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이 같이 가만히 있지 말고 빨리 챙겨입고 튀어나와. 네 속옷 취향에 관심 없으니까."
무심한 억양을 툭 던져 놓은 채, 정욱은 벽에 걸려 있는 이동 손잡이를 잡고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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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9년 4월18일 오후 2시57분]
나린호의 함교 아래층에 있는 소갑판. 백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줄지어 모여 있었다. 무중력이다보니 공중에서 다른 곳으로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서 바닥에서 올라온 손잡이들은 하나씩 움켜 잡은 상태다. 모여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린호의 별빛 마크가 들어간 근무복 차림이었다.
"각 부 인원 확인 되었으면 모두 정렬 바랍니다. 잠시 후 오후 3시부터 선장님의 항해 브리핑이 있겠습니다."
소갑판 중앙에 마련된 단상으로 부선장이 올라와 장내를 정리하고 단상에서 내려오자 선장이 천천히 단상에 올랐다.
"나린호 및 포도선 승무원 여러분. 여러분의 선장 박수원입니다. 이제 우리 배는 장장 1년 2개월의 시간을 날아 가니메데로 향합니다. 모두의 안전과 편의를 책임져야하는 여러분들에게는 분명 길고 어려운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항해를 마치는 순간, 여러분 모두를 역사가 기억할 것입니다."
선장이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말을 끊는다. 그동안 단상을 삥 둘러 서 있는 승무원들을 한번 훑었다. 그의 가느다란 눈이 정확히 어딜 향하는지 알 순 없었지만 승무원들은 새삼 자세를 고치고 허리를 세웠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원을 안전하게 수송한 이주선의 일원으로! 또한 가니메데 이주를 발판으로 뻗어나갈 대한민국 국력의 상징으로! 역사책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입니다."
선장은 격앙된 목소리로 연설을 이어간다.
"바로 이! 나린호가 양쪽에 세개씩 품은 포도선이! 우리의 꿈을 실현할 것입니다. 먼 옛날 한 배의 선장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배는 신조차 침몰시킬 수 없을 것이다!"
무표정으로 조용히 경청하던 부선장의 표정이 복잡 미묘하게 바뀌었다. 설마 침몰해서 더 유명한 그 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나 그 배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로 대서양에 가라앉았습니다."
승무원들이 술렁인다. 어째서 출항 직전에 불길하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모두가 의문을 갖는 찰나에 선장이 말을 이었다.
"나는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탑승한 나린호! 포도선!은 절대로 신조차 침몰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선장이 고조된 하이톤의 목소리가 장내에 쩌렁쩌렁 울린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말을 멈추었다. 선장은 내심 이 타이밍에 박수가 쏟아지길 기대했지만 승무원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는 실망하지 않고 연설을 계속했다.
"제가 그 사실을 굳게 믿고 여러분에게 선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배를 지키는 것이 여러분이기 때문입니다!"
선장의 목소리는 한계를 넘어 하늘을 찌를듯이 높아져간다.
"나린호! 그리고 포도선의 승무원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믿습니다! 대한민국도 여러분을 믿습니다! 모두 가니메데를 향해 전속 항진합시다! 역사를! 새로 써 내려 갑시다!!"
선장은 마지막에 아랫배 끝에 남은 힘을 모두 끌어올려 목놓아 외쳤다. 그의 외침이 끝났지만 장내는 여전히 정적이 흘렀다. 승무원들은 늘 해오던 항해 브리핑 대신 뜬금없는 연설을 들은 탓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단상 아래에 정렬해 있던 부선장 이하 각 부의 장들이 당황하여 박수와 함성을 뒤늦게 유도하자 마지못해 박수가 시작되었다.
선장은 자신이 예상했던 그림과 다른 승무원들의 반응에 속이 심하게 상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손을 들어 답례한 후 단상을 내려왔다. 선장이 자리를 뜨자, 박수를 중단한 승무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흩어저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2069년 4월18일 오후 2시57분]
"기관장님, 선장님은 왜 그러신 거래요?"
갑판에서 나오는 길에 제헌과 마주친 유나가 인사 대신 다짜고짜 질문을 던진다. 제헌은 말없이 눈짓으로 단상 뒤쪽을 가리켰다. 유나는 단상 뒤쪽을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응? 저기 뭐가 있어요?"
유나의 질문에 제헌은 말없이 통로에 있는 이동 손잡이를 잡았다. 이동 손잡이를 출발시키려할 때 유나가 제헌의 손채로 이동 손잡이를 잡아챈다.
"같이 가요!"
