 범죄자와 한 기차를 타다니. 표를 환불해야 할까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탈리는 의아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죄인을 기차로 이송하는 일은 굉장히 흔했지만 그래도 보나레스는 예외였다. 확실히 보나레스만큼 엄중한 경비를 갖춘 기차는 없었지만 그래도 부자들이 큰돈을 타고 내는 기차이니 범죄자를 태우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이 갑자기 범죄자의 이송에 보나레스를 쓴다는 것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보안국이 철도회사에 압력을 넣었거나, 철도회사와 보안국이 합심해 무언가 꾸미는 것이 있거나. 어찌됐건 방금 보았던 빨간 망토의 소녀가 도망친 이유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현상수배범이라면 보안관과 같은 기차에 타고 싶을 이유가 없다.
“(복잡한 일이 생기지 않으면 좋을 텐데.)”
자신의 객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나탈리 리들은 피곤함에 한숨을 쉬었다. 웨스트우드까지의 긴 여정을 생각하며 그녀는 벌써부터 잠을 청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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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사치스러운 보나레스의 풍경에 ‘로르 마르텔’은 입을 다물지 못할 지경이었다. 제 아무리 화려하다고 해봐야 결국 기차는 기차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실로 이 정도의 모습이라면 서부에 있는 대부호들의 저택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탓인지 로르는 자신이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와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공간. 때때로 지나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품이 있고 우아해보였다. 마치 그 중앙 대륙의 궁전을 기차 안에 옮겨 담은 느낌이었다. 어딘지 모를 거북함과 창피함 때문에 저절로 발걸음이나 몸짓이 이상해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행여 그들이 초라한 자신을 비웃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투정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이 기차에 탄 것은 관광이나 여행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
어찌어찌 숨겨서 가지고 들어온 성냥갑을 꽉 쥐며 로르는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승무원과 실랑이를 벌이며 요란법석을 떠는 기묘한 차림의 커플들과, 기차를 오르내리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이 모두 곧 예상치도 못한 끔찍한 소동에 휘말리게 되리라 생각하면 죄악감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울컥거리는 죄책감을 잊기 위해 로르는 자신의 뺨을 강하게 때렸다. 강자가 약자를 약탈하는 것이 당연한 서부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비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로르는 자신을 타일렀다.
로르가 맡은 일은 지극히 간단했다. 열차털이에 있어 ‘승객’이라는 것은 동료들에게 신호를 보내거나 호위대의 시선을 끄는 역할이었다. 이번에는 객실에 불을 질러 호위대의 시선을 끌고 동시에 객실이 불타면서 나는 연기를 동료들에게 신호로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동료들은 호위대가 어디 있는지 얼추 파악할 수 있고 운이 좋다면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죄가 없는 사람들을 말려들게 하는 것은 꺼려졌다. 모든 것을 버리고서 마지막에 남은 일말의 양심이 그것을 붙잡고 있었다. 때마침 로르의 바로 옆으로 한 귀부인이 지나갔다. 그녀의 곁에는 손을 맞잡은 채 웃고 있는 어린 소녀도 있었다. 그 모습에서 애써 시선을 돌리려는 듯 로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로르는 고민 끝에 짐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보나레스는 관광이나 여행을 위한 버스로 자주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기차인 만큼 화물을 운반하는 일 또한 충실히 하고 있다. 짐칸에는 값비싼 화물들이 있을 테지만 적어도 그곳에 불이 난다고 해도 사람이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몇 개나 되는 차량을 지나면서 때때로 사람들은 로르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지금부터 시작될 여행에 들뜬 탓인지 사람들은 한층 친절하고 온화했다. 그곳이 거친 황무지 위의 서부라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그 화사하고 아름다운 풍경은 마치 그곳이 정말 낙원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대로 영원히 이곳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낙원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듯한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히며, 로르는 사람들을 지나치며 짐칸을 향해 달려갔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지나치는 사람들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런 것들을 뒤로한 채 로르 마르텔은 짐칸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짐칸으로 들어가는 문을 연 순간,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에 의해 얼굴을 얻어맞았다. 로르 마르텔의 의식은 그대로 끊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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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길, 이러다 진짜 보안관한테 잡혀가겠네!”
위즐리 기차역에 도착해 한층 북적거리는 보나레스의 깊은 안쪽. 3등 차량과 이어진 어두컴컴한 짐칸에서 ‘조니 워커’는 밧줄에 꽁꽁 묶인 채 애벌레처럼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말하자면 번데기를 뚫고 나오려는 곤충의 발버둥 같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나비로 다시 태어날 일은 없었고 그저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을 처절한 버둥거림 밖에는 없을 테지만.
짐칸에 묶여있는 것도 어언 몇 시간째인지. 바깥의 상황은 잘 알 수 없었지만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면 대충 돌아가는 분위기는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승무원들이 바빠 이곳에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지만 어느 정도 승객이 정돈되면 그들은 재빨리 찾아와 신변을 보안관에게 넘길 것이다.
