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진 직선 주로에서 최대 가속을 내면서도 현은 포기하지 않고 베이징팀의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가며 위협했다. 그러나 베이징팀은 별다른 동요없이 손쉽게 슬쩍 슬쩍 꼬리를 좌우로 흔들며 막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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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태백팀의 하얀 기체가 끊임없이 붉은 기체를 좌우에서 공략합니다. 그러나 한치의 흔들림조차 찾아볼 수 없는 화성 베이징팀!”
관중석으로 쏟아져 내리는 장내 아나운서의 중계 소리에 소년이 고개를 든다. 한 손으로 아까 인후로부터 건네 받은 기화 초콜릿 스틱을 초조한 듯 만지작 거린다. 물론 이미 스틱 내부는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군요. 저런 식으로 좌우로만 공략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동안의 현 선수의 경기 운영을 보면 과감하게 상하 방향 콤비네이션을 만들어 상대가 막을 수 없는 코스로 진입해왔거든요. 그런데 지금 공략은 답답할만큼 좌우만 공략하고 있어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요?”
해설위원이 부연설명을 덧붙이자 장내 아나운서가 맞장구를 친다.
“그렇습니다. 저런 식으로 무리하게 먹히지 않는 공략을 하다보면 기체에 부담이 가서 레이스 종반에 힘들어지거든요. 현 선수는 경기를 거의 포기한 건가요? 도저히 팀 전략실에서 나온 공략이라고 볼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팀 전략실에서도 현 선수를 포기한 걸까요?”
소년은 인상을 찌푸렸다. 삼촌이나 감독님이 어떤 마음으로 경기에 임하고 있는지 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당장이라도 중계석으로 뛰어들어가서 화성 태백팀 모두가 얼마나 삼촌을 믿고 있는지 알기나 하냐고 외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중계 모니터를 보며 최대 속도로 직선 주로를 내달리고 있는 하얀 기체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직선 주로가 끝날 무렵, 평면 코너인 1, 2, 3 코너와 다른 상방향 제 4 코너가 모습을 드러낸다. 현은 상방향 코너링을 하면서 재차 베이징팀의 오른쪽과 왼쪽을 계속 훑었다. 전략실 여기저기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상방향 코너에서조차 평면 좌우 방향 공략을 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진 것이다.
“감독님, 이거 너무 뻔한 그림 아닌가요? 이대로는 끝까지 못 달립니다.”
오퍼레이터가 인후를 돌아보며 말했다. 인후는 말없이 기화 초콜렛 스틱을 하나 꺼냈다.
“감독님, 저렇게 무리한 공략을 계속하다간 다음 랩이 시작되기 전에 기체가 망가질 겁니다. 지금이라도 오토 파일럿 모드로 전환해서 현 선수의 조종권을 빼앗아야 합니다.”
인후는 제안하는 기체 엔지니어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오퍼레이터, 기체 엔지니어의 눈빛에서 현에 대한 믿음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저렇게 독단적인 선수를 어떤 스태프가 좋아하겠는가. 인후는 초콜렛 스틱을 입에 물고는 한번 깊게 빨아들였다. 그리고 묵묵히 기체 엔지니어를 바라보며 달달한 초콜릿 맛을 음미한다.
“감독님! 결정하셔야 합니다! 이대로는 3위 유지조차 불가능합니다. 감독님께서 결정을 내려주셔야 합니다.”
인후는 여전히 기체 엔지니어의 말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방금 끝까지 다 소진한 기화 초콜릿 스틱 버리고 새 것을 꺼내 입에 문다. 그리고 모두에게 손짓으로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현. 네 녀석 작전. 제 5 코너까지만 지켜본다. 그 이상은 스태프 때문에라도 지켜볼 수 없어. 내 손으로 네 녀석의 조종간을 빼앗게 만들지 마라.'
인후는 빈 스틱을 휴지통으로 던지며 속으로 부탁했다.
제 4 코너가 끝나자 왼쪽으로 길게 뻗은 제 5 코너가 모습을 드러낸다. 현은 망설임 없이 출력을 최대로 올리며 다시한번 베이징팀을 압박해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전략실 스태프 전원이 한숨을 내쉰 그 순간, 이전까지와 다른 양상으로 레이스가 흘러가기 시작했다. 화성 베이징팀이 코너링 도중 휘청한 것이다. 4랩만에 가까스로 찾아온 그 틈을 현은 놓치지 않았다.
붉은 기체가 멈칫한 사이에 살짝 벌어진 붉은기체와 내측 코너의 작은 틈에 현은 온 신경을 집중했다. 오른발을 크게 돌리며 우측 추진기만 작동시켜 기체를 세로로 세운다. 가느다란 저 틈을 파고들 최적의 자세였다.