제헌은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유나의 손을 떨쳐버리진 않았다. 이동 손잡이가 출발하면서 유나와 제헌의 몸이 나란히 앞으로 나아간다.
"여기서는 말 못하는 거에요? 궁금하잖아요~ 말을 안해주니까."
유나가 쉬지 않고 입을 놀려대자 제헌은 검지를 입가에 들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잉"
유나는 입을 비쭉 거렸지만 입을 다물었다.
[2069년 4월18일 오후 3시23분]
"도착! 이제 말해주세요!"
기관통제실로 들어서자마자 유나가 제헌을 졸라댄다. 제헌은 잠시 이 철딱서니 없는 아가씨를 혼을 내줘야할지 아니면 아이 다루듯이 놀아줘야할지를 고민했다. 그러나 선택은 늘 그래왔듯이 후자였다.
"아까 단상 뒤쪽을 제대로 못 봤지?"
제헌이 묻자 유나는 "응응"거리며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방송국에서 취재를 왔더구나. 아무래도 국민적 관심이 쏠린 사안이다보니 주목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고, 아마 선장님은 이 일을 기회 삼아 국민들에게 인지도를 쌓을 수 있길 바란 것 같구나."
유나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걸 쌓아서 어디다 쓰게요? 일개 선장일 뿐이잖아요?"
"이번 포도함 프로젝트는 단순한 이주 프로젝트가 아니란다. 국가적 관심사지. 그래서 대중들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쌓을 필요가 있단다."
기관 통제실 입구에서 둘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기관부 승무원들이 하나 둘씩 들어오기 시작한다. 유나가 입구에서 통행을 막고 있다는 생각이 든 제헌은 입구에 멍하니 떠 있는 그녀의 팔을 잡아다 통제실 중앙으로 함께 이동하기 시작했다.
"긍정적인 이미지? 흐음..... 하지만 박수원 선장님은 승무원 사이에서 악명이 높잖아요. 승무원들에게 먼저 긍정적인 이미지를 쌓는게 먼저 아니에요?"
제헌에게 잡힌 채 질질 끌려가던 유나가 물음표가 머리 위로 둥둥 떠오른 듯한 표정으로 질문을 계속한다.
"승무원들에게는 그렇지만 대중들은 그걸 알 수 없으니까. 이번에 눈도장만 제대로 찍으면 향후 정계진출도 가능할 수 있거든. 실제로 정계 측하고 어떤 식으로든 거래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아아...... 그렇구나."
유나는 알겠다는 듯 대답했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딸이 없는 제헌은 그런 유나가 너무 귀여웠다. 늘 장난기와 투정이 심한 그녀를 잘 받아주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가 싱긋 웃으며 손을 놓아주자 유나는 둥둥 9기관실 앞으로 떠내려간다. 유나를 제자리로 날려보낸 제헌은 기관통제실 중앙 계기반 앞의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제 일할 시간이다.
"기관실 승무원 회선으로 기관장이 알린다. 모든 기관사들은 최종 점검 결과를 순서대로 보고하라."
"1번 기관사 황현석. 안녕하십니까 기관장님. 1번 엔진 이상 없다고 알립니다."
1번 기관사의 보고를 시작으로 9번 기관사 김덕중까지 모두 보고를 마친다. 마지막 보고까지 들은 제헌은 고개를 끄덕이고 엔진 시동 버튼을 활성화시켰다. 버튼이 활성화되어 빛나기 시작하자 제헌은 함교를 향해 통신을 보냈다.
"함교, 여기는 기관부. 엔진 시동 준비 완료되었다고 알린다."
함교 측 답변이 오기까지 기관 통제실에는 잠시동안 정적이 흘렀다.
제헌에게는 지금 순간이 가장 즐거운 순간이었다. 엔진이 잠에서 깨어나길 기다리는 순간. 엔진이 잠에서 깨어나면 비로소 배는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그는 배에 생명을 자신의 손가락 하나로 시작하는 매순간 가장 큰 자부심을 느끼곤 했다.
10여초의 정적을 깨고 함교에서 답변이 온다.
"기관부, 여기는 함교. 엔진 시동을 허가한다."
"알겠다. 함교. 카운트에 맞추어 시동한다."
제헌은 손가락을 파랗게 빛나는 시동 버튼의 위로 옮겨두고 카운트를 시작했다.
"카운트, 5, 4, 3, 2, 1. 시동!"
카운트의 종료에 맞추어 제헌이 시동버튼을 꾸욱 누르자 선체가 부르르 떤다. 금새 진동이 천천히 안정화되더니 선체 떨림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제헌의 눈 앞에서 계기반의 체크시트가 모두 녹색으로 바뀌자 메시지가 떠오른다.