“끄흐으으으응?!”
안간힘을 쓰며 버둥거렸지만 당연하게도 밧줄이 풀릴 일은 없었다. 결국 제 풀에 지친 조니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그는 거의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로 ‘아, 끝이다.’ ‘진짜 끝장이야.’ ‘죽고 싶어.’라는 말들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때였다. ‘쾅!’ 커다란 소리를 내며 짐칸의 문이 열렸다. 승무원들이 다시 온 것인가 싶어 조니는 말아놓은 양탄자처럼 바닥을 굴러갔다.
“젠장! 비싼 돈까지 내고 탔더니 왜 보안관이 타고 지랄이야?!”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빨간 후드를 뒤집어 쓴 소녀였다. 거친 말투를 욕지거리를 쏟아내며 그녀는 다시 커다란 소리가 나도록 짐칸의 문을 닫았다.
“빌어먹을! 이것도 저것도 다 그 ‘늑대’인지 뭔지 하는 지랄 맞은 새끼들이 쫓아다닌 탓이야! 하도 염병을 떨어대기에 참다 참다 손 좀 봐준 게 무슨 잘못이라고!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내가 흉악한 범죄자 놈들한테 쫓기고 있다잖아! 주점 하나 망가진 게 대수냐?! 젠장, 무능한 보안관 새끼들!”
그 가냘프고 보드라운 목소리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험한 불평을 늘어놓으며 그녀는 붉은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묶여있던 실타래가 풀리듯, 아름다운 금발이 사르륵 흘러넘쳤다. 찬란한 황금을 실타래로 엮은 듯한 곱실거리는 금발. 그리고 눈동자는 하늘을 그대로 옮겨 담은 것처럼 연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평범하게만 본다면 꽤나 장래가 기대될 소녀라고 할 수 있었다. 단지 오만상을 찌푸리며 ‘퉷’하며 침을 뱉는 그 행동거지만 아니었다면.
“아아아아, 짜증나!!! 기차를 다 폭파시켜 버릴까보다! 어디 폭탄 같은 거 없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난동을 피우던 그녀는 이내 짐칸의 구석에서 그 광경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던 조니와 눈이 마주쳤다.
“아, 안녕?”
조니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그녀는 단숨에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또 무슨 병X이야? 너 거기서 뭐하냐?”
“이야, 여차저차해서 슬픈 오해와 반목으로 인해 일어난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됐어. 그보다 좀 도와주지 않을래?”
“내가 왜?”
“…글쎄? 그냥 풀어주면 안될까?”
“나가 죽어 멍청아. 내가 미쳤냐? 네 꼴을 좀 봐. 누가 같이 엮이고 싶겠어? 안됐지만 다른 사람을 알아보라고.”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다음 짐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본 조니는 순간 번뜩이는 재치가 떠올랐다.
“너 아까 여기 들어오면서 보안관이 어쩌고 했지?”
“뭐?”
귀찮다는 듯이 돌아보는 소녀를 향해 조니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굳이 귀찮게 따질 생각은 없지만, 이런 곳까지 왔다는 걸 보면 너도 어지간히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은 모양인가보군. 너 현상수배범이지?”
“그래서 뭐 어쩔 건데?”
그러자 조니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잘 들어. 미리 말해두지만 내 철면피는 장난이 아니라고. 정말 막판에 몰리면 자존심이고 뭐고 없단 말이다!”
“뭐냐? 그 강력한 찌질이 선언은.”
“만약 네가 날 버리고 그냥 가겠다고 한다면 나는 승무원들은 물론이고 이 기차에 있는 승객들이 죄다 찾아올 정도로 옹골차게 비명을 질러 줄 테다! 여기에 숨어있던 현상수배범 여자가 있었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기차 안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이 듣게 해줄 거야!”
자신만만한 얼굴로 소리친 조니의 주장은 그 당당함과는 달리 그야말로 치졸함의 극치를 달리는 선언이었다.
“진짜 더러운 놈이네! 적반하장도 정도가 있잖아!”
“하하! 그야말로! 이 세상에 바퀴벌레 같은 녀석이라는 말을 나만큼 많이 들어본 사람은 없을걸!”
조니는 자신만만하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뭐 이런 뻔뻔한 놈이….”
“자, 선택해라! 나와 함께 지옥으로 떨어질 것인지! 아니면 날 도와줄 것인지!”
그러자 그녀는 혀를 차며 팔짱을 꼈다. 그리고선 잠시간 고민하는 듯 했으나 이내 귀찮다는 듯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좋아, 밧줄 정도는 풀어주지. 딱 그것뿐이야. 너랑 나랑은 여기서 마주친 적도 없고 앞으로 네가 어떻게 되던 알 바 아니야. 알겠어?”
“좋아.”
조니가 대답을 하자 그녀는 곁으로 다가와 조니의 밧줄을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밧줄이 워낙 꽉 묶여있던 터라 쉽게 풀리지 않았다.
“뭐가 이렇게 느려 터진 거야?! 너 진짜 여자 맞아? 무슨 여자애가 이렇게 손재주가 없냐?!”