현의 기체가 세로로 세워지며 좌측방향 코너링이었던 제 5코너는 상방향 코너가 된다. 현은 허리를 최대한 젖히며 기체에 가속도를 붙여 그대로 코너 바깥 쪽에서 안쪽으로 날카롭게 파고 들었다. 베이징팀의 붉은 기체가 빠르게 재견제에 나섰지만 하얀 기체의 머리가 이미 코너에 바짝 붙어 들어오고 있었다. 무리해서 막아선다면 진로 방해로 실격이 될 상황, 붉은 기체는 어쩔 수 없이 코너 바깥으로 물러선다. 안쪽으로 파고들면서 가속도에 기세가 붙은 현의 기체는 빠른 속도로 코너를 탈출하면서 베이징팀을 뿌리쳤다.
전략실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것도 잠시 환호성이 터져나온다. 오토 파일럿으로 전환하길 강력하게 주장하던 기체 엔지니어도 벌떡 일어나 주먹을 꽉 움켜쥔다.
“화성 베이징팀! 추월을 허용합니다! 현 선수의 송곳 같은 침투! 베이징팀이 흔들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장내 아나운서가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레이스 종반까지 별다른 이변이 없어 조용하던 객석에서 탄식과 환호가 우레와 같이 터져나왔다. 그런 반응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하얀 기체는 붉은 기체 앞 자리를 차지하며 빙글빙글 기체를 회전시키며 도발과 자축을 동시에 날린다.
“아! 전매특허죠! 백색의 나선 세레모니입니다! 선현 선수! 역시 쇼맨쉽이 있어요!”
“통신 블록 우회 성공했습니다!"
통신 시스템 엔지니어의 목소리가 환호성을 뚫고 울려퍼진다.
“당장 연결해!”
인후가 큰 소리로 지시하자 통신 시스템 엔지니어가 바로 채널을 열었다.
“야이 개자식아!!”
뮌헨팀과 시간차이를 계산하던 현은 귀를 파고드는 인후의 고함에 인상을 찌푸렸다.
“왜?”
퉁명스러운 현의 대답.
“뭐어? 왜에? 이 자식이!!”
인후가 기가차다는 목소리로 재차 외치자
“지금 바빠. 특별한 거 아니면 나중에 말해.”
현은 추진기 출력을 최대한 올리며 말했다.
“끝나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이 자식아.”
“……할 말은 그게 다야?”
현은 맥이 탁 풀린 목소리로 힘없이 대꾸했다. 인후는 어딘지 모르게 기운 없는 현의 목소리를 들으며 앗차 싶었다. 이 녀석 어딘지 모르겠지만 몸에 무리가 온 것이 분명했다. 인후는 손짓으로 메디컬 시스템 담당자에게 현의 몸 상태를 체크하도록 신호를 줬다. 담당자가 현의 몸을 정밀 스캔하는 동안 인후는 통신을 통해 들려오는 현의 메마른 호흡에 귀를 기울인다.
“오른쪽 무릎과 허리에 에 하중이 지나치게 실린 것으로 보입니다. 관절 쪽에 좋지 않은 반응이 있어요. 그리고 지나친 기동 때문인지 관성 내성이 한계에 달했습니다. 지금 몹시 어지러운 상태일 거에요.”
체크를 마친 메디컬 시스템 담당자가 인후의 옆까지 다가와 그의 귀에 속삭였다. 인후는 멍청이같이 지 몸 상태도 모르고 무리하고 있느냐고 통신을 통해 화를 쏟아내려다가 잠시 숨을 고르고 멈췄다. 지금은 냉정하게 현을 이끌어야 할 때다. 자신의 화를 참지 못할 때가 아니었다.
“야 똥멍청이! 당분간은 코너링에서 안쪽으로 깎아들지 말고 오른쪽 무릎하고 허리 사용 자제해.”
인후는 우선 경합이 없는 동안 관성 충격을 최대한 줄이도록 지시했다. 인후의 지시에 현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묵묵히 코너웍에 집중했다. 2위 자리로 올라서며 잠시 풀어졌던 긴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이제 곧 20번째 랩에 접어들 것이다. 이번에 4초 차이를 좁혀야 마지막 랩에서 역전의 가능성이 생긴다. 쉴 시간은 없었다.
마지막 제 16 코너를 완만하게 통과 한 후, 제 1 코너를 향해 거침없이 내달린다. 화성 베이징팀은 의욕을 잃었는지 더 이상 현의 기체를 바짝 추적하지 않았다. 현으로서는 방해꾼이 사라져서 다행이었다. 방해꾼 없이 순조롭게 선두와 시차를 2초까지 줄이자 제 8 코너 쯤에서부터는 뮌헨 팀의 황금날개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 불꽃의 추격을 하고 있는 현 선수! 마지막 랩을 앞두고 마침내 오늘 내내 독주를 펼치던 지구 뮌헨팀 프뢰 선수에게 다가섭니다! 지난 시즌 챔피언의 황금날개를 꺾을 듯한 기세로 다가서는 백색의 날개!”
장내 아나운서의 요란한 멘트가 객석을 휘몰아쳤다. 덕분에 객석의 분위기도 한껏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