- 엔진 가동 완료. 각 엔진부 현황 체크 완료.
"함교, 여기는 기관부. 모든 엔진 정상. 날아오를 준비가 되었다."
제헌은 만족스런 미소를 띄우며 함교를 향해 통신을 보냈다.
"기관부, 여기는 함교. 중력 발생 시스템으로 동력 전달 시작한다. 에너지 배분을 위한 엔진 안정화 모니터링 바란다."
"알겠다, 함교."
제헌이 응답하며 고개를 들어 엔진 현황판으로 시선을 돌리자 나린호와 포도선의 구조가 입체 홀로그램으로 떠오른다. 나린호에 선미측 기관부에 몰려 있던 녹색 부분이 천천히 나린호 전체로 퍼지기 시작한다. 나린호를 모두 채운 녹색은 이윽고 6개의 포도선으로 퍼져나가 배 전체를 물들였다.
"함교, 원형 중력 발생 장치에 동력 공급 완료 확인됐다."
"알겠다, 기관부 끝까지 주시 바란다."
함교의 통신이 끝나자, 배를 채우고 있던 녹색의 빛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곧 나린호의 중심에서 하나, 그리고 각각의 포도선에서 하나씩 총 7개의 녹색 빛 뭉텅이가 생겨난다. 나린호의 중심에 존재하는 거주블록과 각 포도선의 회전판이 돌기 시작하면서 중력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기관부, 여기는 함교. 원형 중력 발생 장치 모두 동작한다. 에너지 흐름에는 이상 없는지?"
제헌은 7개의 녹색 빛덩어리를 천천히 살펴 보았다. 조금이라도 에너지가 모자라게 되면 녹색 빛에서 황색 빛으로 바뀔 터였다. 예의 주시했지만 다행히 전혀 그런 낌새는 없었다.
"함교, 여기는 기관부. 선내 에너지 배분에 전혀 이상 없다고 알린다."
[2069년 4월19일 오전 8시23분]
이른 아침부터 우주정거장 뭉게구름에 평상시와 달리 사람들이 북적거리기 시작한다. 뭉게구름과 화성 사이에는 길게 늘어선 우주선의 행렬이 끝도 없이 줄지어 있었다. 모두들 단 한가지 목표를 갖고 우주정거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가니메데에서 새로운 출발."
현은 뭉게구름 주변을 빙글 빙글 돌고 있는 홀로그램을 읽었다. 목소리에는 비아냥이 섞였다. '프로젝트 가니메데'. 그는 처음부터 정부의 장난질에 놀아나는 것만 같다고 생각해왔다. 어차피 결국은 또다른 빈익빈 부익부를 낳을 것이 뻔히 보이는 일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낚여 올라오고 있다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렇게 낚시에 걸린 사람들 속에 자신을 제외한 일가 친척 전체가 포함되어 있었기에 속에서는 염불이 솟아나고 있었다.
"막내 삼촌, 우리 언제쯤 뭉게구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보급형 자가용 우주선 RP7의 운전석에 앉아 있던 그의 뒷편에서 앳띤 목소리가 들려온다.
"글쎄. 앞으로 500대 정도 남은 거 같은데...?"
현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꾸한다.
"뭐야... 50대도 안 남았구만! 거짓말쟁이!"
현의 어깨 위로 불쑥 소녀 하나가 고개를 내밀더니 창밖을 내다보곤 칭얼거렸다.
"시끄러."
현이 그런 소녀의 얼굴을 향해 딱밤을 날리려는 제스처를 취해보였다. 소녀가 흠칫한다.
"폭력까지! 아주 나쁜 어른의 전형이구만!"
소녀의 말에 울컥한 현은 "그냥 확" 이라고 중얼 거리며 소녀의 이마를 향해 딱밤을 날렸다.
"메롱!"
소녀는 놀랄만큼 유연한 동작으로 현의 딱밤을 피해버리고선 혀를 삐쭉 내밀었다.
"이게?"
정말 화가 난 현은 소녀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소녀는 꺄르륵 소리만을 남긴 채 운전석 문을 열고 우주선 뒷쪽 객실로 날았
다.
"야! 선미아! 너 이따 내릴 때 가만 안둔다!"
현이 사라져가는 미아의 뒷모습을 보며 악다구니를 쓴다.
"그러시던가~ 똥멍청이 삼촌~"
자동으로 닫히는 운전석 문틈 사이로 미아의 목소리만 아련하게 남았다.