“죽고 싶냐? 한 대 처맞기 싫으면 닥치고 있어!”
“이러다 그 녀석들이 다시 오겠어!”
“정신 사나워 죽겠네!”
얼마 지나지 않아 밧줄이 풀리자 조니는 재빨리 밧줄을 벗어던지고 일어나 외쳤다.
“자유다!”
만세를 하며 기쁨에 젖어있는 남자를 보며 그녀는 피곤함이 섞인 한숨을 쉬었다.
“이야, 정말 좋네. 덕분에 자유의 귀중함을 알 수 있게 됐어.”
그야말로 아침 햇살만큼이나 화창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를 보며 그녀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래그래, 잘 됐네. 또 잡히기 싫으면 냅다 도망치라고. 언제 승무원들이 다시 올지 모르니까. 나도 다른 곳에 숨어야겠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싱긋 미소를 짓더니 그녀의 어깨에 손을 턱 얹으며 말했다.
“이봐, 이왕 도와주는 김에 하나 더 도와주지 않을래?”
“…”
그 순간 그녀의 눈초리는 단숨에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처음 줄을 풀어줄 때 약속했잖아? 줄을 풀어주면 너랑 나랑은 그걸로 끝. 더 이상 간섭하지 않기로.”
“요즘 세상에 누가 구두계약 따위를 믿어?”
진지한 얼굴로 내뱉은 뻔뻔한 한 마디가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남자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남자는 짤막한 비명을 내지르더니 그대로 화물칸 사이에 얼굴을 처박았다.
“갑자기 무슨 짓이야?!”
“너야말로 인생을 왜 그따위로 살아?! 남자가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아무런 대가도 없이 밧줄까지 풀어줬는데 거기서 더 바라다니 제정신이냐?”
“그야 등골 빼먹을 수 있는 상대는 단물까지 쪽쪽 빼먹어야 이 척박한 세상을 살아남을 수 있는 것 아니겠어?”
해맑은 미소와 함께 튀어나온 끔찍한 한 마디에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물들었다.
“미, 미안하지만 난 손 때겠어. 너 같은 미친놈이랑 엮여서 험한 꼴을 보고 싶진 않다고!”
그녀는 도망치듯 짐칸의 문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그녀가 문을 열기 직전, 갑작스레 예고도 없이 문이 열렸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두 사람은 숨는다거나 도망치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게 서있는 남자와 소녀를 남겨둔 짐칸 안에 문을 열고 한 소년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두 사람을 볼만한 시간조차 없었다. 소년이 들어오는 것과 거의 동시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그녀가 소년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기 때문이다.
“?!”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짤막한 신음을 흘리며 소년은 소리 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와, 깜짝이야. 놀라서 무심코 저질러버렸네.”
그 소년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짐칸에 있는 것을 들킬 수 없던 그녀로써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쳐도 그 뒷수습을 어떻게 할지는 상당히 난감한 문제였다.
“여기여기~”
남자의 부름에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방금까지 자신을 묶고 있던 밧줄을 자랑스러운 듯이 든 채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녀는 피곤한 듯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할 수 없이 밧줄을 받아들어 쓰러진 남자를 묶기 시작했다.
“봐, 아무래도 우리는 함께 할 운명인가 봐.”
“기분 나쁜 소리는 좀 집어치워라 병X아.”
“하지만 이걸로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공범이잖아?”
“제발 그 입 좀 닥치라고! 기차 밖으로 집어던져버린다!”
“자자, 그렇게 까칠하게 굴지 말고. 그러고 보니 이름이 뭐야? 동지가 되려면 이름을 알아야지.”
“난 이 녀석을 묶어서 화물 상자 안에 처박아두고 도망칠 거야.”
“나는 조니 워커. 편하게 조니라고 불러줘. 그래서 내가 도와줬으면 하는 일말인데, 실은 내가 여기 잡혀오면서 그 나쁜 놈들한테 뺏긴 물건이 하나 있거든? 그게 나한테 정말 소중한 물건이라 찾는 걸 좀 도와줬으면….”
“귀가 먹었냐? 난 그냥 도망칠 거라고.”
“근데 이 녀석은 대체 누굴까?”
“나도 모르지. 알게 뭐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밧줄을 잡아당겨 단단히 매듭을 묶었다.
“자, 이제 이걸로 입을 틀어막고 아무 상자에나 넣어두자.”
조니는 어디서 꺼내왔는지 재갈을 들며 말했다.
“진짜 꼬일 데로 꼬이는 날이군.”
그녀는 한숨을 쉬며 누군지도 모를 청년에게 재갈을 씌웠다. 그리고 두 사람은 힘을 합쳐 적당한 화물 상자를 연 후 그곳에 소년을 처박고서는 재빠르게 짐칸을 빠져나갔다. 짐칸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쓸쓸한 적막함이 남아있었다.
재미있네요 ^^
재미있기는 한데 프롤로그가 좀 많이 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